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마음까지 따듯해지는 힐링무비 ‘컬러풀colorful’

자신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우리에겐 없다.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 애니메이션은 한 죽은 영혼이 ‘프라프라’라는 사후 세계의 안내자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신은 살면서 죄를 지었지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마코토’라는 학생의 몸으로 들어가 살면서 6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전생의 잘못을 깨닫는다면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습니다.”

영혼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남자아이의 몸에 들어가 그가 살던 집, 가족, 학교를 보면서 이 아이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타인의 눈으로 본 마코토의 가족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집 아이가 왜 자살을 했을까.

공효음 문화칼럼니스트

하지만 마코토의 몸으로 하루, 이틀 살다 보니 문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능한 아빠, 불륜을 저지른 엄마, 부모를 무시하는 형 등 허울만 가족일 뿐이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마저 당하는 마코토의 삶은 그 안에 들어온 영혼마저도 점차 마코토의 몸에서 사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던 중 진심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친구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하고 싶은 일,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영화의 핵심은 마코토에 들어간 영혼이 사실은 자살한 마코토 자신이라는 것이다.

실제 자신이었음을 전혀 모른 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부터 마코토의 눈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예전에도 손을 내밀어주는 친구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나’였을 때에는 합리화로, 피해의식으로 절대 알지 못했던 것들. 그렇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마코토는 다시 한 번 마코토(자신)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야말로 제2의 삶,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종이에 적어보고는 한다. 거기서 가지를 뻗거나 쳐나가면서 우선순위를 세워보기도 하고, 생각보다 심각한 건 아니라고 진정하기도 하고, 솔루션을 좀 더 열심히 찾아본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안에서의 객관이지, 타인이 보게 되면 완전히 다른 관점이 될 것이다.

영화 제목 컬러풀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었는데,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세상은 다양하고 인간도 다양하고 내 마음속 색깔도 다양하다. 마냥 흰 사람도 없고, 마냥 검은 사람도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나쁜 모습과 어두운 색이 있다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인정하며 사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늘 나는 착하고, 깨끗하고, 피해자라고, 모든 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때문에 더욱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 환경, 습관들로부터 한발 떨어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은 모두 내려놓고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주 짧은 시간일지라도 좋다. 그 짧은 시간이 어쩌면 내 안에 갇힌 다양한 나를 찾게 하고, 좀 더 큰 세상으로 나를 안내해 줄지 모른다. 아니 마코토처럼 아예 새롭게 태어나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아주 컬러풀한 세상에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사진, 글 김선규

부산 범어사에 다녀왔습니다.
금정산 자락에 자리 잡은 범어사는 천년고찰답게
뭇 중생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듯했습니다.
감지덕지 비까지 내려주었습니다.
메마른 세상이 촉촉해지기 시작하고,
이렇다 저렇다 열기 가득했던 내 마음도
정갈하게 식혀줍니다.
머릿속도 그 어느 때보다 맑아지는 듯했습니다.
덕분에 비 오는 날의 수채화 한 폭 담아봅니다.

2005년 8월. 부산 범어사에서

창문에 매달리는 빗방울들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들
그리고 산에, 바다에, 나무에, 풀잎에
무수히 떨어지는 빗방울들.
내 안에도 끝없는 생각의 빗방울들이 매달립니다.
 
어떤 것은 고뇌, 어떤 것은 환희
어떤 것은 그리움…
이들은 그대로 기도가 되어줍니다.
 
당신을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빗방울처럼
내 마음의 창문에 매달립니다.

이해인

기도일기 ‘나의 소망이 빗방울처럼’ 중 (<두레박>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소년시대

나는 50여 년간 ‘인간’을 찍어왔다.
길 위에서 만난 ‘소년’은 벌써 노인이 되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뭔가 수줍은 듯하면서도
순수함이 넘친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들에게
‘웃어 달라’ ‘이쪽을 봐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순간 포착한다.
연출하는 순간 진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1950~1990년대에 부산의 자갈치시장, 광안리 해변,
영도 골목, 부산역 등에서 만난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은 이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최민식

막내 동생을 번쩍 안아 드는 큰오빠의 얼굴에 행복이 넘친다. 자전거 뒤에 예쁜 여동생을 태운 오빠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신문도 팔고 우산도 팔지만 삶의 고난보다는 삶의 희망이 피어난다. 우리에게는 더위를 피해 벌거숭이 아이들이 물장난을 쳐도 흉이 아니고, 순진한 아이들은 주인공에게 푹 빠진 나머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TV를 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거리에서, 골목에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다. ‘인간’을 주제로 카메라에 담아온 이유는 사진이 사람과 사람을 잇게 해주는 가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어주는 게 아니라 맺게 해준다. ‘인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저변에 깔린 따듯한 감정은 바로 ‘애정’이다. 나의 진짜 이야기는 인간의 사랑에 관한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진의 힘에 대한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는 마음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돕는 가운데 의지하고 위로받는 존재들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느 날엔가 진리에 눈을 떠 그들이 형제처럼 서로 배려하고 나누며 함께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모두가 어린이들의 환한 웃음처럼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사진 찍는 이유다.

사진가 최민식님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화가의 꿈을 안고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에드워드 스타이겐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접한 님은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지금까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왔습니다. 2008년 13만여 점의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여 민간기증국가기록물 제1호로 선정되기도 한 님은 한국사진문화상(1974), 예술문화대상(1987),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2000), 부산문화대상(2009)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인간> 시리즈 14집 외에 <낮은 데로 임한 사진> <다큐멘터리로 사진을 말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등 다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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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작가의 미공개작 사진 150여 점이 ‘소년시대’라는 주제로 전시 중입니다. 6월 13일부터 7월 8일까지 롯데갤러리 본점(02-726-4456)에서, 7월 20일부터 8월 13일까지 롯데갤러리 중동점(032-320-7605)에서, 8월 15일부터 9월 5일까지 롯데갤러리 대전점(042-601-2827)에서, 9월 19일부터 10월 11일까지 롯데갤러리 안양점(031-463-2715)에서 열립니다. 사진 제공 _ 롯데 갤러리 본점

내 사랑 병어 각시

옛날 옛적 바닷속 마을에, 입이 아주 큰 노총각 대구가 살고 있었다. 대구란 물고기가 원래 몸뚱이에 비해 입이 우스꽝스럽게 크긴 하지만, 노총각 대구는 정도가 더 심했다. 웃으면 입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중매쟁이 문어 할매가 대구네 집에 찾아와 물었다.

“대구야, 병어 각시 얻어주까?” 병어? 대구는 눈을 끔뻑이며 병어 아가씨를 그려보았다. 바다 마을 물고기 중에서 입이 제일 작은 병어. 그 귀엽고 섹시한 입술을 상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대구가 커다란 입을 활짝 벌려 웃으면서 대답했다. “으흐흐흐흥.”

병어 같은 아내와 함께 산 지 스무 해를 넘긴 어느 날, 밥상머리였다. 아내는 사과를 깎고 있었고 나는 탈모 방지용 검은콩 가루 한 숟가락을 물에 타서 휘휘 젓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어! 사과 한 조각이 없네?” 나는 접시에 놓인 사과 조각들과, 아내가 깎고 있는 사과 조각을 재빨리 눈으로 조립해보았다. 그랬더니 온전한 사과 한 알이 되었다.

“딱 맞네, 뭐.” 아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과 조각들을 열심히 헤아렸다. 그러더니 또 실눈을 뜨고 말했다.

“아닌데… 한 조각이 없는데… 당신이 먹은 것 아니야?” 멈칫했다. 밥숟가락 놓고 난 후의 상황이 헷갈렸다. 아내가 단호하게 치고 나왔다.

“아까 당신이 먹었잖아?”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한 조각을 먹어 치운 게 아닐까. 내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문 채, 살그머니 혀를 굴려 입속에서 사과 흔적을 찾아보았다. 깔끔했다. 그때 아내가 갑자기 ‘어머, 어머’ 하더니 저 혼자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갑자기 자기가 먹은 기억이 나서 웃음으로 실토한 것이다.

하지만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며칠 전 아내는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아프다고 하였다. 밤중에 화장실에 가다가 식탁 다리에 부딪힌 후,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른 병원에 가라고 닦달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병원에 가서 발 깁스를 하고 왔다. 그리고 이상한 신발도 한 짝 얻어 신고 왔다. 발가락 골절 보호용 플라스틱 신발이었다.

아침에 아내는 오른쪽 발에 단화를, 왼쪽 발에 파란색 플라스틱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출근길에 나섰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니 철부지 병어 아가씨 같았다.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얼른 나아야겠다는 일념만 가득한 억척 아줌마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이제 착각과 건망증은 짓궂은 손님처럼 우리 부부를 찾아올 터이다. 두부 자르듯 명쾌했던 살림살이도, 콩나물 다듬듯 조심스러울 것이다. 이제 담담한 관용과 유쾌한 농담이 필요한 때다.

최형식

별들에게 묻다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가르쳐준 것은  밤하늘의 별빛이다.

어렸을 때 가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어느 시골 역사의 철로 가에서 한뎃잠을 자게 됐는데, 밤하늘의 은하수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그 은하수와 별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이 세상이 정말 이상한 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중1 겨울에 학교를 관뒀습니다. 큰형이 대학에 붙어 그 아래로는 학교 다닐 형편이 못 되었거든요.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는 아니었기에 혼자 구두도 닦고 ‘아이스께끼’도 팔았어요. 그 무렵 때로 정처 없이 가출도 한 거지요. 그런데 3~4년을 그러고 나니까 이렇게 살아선 안 될 것 같다는 자각이 들더군요. 검정고시로 뒤늦게 고등학교를 마친 후, 무작정 상경해서는 첫 직장으로 출판사 편집부에 들어갔어요. 그때가 21살, 70년대 초였죠.

자취하던 암사동에서 영등포까지 버스를 갈아타가며 하루 4번 한강을 건너 출퇴근했어요. 그렇게 또 한 10년쯤 살다 보니, 인생이 참 싱겁더라구요. 서늘한 바람이 쉬잉 불던 어느 가을날, 뭔가 할 게 없을까 하다가, 학교나 다시 가보자 해서 뒤늦게 책을 잡았습니다.

다방에서, 만원 버스에서 낱장으로 찢은 대입 참고서를 들여다보며 30살에 성균관대 영문학과 야간에 들어갔습니다. 우주와 별을 좋아해서 책까지 쓴 사람이 웬 영문학과?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말이 딱히 없어서 그러죠, ‘영문’도 모르고 갔다고.

생각해보면 나는 그 어린 시절부터 도대체 우주z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고 별빛에 취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별은 우주의 주민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요.

우주는 한마디로 내가 사는 동네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다를 바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이 우주라는 동네가 어떻게 생겼나 알고자 한 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우주에 대해서는 유서 깊은 질문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주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 속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누구에게나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스물이 갓 넘은 시절, 이런 갈증을 풀어줄 천문학 책을 찾아 청계천 헌책방들을 뒤지며 돌아다녔지만 갈증은 쉬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밥벌이로 출판을 하며, 심심찮게 천문 관련 책들을 기획하고, 종당에는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천문 잡지 ‘월간 하늘’을 창간하기도 했습니다.

나이 오십도 되기 전에 강화도 산속으로 들어간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늘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게 출판사 편집실인데, 그날도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문득 높은 아파트 베란다에 누런 조등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는 걸 봤지요. 순간 이런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아, 나는 아파트 안방에선 죽지 말아야 할 텐데….’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도시 아파트 안방에서 죽는 것. 이게 내 인생 최악의 시나리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기가 오자 미련 없이 출판사를 접었지요.

우리 집은 강화도 서쪽 끄트머리의 퇴모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속에 있습니다. 해만 지면 사위가 적요하고, 달이 없는 밤에는 한 치 앞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겨울날 밤 열 시쯤 마당에 나서면, 전깃줄에 걸린 방패연처럼 남천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별자리 하나를 늘 만납니다. 바로 오리온자리. 지구 행성의 남천과 북천 통틀어 하늘을 뒤덮고 있는 88개 별자리 중에서 유일하게 일등성 두 개를 뽐내고 있는 별자리지요. 게다가 가슴께에 아름다운 성운까지 하나 품고 있지요. 예쁜 나비 모양을 한 오리온 대성운입니다.

지금도 별들이 태어나고 있는 이 성운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약 1,500광년. 초속 30만km의 빛이 1,500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거립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오리온 대성운은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합병하던 무렵인 1,500년 전의 모습인 거지요. 하지만 이 정도 거리도 대우주에 비한다면 큰 바닷속의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밭을 거닐다 보면 우주의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37억 년 전 ‘원시의 알’에서 태어난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속도로 팽창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우주에서 원시 수소 구름들이 수억, 수십억 년을 서로 뭉친 끝에 수천억 개가 넘는 은하들을 만들어내고, 그 수천억 은하들이 지금 이 광막한 우주 공간을 어지러이 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또한 그 별의 일부로 몸을 만들고 생명을 얻어 태어났습니다. 별이 없으면 인류도 없습니다. 별과 인간의 관계는 이처럼 밀접한 것입니다.

1. 오리온자리

2. 오리온 대성운

3. 오리온자리 남쪽 말머리 성운

광대무변한 우주와 억겁의 시간을 생각하노라면, 우리네 삶이란 게 얼마나 티끌 같고 찰나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덧 ‘나’라는 존재는 무한소無限小의 점 하나로 소실되고, 종국에는 딱히 ‘나’라고 정의할 만한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이 ‘나’라는 존재는 대우주 속에서 그 어디에 그 무엇으로 끼워 넣어도 하등 다를 게 없는 그런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지요. 그러면 마침내는, 나와 너라는 차이까지 흐릿해지고, 물物과 아我의 경계마저 아련해지고 맙니다.

이 지구에 사는 우리는 너무나 눈앞의 현실에 함몰된 나머지, 머리 위의 저 엄청난 현실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말하자면 우주 불감증이지요. 눈앞의 것, 땅 위의 것에만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그래서 뭔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극단적인 생각들을 합니다. 시각을 달리하면 또 다른 세상이 있는데 말입니다. 별을 보고 우주를 사색하다 보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과 인생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때로는 버거운 인간사도 좁쌀같이 보이고, 세상 앞에 쫄지 않고 힘내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년은 해왕성이 인간에게 처음 발견됐을 당시의 그 자리로 165년 만에 돌아온 해였습니다. 태양 주위를 280억km 여행하고 돌아온 해왕성이 지구를 보며 이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 지난번 이 자리에 왔을 때 본 지구 사람들이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네….” 우리가 우주를 사색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가를 깊이 자각하고, 장구한 시간의 흐름과 무한한 공간의 확대 속에서, 자아의 위치를 찾아내는 분별력과 깨달음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곧 ‘나’를 놓아버리고 ‘나’를 비우는 일이겠지요.

크기 비례로 보여주는 태양계 가족들. 태양 밖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 있다.

사진 출처 _ NASA

이광식님은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30여 년 동안 출판계에 종사했다. 저서로는 <천문학 콘서트> <한국근현대사사전> <아빠, 별자리 보러 가요> 등이 있으며 현재는 강화도 서쪽 퇴모산에서 별을 보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오정면, 문달님 부부, 정글 속 원주민 찾아 떠나는 27번째 여행

경북 상주에 사는 오정면(77), 문달님(75) 부부는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의 정글 속 원주민들을 찾아 떠난다. 농한기 3개월여 동안, 마을마다 다니며 유기농법을 가르치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치료해주기 위해서다. 26년째 이어지는 변함없는 사랑에 원주민들은 이 부부를 ‘시가르바루(새 정신적 지도자)’, ‘아이윤싱가(사랑의 어머니)’라 부른다. 정글 속 원주민들과 만나면서 삶의 또 다른 길을 보았다고 말하는 노부부. 올겨울, 27번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오정면, 문달님 부부를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매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노부부의 여행 준비는 시작된다. 미리 준비해놔야 정작 떠날 때 빼놓고 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로 다니는 곳은, 보르네오 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보르네오 섬 일대는 정글과 밀림이 울창한 천혜의 원시림으로, 이들 부부가 주로 가는 마을은 말레이시아령과 인도네시아령의 경계 지점에 분포되어 있다. 깊은 산속엔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 마을이 있다. 두세 시간 때로는 7~8시간을 걷고, 거센 급류가 흐르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 다음 마을이 나오기도 한다. 워낙 방문해야 할 마을이 많기에 이들이 한 마을에 머무는 것은 3일 정도.

노부부가 이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87년이었다. 오정면 선생은 그해 봄 필리핀에서 열린 URM(Urban Rural Mission, 도시농촌선교) 국제 모임에, 한국 농민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건 원주민들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무모한 벌목 작업으로 산림은 황폐화돼가고, 가난과 질병, 무분별한 문명의 피해에 당하고만 있었던 원주민들. 게다가 무계획적인 농사법으로 겪어야 하는 폐단들도 컸다.

나 역시 평범한 농사꾼이지만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사명감을 느꼈고, 이들 부부는 그해 추수를 끝내자마자 무작정 원주민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문달님 여사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하나 버리지 않는다. 어린 콩잎은 장아찌로 만들고, 가을이면 감 껍질을 얇게 벗겨 햇볕에 말려놓는다. 그러면 한겨울 영양 간식으로 그만이다. 대개는 버려지는 바스락거리는 양파의 붉은 겉껍질도 물에 넣어 끓여 마신다. 그러면 각종 성인병에 특효약이기도 하다.

처음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 어떠셨는지요?  

보르네오 섬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광대한 자연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는 원주민들의 삶은 온전히 자연 순응적이었죠. 그런데 이곳에도 문명화 바람이 불면서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가난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실제로 마을의 거의 50퍼센트의 아이들이 영양실조 상태예요. 그런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상당수의 마을을 채우고 있었어요. 그게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시금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마을에 가면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우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줘요. 주로 맨발로 다니니까, 피부병도 많고 벌레에 물리거나 뾰족한 것에 찔린 상처가 심각한 질환으로 발전하기도 하거든요. 연고를 발라주거나 상처 소독, 간단한 약 처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해줍니다.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도시의 병원에 데려가고요. 그리고 유기농법을 전해요. 땅을 살리면서 농사짓는 법, 우리가 평생 농사지으며 배운 것을 알려주는 거지요. 마을 청년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유기농법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약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도 해요. 희망이 없으니까 어린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이가 뻘겋게 되도록 ‘쉘’이라는 마약을 씹어댑니다. 그렇게 중독되면 이빨이 모두 빠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변화가 있나요?

변화된 마을이 참 많아요. 보통 한 마을을 3년에 걸쳐 3번을 가요. 마약이나, 농약을 치는 마을의 경우, 계속해서 강조하니까 세 번째 가면 거의 안 하더라고요. 정부에서 주는 유기농 인증서를 받아놓은 마을도 있고요. 자생력이 많이 생기지요. 대한민국 시골 마을의 그저 가난한 농부인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구나, 감동을 느끼는 순간도 참 많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부족이 이반족이었는데, 참 다정다감합니다. 가까이 와서 자기들 살길도 가르쳐달라고 하고 어째 살아야 하는가 묻고. 점점 소문이 나면서 멀리서 찾아오는 부족도 있고요. 같은 마을을 두 번 세 번 방문할 때쯤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환영하고 그날은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지요.(웃음)

특히 오정면 선생 부부가 힘을 기울이는 일 중 하나는, 그곳에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시키는 것이다. 특히 언청이라 불리는 구순구개열 아이들, 심장병에 걸린 아이들을 10여 명도 넘게 수술을 시켰다. 비행기 값과 수술비 등 일체 모든 경비를 노부부가 내야 하기에, 눈에 밟히는 아이들은 많지만 매년 한 명씩밖에 하지 못한다고 한다.

빈민 지역일수록 구순구개열 환자가 많은데,
원주민 마을에는 유독 그런 아이들이 많다.
어린이 손님이 병을 고치러 한국에 오면
문달님 여사는 더욱 분주해진다.
뭐를 잘 먹는지, 어떤 것을 먹여야
살을 찌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온 아이들이거나 기형으로 마음의 상처가
깊이 박힌 아이들이기에 더 신경을 쓴다

입천장이 뻥 뚫린 기형으로 태어나 괴물이라 놀림받던 아이들이 수술을 받아 말도 하고 밝은 얼굴을 찾게 되었을 때, ‘예전하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앞으로 두 분처럼 남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받을 때, 간혹 우리말로 서툴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쓴 편지를 받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느새 이들 부부는 현지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오정면, 문달님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시가르바루(새 정신적 지도자), 아이윤싱가(사랑의 어머니)라는 애칭으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유명한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원주민 어린이들도 종종 만나곤 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면요?  

캐서린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원주민 마을에서는 드물게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인데, 심장병 말기 선고를 받고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을 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막 뛰어다니는데,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5,100만 원이라는 엄청난 수술비가 나왔지만, 그 돈도 결국 해결이 되더라고요. 몇 년 지나서 다시 캐서린을 만났는데 중학교 성적표를 보여줍디다. 전체 학년 중에서 8등이라고. “나는 항상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이다음에 두 분 은혜에 보답해야 하니까요” 하는데 뭉클했지요. 지금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해요. 그걸 계기로 많은 것을 느꼈어요. 정말 돈이 전부가 아니구나, 뜻이 있으니까 길이 있구나, 간절함과 사랑만 있으면 다 열리는구나.

우렁이 농법으로 짓는 논.
이들 부부는 거름조차도 가축의 배설물이나 인분은 쓰지 않는다. 항생제 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사용하는 것이 깻묵과 발효시킨 음식물 찌꺼기. 매년 먹을거리를 키워내는 땅을 소중히 해야 한다 여긴다.

보람도 있으시겠지만, 힘들 때도 참 많을 것 같아요.

15년 전쯤 그곳 풍토병인 댕기 피버에 걸려서 엄청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고열에, 등과 눈에 심한 통증이 오더라고요. 이렇게 죽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힘들게 도시의 보건소에 찾아갔어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를 신문에서 봤다며, 맨 앞줄에 옮겨 치료를 받게 해줬지요. 사람들이 같이 걱정해주고.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같은 거요. 하지만 그날 이후 더욱 겸손해져야 함을 느꼈지요.

그 먼 곳까지 한결같이 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사람들의 또 와달라는 간곡한 부탁 때문이지요. 우리 부부를 1년 내내 기다린대요. 그리고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계속 여행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많이 돌았지만 아직 3분의 1도 못 갔어요. 나이는 들어가는데,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그래도  도와달라고 할 데라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글 속 사람들은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삽니다.

사실 원주민들을 돕기 이전에도 이들 부부에게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정면씨와 문달님씨는 같은 신학대학에 다니며 만났다 한다. “나보다는 남을 더 사랑하면서 살자”는 가치관과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 신기할 만큼 통했던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1960년 오정면 선생의 고향 경북 상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야학 운영, 농민 단체 활동 등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일상생활처럼 해왔다. 마을마다 만연해 있던 동네 술집을 몰아내고, 도박을 없애고, 지붕을 개량하는 일들에도 늘 앞장섰다. 1남 5녀를 키우면서 물질적으로는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원주민들과 나누는 일에 함께할 만큼 잘 성장해주었다.

2004년, 노부부의 이야기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 이후로 이들 부부의 여행길은 ‘함께하는 사랑’이 되었다. 익명으로 성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매년 기부금 봉투를 선뜻 내놓는 딸과 사위들, 아이들의 수술을 해주는 병원들, 여행길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함께하는 세상은 언제나 따듯했다.

세상에 따듯한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참 감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삭막하다 해도 안 그렇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속에 늘 사랑을 품고 살아야겠구나,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하는 걸 느껴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우리 지론이 ‘미리 걱정할 것 없다,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맡기면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더라고요.

부부의 도움을 받은 원주민들은 잊지 않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온다. 부부는 여행 중 들은 말들을 그때그때 메모하거나 물어보는 식으로 원주민 언어를 하나씩 익혀왔다. 단어장도 만들어서 자꾸 쓰고 외우면서 공부를 한다. 2005년에는 그동안의 여행 기록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동안 원주민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요?  

사람 사는 모습이 참 각양각색입니다. 그동안 많은 원주민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삶이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고, 그 마음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가 만난 원주민들도 비록 가난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행복이, 그들이 경험한 기쁨이, 우리가 아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더라고요. 사람이 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도 하게 됐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지금 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것도 좋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에,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우리 젊은이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두 처자에게’ ‘캐서린을 수술해준 세종병원 관계자 여러분께’….   부부는 시간이 되면 책상에 앉아 고마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한번은 너무 고마워 한 해 농사지은 쌀을 돌리기도 했다. 해가 갈수록 감사할 사람이 많아 일일이 마음을 전하는 것조차 버거워진다며 활짝 웃는다. 그만큼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증거 아니냐며. 모든 인터뷰는 남편에게 맡기고, 여성 농민들이 모여 작업하는 날이라며 자리를 비웠던 문달님 할머니가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여쭙자 “아유, 늙어서 뭘 알겠나”며 극구 사양을 했다. 그리고 짧게 남기신 한마디가 긴 여운을 남겼다. “그저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좀 더 남에게 덕을 끼치고 편하게 해주고, 저 사람보다 낮게, 다른 사람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거지.” 앞으로도 이 부부는 봄, 여름, 가을 차곡차곡 준비하였다가 눈발이 날릴 때면 어김없이 그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원주민들은 아이처럼 순박한 웃음과 함성으로 그들을 반길 것이다.

“시가르바루!” “아이윤싱가!”

‘미쳐야 그곳에 미칠 수 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향해 남음 없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의 일에 미친 100인의 손을 만나다

김용훈 42세. IT 업체 근무. <당신의 손은 무엇을 꿈꾸는가> 저자

수년간 IT 업체에 몸담고 있다 보니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랄까 따듯한 무언가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의 정점에서 ‘손’을 떠올렸다.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PR성 자랑 글에 질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입은 말이 많지만 손은 티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생각에 ‘따듯한 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난 손에 미쳐 2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고은 시인,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새 박사 윤무부 교수, 만화가 이두호, 씨름인 이만기, 디자이너 장광효, 투수 송진우, 형사 고병천 등 이미 유명한 분들뿐만 아니라 순댓국집 할머니 오인숙, 갓 태어난 아기 김비취, 극장 간판 화가 이태동 등의 손을 만나면서 내 자신도 성숙해감을 느꼈다. 그야말로 수업료 안 내고 인생 수업을 듣는 참 공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자의 손까지 포함해서 총 100명의 손. 직접 99명을 만나면서 모든 분들의 손에서 감동을 받았지만 특히 지금 떠오르는 몇 분의 손이 있다. 얼마 전 은퇴한 이종범 선수의 손은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나이의 손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굳은살과 상처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의 손을 보고는 감동이 그칠 줄 몰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목련꽃 봉오리와 같은 그녀의 손은 아름다우면서도 가냘파 보였지만,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순간 전해지는 힘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여든 무렵의 한지장 장용훈 선생님의 손을 만날 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한지로 천년의 향을 만들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다 보니 이젠 허리가 굽고 다리도 불편해서 제대로 서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장인은 어쩌면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즐기는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손을 만나는 순간엔 그 손이 앞으로 어떤 것을 쥐고 살아갈 것이며 어떠한 이들의 손을 맞잡고 살아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그 순간의 순수함을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라본 내 손….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든 내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나를 훈계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삶인 만큼 다시금 더 알차고 다부진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게 되었다.

100인의 손을 통해 얻은 결론은 모두가 자신의 일에 미쳐 있다는 것.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진정으로 스스로 좋아서 몇 십 년 그 일만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원리는 통하리라 생각한다. 무얼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일에 빠져 열정적으로 임한다면 언젠가는 진정으로 찬사를 받게 될 것이다. 요즘은 자신의 줏대를 갖고 살아가는 소신쟁이보다 다른 이들의 눈치만 보는 눈치쟁이들이 많은 것 같다.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안정적인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다. 많은 이들이 무언가 좋아서, 미쳐서, 빠져서, 즐긴다는 단순하지만 행하기 어려운 이 원리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곽수연 작. <팬더삼춘 이야기> 115×88cm. 장지에 채색. 2011.

‘자나 깨나 노래 생각’ 노래하는 경찰입니다

송인억(예명 송준) 45세. 서울중부경찰서 근무

어릴 때부터 워낙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라디오에서 노래만 나오면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곤 했다. 시골에서 4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을 도우며 농사일을 하고, 풀을 베고, 소를 키우고,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를 할 때도 내 입에선 노래가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라디오 옆에는 노트와 연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적기 위해서다. 노래가 나오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나는 마루에서, 둘째 누님은 아궁이에 불을 때다 말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신없이 받아 적느라 밥을 태운 적이 도대체 몇 번인지^^; 행여 놓칠세라 서로 한 소절씩 받아 적어간 노래가 노트 3~4권 분량. 100여 곡이 넘었다. 적어놓은 가사를 따라 부르며 노래를 외워나갔다. 당시엔 거의 트로트가 대세였는데, 나의 18번은 남진의 ‘님과 함께’, 나훈아의 ‘고향역’ 등이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가수를 꿈꾸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24살에 경찰이 되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경찰이 되었지만, 가수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노래와 자꾸 멀어지고, 성격마저 딱딱하게 변해가면서 마음 한구석엔 ‘이러다 내 노래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닌가, 나를 찾아야겠다’는 절실함은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13년간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2006년 서울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발령받은 근무지가 장충파출소였는데, 그곳에서 배호가요제가 열리는 게 아닌가! 장충단공원은 가수 배호씨의 히트곡인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 나오는 곳으로, 그 노래를 기념하여 가요제를 열고 있었다. 워낙 중·고등학교 때부터 배호 노래를 좋아해서 마스터한 것만 30곡. 그야말로 준비된 가수가 바로 나였다. 처음엔 자신이 없어 주저하다가 2008년 5월에 참가 신청을 했다. 바로 코앞에서 가요제가 열리는데도 머뭇거리면 점점 가수의 꿈이 멀어지겠구나 싶어, 떨어져서 망신을 당하더라도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결국 1, 2차 예선을 거쳐 15명과 겨룬 끝에 강진의 ‘남자는 영웅’이란 노래를 불러 금상을 수상하면서 내 나이 42살에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9년 3월, 드디어 첫 음반이 나왔다. 신곡 2곡, 기성곡 3곡이 담긴 나의 첫 앨범. ‘아, 이제 진짜 제대로 된 가수구나…!’ 너무나 행복했다.

가수가 되고부터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전에는 주로 지인들의 부탁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경사 ‘송인억’에서 가수 ‘송준’이란 이름으로 노래 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경찰 제복을 입고 노래 봉사를 나가다 보니 경찰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친근감 있게 해준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주로 찾아가는 곳은 장애노인,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행사, 복지회관, 노인분들 위안 잔치다. 주말은 물론이고 주간 근무가 끝나면 가고, 야간 근무 시작하기 전에 가고, 밤새고 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지만, 어르신들이 흐뭇해하시고 좋아하시니 자꾸 찾아뵙게 된다.

나는 여전히 파출소 지구대에서 근무하면서 112 신고가 들어오면 현장으로 출동한다. 하지만 내 인생에 노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경찰 업무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노래에 대한 열정을 경찰 진급하는 데 썼으면 더 큰 명예를 얻었겠지만, 나는 내 노래로 족하다. 그 행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렇듯 노래는 내 삶이자, 인생이고, 친구다.

피는 못 속인다고 얼마 전 아들이 전국노래자랑 강북구 편에 나가 인기상을 타왔다. 그리고 며칠 전엔 그 아들과 노인요양원에 가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아들과 함께 노래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이 되고도 항상 입에서 떠나지 않았던 노래, 어쩌면 내 인생은 타이틀곡인 ‘자나 깨나 당신 생각’이란 제목처럼, ‘자나 깨나 노래 생각’이 아니었을까.

곽수연 작. <공작부부를 만나다> 63×127cm. 장지에 채색. 2011.

내 나이 칠십 때 ‘영화’에 푹 빠지게 되었지요

이윤수 78세. 영화감독.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1동

나는 새벽 6시면 운동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날마다 안양과 서울을 오가며,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기술을 배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영화를 촬영한다. 작은 캠코더를 들고 주인공을 찾아간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는 57세 때 중풍으로 쓰러진 81세의 한 할아버지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가제로 정해둔 것은 <거북이의 꿈> 혹은 <어제 오늘 내일>이다.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된 몸으로, 그분은 매일같이 도로 가운데, 버스 정류장에 안전을 위해 설치된 철대를 잡고 운동을 하신다.

시작점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27년간을 그렇게 운동을 해오셨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질문에 “그동안 너무 고생한 부인한테 고마워서 고물이라도 팔아서 보답하고 싶어서”란다. 그렇게 운동을 한 덕분에, 그나마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가진 소박한 꿈,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노력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안선생님이라는 분이 촬영을 도와주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찍을 때 시나리오 쓰기, 콘티 잡기, 촬영, 편집하기 거의 다 내 몫이다. 벌써 여섯 번째 영화여서 그런지, 조금 더 기술이 생겨, 첫 장면부터 편집, 음악 등 더 세심하게 준비한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온통 그 생각뿐이다. 나이 든 할머니가 영화도 찍고, 포토샵이니 스위시니 그런 프로그램도 잘 다룰 줄 아니, 존경한다 하고 부러워하는 젊은 사람도 많다.

나도 젊은 시절엔 세 아이 키우며 사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데 내 나이 56세 때 남편이 돌아가셨다. 너무 막막해서 이불 가게를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아이들이 자리를 잡으며, 70세쯤 가게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힘든 시기가 왔다. 한창 바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외로움, 좌절감 같은 게 몰려왔다. 자꾸 남편 생각이 나서 남편이 묻힌 국립묘지에 찾아가곤 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한날은 딸이 컴퓨터를 배워보라고 하였다. 이 나이에 할 수 있을란가 싶었지만, 한번 해보자 싶어 동사무소에 개설된 컴퓨터 기초반에 갔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 그 강좌를 두 번을 더 반복해서 들으며, 열심히 연습하니 감이 잡혔다. 점점 컴퓨터는 나의 남편이자 애인, 친구가 되어갔다.

그러다 동영상을 배웠고 영화까지 찍게 되었다. 처음 찍은 것이 <국가유공자 미망인>이라는 다큐였다. 남편이 국가유공자여서 평소 주시했던 주제였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남편이 전사한 사람 등 남편 없이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첫 작품이어서 많이 흔들렸는데도,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주최하는 제2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본선에 입선을 하였다. 그때는 노인영화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뭐만 보면 이건 영화 소재로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질 좋은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기술도 더 부지런히 배우게 되었다. 첫 작품 이후, 월남전에 가서 남편이 죽은 두 미망인이 연인처럼 지내는 이야기를 담은 <내 짝꿍 정순아>, 그리고 독거노인들과 소년소녀가장들을 돕는 70세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천사의 향연>도 제작했다.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편집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기도 하고, 때로 냄비를 두 개나 태워먹은 적도 있을 만큼 몰두하며 한 작품, 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작품인 <황혼의 열정>에서는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열정적으로 사니까 이제는 외롭고, 힘들 시간도 없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력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다.

보통 한 작품을 만들 때 삼사 개월 정도가 걸린다. 출연자들이 카메라를 의식하기에 한 장면을 담기 위해 수차례의 촬영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하다못해 다섯 살만 아래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실망하진 않는다.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그때까진 인생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이대로 늙는 게 아니라 열정을 잃어버리면 늙는 것이기에.

곽수연 작. <다도> 145×125cm. 한지에 채색. 2008.

‘미쳐야 그곳에 미칠 수 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향해 남음 없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사람들의 이야기

비빔밥집 아저씨,‘비빔’에 미쳐 이름도 ‘비빔’으로

유비빔 49세. 전주 비빔소리 운영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비빔에 미쳤다고 한다. 단지 비빔이 좋은 것뿐인데 너무 많이 좋아하다 보니 미쳐 보이나 보다. 내가 비빔에 미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원래 나는 비빔이 아니라 소리에 미쳐 있었다. 소리가 좋아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부 활동을 하며 드럼을 연주했다. 그런데 귀에 물이 들어가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아무리 연습을 해도 정확한 연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때마침 연주의 꿈을 포기하며 힘들어하는 나에게 위대한 스승님이 나타나셨다. 바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드러머이자 타악기 솔리스트 고 김대환 선생이다. 선생님은 “앞으로는 소리의 시대가 올 것이다. 소리를 찾아라”는 말씀을 주셨다.

소리를 찾는다는 게 뭐지? 도대체 소리의 정체가 뭐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세계소리축제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소리문화의 전당 앞에서 음식점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늦둥이 유소리도 낳고, 내가 좋아하는 소리에 미쳐 연구를 하다 보니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소리는 비빔이 아닐까? 무슨 소리든 나려면 비벼야 했다. 성대와 공기가 비벼야 목소리가 나고, 장구 가죽과 장구채를 비벼야 장구 소리가 난다. 바이올린도 비벼야 소리가 난다. 모든 소리는 비빔(마찰)이 있어야 생성이 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찾아낸 소리의 정체였다. 이렇게 해서 ‘비비지 않고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비빌 수 없다’는 비빔소리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빔과 소리는 동시에 발생한다는 원리도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비빔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비빔을 연구하니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비빔이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다 비빔하고 연관시켜서 보게 되었다. 음식점의 메뉴도 각종 비빔밥으로 통일하였다. 지역감정도 비벼야 나라가 화합이 되고, 남북도 비벼야 통일이 되고, 공부도 책을 열심히 비벼야 하고. 무슨 말끝마다 비빔, 비빔, 비빔을 달고 사니,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급기야 “그렇게 비빔이 좋으면 이름도 비빔으로 바꾸라”고 권유하였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비빔문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는 사유로 개명 신청서를 냈는데, 3개월 후 개명이 승낙됐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2007년에 결국 나의 이름은 유인섭에서 유비빔이 되었고, 그때부터 ‘비빔’에 대한 나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 후로 영어와 한글을 조합한 비빔문자를 완성시켰고(전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 비빔세계지도 등 비빔AR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비빔 전시회를 열고, ‘세계를 비벼라’라는 주제로 강의도 하였다.

그동안 모아놓은 비빔 관련 파일이 약 1만 장, 비빔 관련 특허만도 벌써 40여 개가 넘어 전주 기네스에도 신청된 상태다. 그리고 지금은 자칭 비빔대학에 재학 중이다. 비빔대학은 바로 특강, 포럼, 세미나, 워크숍 등을 하면서, 비빔철학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직업도 비빔 재료처럼 많았던 것 같다. 보신탕집 신발 정리, 미용사, 클럽 연주자 등등. 그런 경험들이 비벼져, 지금의 비빔형 인간인 유비빔이 탄생한 것 같다. 길을 걸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잠이 들기 전에도, 화장실에서도 늘 비빔만을 생각한다. 누구나 이렇게 무언가에 미쳐 생각하고 연구하고 행하다 보면, 비빔문화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열심히 디자인을 비비고 생각을 비비고 스토리를 비비고 여야, 종교, 경제, 양극화도 비벼서 상생 화합 통합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봅시다! 비빔!

곽수연 작. <서중자유천종속Ⅰ> 110×70cm. 장지에 채색. 2008.

‘우리말’에 미치다

강상철 40세. 회사원.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3동

예전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크게 글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그날 있던 일을 끄적거리는 게 좋았다. 그러던 몇 년 전,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어느 잡지에 글을 기고했는데, 채택이 돼서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을 했다. 순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일반인의 글을 받아 소개하는 잡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이런 데 글을 보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일들, 재미난 일에 대해 써서 여러 군데 기고했지만 채택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생각지도 않게 어느 잡지에 당선됐을 때의 기쁨이란. 생전 처음 원고료도 받고 내 글이 실린 책도 받으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 이후로 더 열심히 쓰고, 더 다양한 잡지에 글을 보냈다. 한마디로 ‘원고 기고하기’에 미쳤다고 할까.

처음에는 선물 받는 재미가 컸다. 그런데 점점 이왕 보내는 거 제대로 써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도 많이 읽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제대로 하고 싶어, 국어대사전 등 우리말 관련 서적을 많이 찾아보았다. 제대로 된 표현인지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쳤다. 우리말의 세계는 어려웠지만, 오묘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생기자, 점차 무심히 지나친 거리의 수많은 문구들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맞춤법은 맞는지, 표현은 올바른지 등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신문을 읽을 때나 TV를 볼 때에도 이상한 건 고쳐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스스로 내 말버릇을 점검하기도 했고, 친구들이 잘못 말을 하면 즉석에서 고쳐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건강식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 가게 벽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중탕 일절, 한약 다려 드립니다.’ 매일 보는 이 문구도 내 신경을 건드렸다. ‘일절’은 결코, 전혀의 뜻으로 부정하거나 금지하는 말과 어울려 부사로 쓰인다. 그리고 ‘다리다’는 ‘구김살을 펴거나 줄을 세우려고 인두나 다리미로 문지르다’는 뜻이다. 고로 위의 문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 된다. 바른 표현은 ‘중탕 일체, 한약 달여 드립니다’다. ‘일체’는 모든 것, 온갖 것의 뜻이고 ‘달이다’는 약초 따위를 끓여 우러나게 하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는 잘못 쓰인 우리말들이 정말 많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이 쓰는 ‘피로 회복제’도 잘못된 말이다. 회복이란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인데 피로를 회복시킨다는 말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쓰려면 피로 해소제 혹은, 원기 회복제가 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우리말들이 무의식중에 잘못 쓰이고 있었다.

“참 유별나다”는 소리도 듣지만 그렇게 잘못 쓰이는 우리말을 보면 한국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아프다. 특히 요즘에는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바르지 못한 우리말을 알려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어찌 됐건 우리들이 바른 우리말을 위해 조금씩만 더 관심과 애정을 갖는다면 우리말 본연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예전에는 무관심했던 주변 사람이나 일들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관심을 가지면 더 잘 보이고, 더 사랑하게 된다는 걸 체득한 덕분이다. 이래저래 나는 우리말과 글쓰기가 참 좋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말에 미쳐볼까 한다.

곽수연 작. <도원경Ⅰ> 91×116.7cm. 장지에 채색. 2010.

‘멋진 요리사’ 되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할 거예요

김재현 18세. 고등학교 2학년. 한국조리예술학원

나는 중학교 때는 잘하는 것 하나 없는 그냥 그런 학생이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늘 놀기에 바빴고 부모님과의 다툼도 많았다. 공부도 해보려고 해봤지만, 잘 안되니까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친구들하고 오토바이도 타고 담배도 피고, 부모님이 잔소리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당연히 성적도 하위권이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부모님 말씀처럼 ‘정말 나중에 뭐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때 영양사였던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공부는 못할지라도, 요리라면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요리사’라는 꿈이 생겼고, 한국조리과학고를 목표로 공부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장 열심히 했던 때였다.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해 여름 방학 때 엄청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일어나자마자 공부, 밥 먹자마자 공부, 계속 공부였다. 결과는 2학기 중간고사 때 바로 나타났다. 30명 중에서 12등, 반 이상이 오른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전 내신성적이 안 좋았기에, 조리고등학교는 떨어지고 말았다. 실망도 많이 했지만 이렇게 끝낼 수 없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요리 학원에 등록했다. 거기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철호 원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냈다. 정말 ‘요리사’라는 꿈에 미친 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한식 자격증을 준비했다. 채썰기 등등 칼질의 기본을 배운 후, 비빔밥, 무생채, 화전 굽기 등을 배웠다. 학원에서 배우면 집에 와서 또 연습을 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때로 밤새워 연습을 하고는 곧장 학교로 가기도 했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초반에 한식·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전주비빔밥축제에 나갔다. 콩자반, 죽순찜 등의 한식 반찬을 했는데, 뜻밖에 은메달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나간 향토식문화대전에선 단체전 대상을 받았다. 나는 늘 아무것도 못하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더 요리에 몰두했다. 생전 처음 부모님께 요리도 해드리고, 친구들을 초대해 파스타를 해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반대도 많이 하셨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하라고 격려해주실 때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 약 5개월의 맹연습 끝에, 올해 4월에는 싱가포르 국제요리 대회에 나가서 브런치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세계대회 최연소 수상자였다. 3일 뒤에는 국내 요리 대회에서 한식 뷔페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정말 신났다. 정말 하면 되는구나!

요즘 나의 뇌는 요리로만 채워져 있다. 목표가 생기니 다른 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영어도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한다. 요즘은 개인적으로 디저트에 관심이 많아서 제과 제빵 공부도 하고 있다.

나의 꿈은 프랑스 파리에 한식 레스토랑을 차려 외국인들이 한식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친구들도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요리를 하며 내가 느낀 것 중 하나가,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되고, 꿈을 이루기가 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곽수연 작. <부귀도Ⅰ> 143×75cm. 장지에 채색. 2010.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23)

그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도 세웠습니다.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매에 쫓겨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비둘기를 쫓던 매가 나뭇가지에 앉아 왕에게 말했습니다.

“그 비둘기를 내게 돌려주시오. 그건 내 저녁거리입니다.”

“이 비둘기는 돌려줄 수 없다. 나는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때 모든 중생을 다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속에 나는 들지 않는단 말이오?

나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내 먹이마저 빼앗겠다는 겁니까?”

매의 말에 왕은 난처했습니다.

하지만 차마 살아 있는 목숨을 죽일 수 없었던 왕은

선뜻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매는 비둘기와 똑같은 무게의 살덩이를 요구했습니다.

왕은 저울을 가져다가 베어낸 살덩이와 비둘기를 달아 보았습니다.

비둘기의 몸이 훨씬 무거웠습니다.

왕은 다른 쪽 다리의 살마저 베어 두 덩이를 합쳐 달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가벼웠습니다.

양쪽 발꿈치, 양쪽 엉덩이, 양쪽 가슴….

이상하게도 무게는 계속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온몸을 저울에 올려놓자 그제야 무게가 맞았습니다.

그러나 왕은 매를 원망하거나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을 베어내고 피를 흘려도 괴로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내 몸은 본래대로 회복되리라.”

이와 같이 맹세하자 왕의 몸은 순식간에 본래대로 회복되었습니다.

불경의 주석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왕은 곧 비둘기이기도 하고 매이기도 합니다. 부처가 되겠다 서원을 세운 왕은 몸을 내놓는 수행 과정을 겪지요. 결국 자신을, 욕심 덩어리들을 완전히 다 내놓자, 왕은 본래(부처)를 회복합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내 몸은 본래대로 회복되리라.” 진실이라 함은 남음이 없이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일 겁니다. 왕이 온몸을 올려놨을 때 그제야 비둘기의 무게와 맞았듯이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도 감동하는 것이겠지요.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 너머로 내 모습을 비춰봅니다.

 

 

빼기가 대안이다

생각이 우리 행동에 미치는 영향 흥미로운 실험들 (2)

정리 편집부 출처 <마음의 시계>(엘렌 랭어 | 사이언스북스)

생각을 바꿈으로써 몸에 다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엘렌 랭어는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생각보다 광대한 범위에서 ‘우리의 마음이 몸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흔히 운동을 하려고 나서면, 실제로 몸을 움직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더 건강해진 느낌을 받는다. 바로 ‘운동이 이롭다’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엘렌 랭어는 우리 몸에 불가피해 보이는 많은 질병들조차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실험들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운동’ 청소원의 의식 변화가 가져온 놀라운 변화

많은 신체 활동을 해야 하는 직업이 있다. 가령 호텔 객실 청소원의 경우, 각 방의 청소를 완료하는 데 20~30분이 소요되며 밀기, 팔다리 뻗기, 굽히기, 들어 올리기와 같은 움직임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들은 건강한 생활을 위하여 의사가 권하는 운동량을 충족하거나 초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본인들의 일을 운동으로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이들의 혈압, 체질량 지수, 체지방 비율 등 건강 지표는 지극히 열악하다. 필요한 양의 신체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운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객실 청소원들의 생각을 바꾼다면? 그래서 실험해 보았다. 먼저 실험군의 참가자들에게는 운동의 이득을 설명하고 그들이 매일 하는 업무가, 어떻게 헬스클럽에서 하는 것처럼 훌륭한 운동이 되는지 설명해주었다. 반면 대조군 참가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4주 뒤, 그들을 다시 찾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군의 경우 건강이 현저하게 향상된 것이다. 본인들의 업무가 훌륭한 운동임을 알게 된 지 불과 4주 만에 이들은 평균 1킬로그램의 체중이 줄고 두드러진 체지방 비율 감소를 보였다. 일 이외에 추가로 하는 운동은 없다고 했다. 반면 대조군은 그렇지 못했고, 체중과 체지방 또한 더 늘어났다.

나이와 연관성이 적은 ‘유니폼’이 미치는 영향

사회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대개는 그들이 속해 있는 맥락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도서관에 있을 때 축구 경기장에 갔을 때와는 다르게 행동한다. 맥락이 사전 자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을 의복으로 검토해보았다. 우리는 나이에 걸맞은지 생각하며 의복을 고른다. 예를 들어, 60세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으려 한다면, 대부분 입지 말라고 하나, 16세 소녀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유니폼은 일상적인 의복과 비교할 때 나이와 연관성이 적다. 따라서 직장에서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입는 사람들에 비해 나이에 관련된 신호에 노출되지 않을 것이고, 그 때문에 더 건강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이러한 가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1986년~1994년에 걸쳐 206개 직업의 질병 자료를 검토했다. 그 결과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질병이나 부상, 병원 진료로 인한 결근 일수가 적고, 더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곤하다’는 것도 학습된 것일 수 있다

심리학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피로의 정도를 생각해보자. 맥락상의 신호가 ‘틀림없이’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낸다면, 우리는 더욱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각자 친구들에게 팔다리 벌려 높이뛰기를 100회 또는 200회 실시한 뒤 언제 피곤해졌는지를 말해 달라고 했다. 그 결과 두 집단 모두 운동을 3분의 2쯤 진행했을 때 피로를 느꼈다고 응답했다. 즉 첫 번째 집단은 65~70개 정도 한 뒤에, 두 번째 집단은 130~140개 정도 한 뒤에 피곤해졌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가 시작과 중간, 끝의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주어진 과제에 체계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피로를 심리학적인 양상으로 관찰한 일상의 본보기는 수두룩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에너지가 전부 바닥이 나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오후 3시에 커피와 함께 즐기는 휴식 시간은 이 같은 ‘3분의 2 효과’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육체적인 한계로 여기는 상당수가

 

빼기가 나를 바꾼다

공황장애를 넘어서다

 

공황장애는 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병이다. 갑자기 어지럽고 모든 열이 머리 쪽으로 올라가 곧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상태에서 극도의 공포심을 느낀다.

그런 상태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축구장에서 함성 소리를 들을 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멈추거나 터널에 들어갔을 때 ‘이 차 안에 있으면 죽겠구나. 내려서 뛰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 내 몸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실제로는 전혀 쓰러지지도 죽지도 않는데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증상을 느끼게 된 건 십 년 전쯤이다. 너무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평소에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공황장애라는 병이 흔하지 않을 때라 감기 때문이다, 술 때문이다, 오진도 많았는데 계속 증세가 반복되자 정밀 검사를 받았더니 공황장애로 판명이 났다.

그때부터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증세가 호전된다기보다는 발작 순간을 모면하고 가라앉히는 것에 불과했다. 4~5개월간 계속 약을 먹으니 졸리고 멍한 상태가 지속되어 회사 업무도 절반밖에 처리를 못 하고 사회생활도 어려웠다.

결국 2009년 가족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마음을 버리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가장으로서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압박을 이겨내려고 술을 많이도 마셨다. 그것이 공황장애를 키워주고 있었다.

특정 상황이 되면 나타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 자체가 스트레스였기에 살면서 쌓아왔던 모든 것을 계속해서 버렸다. 공황상태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힘들었던 경험, 불안 초조도 다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원래 없는 것임을 100퍼센트 확신하는 순간 어떤 인지치료보다도 쉽게 공황상태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버리면 버릴수록 증세가 나아져 약도 끊고 그렇게 좋아했던 술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회계사무실을 운영하면서 항상 적대심을 갖고 대하거나 매사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것이 많이 없어지고 째려보는 것 같던 내 인상도, 까탈스럽고 예민했던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혹여라도 공황상태 조짐이라도 보이는 듯하면 아예 미리 그런 스트레스와 마음들을 없애서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 묶여 있던 마음에서 벗어나 그 끔찍했던 공황장애를 넘어서게 된 것이 꿈만 같고 너무나 감사하다.

요즘 중년의 가장들에게 특히 공황장애가 많은 것 같다. 그 고통을 겪어봤던 한 사람으로서, 그것이 마음의 병임을 아는 한 사람으로서 기도한다.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이 하루빨리 그 원인을 알고 버려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옥영수 53세. 회계사무실 운영. 부산시 남구 용당동

-깨침이란-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글, 그림 우명

가짜인 마음의 세계에

가짜가 버려진 만큼 참으로 화할 때

알아지는 것이 깨침이다

자기의 죄업을 사한 만큼 진짜가 드러나니

이것이구나 하며 아는 것이 깨침이다

성경에 보면 마음이 믿어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도

깨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가

참이 되어질 때까지는

많은 것을 깨치고 알아진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세속은 혼탁하나

자연의 소리만

나의 심신을 쉬게 하구나

사는 자는 세파에 고달파 하나

정녕 자기의 마음속에 살아

고달픈 이유인 줄 모르고 있구나

가도 가도 갈 길이 없는 자가

바쁘기만 한없이 바쁘구나

이루려던 수만 가지의

마음 따라 가고 또 가도

정처 없지만

참인 세상 가는 것이

정녕 가야 할 곳인 줄 모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구나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 영역본 등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