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주는 이들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소중하고 감사한 이야기들, 그 기다림에 관하여….

건강한 나, 그날이 오면…

장유진 17세. 시인. 경기도 안산시 초지중학교 3학년

엄마와 나는 일찍이 기다리는 것에 도가 텄습니다. 2002년 7월 7일 저녁 7시 이후부터입니다. 뇌동정맥 기형. 8살 때 처음 발병된 그 병 때문에 내 삶은 건강하기만을 기다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1년에 한 번꼴로 중환자실로 실려 갑니다. 엄마는 항상 병원 복도에서 면회 시간을 기다리고 중환자실의 나는 무서움과 고통 속에서 엄마를 만날 순간만 기다립니다. 게다가 후유증으로 왼편 마비가 와서, 일상에서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2~3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주변 사람들을 또 기다리게도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겨울이었는데도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아, 언제 눈이 올까 기다렸습니다. 그날은 일기예보에서 눈이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며 창밖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는데도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며 창밖을 보았는데 마침 눈이 내렸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아, 조금 더 기다리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늘 무언가를 꿈꾸고 기다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어느새 따듯한 봄이 오듯, 정말 믿고 기다린다면 그 꿈은 꼭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지금도 엄마와 나는 ‘건강’이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건강해지면 코피 터지게 공부하고 싶은 나의 소망과, 딸에게 하고 싶은 공부를 다 시켜주고 싶은 엄마의 바람을 말입니다. 그 기다림은 분명 곧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기다림도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예쁜 꿈 꾸며 건강을 기다립니다.

입원을 하니

다시는

입원하지 않겠다는 엄마와의 약속

어겨버렸네

그래도 엄마는

좋다네

내가 폐렴이라서…

그래도 나는 안 좋네

학교 못 가서

엄마는 좋다네

학교 못 가고 병원에 입원했어도

하루 종~일 내가 옆에 있어서

갑자기

나도 좋아졌네

긍정적인 엄마 생각 덕에…

“유진아,

이번에만 입원하고

‘다시는 아프지 말고’

다시는 입원하지 말자”

“네, 엄마”

“고마워

넌 나의 희망이고

나의 보물이야”

“나두요”

입원을 하니

긍정적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엄마와의 사랑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아터 호숫가의 시골집(여름 풍경)>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14년

라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조아람 25세. 애견 미용사. 충남 천안시 두정동

  생각만 해도 코끝이 찡해온다. 2009년 12월 20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날. 2년을 나와 동고동락한 나의 작은 천사 라미를 잃어버린 날….

가난한 대학 시절 애견과 전공이었던 나는 강아지를 분양받으러 가게 되었다. 여러 강아지들 사이에서 라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태어난 지 100일째라는 너무 작고 약한 푸들, 너무 약하다며 더 튼튼한 강아지를 데려가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라미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 나 역시 2.5kg이라는 작고 약한 몸으로 태어났기에 왠지 모르게 끌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생애 처음으로 한 이불에서 자며 사랑으로 보살피는 반려견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돈이 없어도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고 멋진 집도 사주고 싶었다. 라미는 활달하고 천방지축인 성격이었다. 머리를 감기는 데 도망쳐서 감던 머리를 잡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고, 똥오줌 가리는 걸 가르칠 때는 오히려 내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문 앞으로 달려 나와 한결같이 반겨주었다. 첫 취업 후 힘든 일 때문에 녹초가 되던 나에게 라미는 그렇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세 달쯤 같이 지냈을 때, 서울에 놀러갔다가 라미를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여의도가 잠길 정도의 장마 때였는데, 3일 내내 울면서 우산도 없이 잠도 자지 않고 거의 굶다시피 하며 라미를 찾아다녔었다. 드디어 어느 초등학교 쪽에서 라미를 찾았을 때, 그토록 무섭게 내리치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었다. 라미를 찾은 후에야 배고픔이 느껴졌고 다리 힘도 풀렸으며 미친 듯이 잠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마치 내가 낳은 자식 같았다고나 할까. 결혼은 안 했지만 아낌없이 주고 보살펴주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라미는 참 씩씩했다. 힘든 바이러스장염도, 눈이 다치는 어려움도 이겨냈고, 나는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연약한 라미가 어느새 새끼를 낳을 때가 되었을 때는 그 경이로움에 밤새 뜬눈으로 기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해준 것보다 라미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이 훨씬 컸다. 라미를 키우면서 내가 받았던 마음의 치유와 성장,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행복함들.

그렇게 함께한 지 2년. 새로운 내 인생의 출발로 인해 라미를 할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던 나의 선택. 자주 보러 오겠다며, 꼭 다시 같이 살겠다는 다짐을 뒤로하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라미를 맡기고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었다. 고향에 라미 보러 가는 날이면 가슴이 뛰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 후 정말 마지막 이별이 찾아왔다. 할머니께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열린 문틈으로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아마도 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세상에 태어나 제일 많이 울었다. 그리고 라미를 찾아 헤맸다. 수소문 끝에 어떤 아저씨가 자기 옷을 벗어서 감싸 안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라미를 찾기 위해 유기견 보호소 사진들을 보고 있으며, 라디오에 사연도 올리고 애견 가게와 동물 병원들에 전화를 해본다. 찾기만 하면 지금까지 못 해준 걸 다 해주고 싶다.

직업상 매일 강아지들을 보고 대한다. 강아지들을 돌보며 무엇보다 주인과의 오랜 행복을 빌어준다. 나중에 후회 없도록 아낌없이 서로 사랑하길 바란다.

라미는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을까. 따스한 봄날이 되면 또 한 번 기다려본다. 새 주인과 산책하고 있는 행복한 라미와 마주하기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생명의 나무>(꽃 핀 덤불이 있는 오른쪽 부분)

스토클레 저택 벽화를 위한 밑그림. 120.3×194.6cm. 1905-1909년

   

배역을 기다리며, 촬영을 기다리며…

유병준 65세. 탤런트. <불멸의 이순신> 구루지마 장군 역

나는 항상 아침 일찍 산에 간다. 산을 오르며 발성 연습도 하고, 예전에 했던 15분짜리 긴 대사도 다시 외워본다. 즐겁게도 포악하게도 슬프게도 해본다. 혼자서 비굴한 역도 해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10미터 앞에 있다 상상하면서 연극도 해본다. 출연하는 작품이 없을 때도 쉬지 않고 한다. 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야지, 연기자이니 눈은 살아 있어야 되겠지, 목소리도 늘어지거나 하면 안 되겠지, 하며 연습을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주시면 피를 토하든 쓰러지든 정말 작품을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이 기다림이 꽃이 필지 안 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 무슨 역이든 오면 할 수 있도록, 갈고 닦는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이상하게 연극에 끌렸다. 대학 졸업 후 취업과 연기 사이에서 갈등하다 운명처럼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도 무슨 역이든 한번 오기만 하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다. 그래서 광대인가 보다.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작품의 설정대로 해줘야 드라마가 살기에 전체 속에서 그 배역을 이해하며 최선을 다했다. 2004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왜장 구루지마 역할을 할 때는 특히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순신 장군 때문에 죽은 형과, 그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가는 쌍둥이 동생 역을 함께 했는데, 비중은 별로 크지 않았으나 임팩트가 강해서인지 그 당시에 ‘불멸의 구루지마’라는 말도 떠다니고, 전화도 많이 받았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성취>

스토클레 저택 벽화를 위한 밑그림. 120.3×194.5cm. 1905-1909년

그것도 잠시, 다시 기다림이었다. 사실 내 또래가 다 그렇다. 하지만 이제 불러줄 사람도 없겠지, 하며 좌절하다가도 77세의 이순재 선배님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탤런트실에 가면 일년 내내 TV에서 안 보인 친구들이 있다. 나처럼 한 번의 기회만 온다면, 정말 잘할 수 있는데 하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본이 탄탄한 친구들인데…. 안타깝기도 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가 다 기다림일지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설레는 기다림이 있었다. 나의 짝은 누가 될까, 아이를 낳을 때는 이 아이가 누굴 닮을까,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클까…. 이제와 돌아보면 기다림이 나를 만들었고, 그 기다림이 내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배역을 기다리고, 단 몇 분 촬영을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도 예술이라 생각된다.

기다림을 선택한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 정년퇴직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기다리는 거라면 나한테 배우라고. 어떻게 기다리냐 물으면 그냥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알아준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좋아서 이 길을 걸어왔다. 열심히 한길을 걸어왔으니 나 어쩌면 괜찮은 사람이야, 라며 나를 위안한다. 촬영이 없을 때는 동네 텃밭에서 하루 종일 묵묵하게 땡볕에서 땅을 파고 농사도 지으며 열매 맺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기다림이다.자연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기다림의 나날을 만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