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24시간이다.

나는 떡집 셋째 아들이다

최대한 27세. 2011 대한민국 ‘떡 명장’

나는 떡집 아들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내가 아버지를 도와 떡을 배우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던 나는 어쩌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를 한 대 쳤다가, 나도 싸움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중학생이 되기까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물으면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만날 싸움을 해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꿈이 없으면 차라리 떡집을 이어받아라 하시더니, 다음 날 새벽 2시부터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떡은 미리 만들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문이 오면 새벽 일찍부터 떡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친구들이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 영어 단어를 외울 때, 나는 쌀가루를 빻고 가래떡을 뽑았다. 공부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고, 학교에서도 ‘떡집 아이’로 생각해서 졸든 말든 일절 상관을 하지 않았다. 너무 하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힘들어지실 게 뻔히 보여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정말 떡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있었다. 2010년 제대를 하고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크게 보인 것이다.

“야, 쌀 몇 키로 몇 키로 달아.” “이거는 어떻게 어떻게 해.” 쌀, 물의 양, 각 재료의 특성까지도 하나하나 정확하게 알고 지시를 내리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목표를 세웠다. 아버지처럼 되자. 아버지처럼 될 때까지 떡 만드는 일을 하자~!

그때부터 휴대 전화도 끊었다. 친구한테 연락이 오면 나가고 싶고 마음이 흔들릴까 봐서다. 떡 학원에 다니면서 이론을 배우고,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떡 일에만 매진했다. 막상 내 일이다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배우니 재미도 더 생겼다. 공부도 못하고 특별히 관심 있는 것도 없었는데, 떡은 나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떡을 만들 수 있을까? 빵처럼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떡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하면서 새로운 떡들도 많이 만들려고 시도를 했다. 그렇게 ‘호박소담떡’이라는 호박 향이 나면서 호두가 씹히는 부드럽고 달달한 단호박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떡으로 25살에 ‘2011 대한민국 떡 명장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나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보여 드렸는데 아버지는 상을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엉엉 우셨다. 어머니도 아무 말 없이 울고 계셨다.

아버지는 항상 엄하게 떡을 가르치셨다. 한 예로 제대하자마자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새벽에 나를 깨웠다. 나에게는 휴식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리고 한번은 명절 때 너무 바빠서 이틀을 밤새고 가래떡을 만들다가 기계에 손을 넣어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병원에 갔다 온 다음 날 새벽에도 나를 어김없이 깨웠다. 그리고는 비닐봉지로 내 손을 감싸주시고는 나에게 쌀을 퍼오라고 일을 시키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을 못 할 줄 알았는데 하려고 하니까 할 수 있었다. 그때 사람의 능력은 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못 할 거 같지만 상황에 닥치면 하게 된다.

그날 이후 손이 부러져도 일을 했고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려도 일을 했다. 지금 이 일을 완벽하게 안 해놓으면 다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플 때 하면 힘들지만 막상 하고 나면 산을 하나 넘은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한아, 일은 정말 중요한 거다. 손님이 주문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주문을 하는 거다. 그 약속을 절대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귀에 닳도록 하셨던 말씀이다. 부모님도 그 말씀을 몸소 보여주셨다. 아버지에게 섭섭한 순간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버지께 감사하다.

명장이 되고 나서 처음엔 좋았지만, 그 기분은 정말 잠깐이었다. 아직 체계적인 이론도 정리되지 않았고 기대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아버지께서는 “너는 명장이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 아직 명장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겸손하라고 하셨다. 나도 지금 진정한 명장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떡들을 먹어보면 정말 맛이 깊고 엄청 맛있다. 그런 전통 떡들의 맛은 살리고, 현대인들의 입맛에도 맞는 떡을 개발해 전 세계에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아직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청소년들을 위해 재능 기부 형식으로 떡 강의도 해주려고 한다. 자기 싫어도 무조건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떡 만들기.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많았지만 사람마다 자기 삶의 길이 있는 것 같다. 떡 때문에 고생하며 철도 들었고 책임감도 배웠다. 앞으로도 떡과 함께할 시간들에 파이팅을 외쳐본다.

알랭 토마 작.

<흰가슴 투칸>

39×46.8cm. 석판화. 2007.

스웨덴에서 만난 100년 전의 나

이숲 소설가,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저자

2006년,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당시 내 생활의 한 부분이 정리되는 사건이 있었고, 완벽한 이방인의 삶,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를 정리하고 싶었다. 스웨덴 웁살라대학교에서 유럽 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중앙도서관 카롤리나 레디비바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1904년 국운이 기우는 한국에 대해서 쓴 책 <한국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대한 기억과 연구>였다. 화관무를 입고 족두리를 쓴 여인이 그려진 하얀색 낡은 하드커버를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한참 동안 표지만을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방인의 눈으로, 1세기 전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인은 내가 알고 있던 한국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정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내 의식 속에 있는 한국에 대한 표상들은 주로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텍스트 속의 한국인들은 달랐다.

‘자유분방하고 호탕하며 자연스럽고 총명하다’ ‘선량하고 관대하며 명석한 백성들’ ‘한국인들의 태도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당당하다’ ‘동면에서 깨어나면 독창적인 탐구심으로 불타오를 사람들’ ‘겉으로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 밑바닥에 있는 그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단호한 정신력’….

나는 왜 이렇게 긍정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 후부터 몇 년 동안 나는 한국인, 한국인들의 개성과 영혼에 푹 빠져 지냈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거나 체류했던 서구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두툼한 텍스트 속에는 잘나가는 권력가나 영웅이 아닌, 그들이 여행길에서 오가다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들의 감각 속에 포착된 이들의 개성과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 속에서 살아 있는 한국인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들에게 푹 빠졌고, 그 모습을 또렷이 상상하고 싶어서 그 부분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들을 만나 혼자 슬퍼하고, 기뻐하고…. 긴긴 스웨덴의 겨울밤을 보내는 게 외롭지 않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세계의 식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제국주의는 세계에서 마지막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던 한국에도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쾌활하고 명석한 한국’보다는 ‘무기력하고 무질서한 한국’이 필요했다. 특히 당시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쏟아냈다.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이 이용한 부정적이고 우울한 표상들을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을 좀 더 알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친절하고 악의를 모르며 진리를 탐구하고 또 매우 사랑스러운 성품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민족성에는 무서운 잠재력이 있다. (중략) 피압박 민족보다 더 열등한 민족이 4천 년 역사를 가진 민족을 동화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과업이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반면 한국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영국인 신문기자인 프레드릭 매켄지는 반일의 목소리를 담아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한 사람이기에 특히 인상적이었다. 수 세기를 거쳐 이 땅이 물려주고 물려받은 정신성. 그는 한국의 정신사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08년 겨울, 나는 그동안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한국에 대한 서구의 인식 1890-1930: 상호성과 식민담론의 연관성에 대한 비교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웁살라대학교에 제출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2년 이상의 준비 작업을 거쳐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이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역사에 묻힌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우리의 자화상에 드리워 있던 그늘을 걷어, 우리의 정체성에 유쾌한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내’ 나라를 지금에야 발견했다는 의미를 제목 속에 담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 오천 만이 한 명 한 명 소중해졌다.’ 한 독자의 감상평이 심금을 울렸다. 바로 내가 이러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해가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인의 기질 중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선함’과 ‘강인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절망적이리만큼 학대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들. 착하고 순박하다가도 위험이 닥치면 무섭게 일어서는 용감한 사람들.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의 잠재력은 이미 100여 년 전의 서구인들의 눈에 포착이 되었던 것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온 역사, 한국인에 내재된 고난을 극복한 자의 힘과 생명력. 누군가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우리의 오랜 정신을 믿고, 진취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우리 자신의 길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다시 무서운 잠재력을 끌어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한국인 연구’는 내가 놓칠 수 없는 화두가 될 것 같다. 주로 구한말의 한국인을 다루다 보니 현대의 한국인을 말하지 못했는데 훗날 나는 이 작업을 하고 싶다. 그래야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랭 토마 작.

<판다들>

42.5×45cm. 석판화. 2005.

늦깎이 대학생의 꿈

조정자 64세. 김포대학교 사회복지과 2학년, 환경미화원

나는 김포대학교의 환경미화원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는 늦깎이 대학생이기도 하다. 나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부터 시작된다. 아침 준비를 마치고 6시에 출근, 청소를 마치고 9시부터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화장실 청소를 하고 다시 수업을 듣고, 청소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와서 새벽 한두 시까지 공부를 한다. 이제 마지막 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데, 필요한 학점을 따지 못하면 졸업을 못 하기에 정말이지 1분 1초가 귀하다.

나는 전남 순천에서 9남매 중에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여러 가지 여건상 공부할 형편이 안 돼 초등학교만 겨우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온갖 고생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조금의 시간 여유가 나면서, 이상하게 머릿속에 잡념 같은 게 계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니까 괴로웠다. 잡념을 멀리하려면 뭔 취미를 가져야겠다 하면서 찾다가 시작한 게 공부다.

그렇게 50대에 다시 중졸 검정고시부터 준비를 해갔다. 그런데 공부가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 배운 걸 잊어버렸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아는 거 나는 20번 보자는 생각으로 보고 또 봤다. 영어 단어 외울 때는 온 집 곳곳에 단어를 써 붙여놓고, 항상 호주머니에 단어 수첩을 넣어놓고 다니며 외웠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를 하는 것은 힘들기도 했지만, 잡념도 없어지고 무식했던 내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기뻤다.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하면서 아, 나 같은 사람도 되는구나, 하면 되는구나, 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만학도 특별 전형으로 지금의 대학에 들어왔다.
“공부를 하게 해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맡은 일을 잘해내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을 해서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많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감을 더 가지게 되었다.

대학 들어와서도 F학점만 받지 말자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가장 어려운 게 컴퓨터 시간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하다 보니까 지금은 한글문서, 엑셀, 파워포인트로 과제를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는 해보니까 제일 정직했다. 책은 언제나 내가 노력해서 연구하려고 하면 그만큼의 지식과 지혜를 주었다.

공부를 못 했다는 한도 많았는데 어느새 대학까지 다닌다는 게 때로는 신기하기만 하다. 주변에서 도와준 사람들 생각하면 너무 고맙다. 내가 어려워하면 어린 학생들이 많이 가르쳐주었다. 날 무시 않고 존경해주었다. 남편은 나와 같은 학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내가 공부 때문에 청소 구역을 다 못 하면 남편이 다 해준다. 공부가 하도 안돼서 “난 돌대가리인가 봐” 푸념하면 남편은 “아주 똑똑한 사람도 하다 보면 다 틀리더라. 그만큼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최고지” 하며 용기를 주었다.

얼마 전 한 기업에서 만학도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을 땐 너무 감동스러웠다. 어떨 때는 너무 복을 받아서 딴 나라에 온 거 같기도 하다.

잠잘 시간 쪼개서 하다 보니 피곤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잡념 없이 딱 누우면 기절하듯 꿀잠을 잘 수 있어서 행복하다. 2014년 2월 졸업하면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대학에 다니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 장애인활동보조인 과정 수료증도 땄다. 사회복지과를 선택한 이유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1학년 때는 봉사 활동을 다녔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머릿속도 깨끗해지고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많이 느꼈다. 졸업한 후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싶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따고 싶고 계속 배우면서 살고 싶다.

인생은 자기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

알랭 토마 작.

<봄 부케>

50.7×42.5cm. 석판화.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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