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면서 가장 믿을 만한 친구를 만나는 시기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고등학교 이전이나, 대학교 이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마음을 열고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다.
15년간의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 생활 끝에, 나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 조교를 겸하며,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자기 계발을 하는 당당한 엄마이고 싶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통계학이나 역학 등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과목들도 잘하게 되었고, 동기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물어봤다. 수업 시간에 질문도 많이 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런 나를 교수님들도 인정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다른 선배들 눈에는 내가 좀 재수 없게 보였을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데 그 선배만은 달랐다. 나보다 다섯 살 정도 더 많은 한 학기 선배였는데, 아무렇지 않게 계속 학과목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산업전문간호사 생활을 병행하며, 대학원을 시작하신 분이었다. 그 선배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한번은 “보통 선배가 후배에게 질문하긴 쉽지 않은데 선배는 대단한 거 같다”고 했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못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한테 도움받는 게 어때서. 그러면서 같이 살아가는 거지. 그리고 최은희, 나같이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 네가 돋보이는 거야.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인생이라는 게 잘난 사람이 있으면, 못난 사람도 있고 못난 것도 인정하면 즐거운 거”라는 지론을 갖고 여유 있게 사는 그 선배가 점점 편해졌다.
집 방향도 같아서 같이 집에 가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조교 역할을 하며 일의 진행 때문에 어려워하면 “너의 역할은 욕을 먹는 역할이다. 칭찬은 교수님이 받아야 하는 거고” 하며 뭔가 나의 뒤통수를 한 대씩 치는 듯한 명답을 해줄 때가 많았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나는 ‘그 사람밖에 없냐. 이제 안 찾는다, 다른 사람을 찾거나 내가 혼자 하고 만다’는 식으로 아예 피해 버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는 “그건 네가 잘나서 그런 거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상대방한테는 오히려 상처일 거다. 너의 진정한 배려는 너의 자존심이 상함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 선배랑 이야기를 하고 나면 마음이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선배라고 해야 하나.
한번은 그 선배가 쓰던 석사 영문 교재를 받기로 한 적이 있었는데, 자꾸 잊어버려서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그거 돈 얼마나 된다고 내가 그냥 사자’ 마음먹었는데, 그 선배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끝에, 결국은 퀵으로 부랴부랴 보내주어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선배가 말했다. “책을 늦게 갖다 준 것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럴 때 기다려주는 게 나에 대한 배려야. 만약에 내가 주기로 했는데, 네가 사게 되면 나는 너한테 미안함을 갖게 될 거야.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관계가 서먹해질 수 있어. 상대방이 미안함을 갖지 않게 하는 것도 상대에 대한 배려인 거지.”
그렇게 그 선배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나는 내가 왜 그동안 인간관계가 힘들었나 하는 것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선배는 자존심을 꺾고 다가갈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자존심 때문에 아예 관계를 피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항상 내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해준 후에야 일의 해결 방식을 이야기해주던 선배. 많은 것이 서툴기만 했던 나에게 인생의 선배가 되어준 그분은 2012년 여름, 졸업을 하고 지금은 산업간호협회 국장으로 계시는 손숙경 선생님이다.
‘내가 이 나이가 되니까 세상에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더라’고 하던 선배. 늘 나에게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빠른 길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을 제시했던 선배. 언제나 자랑하고 싶은 누구보다도 존경스러운 선배님이다.
글 최은희 40세. 대학원 박사과정. 서울시 도봉구 창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