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께서는 고향 떠나 객지에 사는 손자에게 종종 택배를 보내십니다. “황태랑 야채 좀 보냈다, 몸에 좋은 거니께 구워 먹어.” “어떻게 하는 건데요?”
“별거 아녀. 우선 머리랑 꼬리를 떼고 막 두들겨. 예전에는 방맹이로 두들겼는디 그게 없으면 칼 손잡이 뒤로 혀봐. 그담에 물에 살짝 담갔다가 물기를 빼고 살짝 초벌로 구워. 그걸 양념에 재우는디 양념 만드는 거는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설탕 넣고 깨, 파, 마늘, 술도 한 숟갈 넣으면 되여. 양념이 배일 정도만 재우면 되니께 뭐 그리 오래는 아니고. 그담에 참기름이나 들기름 두르고 다시 구우면 된다, 잘 알어들었제?”
할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황태는 해독에 좋은 대표적인 식품으로 독을 빼내는 데는 이만 한 게 없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북엇국을 먹는 것도 황태가 주독을 풀고 소화기 기능을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북엇국의 시원한 맛과는 다르게 황태구이의 양념은 황태의 비린 맛도 잡아주면서 매콤하고 달콤한 맛이 적절하게 섞여 입맛을 돌게 합니다. 질감도 부드러워 오래 씹다 보면 황태 고유의 구수한 끝 맛을 느낄 수 있지요. 외할머니 표 황태구이의 깊은 맛을 어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요, 직접 만들어 보니 외손자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새삼 느껴져 한 조각 한 조각 아껴 먹고 있답니다.
1. 불린 황태의 물기를 꼭 짜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초벌구이할 때 기름이 튀어 위험합니다. 2. 황태가 도톰할수록 양념에 충분히 재워주세요. 양념이 속까지 배어야 맛있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판청쫑(Feng, Cheng-Tsung 范承宗), 쩡위팅(Cheng, Yu-Ting 鄭宇庭) _대만 NTUST 산업디자인과 재학 중
이름은?
Balance Stick(밸런스 스틱). 어느 장소에서든지 30~40도의 경사에서도 스스로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지팡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아이디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것 같다. 종종 버스에서 어르신들이 지팡이를 사용하시는 걸 보는데 지갑을 열어서 버스 요금을 낼 때 한 손은 항상 지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요금을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왜 지팡이는 스스로 서 있지 못할까? 넘어지지 않게 한번 해보자.’ 거기서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장에 가보았더니 이미 네 개의 발이 달려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지팡이가 나와 있었다. 우리는 하나를 구입해서 실제로 걸어 다녀 보았다. 그런데 잘못하다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더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다가 네 개의 발을 하나로 합친 Balance Stick을 만들게 되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Balance Stick은 한마디로 오뚝이의 원리인데 무게가 아주 가벼운 재질에다 아래쪽은 둥글고 평형추가 들어 있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쓰는 것이라 가볍게 만들면서도 튼튼해야 했다.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재료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다.
주변의 반응은?
우리는 제품을 만든 후 어르신들께 시범 사용을 부탁드렸다. 어르신들은 일반적인 지팡이와는 느낌이 좀 다르지만 괜찮으니 좀 더 가벼웠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무게를 더 줄이는 것을 도전 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촉감, 크기, 색깔 같은 세세한 의견들도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개선해 나가려고 한다. 아직 상용화되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기업이나 일반인들에게서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디자인 공모전 2011 iF Concept Award와 2010 4th Uneec Applied Design Award에서 수상했다.
6년간의 작업 끝에 자랑스러운 한국 만화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신비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흔하디흔한 동물, 암탉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예상을 뒤엎고 개봉 6주 만에 2백만 관객을 넘기며 영화계를 놀라게 했지요. 아이유가 부른 O.S.T나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를 떠나서라도 백만 부 이상 팔리고 교과서에도 실린 탄탄한 원작 스토리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엔 충분했습니다.
어두침침한 양계장에서 평생 알만 낳으며 살 운명에 처한 암탉 ‘잎싹’은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이름도 지어주는 따듯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함께 등장하는 ‘나그네’, ‘달수’, ‘초록’도 모두 잎싹이가 붙여준 이름이지요.
<마당을 나온 암탉>은 푸른 하늘 아래서 병아리를 기를 수 있는 마당의 삶을 동경하던 양계장 속 잎싹이 우여곡절 끝에 마당으로 나오고, 더 나아가 야생의 생활을 하다가 뜻밖에 청둥오리의 엄마로 살아가기까지의 고난과 역경을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준 청둥오리 부부가 족제비 ‘애꾸눈’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자 홀로 남겨진 오리 알을 품어주게 되는 잎싹. 이때부터 엄마 닭 ‘잎싹’과 아기 오리 ‘초록’의 고군분투 ‘다문화 가족’의 삶이 시작되지요. 날지도, 헤엄치지도 못하는 잎싹은 ‘닭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닭 스타일에 맞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청둥오리 초록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늪으로 갑니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늪의 생활과 늪지 동물들의 따돌림을 씩씩하게 이겨내면서 아들 초록이가 잘 자라기만을 바랍니다. 초록 역시 헤엄치고 날갯짓하는 오리들의 생존의 법칙을 서서히 터득해 가면서 엄마와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 엄마랑 난 달라!” 어느덧 초록에게 암탉 엄마는 귀찮고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잎싹은 말합니다. “다른 게 어때서? 서로 달라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잎싹에게 ‘다름’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리 알을 품었던 그 순간부터, 자신과 다른 종(種)의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잎싹에게는 오직 생명을 키워내고자 하는 사랑과 헌신만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출을 감행했다가 양계장 주인에게 붙잡힌 초록은 목숨을 건 잎싹의 구출 작전으로 풀려나게 되고, 비로소 엄마의 한결같은 사랑과 희생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철들자 헤어진다 했던가요. 초록이는 자신 역시 다른 청둥오리들처럼 철새의 본성에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잎싹 역시 초록이 자유를 찾아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응원해주며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잎싹은 담담히 족제비 ‘애꾸눈’에게 향합니다. 초록의 부모를 죽인 원수, 잔인했던 천적 족제비 애꾸눈.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 잎싹은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알고, 스스로 족제비를 찾아가 말합니다. “나를 먹어. 네 새끼들이 굶지 않게….”
순간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쏟고 맙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던 한 사람, 바로 ‘엄마’ 생각이 나서이겠지요.
살다 보면 종종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꿈, 자신의 스타일,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힘든 것인지. 하지만 엄마들은 너끈히 해냅니다.
지금 내가 엄마의 품을 박차고 나와 내 인생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엄마의 그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주변의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다 그렇게 엄마의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엄마는 위대합니다.
전 세계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도시 1위 뉴욕! 가장 상업적인 도시이면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 뉴욕, 그곳에 나도 가고 싶었다. 드디어 밟게 된 뉴욕 땅, 그곳에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가치관도 그 어떤 모습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 나 역시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들을 따라 구석구석 걸었다. 인종도 관념도 그 어떤 형식도 뛰어넘어 하나 되게 하는 곳, 뉴욕은 엄마 품처럼 포근했다.
사진, 글 홍성훈
펜 스테이션(Penn Station)에서 나오자 맨해튼이 눈앞에 펼쳐졌다. 탁 터진 시야, 마치 큰 바둑판이 놓인 듯 블록 블록마다 서 있는 빌딩들과 형형색색의 대형 간판들은 “나는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다”라고 말하는 듯 위풍당당했다. 1524년 맨해튼 섬을 최초로 발견했던 이탈리아 항해사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는 500여 년 후의 이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뉴욕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태튼 섬의 5개 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는 뉴욕은 바로 맨해튼이다. 뉴욕시 관광의 중심지인 맨해튼은 동쪽으로 이스트강, 서쪽으로 허드슨강, 남쪽으로는 뉴욕만에 둘러싸인 긴 섬이다.
‘세계의 교차로’라 불리는 타임스스퀘어. 빌딩 외관을 도배하고 있는 화려한 광고판들은 한낮에도 불빛을 뿜어낸다. 예전에 뉴욕타임스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 타임스스퀘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다. 1899년 최초로 극장이 생기고 브로드웨이 공연 문화가 시작되면서 레스토랑, 카페, 상점이 들어서자 미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곳이 됐다. 센트럴파크는 분주한 도심에서도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나무와 호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더피스퀘어 타임스스퀘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위치에 더피스퀘어가 있다. 평범한 보행자 공간이었던 이곳은 타임스스퀘어라는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으로 변신했고, 사람들이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더피스퀘어가 생긴 후 타임스스퀘어의 보행자 수는 10년 전에 비해서 90%가 늘었다.
뉴욕은 어우러짐이 자연스러운 도시였다. 노래와 춤과 연주, 체스 등 무엇이든지 하나의 매개체만 있으면 인종 상관없이 편견 없이 함께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공유하는 그들의 모습이 멋있었다. 부러웠다.
맨해튼 동쪽 이스트빌리지로 향했다. 1950년 이후 반전과 반체제 문화의 중심지로 언더그라운드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답게, 예술성 가득한 클럽과 부담없이 들어갈 수 있는 싼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끼를 해결하고 외곽으로 나오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낫소 카운티 북쪽 포트 워싱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데이트하는 연인들, 다정히 낚시하는 모녀가 아름답다.
맨해튼 동남부 이스트빌리지 거리에서 만난 벽화는 다양한 인종이 더불어 사는 뉴욕을, 더 크게는 어머니와 같은 지구가 있어 모두가 조화로울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영화나 그림, 사진 등에 자주 등장하는 브루클린 브리지는 600여 명 인원이 1883년부터 16년간에 걸쳐 완성한 다리로, 처음 맨해튼 섬과 브루클린을 연결시킨 다리여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근처 낫소 박물관(Nassau County Museum of Art)에도 들러 보았다.
정원의 커다란 나무들은 그 역사를 자랑하고 곳곳에 자리한 조각상들이 예술의 가치를 드높이는 곳. 그중 한 조각상이 내 눈길을 끌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모습. ‘배려, 보살핌(Caring)’이라는 제목의 Chaim Gross 작품(1987년)으로, 2차 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 때 죽은 어린이들을 추모하며 만들었다 한다.
2011년, 훌쩍 떠난 뉴욕에서도 내 심장을 울리는 건 결국 ‘배려와 보살핌’ 이었다. 그렇다.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지고, 여러 언어, 문화, 예술이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 또한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우리가 알고 있든, 알고 있지 못하든, 변함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배려해주고 언제나 기다려주는 존재 말이다.
어머니는 찰떡같이 약속해놓고, 내가 방심한 사이 옷 보따리를 싸 들고 잽싸게 진주역으로 달아났다. 낌새를 채고 역으로 갔을 때, 진주발 순천행 9시 30분 기차는 이미 떠나고 선로에는 장대 같은 빗줄기만 퍼붓고 있었다. 호우주의보가 해제되면 내 차로 함께 시골집에 가기로 한 약속을 어머니는 단박에 깨뜨린 것이다. 오로지 그놈의 고양이들 때문에.
결국 어머니 뒤를 쫓아 시골집으로 차를 몰았다.
쫓고 쫓기던 세 시간 만에 우리 모자는 피차 어이없는 표정으로 상봉하였다.
“뭐라고 왔냐? 애비 땀새 참말로 못 살것네.” “나 할매 보러 온 게 아닌디요? 까미랑 호돌이 보러 왔는디요.”
서울특별시 어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 두 마리였다. 녀석들은 동물 애호가이자 최초의 발견자인 친척의 손을 거쳐,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 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서울 출신 고양이 까미와 호돌이는 시골집에 잘 적응하였고 제법 고양이 특유의 볼륨 있는 몸매로 자랐다.
우산을 쓰고 집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비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창고 근처로 가니 뭔가 후다닥 튀어나와 밖으로 달아났다. 도둑고양이였다! 어머니가 출타한 틈을 타서 또 떠돌이 야생 고양이들이 침입하여 시골집을 접수한 것이다. 주인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냉큼 달려와 구르며 아양을 떠는 집고양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고양이들은 텃밭에 숨은 채, 제 몸의 상처를 핥으며 공포에 떨고 있을지 모른다.
“까미야! 호돌아!” 집 안팎을 헤매던 어머니가 한참 만에 고양이들을 찾았다. 그런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야생 고양이한테 해코지를 당한 모습이 역력했다. 두 눈에 눈곱이 잔뜩 끼였고 목덜미에는 상처까지 나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어도 선뜻 안기지 않고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망할 놈의 도둑고양이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나는 덫과 올가미를 떠올렸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들고양이한테 올가미는 턱도 없을 터이다. 덫이 좋겠다. 그렇다면 쥐덫처럼 가둬 잡는 식이냐 아니면 날카로운 이빨로 발목을 콱 물어 잡는 식이냐?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포한 도둑고양이를 차에 실어 강 건너 들판에 버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덫에 발목을 물린 고양이의 푸른 눈빛과 포효를 떠올리니 더럭 겁이 났다.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 잡는 기분일 거다. 아무래도 콱 물어 잡는 덫보다는 슬그머니 가두어 잡는 덫이 그나마 수월하겠다.
보복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그날 저녁 나는 우연히 창고 문틈 사이로,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들을 발견하였다. 눈에 띄는 것만 무려 세 마리. 새끼 고양이들은 내가 다가가자 잡다한 물건 사이로 꼬물꼬물 사라졌다. 까미와 호돌이 둘 다 수컷이었다. 그러니까 그놈들은 야생 고양이의 새끼들이었다. 장마철 창고의 통풍을 위해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와 몰래 새끼를 친 것이다. 나는 비정하게 창고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들은 철저하게 격리되었다. 이제 덫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하지만 야생 고양이는 영악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창고 위쪽에 있는 창문의 철그물형 방충망 한구석이 뜯겨져 있었다. 들고양이가 간밤에 창고로 들어온 흔적이었다. 어미 고양이는 창고 바깥쪽에 쌓아놓은 땔감 더미를 타고 올라, 발톱으로 방충망에 구멍을 내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밤새 제 새끼들한테 젖을 먹이고 사라졌다. 찢어진 방충망은 모성애가 남긴 증거였다. 어머니는 창고 문을 다시 열어젖혔다. 나는 새끼 고양이들이 어미 고양이 뒤를 따라 쫄랑쫄랑 창고 문을 나서는 광경을 상상하였다.
그로부터 2주일 후, 가족들과 함께 시골집에 갔다. 우리는 모처럼 마당에 평상을 펴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때 화단 옆에 숨어 이쪽을 지켜보던 낯선 얼룩무늬 고양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도둑고양이! 나는 재빨리 마당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힘껏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멩이는 도둑고양이를 살짝 비켜갔다. 그런데 도둑고양이 반응이 이상했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물러났다.
“도둑고양이가 아직도 창고에 삽니까?”
어머니는 빙긋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낡은 의자 위에 배를 깔고 있던 까미와 호돌이도 의외였다. 불안해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그냥 소 닭 보듯 도둑고양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계약 기한이 다 되었는데도, 어린 자식들을 핑계로 선뜻 방을 빼지 않는 가난한 세입자와 쓴소리 한마디 못 하고 마냥 기다리는 어벙한 집주인 같았다.
내가 삽살개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경북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목장을 하셨고 그곳에는 목장을 지키는 개들이 여럿 있었다. 넓은 목장 마당에 몰려다니던 개들은 나의 휘파람 소리에 우르르 달려오곤 했다. 그중에 삽사리도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몰랐었다. 어느새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의 토종개라는 것을.
신라 시대 왕궁에서 기르는 개였던 삽살개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동물이다. 삽살이, 삽사리로도 불리는 삽살개의 이름을 풀어보면, 살(煞)은 액운 즉 사람을 해치는 기운을 말하며, 삽(揷)은 퍼낸다, 없앤다는 뜻을 지녀, 말 그대로 악귀 쫓는 개를 뜻한다.
삽사리가 그렇게 여겨졌다는 것은 각종 조각상이나 그림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삽살개 상이나 그림을 액막이용으로 놓거나, 99칸 대가(大家)의 액막이용 동물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황희 정승은 “삽살개의 눈빛은 워낙 강해 웬만한 동물들은 눈빛만으로도 기가 꺾이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을 만하다”고 했다.
한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섬기며,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주인을 구한다는 충절과 의리에 대한 민담도 많이 전해진다. 술에 취한 주인이 산에서 잠이 들었는데 산에 불이 나자, 인근 저수지로 가서 자신의 털에 물을 묻혀와 몸으로 불을 끄고 주인을 구한 후 결국 자신은 죽었다는 ‘의구총’의 전설 또한 삽살개를 두고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삽살개는 또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도 불리며, 대단히 신령한 동물로 여겨졌다. 긴 털을 바람에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또 먼 하늘의 구름을 보고 짖으며 멀리서 올 손님을 예견하는 삽살개는 그렇게 여겨질 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전쟁에서 쓸 견피(犬皮)를 얻기 위해 일제는 매년 수십 만 마리의 토종개들을 도살했고 그 과정에서 털이 길고 부드러운 삽살개 대다수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우리 집 목장에 있던 삽사리들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탁연빈, 김화식 교수가 1960년대 멸종 위기에 놓인 삽살개 연구를 시작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어렵사리 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대학을 가고 미국 유학을 갔다 오면서 삽살개는 내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32살의 나이에 경북대 교수로 오면서, 삽살개와의 운명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4년 여름 아버지의 목장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그때 남아 있던 삽사리는 단 8마리뿐이었다. 힘없이 묶여 있는 삽사리들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아, 저 여덟 마리가 문익점의 목화 씨앗 세 알이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이미 계획하던 다른 연구가 있었지만, 나는 멸종 직전에 놓인 삽사리를 살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목장 뜰에 개들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진 삽살개를 찾아 나섰다. 시간만 나면 어김없이 개를 돌보러 달려갔다. 정성을 들인 만큼 삽사리의 수는 늘어났다. 8마리에서 30마리, 50마리…. 처음에는 똥 냄새조차 싫지 않을 정도로 삽사리들이 좋았다. 하지만 점점 많아지는 개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어떤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못했기에 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며 좌절할 때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삽살개들이 수천 년을 우리 땅에서 살아왔다 보니 어지간한 병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또 삽살개와의 알 수 없는 묘한 교감이 나와 삽사리들을 단단히 엮어주는 것도 같았다.
한 번은 농장에 있는 한 친구가, “당신이 삽살개를 부리는 게 아니고 삽살개에게 당신이 선택된 것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멸종 위기의 삽살개를 구해 이름을 알리고 싶은, 학자로서의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정말 삽사리들이 나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이 있었다. 동물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삽사리들도 수컷끼리 툭하면 싸운다. 어느 날 갑자기 수컷 두 마리가 으르렁대더니 싸움을 시작했다. 저러다가 둘 중 하나는 죽겠는 걸? 앞뒤 잴 것 없이 싸우고 있는 한 녀석의 배를 잡고 세게 뒤로 잡아당겼다.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엄청나게 큰 이빨이 나를 향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구멍 낼 정도로 강한 이빨을 지닌 녀석들. 당연히 크게 물리겠구나, 했는데 아프지가 않은 것이다. 눈을 뜨고 보니 내 팔뚝이 그 녀석의 이빨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었다. 이빨이 내 살갗에 닿은 순간, 자신의 주인인 걸 알아채고 멈춘 것이다. 동물들이란 자기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 법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두들 놀라워했다.
삽사리를 키우는 사람들은 “주인밖에 모르는 너무 멋있는 개”라고 말한다. 기다려! 하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개, 주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행동, 낯선 사람에게서 주인을 지켜주는 행동이 감동스러운 개, 주인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영리한 개, 순할 땐 순하지만 용맹할 때 아주 용맹한 개, 작은 개가 자기 밥그릇을 넘보면 아예 줘 버리지만, 다른 큰 개가 자기를 해코지할 때는 절대 물러남이 없는 멋진 개…. 오랫동안 삽살개를 키운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특징이다.
삽살개의 이름을 풀어보면 악귀 쫓는 개를 뜻한다. 또 신선개 또는 선방(仙尨)이라고도 불리며, 대단히 신령한 동물로 여겨졌다. 청룡(3살, 청삽사리), 수호(5살. 백삽사리), 복길이(6살, 황삽사리)가 포즈를 취했다. 현재 삽살개육종연구소에서는 500마리의 삽살개를 키우고 있다.
이런 삽살개는 1992년 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되었고, 1999년 100마리 분양을 시작으로 현재 3천 마리 정도를 전국적으로 기르고 있다. 사전에 개념조차 없어 사어(死語)가 될 뻔했던, 삽살개라는 단어가 이제 사전에도 당당히 등재되어 있다. 삽살개와 함께하는 세월 동안 말로 표현 못할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렇게 삽살개를 다시 찾은 것에 보람을 느낀다.
굴곡 많았던 시대의 아픔 속에서 힘없이 사라져갈 뻔했던 삽살개가, 오랜 역사를 우리와 함께해온 민족견으로서의 특성을 간직한 채 그렇게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하지홍 교수는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경북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1985년, 마지막 남은 8마리 삽살개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삽살개를 살려냈으며, 저서로 <우리 삽살개>, 자전적 이야기를 동화로 담은 <삽살개 아버지 하지홍> 등이 있습니다.
‘장미 꽃 한 송이를 안겨볼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경쾌하고 상큼한 발라드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등 199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가수와 연기자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상우씨.
언젠가부터 그는 한가인, 장나라 등을 발굴한 연예 기획자, 잘나가는 사업가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 KBS 휴먼다큐 인간극장에서 보여진 이상우씨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큰아들을 키우면서
가졌던 아픔과 방황의 시간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버지 이상우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훗날 아이들로부터 “나도 아버지처럼 제 아이들을 키울래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최고로 행복할 것 같다는, 참 좋은 아빠 이상우씨를 만나보았다.
글 최창원 사진 홍성훈
승훈이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지요?
네. 1학년이에요. 이제 혼자 학교도 가고 레슨 받으러 갔다가 두세 군데 거쳐서 올 정도는 되는데,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딜 갔다 와라 하는 건 못 해요. 예전에는 많이 조급했어요. 아이는 커 가는데 실생활에서 안 되는 게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승훈이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해나가야죠.
2007년 9월, 인간극장에 출연하셨을 때 많은 화제가 됐어요.
“제 아들이 장애가 있습니다” 하고 밝히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무엇보다 나중에 아이가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봐 그게 두려웠어요. 그런데 PD가 “보통 장애아를 키우면 힘들고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방송으로도 우리가 밝고 예쁘게 나왔잖아요. 그걸 보고 제가 부끄러울 만큼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과 격려를 해주셨어요. 승훈이도 사람들이 자신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것을 느끼면서, 세상에 한발 더 나가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폐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나오는데 눈물이 비 오듯이 나더라고요. 처음 3개월은 거의 폐인이었어요. 술을 얼마나 먹고 다녔는지. 근데 아내는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계속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언어 치료, 행동 치료며 뭐든지 해보려고 하고. 그게 엄마의 힘인 것 같아요. 아내가 그러는 걸 보면서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더라고요.
지금은 승훈이를 ‘스승’이라 생각하신다고요.
예전에는 정말 나 잘난 맛에, 소위 말하는 출세한 사람으로 살았거든요. 그렇게 오만 덩어리였던 나를 승훈이가 겸손하게 만들어준 겁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세상이 허락한 만큼밖에 인간은 누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또 행복이라는 게 마음 안에 있다는 것도 승훈이를 키우면서 알게 됐어요. 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심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정말로 힘들거든요. 저희들 역시 수없이 좌절하고 절망적인 상황들을 겪었어요. 그럴 때 어떤 식으로든 버텨야 하다 보니 자꾸 희망을 찾게 돼요. 난 그래도 이런 게 좋잖아, 하면서. 그런데 신기하게도 억지로 찾다 보면 그게 진짜 감사한 겁니다. 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감사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 행복이 와요. 그리고 장애아를 키우면 부모들이 잠깐도 허튼짓을 못해요. 그런 긴장감들이 저를 참 열심히 살게 만듭니다. 승훈이는 우리 부부한테는 정말 스승이에요.
1993년 결혼, 큰아들이 30여 개월 되었을 때 발달장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온 ‘스승’처럼 그의 삶을 이끌어주었다. 그는 승훈이와 같은 처지의 발달장애아들과 부모들을 돕기 위한 공연을 다녔다. 남을 위해 살겠노라 대단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가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이상우. 학창 시절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고, 중창단, 밴드도 만들어서 활동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 친구의 권유로 1988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한다. 기대치 않은 금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한 후 드라마, CF모델, 영화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발달장애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아들 승훈이를 위해 경제적으로 넉넉해져야 했기에 사업을 시작했다. 연예기획사, 교육, 문화, 의류 사업…. 까만 뿔테 안경에 순둥이로만 보이던 방송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논리적이고 꼼꼼한 사업가적인 면모를 발휘해갔다.
이제 사업가라 불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으시겠어요.
처음에 사업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승훈이 때문이었어요.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은 똑같죠.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아이가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괴로워요.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갖지 못하면 결국 다른 누군가의 신세를 지면서 살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발달장애아들의 자활 교육과 자립을 도와줄 복지센터 같은 걸 만들고 싶었어요. 일단 지금은, 아는 목사님께서 발달장애아를 위한 복지센터를 만드신 상태예요. 제가 하는 것보다 목사님이 만드시는 게 훨씬 수월해서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계속 후원을 할 거고요.
발달장애아와 부모를 돕기 위한 음악봉사단 등 봉사도 활발하게 하시고 계시지요.
제가 넓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발달장애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후부터 자꾸 섭외가 들어와요.(웃음)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면 다른 누군가가 또 우리 아이를 많이 도와주시겠지 이런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조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조금은 못한 사람을 돌보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최근에는 보컬아카데미도 여셨다고 들었습니다.
노래는 참 좋은 거예요. 진정성을 가지고 전달했을 때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거든요. 요즘에는 오디션 프로그램도 많고,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노래를 가르쳐주기는 힘들죠. 노래의 근간이 되는 게 좋은 호흡과 발성인데, 그건 몸속에 있는 근육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사람 몸속에 있는 근육의 움직임을 이론이나 논리로 가르치기는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가르치는 게 중요해요. 이번에 1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분들이 2년 가까이 연구해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제대로 노래를 가르쳐보고 싶고, 내년부터는 음악에 재능 있는 장애아들을 매니지먼트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승훈이를 통해 기다림을 배웠다고 하셨는데요,
그러한 마음이 사회생활하며 사람을 대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엄청나게 바뀌었지요. 예를 들어 원래 수영 가는 날인데 일정이 꼬이잖아요. 그러면 아빠, 오늘 수영 하러 안 가죠? 그러면 안 가요, 해요. 그러면 조금 있다 또 물어요. 그럼 또 안 가요, 대답하고. 그 과정을 300번 넘게 반복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근데 200번 잘하다가 한 번 안 간다 그랬잖아! 하고 소리 지르면 끝이에요. 끝까지 참고, 있는 그대로 대답해줘야 해요. 왜냐면 불안해서 그런 거거든요. 지는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하면 그렇게 수백 번을 물어보겠어요. 어쨌든 승훈이 덕분에 사람 됐다고 하죠. 커뮤니케이션이 힘든 아이하고도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데, 멀쩡한 사람하고 왜 대화를 못 하겠어요. 말로 못 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승훈이와 둘째 도훈이, 또 아내분까지 네 가족이 굉장히 화목하신 것 같아요.
아이들한테 조금 미안하지만 저는 아이들보다 아내가 더 좋아요. 그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근데 이것도 다 승훈이 덕분이에요. 집사람은 무남독녀 외딸에 서울 여자고 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니 처음에 얼마나 싸웠겠어요. 그런 와중에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애한테 정말 잘하는 거예요. 저도 감동을 받아서 아내한테 잘하게 되고, 제가 잘하니까 아내도 저한테 잘해주고. 또 승훈이 문제를 풀려면 부부끼리 대화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이게 계속 상승작용을 하니까 닭살 부부가 될 수밖에 없죠.(웃음)
둘째 도훈이가 그렇게 똑똑하고 음악적 재능도 많다면서요? 승훈이와 도훈이가 어떤 형제가 되길 바라시는지요.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승훈이 때문에 둘째를 생각했던 것도 있어요. 나중에 혼자가 될 승훈이를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서요. 도훈이가 6살 때인가, 얘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도훈아 너는 형이 어때?” 하고 물었죠. 그러니까 형이 좀 시시하대요. 게임을 해도 항상 자기한테 지니까. 그래서 “앞으로 네가 커가면서 형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아빠는 그게 너한테 참 미안하다. 그럴 때라도 씩씩하게 잘해줬으면 좋겠어” 그랬더니 6살짜리가 펑펑 우는 겁니다. “아빠, 내가 미안해” 이러면서. 자기가 형을 많이 챙겨야 하는데, 많이 못 챙겨서 미안하다는 거예요. 승훈이도 도훈이를 정말 좋아해요. 한번은 도훈이가 4살 때인가 승훈이가 나가다가 공을 밟아서 넘어졌어요. 그걸 보고 도훈이가 깔깔깔 웃었어요. 그러니까 얘가 그 자리에서 스무 번은 더 넘어지더라고요. 도훈이가 좋아하니까. 지 동생이 웃으니까…. 서로 얼마나 아끼고 챙기는지 어느 땐 니들이 부모보다 낫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런 생각도 들 때가 많아요.
도훈이에게 한마디 해주시겠어요? ‘영상 편지’ 대신 ‘지면 편지’가 되겠네요.
“도훈아, 도훈이가 앞으로 커가면서 형이 보통 형들하고 다르다는 느낌을 받겠지만 형이 절대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도훈이가 형을 챙겨야 할 일도 생길 거야. 그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주리라 믿어. 엄마 아빠는 도훈이도 무지무지 사랑하니까, 엄마 아빠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듬뿍 줄 거야. 그 사랑 받고 잘 자라서 형한테도 나눠줄 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아는 따듯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수, 연기자, 사업가, 이상우씨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어떤 타이틀도 다 떠나서 훗날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으신지요.
제가 나중에 눈감을 때 내 아들이 당신이 제 아버지여서 정말 좋았습니다, 저한텐 그게 행운이었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내 아이를 키우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한테는 당신은 남편으로 최고였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해요. 이게 제가 사는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우씨를 응원하는 많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했다. “항상 제가 모르는 곳에서도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자세를 바로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세상 앞에 더욱 겸허해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그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 같은 아내와 스승이 되어주는 두 아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안다는 것, 그는 이미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삶의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있지 않은가.
이상우 님은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MBC 강변가요제 ‘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습니다. 1989년 1집 발표를 시작으로 5집까지 발표를 했고, ‘그녀를 만나는 곳 100m전’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이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CF모델, 드라마,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동안 음반 프로듀서, 교육, 문화 사업, 엔터테인먼트사 운영 등 사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던 그는 현재 티원보컬아카데미를 운영하며, KBS2 라디오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운이 잘 따르는 편이다. 럭키 가이라고나 할까^^.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구독하는 잡지 이벤트에 당첨이 되고, 우연히 돌아다니다가 TV 인터뷰에 나오기도 하는 등, 당첨 운은 기본이고 뭔가 지원해서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전, 연속 7개의 컴퓨터 자격증을 어렵지 않게 땄고, 초, 중, 고 3번 모두 국제로봇올림피아드에 나가서 금메달을 받았다. 벼락치기 공부를 해도 딱 내가 본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니, 이쯤 되면 행운의 여신이 나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ㅋㅋ
“너는 참 운이 좋은 것 같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냐?”
‘괴짜’라는 별명처럼 생각도 행동도 엉뚱한 데다, 수업 시간에는 졸기만 하고 별로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성적은 잘 나오고, 뭔가 술술 풀려가는 것 같으니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나의 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잘 만나서인 듯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외가 쪽으로 큰손자였고, 친가 쪽으로는 아이가 한참 귀할 때 태어난 늦둥이였다. 그러다 보니 친가, 외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런 사랑 덕분에 성격도 무난하고 마음도 갇혀 있지 않게 된 것 같다.
로봇을 만들 때도 항상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팀을 이룰 때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었다. 보통 한번 대회에 나가려면 팀 사람들과 반년 이상을 준비한다. 어떤 로봇을 만들까 기획하고, 설계도 짜고, 재료와 부품을 찾으러 청계천 시장을 왔다 갔다 하고, 톱질하다 상처를 입기도 하고, 불에 데기도 하고, 작은 부품 하나라도 잘 맞지 않으면 다시 찾아 나가야 하고…. 고비 고비 힘들지만 그때마다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봐라. 이왕 할 거면, 이걸 했다, 하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라”고 하셨던 부모님 말씀을 떠올린다.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뒷받침해주셔서 만든 행운이었기에, 나 혼자만 누리기에는 미안한 행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의 꿈은 로봇 공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외할아버지 덕분이다. 나는 원래 이과 계열이 잘 맞긴 했지만 법관이 되고 싶어 인문계 고등학교에 왔다. 그런데 그즈음 외할아버지께서 치매를 앓게 되셨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일하러 가시면, 바둑도 가르쳐주시고, 자전거 태워 산책도 시켜주시던 할아버지. 병세가 깊어지시며 다른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나만은 기억하는 할아버지를 뵈며,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시는 할아버지를 뵈며, 24시간 할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는 로봇이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고, 진로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아직 19살의 어린 나이지만, 나름 10여 년 가까이 로봇을 만들다 보니, 배우고 변화된 것도 많다. 각각은 정말 작고 하잘것없는 부품들이라도, 하나라도 없으면 로봇이 작동되지 않는 것을 보면, 나사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생활 속에 불편한 게 있을 때, 저걸 해결하려면 어떤 로봇을 만들면 좋을까? 생각하게 된다. 외할아버지를 위한 치료용 로봇을 시작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 나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행운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로봇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행운’이라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선 ‘노력’이라는 부품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쯤에서 친구들에게 한 가지 고백하고자 한다.
친구들아, 나 겉으로는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집에 가면 완전 새벽까지 공부한다. 내가 마냥 초월한 괴짜처럼 보여도 실은 나도 성적에 대한 부담감 완전 많단다.ㅋㅋ^^
김인옥 작 <항금리 가는 길> 순지에 채색. 100×100cm. 2007.
당신이 행운입니다
박미경 43세. 호주 퍼스 베이스워터
존, 29살 때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하다 당신을 만났지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남편의 배신으로 일년 만에 이혼을 한 저는 여러모로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쾌활, 명랑한 척했지만, 남자에게 받은 피해 의식, 이혼녀를 보는 따가운 시선에 많이 주눅 들어 있었어요. 호주 사람이던 당신은 나를 그냥 따듯하게 바라보고 도와주었지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저에게 “내 인생에 후회하는 일 만들지 않겠다고, 자기는 변하지 않겠다”며 프러포즈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하며 저는 정말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를 한 남자의 소유물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었지요. 언어가 서툴러 많은 것을 당신께 미루던 나에게, 그러면 나중에 힘들어진다며 다 해보도록 했고,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화가 나서 침묵할 때면 그것은 안 좋은 습관이라며 화가 난 이유를 솔직하게 표현하라며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결혼 초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한다” 했을 때 “한 10년을 살고 난 뒤에 그 얘기를 하면 믿어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당신. 1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당신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깊어짐을 확인합니다.
당신을 만나 점차 위축됐던 마음이 많이 풀어지고 여유로워져갔지만, 제 마음속에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후회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항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현재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철학, 종교 책을 읽고, 템플스테이, 피정 등에도 참여해 봤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지요. 그러다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주 수련원에서 3일을 수련하며, 아,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본원에 가서 마음수련의 모든 과정을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내가 진정으로 찾던 것을 찾았다”고 했을 때 당신은 진심으로 기뻐해주었지요. 하지만 한국에 가서 몇 개월을 수련하고 오고 싶다는 나의 부탁은 정말이지 당신으로서도 들어주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 네 명이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 손에 한국행 비행기 표를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장 8개월을 저는 한국의 마음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직감했던 대로 마음수련은 제 안에 맺혀 있던 모든 의문을, 모든 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간혹 통화하며 가족을 걱정하면, 당신은 “수련에만 집중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주위에서 어떻게 아내를 그리 오래 내보낼 수 있냐고 하자 “나비는 날게 해야 다시 돌아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했지요. 당신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마음수련의 과정을 마쳤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후회로부터,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떤 상황이 나에게 온다 해도 이 마음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제가 없는 동안, 직장에 다니며 초등학생 세 명의 보호자로 도시락을 싸고, 과제물을 챙겨주고, 집안일까지 두루 챙겼을 당신. 그동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만을 바랐던 나를 많이 참회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있는 그대로에 감사합니다. 나의 남편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나에게는 가장 행운입니다. The luckiest thing in my life.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110×55cm. 2003.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이 가져다준 행운
문관배 77세. 전북 군산시 경장동
나는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아마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워낙 먹을 게 없어서 논에 가면 벼와 비슷하게 생긴 피를 뽑아, 씨앗을 훑어 먹고, 소나무 속 속피를 뜯어 먹었다. 그러다 일본 사람들의 압박 속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진 부모님은 내가 6살 때 만주로 향하셨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떠난 빈집에서 다시 시작했다. 나는 군산 비행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는데, 항상 배가 고팠다. 주위에 옷도 잘 입고, 다방에서 고상하게 차도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행운이 왔으면 좋겠다 해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너무 먼 꿈일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훌륭한 학자가 돼서 많은 후진들을 키워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놔도 상위급에 오를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더 배울 형편이 되지 않았고, 어떻게 갖게 된 직업이 소방관이었다. 옛날에는 공직 사회도 백그라운드가 좋거나 지역이 같거나, 무엇이 있어야 승진이 잘되고 보직도 잘 받았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는 내 스스로 해야지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내 자신의 독학으로 실력을 넓혀갔다. 영어, 일본어 등의 외국어 공부도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책을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 같은 것을 탐독했다. 그 사람들의 길을 똑같이 밟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응용을 해봤다. 소방관을 하며 위험한 일일수록 내가 먼저 앞장을 섰다. 남들이 싫어하는 보직을 맡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런 모습을 상사들이 좋게 봐주어서인지, 승진 운도 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련도 많았다. 묵묵히 내 일만 한다고 하는데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항상 내 앞에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 자를 붙여놓았다.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작용들이 험악하게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질게 받아들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참아가면서 그냥 내 할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 자신에 충실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누가 뭐라 하든 꿋꿋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더니, 결국 나를 헐뜯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나고는 했다.
54세 때 소방서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참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 자리 하나에 20명 정도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나는 꿈도 안 꿨는데, 당시 내무부 소방국장이 공정한 인사를 해야겠다며, 대상자들의 인사 기록 카드를 꼼꼼히 검토한 후 내가 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그 운을 만들어준 거였다.
지금은 퇴직해 안사람과 노년을 보내고 있다. 2남 2녀 모두 다 잘 자라, 손자들도 8명이나 있으니 이 정도면 행복한 노년이라 생각한다.
주위에 보면 자기는 진짜 운이 안 풀린다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내가 충성을 다하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는데 윗분들이나 주변에서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것인지. 내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에 재밌는 것만 하면서, 좋은 일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것이 다 보인다. 남들이 어떤 것을 이뤘으면 그것도 이루고 싶고 음식을 먹으면 그것도 먹고 싶고, 하지만 다 가질 수는 없다. 안 되는 걸 굳이 탓하지 말고, 내 운은 내가 만들어간다 생각하며 살면 그리 어려운 인생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간경화, 류머티즘, 재생불능성빈혈, 갑상선에 비장비대…. 내가 핏덩어리였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엄마는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셨단다. 젊은 엄마는 자식 셋을 홀로 키우기 위해 당신의 체력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셨을 것이다. 덕분에 먹고살 걱정 없이 살게는 되었지만, 엄마는 건강을 잃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내내 누워계셔야 했던 엄마. 아침이면 엄마 옆에 전화기와 물 등을 놓아드리고, 저녁에는 오빠들과 번갈아 엄마를 주물러 드렸다. 엄마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였는데, 깜빡 약 기운에 잠이라도 드시면, 큰오빠는 새벽까지 주물러드리곤 했다.
엄마는 약 기운으로 버티며 조금씩 생활을 하셨다. 운동회라든지, 방학을 맞아 우리들 코에 바람이라도 쐐주겠다고 집을 나설 때면, 그 전날 집에서 링거액을 맞으셔야 했다. 정신력이 강하시고 여장군 같았던 엄마는 가장의 짐 때문에 늘 묵직한 얼굴이셨는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런 엄마와 나는 조금은 먼 사이가 되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왜 살고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의문이 엄마에게는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사춘기 딸의 핑크색과 초록색 옷 사이에서의 고민도 엄마를 힘들게 할 뿐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엄마와 딸이 친구처럼 다니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느니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희는 그러고 사는구나’ 싶었다. 내 의견을 주장하기엔 ‘편찮으신 가여운’ 엄마였기 때문에.
30여 년 내내 엄마는 편찮으신 모습이다. 종일 누워계셔서 헝클어진 머리, 속옷 차림, 개수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 어쩌다 시간이 나는 휴일에도 집안 청소에 빨래로 내 시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예쁘게 홈패션을 차려입고 가꿔져 있는 엄마를 보고 싶다고, 퇴근 후에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데이트도 하고 싶다고. 휴일에는 엄마랑 산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싶다고. 이 모든 걸 하지 못한다 해서 누구를 마음 놓고 원망할 수 있느냐 말이다.
한 달 전 엄마가 갑상선 수술을 받은 후부터 이삼일 간격으로 30분간 떠오던 쑥뜸을 매일 떠드리고 있다. 다행히 쑥뜸 치료가 잘 맞아서 꼼짝없이 한 자세로 누워 있어야 하는 불편함에도 엄마는 잘 참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니 어쩌다 늦게 퇴근하거나, 녹초가 되어 피곤할 때도 쑥뜸 뜨는 일을 건너뛸 수가 없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건너뛰자’ 하시면 내심 좋으면서도 착한 딸은 아무 말 없이 쑥뜸기를 엄마 배에 올려놓고 1시간이 넘도록 펌프질을 한다.
“엄마는 의선이한테 제일 미안해. 엄마가 건강하지 못해서 여행도 한번 제대로 못 가고, 친구처럼 지내주지 못해서. 어쩌다 일찍 집에 와도 엄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너도 이런 엄마가 귀찮고 싫지.”
가끔 촉촉해진 목소리로 하시는 엄마의 말씀이, 습도가 가신 청량한 날씨 때문일까, 내 마음을 정확히 비추는 맑은 거울 같다.
‘엄마 덕분에 이만치 착하다는 소리 듣고 살았잖아.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았잖아. 이보다 더 인생 공부 잘 시킬 수 있는 엄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엄마는 내 인생의 행운이야. 엄마 사랑해~^^’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33.4×45.5cm. 1996.
행운이 찾아오게 하는 비결, 알려드리지요
김영삼 41세. 농업인. 전북 진안군 부귀면
25살 젊은 나이에 선택한 직업이 표고버섯을 생산하는 농업인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17년 차 농부의 길을 걷고 있다. 다들 힘들다고 떠나는 농촌으로 다시 돌아온 건 분명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 마음속에, 몸속에는 어린 시절 산촌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각인된 자연인의 기질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전공을 살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 23살에 군 입대를 했다. 군 생활을 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히 했다. 특히 내 머리에 떠나지 않던 대사가 있었는데, 오래전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만물 수리점을 하던 순돌이 아빠가 습관처럼 하는 이야기였다.
“요즘 전자제품은 어려워서 못 고치겠다.”
그게 미래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내가 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고민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운명처럼 보게 된 방송이 KBS스페셜 ‘미래의 식량 버섯’ 4부작이었다. 버섯!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께서 부업으로 짓던 표고버섯 농사, 이거야말로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중에 으뜸인 참나무! 그 참나무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바람으로 썩혀, 그 양분으로 표고버섯은 자란다. 처음엔 젊은 혈기에 자연을 위반하는 행위들을 많이 했다. 표고버섯은 주로 봄과 가을철에 나는데, 그 철이 아닐 때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제철이 아닐 때도 재배 하우스 안에서, 바람과 햇빛과 비를 막아, 습도와 온도를 조정해 버섯을 나오게 했다. 내 계획하에 버섯은 자라는 거라고 생각했고, 인위적인 힘으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욕심으로는 안 되는구나를 느껴갔다. 버섯들은 미세한 곰팡이 균으로 키우는 생명이다 보니까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버섯이 통통하고 예쁘고, 영양가도 풍부했다. 그런데 억지로 나게 한 버섯은 버섯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모양도 작고, 기형 버섯이 많이 발생했다. 원래의 향이나 영양도 떨어졌고, 참나무 평균 수확 기간이 3~4년인데 2년 만에 폐목을 시킬 정도로 빨리 상해 버렸다.
그즈음 나는 결혼하고 5년이 흘렀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소망이 너무 커서,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보고 인공수정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이 우리에게는 안 통했다. 우리 부부는 아기가 없는 운명인가 보다 받아들인 후 여행을 갔는데, 여행지에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겼다. 그때 내 마음에 들려온 소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구나, 자연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였다.
이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버섯을 키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맡긴다. 가을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고…. 세월을 벗 삼아 유유자적할 줄 알아야 스스로 지치지 않고 오래 달려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화학적인 요인들로 망가졌던 농장에는 어느새 장수풍뎅이가 돌아오는 등 자연 생태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주변 환경을 혹사시켰다면 30~40년 후쯤 이 농장에서 생명체가 살아가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농장 안에 있는 그 어떤 생명들도 불필요한 것들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다들 자기의 역할이 있고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활동해 줄 때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이라도 자연에 맞서 이기려 했던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스스로 선택한 일 속에서 삶의 가치를 알게 되고, 자연의 위대함을 배웠다.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연에 거스르지 말고 순리대로 사는 것, 그것이 행운을 찾아오게 하는 가장 큰 비결이라는 걸.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30×30cm. 2010.
지지리도 운 없던 나, 대박 행운을 만나다!
최진희 39세. 간호사.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나는 단 한 번도 행운권 따위에 당첨된 적이 없다. 기필코 내가 가지고 있는 번호의 다음 번호가 불릴 때의 아쉬움은 너무도 많이 반복되어 언젠가부턴 아쉽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늘 0.1~0.2점 차이로 과목 등급이 떨어졌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과외하는 애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말을 잘 듣는다 해도 선생님의 관심은 늘 내 옆의 친구에게로 향했고, 부모님의 관심 또한 늘 어린 동생들에게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난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애’ ‘난 어떻게 해도 안 돼!!’라는 마음이 지배적이 되어 버렸다.
그런 마음은 직장 생활에서도 계속되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일에 집중도 잘 안 되고, 늘 사고를 치어 상사에게 지적을 들었다. 내가 직장 상사에게 관심을 받거나,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그동안의 나의 ‘운 없는’ 삶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는 스트레스는, 동료들과 함께 직장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소했다.
주변에는 나와 똑같은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들을 진정한 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마음수련원이라고 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걸핏하면 불평불만을 얘기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저 사람들, 저 여유, 저 편안함은 뭐지?’
그들은 어떤 말도 귀 기울여 들어주되, 먼저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도 해주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한번 시키는 대로 해보자,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흉내라도 내보자 생각했다. 그러면서 투덜거리기보다는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짚어보고, 불평하기보다 그 일을 잘하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나는 변해갔나 보다. 어느 날이었다.
밑의 직원이 힘들다고 하자, 내가 맞장구치기보다 한번 힘내서 잘해보자고 격려의 말을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엔가 불평불만으로 내 시간을 채워주었던 사람들보다, 잘해보자며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났다.
내 안에서 나의 일을 조금 더 열심히, 그리고 조금 더 사명감을 가지고 해보자는 마음도 들었다. 마흔이 가까워진 나이에 대학원도 들어갔다. 알게 모르게 바뀐 나는 공부도 재미있어 했고, 재미가 있으니 더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도 해주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선생님은 이 일에 딱 맞아요.”
항상 지적을 받던 나로서는 생소한 칭찬들이 쏟아졌다. 그 후 난생처음 장학금도 받고, 과 대표가 되고, 교수님과 함께 연구 사업도 하게 되었다. 이제 교수님의 권유로 박사 학위를 생각하고 있다. 교수님 추천으로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직장도 옮길 예정이다.
오 마이 갓! 그렇게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던 나에게 연속으로 행운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요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느끼는 중이다.
‘어떻게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서였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내 마음세계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아, 내 인생의 가장 대박 행운은 바로 마음수련을 만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