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어린 시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인내’라는 과일이 진짜 있는 줄 알았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다음에 커서 돈 벌면 그 요상한 과일을 꼭 사 먹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신(神)은 ‘옜다! 네가 바라는 인내다’ 하고 인내를 주셨다. 그 맛은 이랬다.

중학교 때 집안이 사정없이 기울어졌다. 그래서 한때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나는 깊은 밤 자전거를 타고 읍내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는 밤 열두 시에 하동역에 도착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면 나는 재빨리 수하물 칸으로 달려가서,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신문 꾸러미를 내려 받아 자전거에 옮겨 싣고 신문보급소로 왔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우편으로 보낼 신문지마다 독자의 집 주소가 적힌 띠지를 끼우는 작업을 하였다.

겨울밤 추위는 혹독했다. 어둠이 내리자 바람은 도적같이 읍내를 휘젓고 다녔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아걸었다. 하지만 나는 춥고 어두운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칼바람은 어리다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손발은 얼고 코와 귀가 떨어질 듯 아팠다. 겨우 신문 보급소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나는 울었다. 너무나 추워서 아무도 없는 길에서 엉엉 울었다. 얼떨결에 처음 맛본 인내는 그렇게 매웠다.

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에 실습을 나갔다. 일만 열심히 하면 공장에서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다 해결해주었다.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즈음 울산조선소에 다니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기능직 사원 모집이 있어서 담당 과장님한테 부탁해두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그곳은 방위산업체, 즉 월급 받고 5년간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회사였다. 나는 곧바로 방직공장을 퇴사하고 울산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철석같이 믿었던 담당 과장의 부름이 없었다. 나는 친구 기숙사에서 꼬박 보름을 기다리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집안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녔지만, 나는 자꾸 지쳐갔다. 결국 첫 직장 대구 방직공장 부장님께 사정을 전하였다. 다행히 회사에서 재입사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옷가방을 싸들고 대구로 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그리 서럽던지…. 나는 차 안에서 고개를 떨군 채 꺽꺽 울었다. 쓰디쓴 두 번째 인내였다. 그 후에 있었던 세 번째 인내는 아직은 말하지 못하겠다. 대신 이제 열매를 이야기하고 싶다.

대구 방직공장 담 너머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날 나는 오전 작업을 끝내고 면장갑을 빨아 철제 구조물에 널고 있었다. 그때 멀리 학교 창문 밖으로 나온 아이 얼굴 하나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공장에 근무한 지 일년이 넘었지만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도 이쪽 사람과 처음 눈길이 닿은 듯 재빨리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람쥐처럼 사라졌다. 사랑스러웠다. 아! 내가 선생님이 되어 저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신기루 같은 희망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딱 10년 후 어느  날, 내가 초등학교에서 부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시골 학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바라보는 조회대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반갑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최형식 선생님입니다.”

젊은 날, 공장 담벼락 아래서 꿈꾸었던 희망의 뱃머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은 대체 얼마나 맛있는 열매를 주시려고, 이토록 오랫동안 쓰디쓴 인내를 맛보게 하실까’ 하고 내가 구시렁 구시렁거리던 어느 평범한 날, 불현듯 이곳에 나를 내려놓은 것이다.

부임 첫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뒤, 나는 교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슴을 펴고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어릴 때 박하사탕을 오드득 깨물었을 때처럼, 콧속에서부터 시작한 상쾌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인내가 맺은 열매는 박하사탕 맛이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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