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몸의 열을 식히고 갈증을 잡아주는 녹차말이밥

여름철 땀이 나고 갈증이 심할 때 오히려 따듯한 녹차를 마시면 몸의 열도 식고 갈증도 잡힙니다. 여름에 입맛 없을 때 차가운 보리차에 밥을 말아 먹기도 하지만, 이렇게 종종 녹차에 밥을 말아 짭짤한 굴비와 장아찌를 얹어 먹기도 한답니다. 녹차말이밥은 일본의 ‘오차즈케’라는 요리에서 응용한 것인데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고추장아찌 외에도 더덕장아찌나 오이장아찌를 올려 먹어도 맛있어요.

이양지 자연요리연구가

재료 준비

밥 2공기, 녹차 3컵, 굴비 1마리, 고추장아찌 2개, 오이 1/4개, 깻잎 2장, 대파 흰 부분 조금, 김(김밥용) 조금

만들기

① 굴비는 노릇노릇하게 구워 식힌 다음 살만 발라낸다. ② 고추장아찌는 얇게 송송 썰고 오이와 깻잎, 대파는 얇게 채를 썬다. 김은 가위로 가늘게 썬다. ③ 그릇에 밥을 담고 뜨거운 녹차를 붓고 굴비와 ②의 재료들을 올려 먹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천사의 미소, 피막이풀

싱그러운 모습이 보기만 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피막이풀은 우리나라 곳곳의 풀숲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피를 막아준다(멈추게 한다)’는 뜻으로 지혈초(止血草) 역할을 하는데요,
실제로 피가 나는 곳이나 심하게 고름이 잡힌 상처에 잎을 찧어 붙이면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천사의 미소’라는 유통명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 귓불에다 대고 후욱~ 하고 뜨거운 한숨을 내뿜는 것 같은 더운 여름철.
피막이풀 위에 손바닥을 얹어보세요. 차가운 기운이 있어 시원한 촉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번식력도 좋아서 넓은 화분 한쪽에 심으면 금세 전체가 싱그러운 ‘천사의 미소’로 가득해진답니다.

햇빛 직사광선을 피한 양지나 밝은 음지에 두세요.

물주기 손가락으로 뿌리 부분의 흙을 만져보아 말랐을 때 흠뻑 줍니다. 구멍을 뚫지 않은 항아리 뚜껑에 화초를 심을 경우에는 뿌리 전체가 젖을 만큼만 주세요.

번식 뿌리를 나누세요. 꺾꽂이나 휘묻이도 아주 잘된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점자 신용카드 Braille Credit Card

만든 사람: 김영석 30세.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2학년

이름은?

Braille Credit Card. 점자 신용카드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평소 스타일링 위주의 디자인보다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소수를 위한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우연히 쇼핑몰에서 사람들이 거스름돈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일반인들도 거스름돈을 잘못 받아 손해를 볼 때가 있는데 과연 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게 거스름돈을 확인할까? 궁금증이 생겼다. 한 설문 조사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76.2%가 지폐를 구분하지 못해 손해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불편함을 개선해보고자 시도하였다.

중점을 둔 부분은?

시각장애인들은 촉각과 청각을 이용하여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더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점자’와 ‘소리’ 이 두 가지 요소를 접목시켜 새롭게 디자인했다. 물론 일반 신용카드처럼 휴대성과 사용성이 뛰어나야 한다는 점도 중요시했다.

사용 방법은?

일반 신용카드와 같다. 기존에는 결제 금액을 점원이 알려주거나 휴대폰과 연결된 서비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은 불편하기도 하고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자 ‘점자’와 ‘소리’를 이용했다. 핵심적 기능은 신용카드에 내장된 전자 자동 점자(Electric automatic braille)를 처리하는 체계와 스피커인데 카드의 전자 신호에 반응하여 금액을 점자로 표시해주고 내장 스피커는 금액을 소리로 알려준다.

하고 싶은 말은?

사실상 이 제품은 콘셉트 디자인으로, 당장 시장에서 상용화하긴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만약 양산된다면 신용카드가 아닌 하나의 전자 제품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럴 경우 실제 사용자인 시각장애인들과도 충분한 테스트를 거쳐 편리성을 확보하고 싶다. 또한 기존 카드사와의 협력 방법도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다.

김연아의 키스&크라이

곽지영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SBS

‘키스&크라이’ 첫 방송 때, 요즘 ‘대세’인 가수 아이유는 빙판 위에서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했는데요, 이에 대한 심사 평은 ‘노래는 잘 들었다’였습니다. 가수가 아닌 스케이터로서 은반 위에 섰지만 스케이팅으로는 심사할 것이 없었지요. 이는 ‘키스&크라이’의 첫인상을 대변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피겨 영웅 김연아가 진행한다기에 시작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지만, 실제로 빙판 위에서 선보인 것은 부족해 보였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아이스쇼나 올림픽 장면만 보다가 이들의 초보적인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습니다. 바쁜 연예인들이 굳이 이런 걸 해야 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지요.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왜 이걸 해야 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13살 진지희부터 50대의 박준금까지, 그리고 상당한 재능을 갖춘 유노윤호에서부터 막 스케이트를 배운 아이유나 김병만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출연진들은 서로 다른 운동 신경과 전혀 다른 환경을 가졌지만 각기 전문 스케이터와 짝을 이뤄 발전해가는 모습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유노윤호의 경우, 해외 공연 등 바쁜 스케줄 탓에 연습을 거의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케이트를 타야 할 의미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당초 이 프로그램에 나온 목적은 자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 피겨는 자신만의 목표일 수가 없음을 깨달은 거지요. 그의 파트너 클라우디아 때문입니다. 한국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스위스 국적을 포기한 이 15살 소녀는 1등을 하여 8월에 있을 아이스쇼에 참가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유노윤호가 함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40살의 ‘피겨맘’ 이아현과 36살 김현철씨 커플 역시 인상적입니다. 힘겨웠던 개인사를 극복하고자, 몰입할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이아현은 첫 방송부터 열정을 다해 임하고 있지요. 그녀의 파트너 역시 청춘의 못다 한 꿈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서로간의 성격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이아현은 완벽한 무대에 대한 욕심으로 손짓 하나 표정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상대는 그저 느긋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토로하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정말 서로에게 화난 듯 불편한 기색도 노출됐습니다. 하지만 이아현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상대방을 사랑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 커플 스케이터들은 연인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며, 티격태격하고 힘들어도 결국 서로가 온전히 마음을 공유하지 않으면 최고의 무대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지요.

이렇듯 서로 다른 꿈과 성격, 환경,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때론 갈등하기도 하고 때론 감동하며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무대가 더욱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들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나름의 사연과 열정 그리고 고민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어설프고 낯설었던 무대가, 이들의 드라마로 더욱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 꿈을 공유하고, 성격과 가치관을 맞춰가는 과정은 비단 스케이팅에 한정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곽지영님은 1976년 생으로 대학에서 영어교육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작년부터 ‘비춤’이라는 이름으로 부부가 함께 블로그를 운영하며 드라마와 예능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어느 여름

사진, 글 김선규

새1 : “덥다 더워, 물 좀 마셔야지.”
새2 : “나두, 나두.”
새3 : “야, 새치기는 안 돼. 줄 서.”
새2 : “칫! 난 그럼 샤워부터 할래.”

아마도 이런 대화가… ^^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2008년 7월
뜨거운 어느 여름, 새들의 대화

참새들이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평소엔 조그만 먹을 것 가지고도 아등바등 싸우던 녀석들이 온몸이 젖어들자 서로에게 기대며 추위를 달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비 내리는 날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건 비단 참새만은 아니겠지요.

서울숲. 2006년 7월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날

공원에는 뭐하러 가냐며 시큰둥하던 아들 녀석이 분수대에서 뿜어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며 비로소 얼굴이 환해집니다. 어느덧 아빠 키만큼 훌쩍 커버린 아들을 덥석 안는 아빠의 모습이 물줄기보다 더욱 싱그럽고 벅차 보입니다. 저 수많은 물방울들처럼 행복은 늘 그렇게 우리 옆에 있나 봅니다.

서울숲. 2006년 8월

더위를 피하는 방법

법정 스님은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내가 더위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더우니까 곡식이 익고 여름이 있으니 가을이 있는 법. 가을만 돼도 쓸모가 없어지는 선풍기, 에어컨은 한때의 더위만을 피하려는 인간의 집착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셨지요.

전북 순창 강천산 계곡. 2006년 8월

바담 풍 선생

교육도 생물이다.
못난 스승이 ‘바담 풍’이라 가르쳐도, 슬기로운 제자들이 ‘바람 풍’이라고 알아서 깨치는 일도 있다.
이른바 청출어람. 선생치고는 좀 어리버리한 내겐 가끔 있는 일이다.

사춘기 초입 열세 살 인생들에게 젊은 교생 선생님은 그야말로 로망이다. 실습 기간 불과 2주일 만에 아이들은 제가 가진 도토리를 몽땅 드릴 만큼 가까워져, 마침내 헤어지는 날 교실 풍경은 가랑잎 분교 졸업식장을 방불케 한다.

몇 해 전, 교생 실습 마지막 날도 그랬다. 젊은 교생 선생님들이 손을 흔들며 골마루 끝으로 사라지자, 아이들은 정든 선생님들이 건네준 편지를 꺼내 읽으며 또다시 흑흑거렸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모든 아이들이 교생 선생님의 편지에 감동해서 우는데, 딱 한 아이만 편지를 받지 못해서 울고 있었다. 착한 그 아이는 야속한 교생 선생님들이 떠날 때까지 내색 못 하고 있다가 뒤늦게 눈물을 흘리다 짝꿍한테 들켰다.

총명하고 마음씨 고운 교생 선생님들이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 찬찬히 그 원인을 찾아보니…. 아! 내 불찰이었다. 애초에 교생 한 명당 여섯 명씩 아이들을 배정하여 아동 관찰과 생활 지도를 부탁했는데, 내가 작성한 배정 명단에 그 착한 아이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 아이한테 다가가 온전히 내 실수였음을 고백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문화상품권 한 장을 건네며 궁색하게 위로하였다. 다행히 아이도 칠칠치 못한 담임을 용서하는 듯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다 떠나간 후, 우연히 교사용 책상 한쪽에 네모반듯하게 접어놓은 종이 한 장을 보았다. 무언가 싶어 펼쳐보니 그 안에는 아까 그 문화상품권과 아이가 쓴 짧은 편지가 있었다.

아찔했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열세 살 아이의 숨겨진 마음고생이 자괴감으로 몰려왔다. 못난 담임이 텅 빈 교실에서 혼자 그렇게 심란하게 한숨 쉬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우리 학교 운동장에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 모여 축구를 하던 우리 반 아이 몇 명이, 때마침 강당에서 교육 실습 퇴교식 일정을 마치고 나가던 교생 선생님 한 명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미주알고주알 그 일을 교생 선생님에게 말하였고, 교생 선생님은 재빨리 휴대폰 문자를 날렸다. 그리고 교문을 나서서 뿔뿔이 흩어졌던 다섯 명의 교생 선생님들이 순식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다섯 명의 예비 교사들은 운동장 한쪽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모여 한 아이를 위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 누가 교사를 꿈꾸지 않으랴.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 무려 다섯 통의 편지가 착한 그 아이한테 전해졌다. 젊은 선생님들의 편지 봉투와 편지지는 왜 그렇게 세련되고 예쁜지. 편지를 받아들고 쑥스러운 듯 웃음 짓는 착한 아이의 표정이 반짝거렸다. 나는 어제 그 대견스러운 문화상품권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쉽사리 남을 원망하지 않으며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기꺼이 사양할 줄 아는 멋진 그 친구를 위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세계 챔피언 김주희의 희망 이야기

김주희 26세. 권투 선수, 라이트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매일 아침 나는 15킬로미터를 달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린다. 프로 데뷔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오늘 하루쯤 빼먹을까?’ 하는 생각이 열 번도 더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매일 아침 달리는 이유는 심장을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다. 10라운드를 뛰는 프로 선수가 되려면, 심장이 하나로는 모자란다. 강철 같은 심장을 만드는 건 하루하루 흘리는 작은 땀방울이다.

중학교 2학년. 한창 공부할 나이에 학교만 마치면 체육관으로 향했다. 작은 주먹에 피멍이 들 때까지 서너 시간씩 샌드백만 쳐댔다.

나는 열두 살 때 이미 간절히 원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었다.

IMF로 공장이 문을 닫자 아빠는 실업자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았던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런 데다 아빠는 당뇨에 치매 초기 증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다. 5살 많은 언니가 나와 아빠를 보살피며 생활을 꾸렸다. 이혼한 부모,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 나에게는 까마득히 높이 있었다.

그런 내가 운명처럼 권투를 만났다. 서너 시간씩 숨이 목까지 차오르도록 운동을 하고 나면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30분 동안 줄넘기를 하라 하면 1시간을, ‘하나둘’ 연습을 1시간 하라고 하면 3시간을 하곤 했다.

‘나는 내일, 오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그렇게 8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기본기만 익혔다.

어느 날 관장님이 내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세계 챔피언이요.”

아주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나는 불쑥 대답했다. “나랑 꿈이 같네. 우리 같이 해보자.”

하지만 관장님은 권투를 가르쳐줄 생각은 않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만 해댔다. “권투는 힘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전략으로 하는 거”라며 삼국지와 육군 군사작전 교본 같은 책을 읽게 하셨다. 새 기술을 가르쳐줄 생각은 않으시고 기본기만 지독하게 시키셨다.

왜 새 기술은 안 가르쳐주시는지, 혹시 나에게 실망하신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게 세계 챔피언을 만드는 관장님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의 트레이닝을 거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2004년 IFBA(국제여자복싱협회) 라이트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전. 상대인 멜리사 세이퍼는 미국 선수로 8전 전승의 권투 천재였다. 모두 멜리사의 압승을 예상했고, 내가 이길 거라고 보는 사람은 관장님 한 분밖에 없었다. 관장님은 멜리사에 대항하기 위해 스타일의 변화를 요구했다. 긴 팔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치고 빠지는 기술 대신, 1라운드부터 맞고 다운되는 한이 있더라도 바짝 접근하라고 주문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근접해서 멜리사를 강하게 압박해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멜리사도 나를 연구했다면, 내가 긴 팔을 이용한 잽으로 도망가는 스타일의 권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1라운드부터 나는 멜리사의 예상을 비웃듯 밀착해 들어가서 복부 기술을 구사했다. 멜리사는 내가 가까이 붙어 있었음에도 제대로 한방을 먹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만 18세 최연소로 손에 쥔 벅찬 타이틀이었다.

그토록 꿈꾸었던 세계 챔피언. 챔피언이 되면 마냥 행복해질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방어전을 치를 때마다 발톱이 6~8개씩 빠져나갔다. 발톱이 빠져도 훈련을 쉴 수는 없었다. 2년 후에는 급기야 오른쪽 엄지발가락 뼈를 3분의 1이상 긁어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빠진 발톱으로 세균이 침투해서 염증을 일으켰던 것이다.

수술이 끝나자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이제 반쪽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저히 권투를 포기할 수 없어, 훈련을 시작했지만 균형감은 엉망이었고, 움직임이 둔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매일 밤을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울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시합을 해낼 수 있을지 너무 막막하고 무서웠다.

하루는 관장님이 체육관에서 가장 무거운 덤벨을 들고 오라더니 무겁냐고 물었다. 무겁다고 하자 관장님은 축 처져 있던 덤벨을 있는 힘껏 받쳐 올려주었다.

“아직도 많이 무겁니? 너 혼자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태 우리 둘이 해왔고 앞으로도 둘이 하는 거야. 이렇게 내게 의지해. 그래야 이겨낼 수 있어.”

그날 이후 몇 개월 동안 나는 이를 악물고 재활을 견뎠다. 5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찬 채 한강변을, 도봉산을 절뚝거리며 걸어 다녔다. 그러면서 예전의 기량을 서서히 회복해갔다.

9개월 후, 나는 WBA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상대 선수를 어렵지 않게 이기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작년 9월에 치른, 챔피언 타이틀 4개가 걸린 시합….

도전자 주제스 나가와의 좋은 펀치들이 사정없이 들어왔고, 4라운드 때는 왼쪽 얼굴이 화산처럼 밀려 올라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피가 흐르기 시작해 타월 두 개를 적셨다. 도전자도 나만큼이나 절박했을 터, 상대는 부상당한 곳을 계속 공격해왔다. 왼쪽 눈은 아예 밀려 올라가 튀어나올 듯했고, 멀쩡했던 오른쪽 눈에도 이상 신호가 왔다. 아직 경기가 반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주심은 링 닥터를 불렀다. 나는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1분쯤 지난 뒤, 주심이 다시 경기를 중단시켰다. 모두가 그 상황에서는 멈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삶에도 연습이 있다면 그만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절대 물러설 수도 없고, 절대 질 수도 없었다. 계속 난타전을 치렀으므로 7라운드부터는 둘 다 체력이 바닥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오랜 연습으로 몸에 밴 본능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나의 공격은 살아났다.

10라운드, 마지막 1분.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시합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승리의 여신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챔피언 벨트를 지켜냈다. 이 시합을 통해 4개 기구 통합 챔피언에 올랐고, 총 6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최초로 따내는 기록을 세웠다.

살면서 다가오는 순간들은, 그것이 좋든 싫든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또 떠나보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왜 하필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왜 하필 무책임한 엄마, 능력 없는 아빠를 만났을까? 이런 것들은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너무 억울하기 때문에, 너무 아프고 힘들기 때문에’라는 말도 이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주저앉고 싶을 때 한 발짝만 더 나가고, 한 번만 더 손을 뻗으면 권투는 이긴다. 아마 삶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도전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건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라는 것. 계속해서 땀을 흘리는 한 나의 드라마도 계속된다는 것. 어떤 순간이든 도전함으로써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자료 제공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 다산책방 

김주희 선수는 1986년생으로 16살이 되던 해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여자 프로 복서로 데뷔했습니다. 2004년 IFBA 챔피언 벨트를 따내며 만 18세에 최연소 여자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며, 2006년 엄지발가락 뼈를 잘라내는 수술로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위기를 맞았지만 악착같이 재활 훈련에 임해 WBA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며 재기했습니다. 2010년 9월 WIBA·WIBF·GBU·WBF 4개 기구 통합 세계 챔피언에 오르며 최초로 6개 기구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저서로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가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윤효간, 음악 접하기 어려운 지역 다니며 1,000회 공연

산골 분교, 군부대, 소록도 병원, 캄보디아, 중국….
평소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곳으로 직접 피아노를 들고 찾아가 연주하는 음악인이 있다.
피아니스트이자 대중음악 편곡자인 윤효간씨다.
2005년 <피아노와 이빨>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그의 콘서트 팀은 지난 5월 1,000회째 공연을 끝냈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공연 중이다.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픈 사람, 피아니스트 윤효간씨를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저희 공연은 쉽습니다.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어요.”

지난 7월 1일 국립극장에선 피아니스트 윤효간의 피아노 콘서트 ‘피아노와 이빨’ 특별 공연이 있었다. 첫 곡으로 그가 편곡한 비틀즈의 ‘헤이 주드 Hey Jude’가 울려 퍼졌다.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적인 그만의 연주와 노래에 관객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첫 곡이 끝났을 때였다. 조심조심 공연 시간에 늦은 관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어서 오세요. 차가 많이 막히죠? 근데 앞부분을 못 보셨네요.”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헤이 주드’의 클라이맥스를 다시 한 번 열창했다. 이후로도 입장하는 관객들,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고, 또다시 첫 곡을 열창했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곡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 <오빠 생각>을 비롯해 팝송 퀸의 <We are the champion> 등 우리에게 친숙한 곡들을 색다르게 편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십 대부터 어르신들까지 관객층도 다양했다. 피아노 공연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주고, 관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사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음악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피아니스트. 그러기 위해서 그는 피아노를 무대에서 내렸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1년에 200회 이상의 공연을 하고, 2007년부터는 해외로 발길을 돌렸다. 전 세계 아이들과 교민들을 위한 피아노 공연은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70일간 미국 40개 도시 일주,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중국의 쓰촨성까지 그동안 함께한 관객만 100만 명에 이른다. 화려한 조명과 스피커 대신 초원이, 오지 마을이, 학교 운동장이 최고의 무대가 되어준 것이다.

<피아노와 이빨>이란 콘서트를 처음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마흔 정도 되니까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더라고요. 나도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피아노와 이빨’에 올인하게 되었어요.

피아노 공연을 하시면서 제일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인지요.

우선 공연장에 오기 힘든 관객들을 직접 찾아갔어요. 예를 들면 군부대 같은 곳은 직접 가야 하잖아요. 그곳에선 베토벤과 비틀즈가 중요한 게 아니더라구요. 함께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음악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게 전달할까 고민했죠. 음악적 변화를 준다든지 초대 손님을 초청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이빨’이 제 고향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꾸준히 공연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사실 힘든 점도 많았어요. 무대, 관객, 자본도 있어야 하고 무명의 피아니스트 공연에 과연 누가 올까 싶기도 했고요. 근데 저는 하늘의 힘을 믿어요. 사람이 진정 용기 있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으면 조금씩 이뤄진다는 걸요. 제일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겠죠. 그렇게 1,000회를 달려온 거고요. 다행히도 관객 분들께서 입소문을 내주시더라고요.(웃음) 공연을 계속하다 보니까 어떤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도 느껴져요. 보시다시피 조금 늦게 오는 분들을 위해 다시 연주해 준다던지, 선물 주는 코너도 마련하고요. 먼저 다가가고 찾아가려고 하니까, 좀 착하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지진 피해가 컸던 중국 쓰촨성의 한 학교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지진으로 25만 명이 죽었어요. 그때 살아남은 아이들이죠. 그곳에서 피아노 공연이 열린 건 처음이었다고 해요. 공연이 끝나고 피아노, 세탁기, 냉장고를 기부했는데, 그 아이들이 저한테 수화로 노래 선물을 하는 거예요. 참 감동이었어요. 사람들이 좋은 일 한다고 하는데 막상 가 보면 그 반대예요. 오히려 제가 더 많은 걸 받고 더 많은 감동을 얻고 더 착해져서 오거든요. 그래서 이 일을 멈추지 않는 거 같아요. 조금 더 절실한 곳에 조금 더 깊숙이 가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그가 처음 피아노를 배운 건 7살 때라 한다. 60년대 당시 ‘유엔팔각성냥’으로 유명했던 기업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울 만큼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다 열 살 무렵 서울에서 열린 콩쿠르에 참가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20명의 아이들이 마치 한 사람이 치듯 피아노 치는 자세부터 방법까지 똑같았던 것.

그때부터 그에겐 질문이 하나 생겼다. ‘크게 치라는 데서 작게 치고, 작게 치라는 데서 크게 치면 안 될까?’ 선생님이 가르쳐준 방식에서 벗어나 거꾸로 연주해 보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피아노 선생님과 부모님과의 갈등도 점점 커져갔다. 결국 고3 때 집을 나왔고, 이후로 그는 현장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클럽에서 밴드 키보드를 맡았고, 가수 김현식, 김광석, 이미자 등의 공연과 앨범에 1,000회가 넘게 세션으로도 참여했다. 스물일곱엔 박춘석 악단에 최연소로 들어가 아코디언을 배웠고, 오케스트라 편곡을 익히기 위해 KBS 관현악단에 들어가 키보드 연주자로도 활동한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편곡가, 아코디어니스트, 가수, 음반 제작자…. 음악인으로서 치열했던 그의 삶은 피아노 연주로 녹아내렸고, ‘피아노와 이빨’의 장기 공연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2009년엔 꿈의 무대인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가리켜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돌아보니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한 답이 꼭 피아노에만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가 자신을 고졸 학력 음악가라 소개하면서, 매 공연마다 학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인생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다.

누구나 잘 치는 베토벤이 아닌 나만의 베토벤이 되라고 말씀하셨지요.

피아노를 어떻게 쳐야 잘하는 것인지 묻는 사람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자기 스스로가 베토벤이 돼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해요. 소리에는 철학과 삶이 들어 있어야 하고, 잘하는 것보다 감동이 있어야 하거든요. 저는 길 위에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나와 다른 환경, 사상, 철학을 가진 상대방의 눈을 보고 대화하고 같은 호흡을 하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교나 책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길을 가다 어떤 아이에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거든요. 피아노 소리도 높고 낮은 여러 화음을 낼 때 아름다워지는데, 우리는 평생 한 가지 소리만 내는 건 아닌가 싶어요. 저 같은 방법으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요.

공연을 다니며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셨나요.

부모님들이 공연을 보고 아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씀을 하실 때예요. 말도 안 듣고 가출도 많이 하고 너무나 가슴 아팠는데,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거예요. 똑같은 방법으로 학업 경쟁을 하게 하기보다 다른 걸 인정하는 게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지 않을까 싶어요. 차를 좋아하면 카센터에서 배우게 하고, 공연을 좋아하면 포스터 붙이는 거부터 먼저 해야 된다는 걸, 알려주면 돼요.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셨을 거 같아요.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해졌죠. 옛날엔 내 것 먼저 갖고 싶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챙겨주고 싶으니까요. 연주자가 공연할 때는 수많은 스태프들의 수고와 노고가 있는 거잖아요. 그게 화합이 되었을 때 피아노 건반의 화음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고 아름다운 가치가 나오는 것이지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배려를 안 하면 결코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없어요. 이제는 공연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공익적이고 서로가 사랑할 수 있는 공감과 여유를 만들까 많은 고민을 하게 돼요. 그러면서 이제 ‘피아노와 이빨’이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공연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의 것이구나, 그분들에게 돌려드리자, 그런 마음이 가장 크죠.

윤효간의 콘서트 ‘피아노와 이빨’의 가장 큰 바람은 무엇인가요?

사람에 대한 존경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요. 정의, 사랑, 박애주의, 인본주의, 친구, 우정….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이 사회에 많이 퍼트리고 싶어요. 피아노를 통해서. 또 90살이 되어서도 이 투어를 하고 싶어요. 그땐 저도 더 멋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웃음)

1000회가 넘는 공연을 통해 관객들을 만났으며 ‘나의 음악적 스승은 길에서 만난 보통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사람들이 건네는 따듯한 눈빛을 통해 가장 큰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게 모두가 따듯한 눈빛을 주고받는 세상이 될 때까지 그의 열창과 연주는 계속될 것이다. 공연 시간에 늦게 들어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이미 부른 첫 곡을 다시 부르고, 또 부르는 그 마음으로….

피아니스트 윤효간님은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동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하여, 가수 김현식, 김광석, 이미자 등의 세션으로도 참여했으며, KBS 관현악단에서 키보드 연주자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쌓습니다. <기다림도 사랑이야> 동요앨범 <풍금이 있는 교실> 등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피아노 콘서트 ‘피아노와 이빨’이란 이름으로 1000회 공연을 기록했습니다. 2009년 4월엔 아름다운 재단으로부터 ‘나눔의 연주가’로 선정되었으며 현재 아름다운 가게 홍보대사,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국제홍보위원, 광주시 문화예술홍보대사, 한국미술협회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늘 곁에 있어 자칫 잊고 있던 ‘베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내 친구 영애를 찾는 것입니다

윤경선 56세. 미국 오리건주 힐스보로 거주

39년 전, 그러니까 1972년 여고 2학년 때 난 친구들과 헤어졌다. 이름은 최영애, 이해숙이다. 특히 영애와의 소중했던 우정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여고 시절 나는 반항기 어린 사춘기를 보냈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중학교만 나오고 그만두라는 것을, 1년 동안 전화국 급사 생활을 하다 마음에 맺혀 다시 고등학교 시험을 쳐서 붙으니까 할 수 없이 여고를 보내주셨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와 매사에 부딪쳤고, 급기야 가출도 여러 번 했다.

그때 나를 따듯하게 챙겨준 친구가 영애였다. 그 아이 역시 형편이 어려웠지만 자기 주머니를 털어 먹을 것을 챙겨주고,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었다. 성격도 깐깐하고 말썽만 피우는 나를, 보통은 멀리하려 했지만 영애는 달랐다.

그러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정년퇴직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부모님은 먹고살기 위해 큰 집을 줄여가며 이사를 여러 번 다니셨다. 이사를 다니다 보니 학교도 달라지고 어느 순간 서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26살에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삶이 힘들 때면 영애 생각이 나고, 해가 지날수록 영애에 대한 그리움은 오히려 더해갔다. 미국으로 들어온 뒤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가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언젠가 영애가 어린애를 업고 우리 집으로 날 찾아왔는데 엄마가 그냥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내가 가출을 하면 항상 영애가 보살펴주었으니, 엄마는 내가 영애를 만나면 다시 나쁜 길로 빠질까 봐 걱정을 하신 것이다. 여러 번 이사를 해서 틀림없이 물어물어 왔을 텐데. 그냥 돌아선 영애의 마음이 어땠을까. 한 번만 더 날 찾아주었더라면….

이영미 작. <내 안의 소리>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120×120cm. 2011.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온다.

“영애야, 정말 미안해. 그리고 많이 많이 보고 싶다. 친구야, 내가 널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우리의 우정을 회복해서 두 번 다시 널 아프게 안 할 거야.”

그동안 영애를 찾으려고 영애가 다닌 여고 카페지기에게 사정도 해보고, 우리 학교가 있었던 서울 영등포 어디엔가 살고 있을 것 같아서 국회의원, 각 방송국에도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편지를 보내보기도 했다. 몇 달 전에는 한국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 몇 년을 두고 애원을 해서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는 커다랗게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세계 일주 여행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소망은 오로지 영애를 찾는 것뿐이다. 영애의 목소리를 한 번만 들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에 살더라도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더 늙기 전에 꼬옥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드린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친구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정신을 차리려고 한다. 우린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될 거라 믿는다.

 

우리들의 꽃다웠던 열아홉 살

이상미 25세. 직장인.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나의 베스트 프렌드 은정이!! 중1 때, 14살 소녀 둘은 학교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또 다른 친구 동연이와 함께 우리는 삼총사처럼 늘 붙어 다녔다.

고등학교는 달리 갔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만났다. 조용하지만 웃을 때 덧니가 드러나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은정이. 은정이는 자기 집에 자주 초대해서 수준급 실력의 계란말이와 멸치볶음 등을 만들어주었다. 한번은 은정이의 집 가족사진에 은정이 아버지와 오빠 외에는 없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은정이가 10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후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나이에 맞지 않게 요리도 잘하고 굉장히 성숙한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정이는 늘 밝게 웃을 줄 아는 애였고 글씨도 잘 써서 해마다 서기를 도맡아 했다. 나는 늘 글씨를 잘 쓰는 은정이가 부러웠었다.

고등학교 때 은정이는 미용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내 머리도 수준급으로 잘라주었다. 나는 어떤 고민도 은정이에겐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내 편이 돼주었다. 남들이 오해를 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며 나를 믿어주었다.

그러다 고3이 되던 해 2005년 어느 날, 그날도 우린 셋이 만났다. 은정이는 얼마 전 밀가루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나와 동연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다만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말에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그날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그게 우리 셋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보름 후 은정이가 갑자기 쓰러졌고, 결국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그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는 이틀 후에야 들었다. 뇌에 수술해도 소용없는 불치병이 생겼다 했다.

이영미 작. <꽃마중>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120×120cm. 2011.

 

19살, 너무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내 친구, 은정이.

은정이의 뼈는 벽제의 한 납골당에 안치되었고 난 은정이의 가장 친한 친구란 이름으로 그녀의 영정 사진을 들고 말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쓴웃음을 띤 채 나는 담담히 걸어갔다. 아직 열기가 남은 뜨거운 은정이의 뼛가루를 뿌릴 때에도 은정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건강하던 애가… 어떻게… 아니겠지… 이 뼛가루의 주인공은 은정이가 아닐 거야, 그렇고말고.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다 스쳐 지나갔다.

그해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제발 꿈속에라도 한 번만 나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잠들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은정이에게 못 해준 것이 너무 많아 아직도 가슴이 쓰리고 아프고 아쉽다. 늘 받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뭔가 해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더 이상 해줄 수가 없다.

몇 개월 전에는 은정이를 안치한 납골당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계절별로 은정이가 좋아했던 꽃도 사가지고 가고, 기일이 되면 편지를 써서 납골당 편지함에 넣는다. 이제는 슬픔보다는 은정이를 만난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간다. 힘든 일, 좋은 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다 들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은정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을 한다.

은정아, 비록 6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학창 시절은 네가 있어서 참 즐거웠어! 은정아, 언젠가 만나면 그동안 못 해줬던 것 다 해줄게. 은정아!

 

 

하늘이 너를 친구로 보냈다

내 삶의 등대가 되어주라고

임왕규 55세. 자영업.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1977년 봄.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는 교정의 서클 룸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 우리는 독서와 토론, 여행과 만남을 통해 운동권의 중심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갔다. 친구는 포용력과 즐거움으로 사람을 모을 줄 알았고 열정과 헌신으로 일을 만들어갔다.

용기 부족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나를 친구는 말없이 지켜보면서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3학년 1학기, 친구는 민주 쟁취를 외치며 데모를 주동하던 중 긴급조치로 구속되고 말았다.

친구가 떠난 교정에서 방황하던 나는 휴학을 하고 군 입대를 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나는 최전방 산골짜기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쯤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 부대에 배치되어 왔다. 우리 인연이 보통은 넘는다는 걸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이 면회 오시면 함께 나가고, 주말이면 라면과 막걸리로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제대 후 복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했고, 친구는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인천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

1987년 6월 여름, 넥타이를 맨 나는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깃발을 높이 쳐든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 중에 친구의 모습이 눈에 확 튀었다. 빵과 음료수를 사주며 몸조심하라 말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용인 수지에 터전을 잡고 살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안 학교 설립과 아이들 입학을 위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하였다.

어떻게 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참 우연치고는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말, 나는 23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막막하고 암담한 마음에 집 뒤의 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친구도 내 소식을 알고 있었다. 친구가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할 거니?”

나는 사업 준비를 위해 컴퓨터와 중국어를 배워볼까 생각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친구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왔으니, 이참에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세상 이치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며 마음수련을 권했다. “마음수련! 그거 내 동생이랑 누나가 수없이 권했던 건데, 너도 그걸 했니?” 하고 물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와 둘이 수련원에 있을 때였다. 수련원에 처음 오신 한 분이 둘이 너무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긴 세월 함께하다 보니 친구도 닮는가 보다.

친구와 나는 처음부터 확 가까워진 사이는 아니다. 대학에서 만나 함께 정의를 외쳤고, 군 생활의 어려움도 같이 이겨냈고, 또 이웃으로 한동네 살면서, 마음수련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나누며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이 하늘이 우리에게 준 조건이었다.

멀어지려고 하면 뭔가가 붙들어 매듯이, 그 인연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갈 길 몰라 헤맬 때마다 곁에서 나를 격려해 주고 안내해 준 친구. 내 삶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준 그 친구가 있었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고 일어나 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고맙다. 친구야! 네가 마음수련 8과정을 이수하던 날 축하의 메시지로 보낸 글 기억하냐? 내 마음 지금도 그대로다.

‘젊은 시절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어 민주를 쟁취했던 친구가

10년 정진 끝에 우주로 완성을 이루었네

회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절박한 시절

참의 길로 안내해 나를 살려준 친구야!

너 나를 갖고 30년 함께했던 우리가

마침내 너 나 없이 하나가 되었구나

이제 세상에 나서, 세상일 하며

바람처럼 물처럼 그냥 그렇게 영원히

하나로 살아보자’

이영미 작. <커피 작업실>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70×70cm. 2011.

 

늘 곁에 있어 자칫 잊고 있던 ‘베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친구가 있기에

이윤아 32세. 물리치료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고등학교 1학년 때 알게 된 내 친구 이현승! 체구도 작고, 산만하고, 수업 시간에 매일 졸던 아이. 오지랖이 넓어 작은 고구마 몇 개라도 쪄오면 반 친구들 모두에게 나누어줄 정도로 정이 많은 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힘든 일을 겪으며 중학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진학한지라 까칠함이 몸에 배어 있었죠. 제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해 친구들이 노트를 빌려달라고 해도 싫다고 거절하고, 설사 빌려주더라도 구겨지거나 낙서가 되었거나 하면 노발대발 성질을 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친구들과 함께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반 친구들도 저를 무척 싫어했죠.

하지만 현승이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윤아랑 놀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항상 현승이의 대답은 같았죠. “윤아 좋은 애야. 그러지 말고 너희도 잘 봐봐. 정말 좋은 애야.”

그렇게 믿어주고 다가와 준 현승이 덕분에 저에게도 친구들이 몇몇 생겼고 2학년에 올라가며 반이 나뉘었을 땐 교실 뒤에 서서 부둥켜안고 울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이영미 작. <나들이>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45×45cm. 2011.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현승이에게 의지하며 보내고,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을 하고 졸업을 한 후에도 서로 연락하고 가끔 만나면서 우정을 쌓아갔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우린 마음이 잘 맞아서 오늘은 현승이한테 전화를 해야지, 하면 현승이한테서 전화가 오고, 내가 괜스레 기분이 좋아 전화를 하면 현승이도 오늘은 자기도 그냥 기분이 좋다며 수다를 떨고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인생에 정말 힘든 고비가 찾아왔었어요. 모두와의 연락을 끊고 은둔 생활을 할 만큼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현승이로부터 장문의 메일이 왔고, 저는 그 메일을 읽으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 생각하고 내가 의지할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생각했는데 현승이는 그저 그렇게 항상 제 곁에 있었던 겁니다. 메일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온 마음으로 날 사랑해주는 친구가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좌절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었고, 힘을 낼 수 있었고, 슬플 땐 펑펑 울 수 있었답니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존재, 그래서 가장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내 친구….

친구란 하나의 영혼을 가진 두 개의 신체라는 말이 있더군요. 현승이랑 저는 아마도 그런 하늘이 내린 친구인가 봅니다. 이런 친구가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의정부에서 화장품 장사하는

최영옥이가 내 친구라오

인영순 73세. 대전시 대덕구 연축동

내 나이 40대 중반이 되었을 때, 한순간에 가정 형편이 뒤집어졌다. 차라리 재산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있다가 없어지니 너무나 창피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의정부로 올라갔다. 의정부에는 미군이 많이 살고 있어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의정부에서 내 평생의 은인이자 더없는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세 든 집의 주인이었고, 나보다 12살이나 어렸다. 이름은 ‘최영옥’.

처음 만난 내가 뭐가 좋다고 친자매처럼 여기며 보살펴주었다. 김치를 담그면 나눠주고 맛있는 음식을 하면 꼭 불렀다. 내가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고 옷을 살 때면 내 것도 함께 사주었다.

나는 영옥이가 일하는 화장품 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성격상 물건을 팔았다 해도 값을 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결국 외상값이 쌓이고 쌓여 200만 원이나 되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약 2000만 원 정도를 빚진 셈이다.

반면 영옥이는 인상 좋고 체격 좋고 성격도 화끈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받을 때는 확실히 받으면서도 또 남을 도와줄 때는 확실히 도와주었다. 만 원을 벌면 삼천 원은 상대를 위해 쓰는 식이었다. 그렇게 확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영옥이가 부러웠다. 하지만 영옥이는 오히려 무슨 말이든 잘 받아들이는 내 성격이 좋다고 했다.

영옥이는 느리고 더딘 나를 보호자처럼 챙겨주었다. 장사도 가르쳐주고, 화장품 값도 같이 받으러 가주었지만 결국 나는 장사에 소질이 없다 싶어 6년을 하고 그만두었다. 그 후에도 공장, 커튼 가게, 식당 일 등 많은 일을 해봤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늘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영옥이는 늘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다. 자기 돈이 있으면 자기 돈을, 없으면 빚을 얻어서라도 꿔주었다. 간혹 내가 이자를 얼른 못 내면 대신 내주기도 했다. 한두 번 해주기도 어려운데 몇 십 년을 그렇게 한결같이 해주었다. 고맙다고 하면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언니가 잘사는 것만 보면 원이 없겠다”고 하여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영미 작. <커피 작업실>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45×45cm. 2011.

그렇게 의지하며 25년을 넘게 한동네에서 살았다. 만약 영옥이가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시절, 타지에 나가 크게 낙심하며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옥이를 만났기에 버틸 수 있었고 살아나갈 힘을 얻었다.

지금은 아이들을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이제는 영옥이 생일이면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돈도 챙겨줄 수 있으니, 영옥이의 소원을 이뤄준 셈이다.

화장품 장사로 성공해, 지금도 의정부에서 장사를 하는 영옥이와는 늘 연락을 한다. 전화만 하면 놀러 오라고 성화다. 지금도 자나 깨나 영옥이가 생각나고 보고 싶다.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인 영옥이를 위해서 늘 기도한다. 지금은 참 행복하다. 아이들도 잘 자랐고,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있으니,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남은 여생 같은 동네에서 오가며 그 친구랑 함께 보내고 싶다는 소망도 가져본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요즘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힘겨운 세상살이에 부딪친 누군가가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이 되는, 그런 친구가 되어주라고.

 

나의 사랑하는 명희씨

곽형두 56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왜 당신은 어려울 때 도와주고 속내를 터놓는 진정한 친구가 없어요?”

아내가 몇 차례 나에게 던진 말이다. 사실이다. 속마음을 꼭꼭 숨겨 놓는 ‘포커페이스’는 아니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인생이란 엄연한 현실 앞에서 버팀목이 돼 줄 수 있는 친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오십을 넘어서야 언제나 내 옆에 최고의 프렌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랑하는 나의 아내 명희씨다.

젊은 시절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 오십이 넘어 회사를 그만두며,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상황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매달 나가는 대출금 이자, 들어오는 돈은 없고 점점 쪼들려갔다. 처음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중산층의 몰락이 이런 거구나 실감했다. 마음의 병으로 건강 상태도 안 좋아졌다. 자격지심 때문에 친구들과의 만남도 꺼리며 집에만 있는 나에게, 아내는 나의 건강을 챙겨주며 위로해 주었다. 다들 돌아서도 아내만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곱게 자라 직장 생활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아내가, 일을 시작하겠다고 나섰다. 지방으로 일하러 떠나는 아내를 배웅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혼기념일에 아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 축하! 앞으로 미안하단 말 하지 마요. 열심히 살아서 앞으로 잘 살면 되지요. 함께 있지 못해 안타까워요. 내 생각 해서라도 잘 챙겨 먹고 건강한 모습 보여줘요.”

아내는 부족함 없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장남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님 모시랴, 조상님 제사 지내느라 약한 몸으로 불평불만 없이 고생했다. 넉넉한 형편에도 결혼 생활 25년 동안 부부끼리 여행 한번 제대로 다녀온 적이 없었다. 여름휴가 때면 당연히 ‘고향 앞으로’였다. 그리고 시댁에 가서 살림하며 휴가를 보냈다. 언제나 부모님 생각만 하느라 아내의 입장은 등한시해왔다. 잘나가는 회사원일 때는 모임도 많고 아내를 다정히 챙겨줄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불평한 적도 없었다.

이영미 작. <내 안의 소리>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45×45cm. 2011.

어느 결혼식 주례사가 떠오른다.

‘결혼은 우정의 시작이다. 언제든지 편이 되어주고, 조건 없이 상대 말을 경청해주는 진실한 친구가 돼야 한다. 서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 씩씩한 가족, 따스한 가족이 되어라!’

나에게 먼저 그런 친구가 되어준 것이 아내였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믿어준 아내가 있었기에, 그동안의 행복이 있었다는 것을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겪고서야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가장 추운 겨울 속으로 들어와 있다. 지금의 삶이 비록 고단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기에, 나도 움츠려만 있지 않고 뭐든지 해보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게, 아내에게도 더 잘하려고 한다. 집안 일 한번 해보지 않았지만, 빨래도 하고 아이들 밥도 챙겨준다. 우리 가족이 빨리 차가운 겨울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더욱 눈부신 봄을 맞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명희씨. 쑥스러워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이다.

“여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