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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국인 입양아의 대모, 현덕김 스코글룬드 박사

편집부

스칸디나비아반도 동남부, 대서양을 바라보며 자리한 아름다운 나라. 노벨상으로도 유명한 스웨덴에 한국인 정신과 의사 현덕 김 스코글룬드(74) 박사가 살고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 입양아들을 상담해온 그녀는 입양아의 대모라고도 불리지요.

스웨덴에는 약 4만5천여 명의 해외 입양아가 있는데, 그중 만여 명이 한국인입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시작된 해외 입양은, 1970~80년대에는  1년에 800명 이상으로 늘었고, 당시 김현덕 박사는 1962년 스웨덴 의사와 결혼해 스웨덴에 정착한 유일한 한국인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소아정신과를 찾는 해외 입양아들이 보통 아이들의 4배에 달한다 합니다. 그만큼 많은 상처를 안고 있지요. 버려졌다는 공포, 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외모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느끼는 이질감. 이 모든 것들은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가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양부모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김현덕 박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년이고, 2년이고, 마음속 매듭이 풀릴 때까지 상담해 주었습니다.

당시 스웨덴 언론은 한국을 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소개했답니다. 그러한 광고를 보며 입양아들은 부끄러워했습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 김현덕 박사는 입양 가족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정서와 가치관을 가르칩니다.

“자부심을 가지거라. 너희는 열등하지 않단다. 너희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아이들이야.”

1987년부터는 입양아들을 위한 한국 요리 강좌를 열어, 불고기, 김치, 잡채 등 한국 요리를 가르쳤습니다. 입양아들은 점차 자신감을 회복해갔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 사진_ 이동준  blog.naver.com/percian78

어느 날입니다. 뒤뜰에서 한국 입양아가 코가 납작하다는 놀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오히려 되받아쳤습니다. “한국인은 원래 코가 납작해, 너희는 그것도 몰랐단 말이니?” 소년을 놀리려던 아이들은 그만 멍해져 버렸습니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자신에 대한 생각은 달라집니다.

‘나는 한국인인가, 스웨덴인인가?’ 정체성에 대해 평생 고민하는 입양아들에게 김현덕 박사는 뿌리를 찾아볼 것을 권합니다. 설령 생부, 생모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을 봐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퇴임했지만 김현덕 박사의 상담실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내면 깊숙이 억압되어 있던 상처는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가 있으니까요. 김현덕 박사 역시 그들의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함께해주는 것이 자기의 역할이라 믿습니다. 시집 장가 보낸 아들딸처럼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늘 걱정하고, 큰 품으로 안아주는 그녀를, 한국인 입양아들은 또 한 분의 어머니라 말합니다.

해외 입양의 상처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직도 해마다 50여 명의 아이들이 스웨덴으로 입양되고 있다는군요. 다행히 스웨덴 부모들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유일한 존재며, 부모란 양부모건 친부모건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아이들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한없이 기다려주는 양부모들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처럼, 자신도 “기력을 다할 때까지 누군가를 위해서 힘이 되고 싶다”는 김현덕 박사.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30여 년간 한결같이 한국인 입양아의 어머니가 되어준 김현덕 박사는 한국요리강좌, 한국의 미혼모들을 돕는 모임 스웨덴 민들레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9년 <아름다운 인연_스웨덴이 기른 우리 아이들>(사람과 책)을 펴냈습니다.

“제가 돌봐줄 수 있는 승가원 동생들이 있어서 행복해요”

“제가 돌봐줄 수 있는 승가원 동생들이 있어서 행복해요”

서울 청량고등학교 3학년 이영덕(19)군

척추측만이형성증이란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이영덕군.

6살 때부터 열 번이 넘는 대수술을 받으면서 세상이 자신에게 허락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계속 누워만 있고, 견디기 힘든 고통에,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 세상에 도움도 되지 않는데 왜 태어났나…. 온통 부정적인 마음뿐이었다지요.  그러다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한 봉사 활동, 승가원에서 영덕군은 자신보다 더 아픈 동생들을 만납니다. 그냥 놀아주고 숙제를 봐주고 밥을 먹여주었을 뿐인데도 “형 힘들었지?” 하면서 환한 얼굴로 어깨를 주물러주는 착한 동생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게 기뻤답니다.

이젠 영덕군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돌봐줄 동생들이 있으니까요.

“엄마, 고맙습니다” “사랑한다, 며늘아”

필리핀에서 온 며느리 미치 마글란트(25)씨와 시어머니 우영희(56)씨

미치 마글란트씨는 3년 전, 필리핀으로 유학 온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처음엔 결혼을 반대했던 시어머니가 많이 무서웠답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자 시어머니는 끔찍하게 며느리를 아껴주셨습니다. 한국 음식이 매워서 못 먹는 것 같으면 안 매운 음식도 만들어주시고, 회사에서 늦게 올 것 같으면 저녁 반찬도 챙겨주시며,  한국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신다는군요. 또 필리핀의 친정엄마가 눈 수술을 하실 때도 도와주시고, 필리핀 집이 너무 더웠는데 집도 새롭게 단장을 해주셨다고 자랑을 합니다.

며느리가 무얼 바라는지 무얼 어려워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상에서 가장 잘 아시는 시어머니. 미치 마글란트씨는 어떻게 하면 나도 시어머니께 잘할까 매일매일 고민한답니다.

어깨동무 정도는 매일 해요.

사진 이종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우리, ‘고맙다, 내 손을 잡아줘서.’

사진 신미식

저 등치에 매달려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겄냐!

한 식군데 도와줘야지.

사진 김선규

우리는 한 뿌리여, 그걸 잊으면 안 되느니라.

사진 김선규

강아지랑 고양이랑 누가 앙숙이래?

사진 이민호

각국의 청소년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한반도를.

아! 울릉도와 독도는 손을 잡고 있네요.

사진 김선규

모든 존재는 우주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형제다

과학적으로 따져 보는 우리가 하나인 이유

예수님은 꼭 피가 섞여야 형제자매가 아니라누구든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형제자매라고 말씀하셨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원수이고 악인일지라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우리 모두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또한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몸의 뼈, 눈, 머리카락, 살, 근육, 위, 장, 콩팥 등 우리 몸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석해보자. 몸을 구성하는 장기나 조직을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면 지금까지 밝혀진 화학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 몸을 이루는 단백질을 살펴보면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형태다. 아미노산은 화학원소인 탄소, 수소, 질소, 산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육신이 죽으면 화장을 하건 땅에 묻건 썩어서 없어진다. 몸을 이루기 위해 연결되어 있던 화학원소들은 공기, 땅, 물을 통해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흙에서 태어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육신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서 다른 형태로 변한다. 자연으로 돌아갔던 화학원소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식물의 비료 성분으로 변할 수도 있고, 여러 화학반응을 거쳐 새로운 분자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그 분자 중에서 일부는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의 재료로 바뀔 수도 있다. 그 음식물을 먹고 영양분을 섭취한 산모는 뱃속에서 아이를 성장시킨다. 그 영양분으로 아이는 세포 성장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 아이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언젠가는 다시 각종 화학원소나 화학분자의 형태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모습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얼굴은 조금씩 다르지만, 구성 요소는 똑같은 것이다. 그 구성 요소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나온 화학원소로 표현이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형제자매인 이유다. 이렇게 우주 만물은 모두 서로 연결이 돼 있으며 우주에서 외따로 떨어진 생명체는 없다. 모든 존재는 우주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강상욱 <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의 저자

황태 구이

“황태 보냈다, 좋은 거니께 구워 먹어”

외할머니께서는 고향 떠나 객지에 사는 손자에게 종종 택배를 보내십니다. “황태랑 야채 좀 보냈다, 몸에 좋은 거니께 구워 먹어.” “어떻게 하는 건데요?”

“별거 아녀. 우선 머리랑 꼬리를 떼고 막 두들겨.
예전에는 방맹이로 두들겼는디 그게 없으면 칼 손잡이 뒤로 혀봐.
그담에 물에 살짝 담갔다가 물기를 빼고 살짝 초벌로 구워.
그걸 양념에 재우는디 양념 만드는 거는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설탕 넣고
깨, 파, 마늘, 술도 한 숟갈 넣으면 되여. 양념이 배일 정도만 재우면 되니께 뭐 그리 오래는 아니고.
그담에 참기름이나 들기름 두르고 다시 구우면 된다, 잘 알어들었제?”

할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황태는 해독에 좋은 대표적인 식품으로 독을 빼내는 데는 이만 한 게 없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북엇국을 먹는 것도 황태가 주독을 풀고 소화기 기능을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북엇국의 시원한 맛과는 다르게 황태구이의 양념은 황태의 비린 맛도 잡아주면서 매콤하고 달콤한 맛이 적절하게 섞여 입맛을 돌게 합니다. 질감도 부드러워 오래 씹다 보면 황태 고유의 구수한 끝 맛을 느낄 수 있지요. 외할머니 표 황태구이의 깊은 맛을 어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요, 직접 만들어 보니 외손자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새삼 느껴져 한 조각 한 조각 아껴 먹고 있답니다.

1. 불린 황태의 물기를 꼭 짜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초벌구이할 때 기름이 튀어 위험합니다. 2. 황태가 도톰할수록 양념에 충분히 재워주세요. 양념이 속까지 배어야 맛있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밸런스 스틱 Balance Stick

판청쫑(Feng, Cheng-Tsung 范承宗), 쩡위팅(Cheng, Yu-Ting 鄭宇庭) _대만 NTUST 산업디자인과 재학 중

이름은?
Balance Stick(밸런스 스틱). 어느 장소에서든지 30~40도의 경사에서도 스스로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지팡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아이디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것 같다. 종종 버스에서 어르신들이 지팡이를 사용하시는 걸 보는데 지갑을 열어서 버스 요금을 낼 때 한 손은 항상 지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요금을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왜 지팡이는 스스로 서 있지 못할까? 넘어지지 않게 한번 해보자.’ 거기서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장에 가보았더니 이미 네 개의 발이 달려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지팡이가 나와 있었다. 우리는 하나를 구입해서 실제로 걸어 다녀 보았다. 그런데 잘못하다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더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다가 네 개의 발을 하나로 합친 Balance Stick을 만들게 되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Balance Stick은 한마디로 오뚝이의 원리인데 무게가 아주 가벼운 재질에다 아래쪽은 둥글고 평형추가 들어 있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쓰는 것이라 가볍게 만들면서도 튼튼해야 했다.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재료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다.

주변의 반응은?
우리는 제품을 만든 후 어르신들께 시범 사용을 부탁드렸다. 어르신들은 일반적인 지팡이와는 느낌이 좀 다르지만 괜찮으니 좀 더 가벼웠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무게를 더 줄이는 것을 도전 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촉감, 크기, 색깔 같은 세세한 의견들도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개선해 나가려고 한다. 아직 상용화되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기업이나 일반인들에게서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디자인 공모전 2011 iF Concept Award와 2010 4th Uneec Applied Design Award에서 수상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

6년간의 작업 끝에 자랑스러운 한국 만화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신비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흔하디흔한 동물, 암탉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예상을 뒤엎고 개봉 6주 만에 2백만 관객을 넘기며 영화계를 놀라게 했지요.
아이유가 부른 O.S.T나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를 떠나서라도 백만 부 이상 팔리고
교과서에도 실린 탄탄한 원작 스토리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엔 충분했습니다.

어두침침한 양계장에서 평생 알만 낳으며 살 운명에 처한 암탉 ‘잎싹’은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이름도 지어주는 따듯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함께 등장하는 ‘나그네’, ‘달수’, ‘초록’도 모두 잎싹이가 붙여준 이름이지요.

<마당을 나온 암탉>은 푸른 하늘 아래서 병아리를 기를 수 있는 마당의 삶을 동경하던 양계장 속 잎싹이 우여곡절 끝에 마당으로 나오고, 더 나아가 야생의 생활을 하다가 뜻밖에 청둥오리의 엄마로 살아가기까지의 고난과 역경을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준 청둥오리 부부가 족제비 ‘애꾸눈’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자 홀로 남겨진 오리 알을 품어주게 되는 잎싹. 이때부터 엄마 닭 ‘잎싹’과 아기 오리 ‘초록’의 고군분투 ‘다문화 가족’의 삶이 시작되지요. 날지도, 헤엄치지도 못하는 잎싹은 ‘닭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닭 스타일에 맞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청둥오리 초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늪으로 갑니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늪의 생활과 늪지 동물들의 따돌림을 씩씩하게 이겨내면서 아들 초록이가 잘 자라기만을 바랍니다. 초록 역시 헤엄치고 날갯짓하는 오리들의 생존의 법칙을 서서히 터득해 가면서 엄마와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 엄마랑 난 달라!” 어느덧 초록에게 암탉 엄마는 귀찮고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잎싹은 말합니다. “다른 게 어때서? 서로 달라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잎싹에게 ‘다름’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리 알을 품었던 그 순간부터, 자신과 다른 종(種)의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잎싹에게는 오직 생명을 키워내고자 하는 사랑과 헌신만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출을 감행했다가 양계장 주인에게 붙잡힌 초록은 목숨을 건 잎싹의 구출 작전으로 풀려나게 되고, 비로소 엄마의 한결같은 사랑과 희생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철들자 헤어진다 했던가요. 초록이는 자신 역시 다른 청둥오리들처럼 철새의 본성에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잎싹 역시 초록이 자유를 찾아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응원해주며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잎싹은 담담히 족제비 ‘애꾸눈’에게 향합니다. 초록의 부모를 죽인 원수, 잔인했던 천적 족제비 애꾸눈.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 잎싹은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알고, 스스로 족제비를 찾아가 말합니다. “나를 먹어. 네 새끼들이 굶지 않게….”

순간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쏟고 맙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던 한 사람, 바로 ‘엄마’ 생각이 나서이겠지요.

살다 보면 종종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꿈, 자신의 스타일,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힘든 것인지. 하지만 엄마들은 너끈히 해냅니다.

지금 내가 엄마의 품을 박차고 나와 내 인생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엄마의 그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주변의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다 그렇게 엄마의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엄마는 위대합니다.

문진정

이제 곧 고향입니다

이 제  곧  고 향 입 니 다

가을 들녘이 익어갑니다. 높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 물결이 출렁대고, 산비탈에 줄지어 선 사과가 가을 햇살에 붉게 빛나고, 마을 지붕 위에도 돌담 위에도 둥그런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어딜 가도 먹을 것 천지인 우리 고향, 이제 곧 도착합니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2리. 2005년 10월

주 인 님 , 언 제  오 실 거 예 요 ?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자식들 기다리는 부모 마음처럼 동구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졸고 있는 똘똘이…. 기다림 가득한 고향으로 성큼 달려가는데 똘똘이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객지 나간 젊은 주인님들, 빨리 와서 좀 놀아주십시오. – 똘똘이 올림’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2리. 2005년 10월

사진, 글 김선규

New York, 그곳에 엄마가 있다

전 세계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도시 1위 뉴욕! 가장 상업적인 도시이면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 뉴욕, 그곳에 나도 가고 싶었다. 드디어 밟게 된 뉴욕 땅, 그곳에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가치관도 그 어떤 모습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 나 역시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들을 따라 구석구석 걸었다. 인종도 관념도 그 어떤 형식도 뛰어넘어 하나 되게 하는 곳, 뉴욕은 엄마 품처럼 포근했다.

사진, 글 홍성훈

펜 스테이션(Penn Station)에서 나오자 맨해튼이 눈앞에 펼쳐졌다. 탁 터진 시야, 마치 큰 바둑판이 놓인 듯 블록 블록마다 서 있는 빌딩들과 형형색색의 대형 간판들은 “나는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다”라고 말하는 듯 위풍당당했다. 1524년 맨해튼 섬을 최초로 발견했던 이탈리아 항해사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는 500여 년 후의 이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뉴욕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태튼 섬의 5개 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는 뉴욕은 바로 맨해튼이다. 뉴욕시 관광의 중심지인 맨해튼은 동쪽으로 이스트강, 서쪽으로 허드슨강, 남쪽으로는 뉴욕만에 둘러싸인 긴 섬이다.

‘세계의 교차로’라 불리는 타임스스퀘어. 빌딩 외관을 도배하고 있는 화려한 광고판들은 한낮에도 불빛을 뿜어낸다. 예전에 뉴욕타임스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 타임스스퀘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다. 1899년 최초로 극장이 생기고 브로드웨이 공연 문화가 시작되면서 레스토랑, 카페, 상점이 들어서자 미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곳이 됐다. 센트럴파크는 분주한 도심에서도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나무와 호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더피스퀘어 타임스스퀘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위치에 더피스퀘어가 있다. 평범한 보행자 공간이었던 이곳은 타임스스퀘어라는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으로 변신했고, 사람들이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더피스퀘어가 생긴 후 타임스스퀘어의 보행자 수는 10년 전에 비해서 90%가 늘었다.

뉴욕은 어우러짐이 자연스러운 도시였다. 노래와 춤과 연주, 체스 등 무엇이든지 하나의 매개체만 있으면 인종 상관없이 편견 없이 함께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공유하는 그들의 모습이 멋있었다. 부러웠다.

맨해튼 동쪽 이스트빌리지로 향했다. 1950년 이후 반전과 반체제 문화의 중심지로 언더그라운드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답게, 예술성 가득한 클럽과 부담없이 들어갈 수 있는 싼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끼를 해결하고 외곽으로 나오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낫소 카운티 북쪽 포트 워싱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데이트하는 연인들, 다정히 낚시하는 모녀가 아름답다.

맨해튼 동남부 이스트빌리지 거리에서 만난 벽화는 다양한 인종이 더불어 사는 뉴욕을, 더 크게는 어머니와 같은 지구가 있어 모두가 조화로울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영화나 그림, 사진 등에 자주 등장하는 브루클린 브리지는 600여 명 인원이 1883년부터 16년간에 걸쳐 완성한 다리로, 처음 맨해튼 섬과 브루클린을 연결시킨 다리여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근처 낫소 박물관(Nassau County Museum of Art)에도 들러 보았다.
정원의 커다란 나무들은 그 역사를 자랑하고 곳곳에 자리한 조각상들이 예술의 가치를 드높이는 곳. 그중 한 조각상이 내 눈길을 끌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 ‘배려, 보살핌(Caring)’이라는 제목의 Chaim Gross 작품(1987년)으로, 2차 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 때 죽은 어린이들을 추모하며 만들었다 한다.

2011년, 훌쩍 떠난 뉴욕에서도 내 심장을 울리는 건 결국 ‘배려와 보살핌’ 이었다. 그렇다.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지고, 여러 언어, 문화, 예술이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 또한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우리가 알고 있든, 알고 있지 못하든, 변함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배려해주고 언제나 기다려주는 존재 말이다.

그 땅, 그곳에 엄마가 있었다.

고양이가 사는 법

어머니는 찰떡같이 약속해놓고, 내가 방심한 사이 옷 보따리를 싸 들고 잽싸게 진주역으로 달아났다. 낌새를 채고 역으로 갔을 때, 진주발 순천행 9시 30분 기차는 이미 떠나고 선로에는 장대 같은 빗줄기만 퍼붓고 있었다. 호우주의보가 해제되면 내 차로 함께 시골집에 가기로 한 약속을 어머니는 단박에 깨뜨린 것이다. 오로지 그놈의 고양이들 때문에.

결국 어머니 뒤를 쫓아 시골집으로 차를 몰았다.
쫓고 쫓기던 세 시간 만에 우리 모자는 피차 어이없는 표정으로 상봉하였다.

“뭐라고 왔냐? 애비 땀새 참말로 못 살것네.” “나 할매 보러 온 게 아닌디요? 까미랑 호돌이 보러 왔는디요.”

서울특별시 어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 두 마리였다. 녀석들은 동물 애호가이자 최초의 발견자인 친척의 손을 거쳐,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 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서울 출신 고양이 까미와 호돌이는 시골집에 잘 적응하였고 제법 고양이 특유의 볼륨 있는 몸매로 자랐다.

우산을 쓰고 집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비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창고 근처로 가니 뭔가 후다닥 튀어나와 밖으로 달아났다. 도둑고양이였다! 어머니가 출타한 틈을 타서 또 떠돌이 야생 고양이들이 침입하여 시골집을 접수한 것이다. 주인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냉큼 달려와 구르며 아양을 떠는 집고양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고양이들은 텃밭에 숨은 채, 제 몸의 상처를 핥으며 공포에 떨고 있을지 모른다.

“까미야! 호돌아!” 집 안팎을 헤매던 어머니가 한참 만에 고양이들을 찾았다. 그런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야생 고양이한테 해코지를 당한 모습이 역력했다. 두 눈에 눈곱이 잔뜩 끼였고 목덜미에는 상처까지 나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어도 선뜻 안기지 않고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망할 놈의 도둑고양이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나는 덫과 올가미를 떠올렸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들고양이한테 올가미는 턱도 없을 터이다. 덫이 좋겠다. 그렇다면 쥐덫처럼 가둬 잡는 식이냐 아니면 날카로운 이빨로 발목을 콱 물어 잡는 식이냐?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포한 도둑고양이를 차에 실어 강 건너 들판에 버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덫에 발목을 물린 고양이의 푸른 눈빛과 포효를 떠올리니 더럭 겁이 났다.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 잡는 기분일 거다. 아무래도 콱 물어 잡는 덫보다는 슬그머니 가두어 잡는 덫이 그나마 수월하겠다.

보복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그날 저녁 나는 우연히 창고 문틈 사이로,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들을 발견하였다. 눈에 띄는 것만 무려 세 마리. 새끼 고양이들은 내가 다가가자 잡다한 물건 사이로 꼬물꼬물 사라졌다. 까미와 호돌이 둘 다 수컷이었다. 그러니까 그놈들은 야생 고양이의 새끼들이었다. 장마철 창고의 통풍을 위해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와 몰래 새끼를 친 것이다. 나는 비정하게 창고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들은 철저하게 격리되었다. 이제 덫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야생 고양이는 영악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창고 위쪽에 있는 창문의 철그물형 방충망 한구석이 뜯겨져 있었다. 들고양이가 간밤에 창고로 들어온 흔적이었다. 어미 고양이는 창고 바깥쪽에 쌓아놓은 땔감 더미를 타고 올라, 발톱으로 방충망에 구멍을 내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밤새 제 새끼들한테 젖을 먹이고 사라졌다. 찢어진 방충망은 모성애가 남긴 증거였다. 어머니는 창고 문을 다시 열어젖혔다. 나는 새끼 고양이들이 어미 고양이 뒤를 따라 쫄랑쫄랑 창고 문을 나서는 광경을 상상하였다.

그로부터 2주일 후, 가족들과 함께 시골집에 갔다. 우리는 모처럼 마당에 평상을 펴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때 화단 옆에 숨어 이쪽을 지켜보던 낯선 얼룩무늬 고양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도둑고양이! 나는 재빨리 마당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힘껏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멩이는 도둑고양이를 살짝 비켜갔다. 그런데 도둑고양이 반응이 이상했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물러났다.

“도둑고양이가 아직도 창고에 삽니까?”

어머니는 빙긋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낡은 의자 위에 배를 깔고 있던 까미와 호돌이도 의외였다. 불안해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그냥 소 닭 보듯 도둑고양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계약 기한이 다 되었는데도, 어린 자식들을 핑계로 선뜻 방을 빼지 않는 가난한 세입자와 쓴소리 한마디 못 하고 마냥 기다리는 어벙한 집주인 같았다.

최형식

삽살개육종연구소 하지홍 교수가 들려주는 우리 삽살개 이야기

내가 삽살개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경북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목장을 하셨고 그곳에는 목장을 지키는 개들이 여럿 있었다. 넓은 목장 마당에 몰려다니던 개들은 나의 휘파람 소리에 우르르 달려오곤 했다. 그중에 삽사리도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몰랐었다. 어느새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의 토종개라는 것을.

신라 시대 왕궁에서 기르는 개였던 삽살개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동물이다. 삽살이, 삽사리로도 불리는 삽살개의 이름을 풀어보면, 살(煞)은 액운 즉 사람을 해치는 기운을 말하며, 삽(揷)은 퍼낸다, 없앤다는 뜻을 지녀, 말 그대로 악귀 쫓는 개를 뜻한다.

삽사리가 그렇게 여겨졌다는 것은 각종 조각상이나 그림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삽살개 상이나 그림을 액막이용으로 놓거나, 99칸 대가(大家)의 액막이용 동물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황희 정승은 “삽살개의 눈빛은 워낙 강해 웬만한 동물들은 눈빛만으로도 기가 꺾이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을 만하다”고 했다.

한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섬기며,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주인을 구한다는 충절과 의리에 대한 민담도 많이 전해진다. 술에 취한 주인이 산에서 잠이 들었는데 산에 불이 나자, 인근 저수지로 가서 자신의 털에 물을 묻혀와 몸으로 불을 끄고 주인을 구한 후 결국 자신은 죽었다는 ‘의구총’의 전설 또한 삽살개를 두고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삽살개는 또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도 불리며, 대단히 신령한 동물로 여겨졌다. 긴 털을 바람에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또 먼 하늘의 구름을 보고 짖으며 멀리서 올 손님을 예견하는 삽살개는 그렇게 여겨질 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전쟁에서 쓸 견피(犬皮)를 얻기 위해 일제는 매년 수십 만 마리의 토종개들을 도살했고 그 과정에서 털이 길고 부드러운 삽살개 대다수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우리 집 목장에 있던 삽사리들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탁연빈, 김화식 교수가 1960년대 멸종 위기에 놓인 삽살개 연구를 시작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어렵사리 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대학을 가고 미국 유학을 갔다 오면서 삽살개는 내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32살의 나이에 경북대 교수로 오면서, 삽살개와의 운명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4년 여름 아버지의 목장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그때 남아 있던 삽사리는 단 8마리뿐이었다. 힘없이 묶여 있는 삽사리들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아, 저 여덟 마리가 문익점의 목화 씨앗 세 알이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이미 계획하던 다른 연구가 있었지만, 나는 멸종 직전에 놓인 삽사리를 살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목장 뜰에 개들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진 삽살개를 찾아 나섰다. 시간만 나면 어김없이 개를 돌보러 달려갔다. 정성을 들인 만큼 삽사리의 수는 늘어났다. 8마리에서 30마리, 50마리…. 처음에는 똥 냄새조차 싫지 않을 정도로 삽사리들이 좋았다. 하지만 점점 많아지는 개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어떤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못했기에 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며 좌절할 때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삽살개들이 수천 년을 우리 땅에서 살아왔다 보니 어지간한 병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 삽살개와의 알 수 없는 묘한 교감이 나와 삽사리들을 단단히 엮어주는 것도 같았다.

한 번은 농장에 있는 한 친구가, “당신이 삽살개를 부리는 게 아니고 삽살개에게 당신이 선택된 것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멸종 위기의 삽살개를 구해 이름을 알리고 싶은, 학자로서의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정말 삽사리들이 나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이 있었다. 동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삽사리들도 수컷끼리 툭하면 싸운다. 어느 날 갑자기 수컷 두 마리가 으르렁대더니 싸움을 시작했다. 저러다가 둘 중 하나는 죽겠는 걸? 앞뒤 잴 것 없이 싸우고 있는 한 녀석의 배를 잡고 세게 뒤로 잡아당겼다.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엄청나게 큰 이빨이 나를 향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구멍 낼 정도로 강한 이빨을 지닌 녀석들. 당연히 크게 물리겠구나, 했는데 아프지가 않은 것이다. 눈을 뜨고 보니 내 팔뚝이 그 녀석의 이빨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었다. 이빨이 내 살갗에 닿은 순간, 자신의 주인인 걸 알아채고 멈춘 것이다. 동물들이란 자기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 법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두들 놀라워했다.

삽사리를 키우는 사람들은 “주인밖에 모르는 너무 멋있는 개”라고 말한다. 기다려! 하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개, 주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행동, 낯선 사람에게서 주인을 지켜주는 행동이 감동스러운 개, 주인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영리한 개, 순할 땐 순하지만 용맹할 때 아주 용맹한 개, 작은 개가 자기 밥그릇을 넘보면 아예 줘 버리지만, 다른 큰 개가 자기를 해코지할 때는 절대 물러남이 없는 멋진 개…. 오랫동안 삽살개를 키운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특징이다.

삽살개의 이름을 풀어보면 악귀 쫓는 개를 뜻한다. 또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도 불리며, 대단히 신령한 동물로 여겨졌다. 청룡(3살, 청삽사리), 수호(5살. 백삽사리), 복길이(6살, 황삽사리)가 포즈를 취했다. 현재 삽살개육종연구소에서는 500마리의 삽살개를 키우고 있다.

이런 삽살개는 1992년 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되었고, 1999년 100마리 분양을 시작으로 현재 3천 마리 정도를 전국적으로 기르고 있다. 사전에 개념조차 없어 사어(死語)가 될 뻔했던, 삽살개라는 단어가 이제 사전에도 당당히 등재되어 있다. 삽살개와 함께하는 세월 동안 말로 표현 못할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렇게 삽살개를 다시 찾은 것에 보람을 느낀다.

굴곡 많았던 시대의 아픔 속에서 힘없이 사라져갈 뻔했던 삽살개가, 오랜 역사를 우리와 함께해온 민족견으로서의 특성을 간직한 채 그렇게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하지홍 교수는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경북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1985년, 마지막 남은 8마리 삽살개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삽살개를 살려냈으며, 저서로 <우리 삽살개>, 자전적 이야기를 동화로 담은 <삽살개 아버지 하지홍>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