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 항공 사진을 위하여

이태훈 여행 작가, 사진가.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2가

2008년 가을 어느 날, TV에서 항공 사진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프랑스에서 생태 전문가이자 항공 사진가로 활동 중인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하늘에서 본 지구의 모습을 몇 십 년째 촬영하고 있는 유명한 사진가다. 그의 사진은 신(神)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빚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미학(美學)들을 그려냈고, 나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라는 사진가에 대해 존경과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을 3년째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TV로 보자, 내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로 저거다! 이때부터 나는 베르트랑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우리만의 시각으로 촬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항공 촬영을 하기 위해선 과연 어떤 방법이 필요하고, 헬기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갔다.

헬기를 빌려서 한반도를 촬영하겠다는 기획안을 가지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국방부였다. 우리나라에서 헬기를 가장 많이 보유했고, 베르트랑에게도 헬기를 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방부에서는 개인에게는 헬기를 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내가 아는 모든 인력을 통해 국방부에 부탁을 드렸지만 헛수고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국방부의 한 분이 헬기는 국방부 다음으로 산림청에 많다는 말을 해주었고, 마음은 어느새 산림청으로 향했다. 백방으로 알아본 후 2010년 산림청 주관으로 세계 산림과학 박람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해, 산림청에 새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박람회 때 세계 산림학자 3,000여 명이 오는데 한반도의 산림과 조림 현황을 사진으로 보여주자는 내용의 기획서. 산림청 홍보실과 산림과학원의 박사들을 찾아가 열심히 설득했다. 헬기만 내주면 지상에서 들어가는 인건비나 사진 촬영에 대한 용역비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산림청이 원하는 사진이나 박람회 때 필요한 사진을 촬영해주겠다는 약속 끝에 마침내 2008년 겨울부터 2010년 여름까지 2년 동안 헬기를 타고 우리나라 전역을 촬영하게 되었다.

항공 촬영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우선 한반도 전역을 직접 다녀보았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하늘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기를 타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비행 첫날 무엇을 찍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땅에서 볼 때와 달리 하늘에서의 시각은 훨씬 넓었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작게 보이는 탓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정말 어려웠다. 설령 셔터를 눌렀다고 해도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계절의 특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의욕만 앞섰지 항공 촬영에 대한 지식도 없고, 요령도 없어 아주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만 했다. 그 후 몇 번의 실수를 반복하고, 하늘에서 보는 시각이 익숙해질 때 내 눈에 진정한 ‘한국의 미’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산으로 가든 들녘으로 가든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미(美)와 색(色)이 엿보였다. 그 자연의 소나타가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퍼져 있는 모세혈관이 자극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가 가진 특유의 부드러운 선, 형형색색의 나무와 숲, 수백 년 동안 만들어진 논두렁, 인간의 따스한 마음을 품은 산길 등이 작은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헬기는 지상에서 500m 정도 날지만 산을 촬영할 때는 최고 2,000m 이상 올라간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헬기에 난 창문이 책 크기만큼 작아 자유롭게 수직 사진을 촬영하기 어려웠고, 헬기가 적당한 속도로 날아야 하기 때문에 좋은 피사체를 봐도 제대로 촬영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백두대간을 촬영하다가 갑작스런 돌풍에 헬기가 곧바로 수직 하강할 때의 느낌은 놀이동산의 자이로드롭보다 몇 십 배는 더 아찔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을까?’ 할 정도로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사진가로서 의미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무수한 도전을 해왔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로도 마음을 내고, 지극정성으로 움직인다면 꼭 이뤄낼 수 있다는 것도 많이 경험했다.

대략 30회 정도 헬기를 타면서 남들이 경험하지도 보지도 못한, 한반도의 숨겨진 비경을 많이 보고 사진에 담았다. 이 사진들을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 후세들이 보게 된다면 한반도의 지형과 우리 삶의 터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에르베 튈레 작.

<Hasard>

서른아홉에 이룬 파일럿의 꿈

조은정 중국 상하이 지샹항공사 기장, <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 저자

내가 파일럿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내 나이 만 29세 때였다. 그날은 우연처럼 찾아왔다. 2001년 3월 초의 어느 날, 서울 힐튼호텔의 호텔리어였던 나는 여느 때처럼 프런트 데스크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서 금발 생머리의 여성 기장이 포부도 당당하게 호텔 정문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이 심하게 뛰었고 설명할 수 없는 충격과 설렘으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 파일럿이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중년 여성이었던 그녀는 미국 회사에서 20년가량 비행을 해온 기장이라고 했다. 여성도 조종사가 될 수 있구나, 몇 백 명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한 비행기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구나.

그 이후 파일럿을 향한 나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 나이에 어떻게 파일럿이 되느냐, 정신 차려라, 남자들도 되기 힘들다, 파일럿을 남편으로 두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더구나 당시 한국에 있던 대표적인 두 항공사에서는 몇 년째 신입 파일럿을 채용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뽑더라도 나이 제한은 25세였고 시력도 양쪽 모두 1.5 이상이어야 했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아홉에 시력도 0.8이었으니, 자격 미달로 파일럿의 꿈이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꿈인가?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메아리가 멈추질 않았다.

안정된 호텔리어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속 목소리에 충실하기로 했다. 한국이 안 되면 다른 나라에서라도 시작해보면 된다는 생각에 호텔에 오시는 외국인 파일럿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파일럿이 되셨나요?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미국인 파일럿들은 모두 긍정적인 답을 해주었다. 그 후 더 열심히 파일럿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정보만 책 몇 권 분량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 꿈을 향한 길의 윤곽도 잡히는 거 같았다.

한국에서는 어렵지만, 미국에서 비행 교육을 받아 비행 경력을 쌓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미국으로 떠날 만한 돈도, 연고지도 없었던 나는 우선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비행을 배울 방법을 찾았고,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는 말처럼 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오산 미군 공군부대 내의 에어로클럽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교육받기까지 실패, 좌절,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오산 에어로클럽에 들어가 자가용 면허증까지 취득했고, 그다음 단계인 계기비행 과정을 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동안 일하며 알뜰히 모아놓은 돈이 기본 자금이 되어주었다.

미국에서 파일럿이 되려면 항공 학교에서 자가용면허, 계기비행 자격, 상업면허, 멀티엔진면허를 취득하고 이러한 면허 과정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관면허까지 취득한 뒤 비행 교관을 하면서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 과정 과정을 마스터하는 길은 오직 연습과 훈련뿐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끝내 파일럿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11년, 파일럿의 꿈을 꾼 지 10년 만에 중국 항공사에서, 중국 최초의 외국인 여기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운이 좋은 거 같다고 하지만, 내가 이룬 그 어떤 것도 한 번에 된 것은 없다. 이 모든 행운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파일럿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노력한 덕분이다.

파일럿 면허 과정 중에 계기비행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비행기 내의 계기판을 보고 계기판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비행하는 것을 말한다. 계기비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이 허상일 수도 있고 실제와 다를 수도 있는데 습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믿다가는 때때로 실수를 하게 되어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행 중에 구름의 모양이 비스듬하면 비행기가 수평으로 날고 있음에도 구름의 모양에 영향을 받아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때 구름의 기울기에 맞추어 비행기를 기울이다가는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허상이라고 부르는데 허상을 믿고 위험한 조종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기비행을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것들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내 가슴속에 강하게 새겨놓은 목표와 계획의 계기판을 믿고, 아무리 힘들다 해도, 자신만의 계기판을 따라 도전하고 노력으로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시원한 활주로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앤서니 브라운 작.

<꼬마곰과 프리다>

수채화+과슈+색연필 / 2013

귀가 들리지 않는 나, 4개 국어에 도전하다

김수림 일본 도쿄 거주.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은 없다> 저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불행하다 말할 만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2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4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먼 시골집에 버려졌다. 그리고 6살에 청력을 잃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어떤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돈 벌어서 돌아온다며 떠났던 엄마가 4년 만에 돌아왔고, 12살 때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힘든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듣지도 못하고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학창 시절엔 따돌림을 당했고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그러한 시련 앞에 나는 내 앞의 문제를 피해 돌아가기보다는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럴수록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뭐든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에 도전했다. 그중 하나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일본어를 빨리 배우게 했다면, 영어는 장애를 가진 나의 진정한 독립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귀가 안 들리는데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변의 많은 우려를 뒤로한 채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당시 나는 알파벳조차 제대로 모를 정도의 수준이었다. 학창 시절 영어 수업은 영어 듣기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어학원에 와서도 처음엔 수업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정말 큰 좌절이었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나에게 맞는 학습법이 무엇일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수업의 형태를 나에게 맞춰 조금씩 바꿀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어학원 원장님이 유치원 선생인 린다 선생님을 내 수업을 위해 특별히 초빙해주셨다. 그 이후 개인 교습을 통해 알파벳부터 배워나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내가 똑같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선생님은 자기 입술의 움직임, 혀의 움직임, 목의 진동, 입에서 숨을 토하는 공기의 세기 등을 나에게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확인하게 하셨다. 그 느낌과 똑같이 내 입, 혀, 목, 이를 움직이게 하여 26개 알파벳의 소리를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주셨다. 심지어 입속에 손을 넣어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익힌 발음을 잊지 않기 위해, ‘A’를 배웠다면 하루 종일 ‘에이, 에이, 에이’ 소리를 내야 했다. 알파벳 하나를 배우기 위해 하루가 걸렸다. 그 이후 단어를 배울 때도, 24시간 계속 연습해서 잊지 않으려 애썼다. 새로 만난 단어는 포스트잇에 적어 방 안 벽과 천장에 붙여두었다. 말의 높낮이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단어 하나하나를 말할 때 입 모양, 표정 변화를 읽어가며 그대로 따라했다.

휴일에도 서재에 박혀 공부했고, 서재에서 나왔을 땐 누구든 붙잡고 수다를 떨었다. 상대방의 입술을 읽으면서 하는 말을 이해하고, 머릿속으로 소리를 만들어 목소리를 낸다. 이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내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은, 사람들이 바보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의 지루하고 답답하고 긴 과정이었다. 하지만 기초를 충실하게 다지자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다. ABC도 모르던 내가 6개월 만에 영국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다.

그렇게 영어를 마스터하자 그다음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은 더 쉬웠다. 그러고 나자 세상살이에 조금은 자신이 생겼다.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일본에 있는 세계적인 금융 회사에 취직했고, 좋은 남편 예쁜 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듣지 못하는 내가 한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4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4개 국어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살면서 포기할 일이란 없고, 전력을 다한다면 그 마음이 결국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는 꿈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본다면,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다면, 그 꿈은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되어줄 것이다.

나탈리 레테 작.

<Jeune fille sur le champignon>

실크스크린 / 2010

나도 ‘아티스트이다’ 展

작 가 들  경 계 를  허 물 다

2013년 8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품은 앤서니 브라운, 세르주 블로크, 에르베 튈레, 나탈리 레테 등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입니다. 현재 이 작가들의 그림책 원화들이 <나도 ‘아티스트’이다> 전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각 작가들마다 ‘경계 허물기’라는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작가와 감상자와의 경계, 다른 문화와 종교라는 경계, 인종과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 등 그들의 세계를 엿보며 그들의 창작 과정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앤서니 브라운과 그의 동반자인 한나 바르톨린이 함께 작업한 2013년 신간 <꼬마곰과 프리다>의 원화도 공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세계 일러스트 거장들의 원화뿐 아니라, 그들의 작업하는 모습, 작품 제작에 사용되는 작가별 다양한 재료들 등 참여 아티스트의 실제 아뜰리에 모습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만져보고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하면 좋을 다양한 무료 체험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나탈리 레테의 ‘꼴라쥬 조각놀이’ 세르주 블로크의 ‘빨간 실을 이용한 공간드로잉’ 크리스티앙 볼츠의 ‘애니메이션 만들기’ 에르베 튈레의 ‘12가지 감성놀이 책 읽기’ 등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전시 기간 5.1~8.21   장소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Tel. 031-901-4368)

자료 제공 (주)아트센터이다  www.artcenterida.com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