때론 아름답게, 때론 따듯하게, 때론 아프게 다가왔던, 그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들.

우리 가족의 뒷모습은

김은선 14세. 학생. 부산시 북구 만덕3동

안녕하세요. 저는 14살의 여학생입니다. 태어날 땐 정상이었는데 6살 때부터 다리가 굳어가는 근육병에 걸렸어요. 그때부터 치료를 받았으면 지금쯤 걸어 다녔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3년 늦게 들어가 중학생 1학년일 나이에, 지금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학교생활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지금 2~3년째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근육병의 진행성이 멈춰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힘들 때도 많았지만, 제가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가족 덕분입니다. 엄마, 아빠, 언니. 저는 늘 가족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저 때문에 힘든 일도 많이 겪으시고, 고생하시고. 그래서 우리 가족의 뒷모습을 보면 왠지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하나뿐인 언니는 저랑 7살 차이가 납니다. 언니가 동생을 갖고 싶어 해서 제가 태어났을 때 되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언니는 학교 갔다 오면 제일 먼저 저한테 달려와서 안아주고, 젖병 물려주고 놀아주었다고 해요. 커가면서 제 고민도 다 들어주었지요. 힘내라고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오답노트도 만들어주었어요. 간혹 친구들이 놀리고 하면, 항상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근데 언니가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안에 도움을 주겠다며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구하는 중입니다. 많이 속상하지만, 나중에는 언니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니, 종종 언니한테 대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언니를 좋아하는 거 알지. 늘 도와줘서 고마워. 이제 나도 14살이니까 언니도 고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잘 들어줄 자신은 있으니까. 언니의 뒷모습은 어색하지 않고 언제나 이름 불러보고 싶은 뒷모습입니다.

엄마도 오래전의 사고로 몸이 좀 불편하십니다. 하지만 요리도 잘하시고, 늘 가족들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십니다. 늘 부족한 저를 지켜봐주시고 잘되라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가끔 공부해라, 그런 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한마디가 제 미래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홍찬석 작. <The Windows>

116.8×91cm, Mixed media

2008

 

엄마, 엄마가 잔소리할 때 가끔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엄마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잘 알아. 엄마의 뒷모습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고 싶은 뒷모습입니다.

아빠는 우리 집에서 혼자 돈을 버십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10년 넘게 다니는 회사에 한 번도 결석 안 하시고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차에 치여서, 많이 다치셨어요. 그래도 일할 거라면서 병원도 안 가고 회사에 가셨습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회사 가겠다고 신발 신고 나서시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도 무릎이 아프신데도 그냥 보호대만 착용하시고 일을 하십니다. 주간, 야간으로 일하시면서 언제나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아빠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아빠, 우리 가족을 위해 힘들어도 아파도 일해 주셔서 감사해요. 가끔 상 타오는 저에게 오천 원씩 주시고, 아직 공부 실력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할게요. 아빠의 뒷모습은 어깨가 무거워 보이지만 힘을 내는 뒷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의 뒷모습은 떨어져도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밝게 사는 뒷모습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크면 언니, 엄마, 아빠에게,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노총각, 그의 뒷모습에 감동하여

결혼 결심하다

김종수 38세. 인쇄기획사 운영. 전북 김제시 요촌동

난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평가받는 종족(?)에 포함된 이른바 노총각이다. 노총각은 힘들다. 외로운 건 둘째 치고 어딜 가든 “장가 언제 가?”라는 식상하면서도 언제 들어도 거슬리는 질문부터, 미혼이라는 이유로 각종 혜택에서 배제되는 상황까지, 노총각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불이익은 제법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결혼을 안(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좀처럼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티격태격하는 부부들이 태반이고, 친구들 역시 퇴근 후의 시간을 아내와 보내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늦게 들어가려고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휴,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는데, 차라리 서로 최대한 안 보는 게 상수다”라면서. 뭐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이 왠지 씁쓸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나에게 ‘나도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전 친구와 삼겹살집을 갔을 때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손님들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손님이 있었다. 체크무늬 남방 하나를 걸친 채 혼자 테이블에 앉아 고기를 굽는 중년 남성이었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신기하게도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정성스럽게 고기를 구웠다.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잘 구워서 줄까지 맞춰서 불판 구석에 고기를 세워놓는 모습과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주병을 번갈아 보노라니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냥 대충 먹지, 혼자 먹으면서….’ 친구랑 고기를 먹으면서도 자꾸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 뭐랄까 외로워 보였다.

‘저분은 뭐 때문에 이런 시간에 혼자 저렇게 고기를 먹고 있을까? 얼마나 심심하면 고기를 구우면서도 먹지도 않고 줄 맞추기를 하고 있을까?’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반전이 일어났다. 고기를 굽던 그 아저씨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어떤 중년 여성을 조심스레 모시고 들어오는데 임신을 하고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한눈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중년 남성은 임신한 아내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해 고기를 예쁘게 굽고 있던 것이었다.

“어머! 미리 구워놓은 거야?” 여성은 감동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보더니 이내 고기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남성은 그런 여성을 사랑스러운 듯 지그시 바라보면서 옆에 놓인 소주를 한 잔씩 따라서 마실 뿐이었다. 고기와 밑반찬이 떨어질세라 틈틈이 챙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제야 보이는 행복해 죽겠다는 듯한 아저씨의 뒷모습.

홍찬석 작. <Three Vases>

116.8×91cm, Mixed media

2008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친구가 “왜 혼자 실실 웃냐?”고 면박을 줬지만 이상하게 비실비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본다고, 결국 나는 아내를 기다리며 신나게 고기를 굽는 아저씨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본 게 아닌가. 결국 나는 오늘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내 마음 상태를 보고야 만 것이다.

아내는 고기를 먹으며 무슨 얘기인가를 끊임없이 하고, 남편은 미소 띤 얼굴로 아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고기를 다 먹은 후 팔짱을 꼭 끼고 나갔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솔직히 친구나 선배들로부터 결혼하면 다 똑같다는 말을 내내 듣던 나로서는 그 중년부부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맞아. 뭐든지 자기 하기 나름이지”라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내 용기 없음을 남들 사는 모습에 핑계 대지 말아야겠다. 이제 정말 용기를 내고 싶다. 한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용기를.ㅎㅎ

아버지의 뒷모습

김재숙 68세. 경기도 고양시 마두2동

교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되어 가나 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중고등학교 교사직을 40년 가까이 짊어지고 있다가 내려놓고 나온 지 벌써 5년.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어찌할 수 없을 때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친정으로 발길을 옮기곤 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가기만 하면 얼씨구나 하고 반겨주셨다. 어머님은 모처럼 제 발로 걸어온 딸이 애처로워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시고, 아버님은 내가 왜 왔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일까?

“앉아라. 여기, 여기가 따뜻해” 하시며 엄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앞세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지난번에 너를 괴롭힌다던 그 ○○ 선생님은 좀 나아지셨나?”

지나가는 투로 말을 시작하시면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특히 내가 어떻게 누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를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약간 머리를 수그린 채로 조용히 듣고 계셨다.

때로 “어디 사람인데?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데?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 등의 간단한 질문을 하셨다. 한참 열변을 토하고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어머니의 밥상이 문지방을 넘는다.

“어서 밥 먹자.” 아버지 말씀이 아니더라도 배도 고프고 기운도 빠지고 허기가 진 터인데, 밥상엔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조림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과 밥이 있었다.

늘 식은 밥과 밑반찬 몇 가지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다니는 학교생활이 아닌가? 어머니께서 갓 지어주신 음식은 나의 모든 시름을 거두고도 남아서 나는 온몸에 새로이 솟는 신기한 기운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곤 하였다.

“얘, 나랑 같이 가자. 소화도 시킬 겸 역까지 갔다 와야겠다.” “아이구 아버지, 어두운데 어딜 가셔요? 그냥 들어가셔요.” “아니다. 너도 가는데 내가 왜 못 다녀? 괜찮아. 어서 가기나 혀.”

가다 보면 아버지가 앞장을 서신다. 아버지는 등산을 많이 하셔서 걷는 걸 좋아하시고 젊은이 못지않게 잘 걸으신다. 어느 핸가 우리 육 남매와 사위 며느리 손자들이 모두 도봉산에 올랐는데 아버지께서 훌훌 날다시피 산을 오르시는 것을 보고 사위들이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그때 내 기분이 엄청 좋았다.

어느새 안국역 종로경찰서 앞 6번 출구까지 다 왔다. “아버지, 이젠 돌아가셔요. 다 왔네요.” “그래, 걱정 말고 어서 내려 가.” 아버지는 손 인사를 하신다. 내려가다 뒤돌아보니 아버지께서 그대로 서 계신다. “아버지 조심해서 가셔요.” 다시 한 번 크게 인사를 한다. “어서 가기나 혀. 내 걱정 말고.”

홍찬석 작. <Village in Dream>

116.5×72.7cm, Mixed media

2012

 

말이 사십 년이지 그 기나긴 나의 전 생애를 학교에서 보내며 교장이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어찌 나 혼자의 힘이라 할 것인가? 나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같은 성격과 조급함을 지그시 눌러주고 감추어주면서 나의 사십 년을 지켜주신 분이 아버지시다.

말씀이 별로 없어서 학창 시절에도 일체 간섭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내게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은 늘 정면이 아닌 뒷면이었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를 위해 아들을 키워주신 정 때문인지 아버지는 우리 집에 자주 오셨다. 전철로 한 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나는 전철역으로 배웅을 나갔다. 개찰구에서 표를 넣고 내려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왜 그런지 가슴이 뭉클하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더워졌다.

이윽고 되돌아보시며 손을 흔드시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얼른 얼굴을 돌리고 돌아섰다. 층계를 내려서 홀로 돌아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왜 그리도 외롭게 느껴진 것일까?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삼대독자 외아들로 자라셔서 외로움이 몸에 밴 것일까?

사업에 성공하셨다면 성공하신 분이다. 이남사녀 육 남매를 두시고 며느리와 사위와 손자가 주렁주렁 한여름 고구마밭처럼 풍성하게 뻗어간 집안이다.

그래도 일제 강점기 때 어머니를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시고 만주로 어디로 떠돌던 아픔과 외로움이 몸에 밴 것일까?

이제 아버지는 내일모레가 구십이라고 하신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님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아버님의 뒷모습은 늘 외로움에 젖어 있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버지의 뒷모습에 내 설움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