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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건축가 정기용

정리 김혜진

우리는 걷다 보면 무수한 건축물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건물들은, 우리가 사는 집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근사한 건물, 가격이 높은 집, 행복을 꿈꾸는 집….

 

건축가 고 정기용. 그를 알게 된 건 지난해 개봉한 <말하는 건축가>란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멋진 건물’이기보다 ‘사람’의 삶에 가까이 다가간 그의 건축은 참 겸손해 보였습니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일방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그는 자연, 사람과의 소통을 통한 건축을 꿈꿔 왔습니다. 그의 작업들은 대부분 예산은 적지만 손이 많이 가는 지역의 공공건축물입니다. 대통령 사저를 건축한 건축가이면서도 자신은 집 한 채 없이 소박하게 살다간 건축가 정기용. 그가 생전에 말해온 우리 건축과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집이란 거주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집이다.’

<사람 건축 도시> 중에서

무주 등나무운동장 © 김재경

저는 두 살 때부터 15년간 을지로에 있는 한옥에 살았습니다. 프랑스에서 건축 수업 할 때 그 집을 그린 적이 있는데 모든 게 정교하게 떠올라서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들어섰지만, 그 기억이 나를 지금 살고 있는 명륜동까지 데려옵니다. 외갓집 툇마루에서 느낀 농촌의 풍경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에요. 맑은 금강이 흐르고 강을 에워싼 높고 낮은 산들. 봄날 멀리 상여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어린 나이에도 “여기가 천국인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1970년대 전국에서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마을 길은 포장되고 초가지붕은 없어지고… 내 고향도 사라졌습니다. 충격이었죠. 그렇게 온 국토가 경제개발로 뒤엎어지면서 집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이 아닌 사고팔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 돼 버렸습니다. 똑같이 찍어낸 듯한 아파트와 상가 건물엔 소통의 흔적이 없습니다. 도시도 그런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건축가들은 ‘있어온 것’으로부터 어떻게 새롭게 건축할지 고민하고,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기도 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좋은 건축, 좋은 장소에 대한 체험과 교감이기 때문입니다.

‘땅, 근원적 질문, 거기에 더해 시대적 시류, 거기다 또 더하면 건축주, 사용자들의 생각들을 가급적 존중하려고 하죠. 그 네 가지가 결합되는 방식이 ‘감응’입니다.’

<건축 작품집(1986~2010)> 중에서

건축은 단순히 건물만 짓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일’입니다. 건축가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어떻게 보살피고 반영할지 고민하는 사람이죠. 특히 공공건축물이 그렇습니다. 쓸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건축가는 세상과 사람에 감응해야 합니다. 건축가로서 가장 가슴 두근거릴 때는 처음 땅을 보러갈 때입니다. 과연 어떤 땅일까? 근원적인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면사무소란 무엇인가?’ ‘어린이 도서관이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소통하는 과정은 제게 커다란 상상력과 기쁨을 안겨줍니다.

왼쪽부터 <동숭동 무애빌딩> 단면도

<무주 안성면 주민자치센터> 배치도

<무주 안성면 덕유 개발계획> 마스터플랜

자료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건축가는 설계자이기 전에 세상에 대한 번역가이고 사회를 제안하는 사람이다. 그 해법은 이 땅과 사람에게 있다.’
<감응의 건축> 중에서

무주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입니다. 무주 안성면사무소를 설계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주민들을 만나는 거였어요. 필요한 공간을 물으니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목욕탕을 지어달라는 겁니다. 목욕할 곳이 마땅치 않아 봉고차까지 빌려 대전까지 목욕하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거 같았어요. 우리가 농촌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그렇게 해서 최초로 목욕탕이 결합된 면사무소가 들어서게 됩니다. 무주 공설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따가운 햇볕 때문에 주민 대다수가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걸 알게 된 군수는 운동장 둘레에 등나무 240그루를 심었지요. 우리는 거기에 등나무가 타고 오를 수 있는 철 구조물을 설계했습니다. 이제 그곳은 온갖 행사가 열리는 주민들의 친숙한 마당이자 무주의 명소가 되었지요. 당시 무주에서 배운 중요한 사실은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가 처음부터 완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시간과 사람과 식물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건축은 생명력 있는 건축으로 전환됩니다.

© 김재경

기적의 도서관의 경우 동네 도서관을 맹렬하게 운영한 아줌마들한테 배운 것을 공간으로 번역한 겁니다. 출입구 중간엔 세면대를 두어 아이들이 손부터 씻고 책 읽게 하기, 바닥은 온돌로 해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읽게 하기, 엄마들을 위한 수유실, ‘아빠랑 아기랑’ 책을 보는 방 등이 다 그렇게 함께 고민하며 나왔지요. 덕분에 일요일엔 엄마 대신 아빠가 아이와 도서관에 방문해 책을 읽어주기도 합니다. 가족 관계가 새롭게 거듭나는 거죠.

‘어느 누구도 자기 집만 오려내서 볼 수는 없다. 모든 땅은 연결되어 있고, 강과 산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모든 풍경은 아무리 작아도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서울 이야기> 중에서

때론 건축가는 위험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어떤 태도와 관점에 따라 이웃과 소통할 수 있고 담을 칠 수도 있고 사회와 결별할 수도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 건축의 핵심은 한마디로 현장성입니다. 현장의 역사, 지형, 사람…. 모두가 함께 꿈꾸고 더불어 사는 공간을 지어나가는 것. 그게 제가 꿈꾸는 건축입니다. 이렇게 모두의 힘이 모여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등나무운동장, 한국형 어린이 도서관 등이 나오게 되었고, 이 기적 같은 일에 동참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건축가 정기용(1945~2011)님은 서울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프랑스 파리 제6대학 건축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였습니다. 1986년 기용건축을 설립, 주요 작품으로는 계원조형예술대학, 동숭동 무애빌딩, 무주 공공 프로젝트(1996~2006), 기적의 도서관(순천, 정읍을 포함한 총 6곳)이 있으며 저서로는 <서울 이야기> <사람 건축 도시> <감응의 건축> 등과 영화 <말하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정기용 건축을 돌아볼 수 있는 <그림일기:정기용 건축아카이브> 전시회가 2013년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무료 관람)에서 열립니다.

개그맨 이문재, ‘나쁜 사람’의 착한 경찰

인터뷰 당일 여의도 KBS 앞,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한다는 이문재(32)씨가 여느 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했다. 수줍어하며 인사를 건네는 그는, TV를 통해서도 느껴지듯 참 착해 보였다. 현재 개그콘서트 ‘나쁜 사람’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그는 KBS 공채 26기로 3년 차 신인 개그맨이다. 그 스스로 “인생의 시작”이라 말하는 이 ‘개콘’ 무대에 서기까지 5년 동안 13번의 개그맨 시험에 탈락하는 등 힘든 20대를 보냈다는 이문재씨.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소중한 ‘웃음’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요즘 일명 ‘웃픈(웃기면서 슬픈)’ 개그 ‘나쁜 사람’의 인기가 한창이다. 등장인물은 범인 한 명과 경찰 세 명. 취조를 당하는 범인과 경찰들의 묻고 답하기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범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빠져들며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범인 : 아들 돌 반지가 필요했어요. 사진만 빨리 찍고 갖다 놓으려고 했는데….

경찰 : 동정심 유발하지 마. 직업도 있는 놈이 돌 반지 하나 못 산다는 게 말이 돼?

범인 : 집사람 병원비로 다 썼어요. (슬픈 음악이 흐르고)

“나는 피도 눈물도 아무 감정도 없는 놈”이라며 등장해 야심 차게 범인을 심문하던 형사 이문재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불쌍해서 어떡하니, 풀어주자” 말한다. 그러다 이내 자기 대신 취조를 해대는 선배 경찰에게 “나쁜 사람~ 나쁜 사람~ 왜 그랬니~ 왜~” 하고 울부짖는 이문재씨의 일품 울음 연기를 보노라면, 범인 사연에 뭉클해지다가도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코너에 맞는 음악을 찾기 위해 2주 동안 1,000곡이 넘는 OST를 듣는 등 많은 노력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이 코너는, 2월 초 방송되자마자 시청자들로부터 ‘나 왜 울면서 웃고 있지?’ ‘슬픔과 웃음이 함께하는 나쁜 사람 최고!’ 등의 평을 들으며 한순간 인기 코너가 되었다.

요즘 인기를 실감하겠어요. 처음 이 코너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개그콘서트에 김준호 선배가 왕으로 나온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거기서 권장군이 “전하, 전쟁에 나갈 병사가 없습니다” 하자 왕이 “그럼 니 아들이라도 보내야 할 거 아니야” 하는데, 슬픈 음악이 깔리며 권장군이 “제 아들은 이제 돌 지났습니다” 말하는데 너무 웃긴 거예요. 슬픈데 웃길 수 있을까? 아예 이 사람이 더 힘들어지면 어떨까? ‘비극의 희극화’를 생각하면서 짜기 시작했죠. 이렇게까지 재밌어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범인이 진실을 말하는 건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저희가 짜는 이야기에서는 범인은 죄가 없어요. 입양 간 동생 생일이어서 선물을 주려고 잠깐 만났는데, 헤어지기 싫어하는 동생 때문에 길게 데리고 있게 된 것. 양부모 입장에서는 납치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안아줄 수 있는 죄인 거죠. 그런 식으로 정말 안 좋은 상황들이 이어져서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오해하는 우리들, 어떻게든 널 집어넣겠어! 하는 우리들이 진짜 나쁜 거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웃음도 있고 감동도 있고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다시금 바라보게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들도 해주시는데, 사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고민도 많았어요. 우리는 웃음을 주기 위해 짠 건데, 실제 그런 사연을 가지신 분들이 계신 거예요. ‘알고 계십니까, 그게 저의 상황입니다. 이런 게 웃음이 될 수 있다는 게 씁쓸하네요.’ 게시판이나 메일로 그런 글을 보내주시는데, 너무 죄송하고 진짜 난 나쁜 사람인가 싶은 게 괴롭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거 같은 허구적인 상황을 만들려고 해요.

일주일에 한 번, 4~5분의 웃음을 주기 위해 개그콘서트 개그맨들은 누구보다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끊임없이 새 코너를 준비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는 밤샘 연습을 하기도 한다. 개그맨들에게 꿈의 무대라 불리는 개그콘서트. 군 제대 후 20대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5년간의 개그맨 지망생 시절, 각종 방송사 시험에 도전하지만 13번의 탈락 후 서른 살에 치른 시험에서의 합격.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 서게 된 무대이기에 서른두 살의 신인 개그맨 이문재는, 더더욱 치열한 준비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그맨 공채 시험이 항상 2월에서 3월 사이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26살부터 30살까지 연말 연초 때 놀아본 적이 없어요. 항상 작은 지하 공연장에서 공연 연습을 하며 보냈죠. 가장 즐거워야 할 20대를 그렇게 보낸 게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을 수 있었고, 또 이 순간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거 같아요. 지금도 이 일을 위해 포기하는 게 많아요. 노는 거, 술 먹는 거, 늦잠 자는 거…. 하지만 하나를 얻고 싶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거 같아요.”

제일 먼저 사무실에 나와 준비를 하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찾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출퇴근길에도 연습을 하고…. 그렇게 노력한 결과 ‘그땐 그랬지’의 이름 없는 쫄쫄이맨을 거쳐 2012년 2월에는 신인으로서는 쉽지 않게 아이디어부터 모든 기획을 했던 ‘있기 없기’ 코너로 ‘있기 없기’라는 유행어를 배출하기도 했다. 스스로 해냈다는 자부심도 느꼈던 순간이었다.

2011년 KBS 26기 공채 개그맨이 된 이후로, 개그콘서트 그땐 그랬지, 있기 없기, 어르신, 만득이 등 여러 코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 제공 KBS

계속 시험에 떨어지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은데, 끝까지 도전하게 만든 원동력이 있나요?

음… 자존심이랄까, 저 스스로한테 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실 주변에서 반대도 많았어요. 부모님도 서른이 다 되도록 개그맨 지망생 한다고 있으니까 걱정하시고, 친구들도 정신 차리라고 하고. 제일 힘들었을 때는 스물아홉 살 되는 해 시험에 떨어졌을 때예요.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그때 절망감과 암담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더라고요. 내년이면 서른 살인데, 꿈 찾아간다고 여태까지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무서웠어요.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가서 제가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술은 다 먹었죠.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마음으로 죽어라 했는데, 붙은 거죠.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죠. 지금은 부모님도 어디 가면 내 아들이 이문재다 그러세요.(웃음) 일단 한 번은 효도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죠.

개그맨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적이 있다면요?

준비한 걸 딱 보여주는 순간 관객들이 막 웃어주실 때, 그때가 가장 기쁘고 보람 있죠. 제가 지망생 시절에 있었던 일인데요. ‘옹알스’라고, 세계에 나가서 한국의 코미디를 알리고 있는 팀인데, 옹알스쇼의 사전 MC를 할 때였어요. 그날 오프닝을 하다가 오늘이 특별한 날인 분께 선물 드릴게요, 손 한번 들어보세요, 했더니, 어저께 생일이었어요 등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여자분이 손을 들고 “어머니 항암 치료 끝나고 웃겨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 모녀께 선물을 드렸죠. 비록 장난 선물이었지만. 그리고 선배들이 공연할 때 뒤에서 계속 어머니하고 딸을 보았어요. 계속 즐겁게 웃으시는데 병도 다 나은 거 같더라고요. 그때만큼은 비록 지금의 현실은 어둡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 한다, 제일 멋진 남자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은 사람에게 활력을 주니까요.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착한 세상이잖아요.(웃음)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무엇보다 절박해야 할 거 같아요. 장수생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떨어져? 그러면 내년에 보지. 이번에도 떨어져? 그러면 다른 방송국 보지. 저도 어느 순간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지더라고요. 근데 스물아홉 살 때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절박함이 끝까지 차니까 그때부터 쉬지 않았죠. 계속 공연을 짜고, 무대에 올려보고, 안 웃으면 바꾸고 또 바꾸고. 밤새 연습하다가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 짜고. 그렇게 해서 붙게 된 거죠. 돌아보면 뭐 이런저런 조건 때문에 될 수 있었는데 안 됐어, 이런 건 솔직히 변명이고 핑계였어요. 제가 그만큼 안 했던 거였더라고요. 절박한 마음으로 얻고자 하면 다 되니까, 더욱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이문재씨는 고등학교 때는 합기도 선수로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리고 군 제대 후 권투로 종목을 바꾸고 나서는, 지금은 아예 권투 선수 출신의 선배와 함께 체육관을 차려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집, 체육관, 개그콘서트 사무실. 이렇게 삼각 트라이앵글의 구도가 자신 삶의 대부분이라는 이문재씨. “저는 제가 하는 일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거든요. 좀 고리타분한가요?” 지금 하는 일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는 그의 모습이 참 순박해 보였다.

개그맨들마다 다 개성이 있잖아요, 개그맨 이문재의 가장 큰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 그런 건 정말 전혀 없어요.(웃음) 사실 저는 그렇게 끼는 없거든요. 사석에서는 잘 못 웃겨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아직도 사람들 앞에 나가면 부끄럽고 쑥스럽고 그래요. 뒤에서 잘 준비해서 준비한 것만 하는 스타일이랄까. 그러니까 저는 죽어라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밖에 없어요. 매번 코너가 끝날 때마다 항상 멤버들과 통화를 해요. 여기서 이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서로 조언을 해주면서 고쳐나가는 거죠.

개그콘서트 내에서도 서로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코너를 준비해가도 쉽게 통과되기도 어렵고, 녹화하고도 편집이 된다거나. 그럴 때 실망감도 클 거 같아요.

‘어르신’에서 ‘나쁜 사람’ 하기까지 새로운 코너 10개 정도를 피디님과 작가님께 보여드렸죠. 근데 다 별로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웃음) 밤새 의상이며, 음악이며 준비해서 갔는데 단번에 아니라는 소릴 들으면 힘들긴 하죠. 근데 그런 걸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자기와의 싸움인데 지면 못 하는 거죠. 제가 만날 후배들한테 하는 말이, 물론 후배라고는 한 기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웃기는 재미가 아니라, 아이디어 짜는 재미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말합니다. 그리고 운동한 것이 도움이 돼요. 운동도 정말 힘들 때부터가 운동 시작이거든요. 조깅할 때도 땀 떨어지면 그때부터 내 몸의 칼로리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힘들다 느낄 때 스스로에게 말해요. 지금부터 시작이다, 힘들지만 난 할 수 있다, 다운당해도 난 일어난다.(웃음)

감옥에 갇힌 죄수와 여자 친구 이야기를 다룬 ‘있기 없기’, ‘나쁜 사람’ 등 어떻게 보면 좀 무거운 소재로 개그를 해왔는데요, 앞으로 하고 싶은 개그 스타일이 있다면요?

앞으로는 밝은 개그를 하고 싶어요. 이문재 코너를 보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개그. 나쁜 사람이 ‘비극의 희극화’라면, 지금은 ‘희극의 희극화’ 기쁨에 기쁨을 더해주는 코너를 준비하고 있어요. 잘되면 가을쯤에 보실 수 있을 거예요.(웃음)

“어떤 일을 하느냐, 얼마나 버느냐보다, 무슨 일이든 즐겁게 재밌게 하면서,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행복인 거 같아요.”

허황한 꿈 꾸지 않고, 한결같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정직한 사람, 이문재. ‘나쁜 사람’에서 이문재씨가 맡았던 형사처럼, 그를 대상으로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착한 사람~ 웃긴 사람~ 왜~ 왜~” 하고 외치게 된다.

그가 앞으로 만들어 갈 기쁨에 기쁨을 더해줄 ‘밝은 개그’란 무엇일까. ‘웃픈’을 넘어서는 ‘웃웃(웃기디웃긴)’ 개그를 들고 나타날 그의 새로운 모습에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들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용서할까 합니다

이한라 27세. 직장인.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지난 1월, 나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 대학에 들어가면 꼭 하겠노라고 공언했던 그 유럽 배낭여행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떠났다. 그리고 45일간의 여행 일정에 프랑스 니스와 모나코를 넣었다.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그저 탁 트인 산호빛 에메랄드 지중해를 보면서 ‘힐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 떼제베를 타고 리옹을 거쳐 프랑스 최남단에 위치한 니스에 도착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파리와는 달리, 하늘하늘 흔들리는 야자수, 따스한 바닷바람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무작정 해안으로 향했다. 아래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에메랄드빛 바다색.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닷물의 저 끝에는 수평선이 아스라이 그어져 있고, 지는 해는 바다에 그 색을 입히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하얗게 모래사장에서 부서지는 그 탁 트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한참을 주저앉아 그렇게 울었다.

대학 시절, 나는 잠시 의사의 꿈을 꿨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내가 선택한 길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주셨다. 어머니께서는 매일 나에게 전화하셔서, 힘들지는 않는지, 공부는 잘돼가는지, 잘 먹고 잘 자는지를 물으셨다. 그리고 응원과 격려도 잊지 않으셨다.

“우리 딸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그러나 몇 달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길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길임을 확신했다. 책상에 앉아는 있는데 집중할 수 없었고 계속 나태해져만 갔다. 부모님께 이 공부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려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공부가 재미있는 척, 할 만한 척, 부모님을 속였다. 결국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시험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부모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못하겠다고,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말이다.

부모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무척이나 아쉬워하셨고 또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내 의사를 존중하여 주셨지만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했다. 나는 그저 부모님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는 착한 딸로 내비치고 싶어, 부모님을 속여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모님께서 나에게 실망하셨던 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고 분노했다.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나와 맞지 않음을 알고도, 그저 공부하고 있는 것이 편하고, 스스로의 틀을 깨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없어 주저했던 내 자신은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루저’였다.

그 후, 회사 생활을 하고 시간도 꽤 흘러 이제 그 일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마음속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 일을 상기시키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어 몸서리쳤다. 나는 그 기억 속의 루저였던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과 분노가 탁 트인 니스 바다를 보자 내 속에서 흘러나왔다. 흐르고 넘쳐,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나는 그렇게 한참을 나 자신을 놓아버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프랑스 어느 한 도시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다. 내 자신에 대한 분노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도 바닷바람에 실어 보냈다. 주위 사람 누가 의사가 되었다고만 해도 움찔했던 나의 옹졸한 마음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의 잔여로 괜히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척했던 나의 위선도 다 놓아버렸다. 나는 개운해졌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부모님께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많이 감사하다고 말이다.

유의랑 작.

<휴식> 170×90cm

Oil on canvas / 1988

나는 ‘왕따’가 아니었던 게 아닐까

백혜명 31세. 직장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거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체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하는 아이였다. 교우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들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업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이들은 각각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괜히 그들 무리에 끼었다가 엄마한테 안 좋은 잔소리를 들을까 봐,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공부만 파고들었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가 돼 버렸고,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곧잘 와서 묻곤 했지만 친구로서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간혹 친구들이 궁금한 것을 질문해도 잘 답변해 주지 않았다. 그런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들은 불만을 갖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지금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가 했는데, 정말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애들이 없었다! 아예 두 명의 친구는 대놓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나를 못살게 구는 친구들도….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왕따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것은 그때뿐이었다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나를 또 왕따시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무서웠고, 우연히 그 친구들을 마주치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니까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 그 아이들이 더 불쌍한 거라고, 그냥 훌훌 털고 살자며 나를 다독였고, 그게 용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나를 괴롭히던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마음에서 용서했기에 그 친구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생각에 불과했다.

그 친구를 보는 순간 원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와 정반대였다.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진심으로 반갑다고 했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용서하기는커녕, 미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건 나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아이는 내게 원수였다. 친구는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고 말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친구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미스터리한 상황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유의랑 작.

<결> 230×150cm

Oil on canvas / 2006

그즈음 마음수련을 하게 된 나는 내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떠올리며 버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때의 일만 떠올려도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버리면서 나는 점점, ‘나’로부터 벗어나 중학교 시절의 ‘나와 친구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는 두루두루 교우 관계가 좋은 아이였다. 그 친구는 혼자 외롭게 있는 내가 안타까워 그 또래의 방식으로 나를 주목받게 해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 친구에게는 그러한 놀림이 친구들 사이의 흔한 장난 같은 것이었는데, 나만 내 열등감에 사로잡혀 나를 왕따시킨 거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철석같이 그 친구가 잘못했고, 나는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착하고 바르다며 살아왔지만, 그게 얼마나 오만했던 건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마음속으로 ‘왕따’시키고, 미워하며 살아왔던가.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은 똑같이 햇살을 비춰주고, 숨 쉬게 해주며 모든 것을 품어 안고 늘 용서해주고 있지 않았나. 용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내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평화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있었다. 용서란 이 세상이 내게 해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는 거라는 걸 배웠다. 부끄러웠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진심 어린 참회를 하고 나서야, 나는 진정으로 그 친구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었다. 내 마음에도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50년 넘게 부재중인 어머니를 용서하며

홍경석 55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성남동

딸의 대학원 졸업식이 있던 날, 모처럼 강추위가 멀찌감치 나들이를 간 날이었습니다. 그날 졸업식에서 딸은 석사 학위를 받았지요. 지난 2005년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상경한 지 어언 8년여 만에 받는 참으로 영광의, 그러나 지난한 과정을 담보로 했던 졸업증서!

캠퍼스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던 중 근처에서 연방 눈물을 훔치는 어떤 노모 한 분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그분 역시 저처럼 아들의 박사 가운과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는 중이었지요.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분은 마구 오열하셨습니다.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니!” “엄마, 이젠 그만하세요!”

유추컨대 그 졸업생의 부친께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그 홀어머니는 갖은 고생과 바라지 끝에 자신의 아들이 우리나라 제일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는 영광의 자리에 오게 됐으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현실이 새삼 통탄스러우신 듯 보였습니다.

애처로운 그 모습을 보자 어떤 동병상련의 아픔이 제 폐부를 마구 찔렀습니다. 저를 낳은 지 불과 백 일여 만에 집을 나간 어머니. 그로 인해 아버지는 시나브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불과 오십 살도 못 사시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셨지요. 따라서 참으로 오랫동안 어머니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집 어머니들은 남편이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자식들을 봐서라도 모두 참고 산다던데 당신은 왜 그랬습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여전히 불변하게 일언반구 회신조차 없었습니다. 그랬던 어머니를 비로소 용서한 건 딸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던 지난 2004년 겨울이었지요.

‘그동안 당신을 참으로 미워했고 심지어는 증오까지 했었지요. 그렇지만 이제부턴 그토록 미워했던 제 심지(心志)에서 증오의 촛불 심지까지를 말끔히 제거하렵니다. 당신은 그동안 내게 있어 너무도 견딜 수 없을 만치의 시련과 아픔을 켜켜이 쌓이게 한 단초 제공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젠 용서하렵니다. 왜냐고요? 따지고 보면 용서란 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동안 당신을 용서할 줄 몰라서 그 숱한 나날 동안을 번민과 증오, 그리고 때론 자학의 밤으로 점철하곤 했거든요. 뿐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날 낳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커다란 상실감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각인된 주홍글씨와도 같았지요. 근데 오늘날 아들에 이어 딸마저 소위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이것이 어쩌면 당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는 억지춘향격 자기 합리화 당위성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이 없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할 줄 알았으며 아울러 당신의 몫까지를 채워 아끼고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날 아무리 증오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먼저 용서하는 순간, 날 짓누르던 미움과 원망의 먹구름에서도 벗어나 참다운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제 나이 올해로 55세.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진 모르겠으되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거두겠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용서와 관용이란 긍정의 비단으로 채우겠습니다.

유의랑 작.

<열매> 60×25cm

Oil on canvas / 1996

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들입니다.

큰 슬픔을 아름다운 용서로
승화시킨 분들을 떠올리며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교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1동

시내 변두리 고향을 지키며 농사일만 하던 외삼촌이 계셨다. 그때 외삼촌은 매일 아침 오토바이 뒤에 매달린 리어카에 채소를 가득 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밖에 몰라 온몸에서 흙냄새가 나던 분이셨다.

벌써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런 외삼촌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셨다. 사고의 내용인즉 그날따라 채소를 일찍 판 외삼촌은 1차선을 달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2차선을 달리며 친구와 통화를 하던 운전자가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지에서 온 여자 운전자는 조급한 마음에 1차선과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으로 차의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하필이면 갑자기 1차선으로 넘어온 승용차와 외삼촌의 오토바이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피해자인 외삼촌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자리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기도 했지만 회갑을 막 넘긴 나이셨고, 원래 정정하던 분이었기에 가족들은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운전자를 원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급하게 장례 절차가 논의되었고 가해자인 운전자 가족과도 합의가 진행되었다. 그때 슬픔에 싸인 사람들에게 운전자의 딸이 결혼을 며칠 앞뒀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어쩌면 미움을 동정으로 바꾼 소식이었다. 합의를 보지 못하면 운전자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모두 착한 분들이라 바로 모여 해결책을 상의했다. 집안 식구들 모두는 엄마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집집마다 운전자가 있으니 우리 가족 누군가도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사천리로 합의가 진행되었고, 운전자의 남편분은 결혼식을 며칠 앞둔 딸과 사위를 데리고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같이했다.

주위 분들에게 법이 필요 없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는 외삼촌의 일생이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그때 쉽게 동조를 해준 외사촌들이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그때 나는 세상은 생각보다 몰인정하지 않다는 것과 어떤 일이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더 쉽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 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아픔을 안겨준 사람조차 용서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식이 죽는 일을 누가 상상이나 할까. 이 세상이 끝나거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부모도 있다.

유의랑 작.

<휴식> 72.7×53cm

Oil on canvas / 2001

 

오래전 얘기이지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친구들과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 외아들이 음주 운전자의 승합차에 치여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찌 삭일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법의 잣대에 맞춰가며 가해자에게 돈을 더 받아내는 방법을 열심히 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장기 기증을 결심했고, 시각장애인 2명에게 새 희망을 안겨주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음주 운전을 한 운전자를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운전자가 군 제대 후 복학을 기다리는 학생이고,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담당 경찰관의 설명을 들은 아이의 부모는 젊은이의 장래를 생각해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운전자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합의를 해준 후 경찰과 검찰에까지 찾아가 선처를 부탁했다. 경찰은 피해자 부모의 간곡한 부탁과 운전자가 초범인 점을 들어 검찰에 불구속 지휘를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피해자 부모의 아름다운 용서가 잘못을 뉘우친 운전자에게 7번방의 선물처럼 새로운 희망을 선물했다.

어려울수록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정말 어려운 일을 실천으로 옮겼기에 아이의 부모가 보여준 아름다운 마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큰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은 각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 미담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든다. 때로 누군가가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 때면, 이분들을 조용히 떠올려본다.

아버지 괜찮아요,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신용 39세. 직장인.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나의 아버지는 현재 사업의 잘못으로 인하여 구치소에 있다. 5년 전 당시 나는 육군 공병 장교 소령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즈음 아버지는, 직장까지 내려놓고 병간호를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로움을 잊으시려고 일에 집착하고 계시던 때였다.

사업을 하시려고 하던 중 한 다단계 업체를 만나, 다단계가 뭔지도 모르던 분이 순진하게 열심히 사람들을 소개하여 고위 직급으로 추천되었다. 그런데 그 업체의 회장은 순진한 아버지를 이용하였다. 우선 아버지가 추천한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체들에게 투자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승인하여 협약을 맺도록 하였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대표이사를 맡게 되었는데, 회장은 몰래 해외로 대규모 자금을 빼돌린 후 부도 위기가 났다고 했다. 기업들은 투자 자금 받기로 협약한 것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 회장과 함께 아버지를 고소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군 생활 12년 동안 힘겹게 모았던 돈 1억2천 정도와 아버지가 평생 모은 본인 투자금, 형제와 친척들의 돈까지 끌어들여 35억의 돈을 그 업체에 투자했던 터라 너무나 당황했고 원금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억울해하며 회장을 고소하였다. 천 명이 넘는 투자자들이 너무나 큰 손해들을 보았기에 오랫동안 재판이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법정 구속된 상태였고, 내가 전역을 하여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고소자들과 합의하기 위해,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3년 가까이 분주히 쫓아다녔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손해 본 돈만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거짓 증언들을 해댔다. 회장과 가까운 사람들은 ‘나가면 돈을 되돌려주겠다’는 회장 말에 현혹되어, 법정에서조차 거짓 진술을 하였다. 아버지가 아무리 자신도 피해자이고 회장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고 항변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회장의 잘못까지 덮어쓰고 형을 받았다.

너무나 억울한 마음에 아버지는 구치소 안에서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우리 가정 또한 엉망이 되었다. 나는 군 전역 후 제대로 된 일자리도 가질 수가 없었기에 야간 막노동 작업 현장에 가끔씩 나가는 것이 전부였고, 아내가 가정의 생계를 대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두 딸과 행복하게 살던 우리는 자주 싸움을 했고 이혼의 위기까지 가야 했다. 그 몇 년간 내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본의 아니게 아내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된 나 자신이 너무나 싫었고 차라리 아버지를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인연을 끊을까? 아님 그냥 내 목숨을 끊어버릴까? 별의별 생각을 수차례 하였다.

유의랑 작.

<꼼꼼> 33.5×21.5cm

Oil on canvas / 2004

하지만 면회 가서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들이 다 허물어지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계속 힘겨워하시던 아버지, 그래도 일을 하며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듯 보였던 아버지가 한순간에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아버지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리고 나는 점점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억울함과 분노, 원망 속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게 오히려 더욱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내와도 어렵사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더 이상 지나간 일에 사로잡히지 말자.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아버지를 원망만 하지 말자. 그럴수록 우리 스스로만 망가져왔다. 진심으로 용서하고 잊자. 우리 마음에 미움을 선택하지 말고 용서를 택하자. 돈을 위해 살아가지 말고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도 도우며 행복하게 살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많이 울었다. 아버지께도 면회를 가서 말씀드렸다.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우리 가정의 아픈 경험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하지만 이제는 다 용서한다고,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그리고 그 후 많은 것이 회복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진정한 용서는 내 자신을 진정한 평안과 희망으로 안내함을 느꼈다. 아버지도 이런 어려운 시절들로 인해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되셨고, 아들의 가정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그전의 독불장군 모습도 많이 바뀌셨다.

아버지가 형이 끝나 나오시게 되면 우리가 모시려고 한다. 서로 용서하고 아픔 준 것은 덮어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려 한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곰보빵과 우유,
세상이 보내온 용서의 손길

홍순재 드림비즈포럼 대표, 창업 교육가.
<당신이 은인입니다> 저자

나는 창업 교육가다. 그리고 노숙자 출신이다. 노숙을 하기 전, 나는 한때는 1억 이상의 현금을 차에 가지고 다닐 정도로 졸부의 생활을 만끽했었다.

당시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의 일은 완공된 빌라나 원룸을 분양하는 것, 그리고 부동산 주인도 포기한 부동산들을 매입하여 가공 임대 매각하는 일들이었다. 주로 산비탈의 저렴한 집이나 상가들을 경매나 공매를 통해 산 후, 그곳에 살던 채무자들을 내쫓아 새로 분양하는 식이었는데, 최대한 빨리 돈을 뽑아내고 내보내야만 했기에 나는 갖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다. 갈 곳 없어 애처롭게 사정하며 매달리는 노인들도 매정하게 밀쳐냈다.

우리는 그저 먹이사슬의 밑바닥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는 짐승 같았다. 차갑고 독하게 내쫓았고 악착같이 팔아치웠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쓸어 담으며 돈의 맛에 중독되었다.

그런데 2008년 가을 미국에서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지고 말았다. 주가는 수직 하강했고 한국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대출받은 돈은 고스란히 금리, 연체금리, 분양 참패로 빚으로 남았다. 신혼 7개월 만에 아내는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나는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아파트를 급습한 사채업자들에 둘러싸여 목숨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와서 무작정 버스를 탔다.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였고, 이후 9개월간의 노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스팔트에 누워 있으면 뼛속이 에이는 것은 물론이고 뇌가 얼어붙는 느낌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점심은 직장인들이 먹다 남긴 밥을 먹고, 춥고 긴 겨울은 유기견을 찾아서 끌어안고 잔다. 그렇게 몇 개월…. 이젠 정말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

나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물 한 모금 안 먹고 죽기로 결심했다. 그제야 냉정히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갑자기 닥친 가난 때문에 왕따를 당했던 기억, 비행을 일삼으며 어둠 속을 방황했던 시간, 부동산업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상처로부터 시작된 오기, 오기로부터 비롯된 도약. 어느 순간 만족하고 적당히 욕심을 거두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왜 나는 늘 그놈의 오기를 부리며 그 난리였을까. 내가 상처 준 모든 사람들, 내가 만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렇게 누워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열흘째,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며 의식을 놓으려는 찰나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근처에서 고물을 줍고 다니는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는 리어카를 저 멀리 세워두고 나에게 와서 웃으며 말했다.

유의랑 작.

<새로운 휴식> 91×35.5cm

Oil on canvas / 2010

“너 죽어, 이 빵 먹어라.” 순간 멍해졌다. 내 손에는 어느새 곰보빵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빵만 주면 어떻게 먹냐?”고 원망의 목소리를 냈고 그는 냉큼 리어카로 달려가 바나나우유를 가져와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이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세상을 버렸을 때, 이 세상은 끝이라며 절망했을 때, 신은 가장 낮은 자를 통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그저 하염없이 울면서 참회하고 또 참회했다. 영문을 모르며 웃고 있던 그는 혼자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나를 둘러메고 리어카에 싣더니 내가 평소 자던 다리 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곤 내 이불 아래에 천 원짜리 두 장을 주고는 웃으며 갔다. 그 어수룩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목이 메고, 코가 매워, 머리가 울려, 가슴이 터져서 다시 말도 못 하고 울었다. 그래, 내가 살아난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겠지. 나는 어떤 신이든 나를 인도해달라고 외쳤다. 정말이지 앞으로는 내 욕심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만을 채우며 살겠노라고 통곡을 하며 소리쳤다.

무언가 마음에서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혹시 용서라는 느낌인가. 나를 보고 웃으며 자신의 빵과 우유를 나눠주는 바보의 얼굴에서, 나는 그제야 신이 나를 용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게 되면서, 나는 어머니 이외에 나에게 사랑을 주었던 이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가세를 기울게 만든 아버지,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 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만을 떠올리며 오기로 똘똘 뭉쳐 살아왔는데, 내 가파른 길에도 늘 사랑을 주었던 이들이 있었다.

노숙을 시작하고 4일이 지났을 무렵 무작정 찾아간 나에게 돈 5만원을 쥐어주셨던 단골 보쌈집 할머니, 나를 어둠의 비행에서 끌어내주신 고3 담임 장학순 선생님, 노숙 생활의 깨달음을 주었던 왕초도 떠올랐다. 나는 그토록 아버지를 원망했건만, 아버지는 채권자들 앞에 나와 함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었다. 그리고 나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아내….

나는 이제 세상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다시 걷고 있다. 세상이 보내온 용서의 손길, 그리고 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은인이 되고 싶다.

사랑하고 있나요? 미워하고 있나요?

우리는 흔히 가족, 친구, 연인, 부부끼리 ‘사랑한다’ 말합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하거나 서운하게 대하면 언제 그랬나 싶게, ‘미워!’라고 소리치지요. 좋아했다가 미워했다가,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 과연 진짜! 어떤 경우에도! 한순간도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한 건지 반문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요? – 편집자 주

강렬한 사랑은 판단하지 않는다. 주기만 할 뿐이다.
– 마더 테레사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서 나의 유일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 크리스티안 슐트

사랑과 미움은 같은 것이다. 다만, 사랑은 적극적이고 미움은 소극적일 뿐이다.
– 한스 그로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 폴 틸리히

비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비교하지 않는다.
– 하즈라트 이나야트 칸

사랑을 일부러 만들지 말라. 사랑은 미움의 근본이 된다.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모든 구속과 걱정이 없다.
– ‘법구경’ 중에서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다.
– 존 셰필드

사랑의 시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에 맞추어 그들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 토머스 머튼

뇌 과학 ‘사랑과 미움은 한 끗 차이’ 증명

사랑과 증오가 사실상 동일한 감정이라는 사실이 뇌 과학 영역에서 증명됐다. 영국 런던대학 세미르 제키 교수 팀은 남녀 17명을 대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의 사진을 각각 보여주면서 뇌 활동의 변화를 파악하고자 뇌 스캔 촬영을 시도했다. 그러자 두 경우 모두 뇌 과학자들이 ‘증오 회로’라 부르는 뇌 부분이 활성화됐다. 증오 회로가 활성화되면 공격적 행동이 유발되고, 성난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작동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증오하는 사람이나 모두 ‘고통스런’ 신호를 뇌에 전달시키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생물학자에게 사랑과 증오는 거의 같은 감정이다. 모두 비이성적이며, 때로 영웅적이고 때로 사악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고, ‘다른 누구, 다른 무엇을 위하여’라면 그게 곧 ‘하나님을 위하여’다. 그것이 무엇이든 남을 위하여 내어놓으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되고, 그리하여 고스란히 또는 더욱 커져서 내게로 돌아온다. 하늘은 무엇을 움켜잡는 손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 속에 담아놓은 사랑만을 보신다.

–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루미 짓고 이현주 풀어 엮음ㅣ샨티) 중에서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늘이 모든 것을 덮는다는 말은 그 어느 것도 바꿔놓거나 젖혀두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하늘과 같다. 땅이 모든 것을 싣는다는 말은 그 어느 것도 싫어하거나 밀쳐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땅과 같다. 해와 달이 모든 것을 비춘다는 말은 그 어느 것도 등지거나 외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일월과 같다. … 누구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냥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없이, 소리 없이, 흔적도 없이, 아무 바라는 것도 없이 그와 함께 있어라. 거듭 말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곁에 없는 듯 있는 것이다. 하늘이 땅을, 땅이 초목을, 일월이 만물을 대하듯이 그렇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네 몸이 있는 곳에 늘 네가 있듯이 네 몸에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모두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네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린 자세로 그 곁에 있어라. 참사랑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 – <지금도 쓸쓸하냐>(이아무개 지음ㅣ샨티) 중에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만난 지 1년이 되어가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 같다는 거다. 내가 이만큼 사랑하지 않았으면 이만큼 미워할 수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내가 화를 내는 부류는 딱 두 종류이다. 가족과 남자 친구. 가끔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미울 때가 있다. 그럴 땐 동성 가족은 근원적 갈등 관계니 뭐니, 아버지와는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해소가 됐다느니 안 됐다느니 하는 말로 합리화시키기도 하지만 여전히 불만이다. 그냥 사랑만 하면 안 되나.

지금 남자 친구도 그렇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고 만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강의실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100일 되던 날엔 넓은 공원에 가서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둘이 바라보며 한참을 가만히 아무 말도 않고 있었는데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런 대사가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라니.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다시 그 감정을 느껴볼 수 있다면 더 감사히 여길 텐데. 그런 천연기념물 같은 감정을 이제 다시는 느낄 기회가 없을 테니까. 지금 이 사람과 평생 함께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소한 것에서도 미운 감정이 불쑥불쑥 치민다. 마치 나도 모르게 내뱉었던 그 로맨틱한 한마디처럼 나도 모르게 미운 감정이 솟아나 심술을 부리게 된다. 정말 별거 아니다. 이거 때문에 화가 났어 하고 친구들에게 말할라치면 말하다가 자각한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밴댕이 소갈딱지였는가.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며 입을 고이 닫는다.

얼마 전에 읽은 김형경의 에세이집 <천 개의 공감>을 보면 ‘성인이 된 후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유년기에 해결되지 못한 욕망 때문’이란다. 내 안의 작은 아기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내 안의 작은 아기는 왜 이리 예민한 것일까. 왜 나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른 건 용납하지 않는 걸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과 불만을 느끼며 분노의 감정을 분출할까. 책에 따르면 어렸을 때 엄마가 아기의 모든 것을 수용하지 않고 아기와 맞서고 아기를 이기려고 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엄마에게 느꼈던 감정 그대로를 아마 남자 친구에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려서 엄마를 사랑했듯이 지금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미움을 느끼는 이유가 결국은 그 누구보다도 사랑해서라니. 미움을 통해서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미성숙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어서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 손소정

무기력증 타파하기

할 일은 태산 같은데 몸이 꼼짝하지 않을 때, 아픈 것도 피곤한 것도 아닌데 만사가 귀찮을 때, 흔히 ‘귀차니즘’이라고 불리는 이 상황은 현대인들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겪는 문제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에서 직장인 526명을 대상으로 직장 생활 무기력증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90.3%가 업무 의욕을 잃거나 회의감을 느끼는 등의 무기력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겉으로 부지런해 보여도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일은 피하고 심리적으로 편안한 일에 엉뚱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래서 무기력은 ‘은밀히 인생의 발목을 잡는 방해자’이자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삶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독소와 같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무의식은 학습된다고 말한다. 어떤 일을 하려는데 외부의 힘으로 인해 좌절됐을 때 그 경험이 무의식에 기억(학습)되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는 그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기력증 해소를 위해서는 근무 환경이나 업무 변화도 필요하지만 지금껏 쌓아둔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과거의 오래된 습관, 즉 자기를 부정하고 단절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1등 주자였다는 기억, 잘나갔다는 기억,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사실도 잊고 처음 달리는 사람처럼 새로운 마음, 새로운 방식으로 실력을 쌓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정리 문진정 & 참조 도서 <문제는 무기력이다>(박경숙 | 와이즈베리)

대자연과 함께 자란 아이는 무기력증에 빠질 가능성이 적다

한 기관이 미국 대통령들의 출생 배경을 조사한 결과, 거의 대다수가 시골 출신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아이는 대자연을 가까이 접하면서 자연의 무한한 가능성과 생명의 끈질김을 배운다. 또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둔다는 자연의 법칙과 변함없이 반복되는 사계절의 순환을 보면서 고난을 참아내는 인내심을 기른다. 한편 도시 빈민층에서는 대통령이 나온 경우가 없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도시의 화려함과 피폐함, 빈부의 격차와 같은 양면성을 보고 일찌감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한계를 받아들여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못하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라

무기력은 의외로 바쁜 사람, 완벽주의자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이 일을 나보다 더 잘해낼 사람은 없어’ ‘빨리 이 일을 해치우자’ 등 모든 일을 다 떠안고 가려다 보면 체력적, 시간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의욕적인 사람도 한번 무기력에 빠지면 성취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게 된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못하는 것은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포기하는 사람이 무능력하고 비겁하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오히려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알고 내려놓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라

지금 당신 앞에 놓인 일을 두고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왜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지금까지 뚜렷한 목표 없이 불평하며 해온 일은 접어두자. 그리고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찾아보자. 삶을 지탱해 나갈 확고한 의미가 있으면 허둥대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불평도 없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쓰레기를 버리듯 제거하자. 자기에 대한 애정과 자존감, 의욕이 생겨날 것이다.

일단 ‘그냥 시작하라’

하던 일은 계속 하려고 하고, 한번 멈춰버리면 쭉 멈추는 물리학의 ‘작용-반작용 법칙’은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하기 싫은 일도 일단 시작해보자. 그러면 뇌가 자극을 받아 그 일에 집중하게 된다. 이를테면 세차를 해야 하는데 도구가 없어서, 귀찮아서 자꾸 미루고 있다면 일단 차에 물 한 양동이를 퍼부어보자. 마치 세차 기계가 된 듯 열심히 닦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차는 반짝반짝 깨끗해져 있을 것이다. 무기력한 뇌에 자극을 주는 방법은 일단 시작을 하고 보는 것이다.

로봇 과학자 최춘보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

세계 1위의 로봇 회사 미국 브룩스 오토메이션(Brooks Automation)은 정밀하고 정확한 로봇을 생산하기로 유명하다. 그 회사의 전무이사이자 로봇의 두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로 근무했던 최춘보(61)씨. 그녀가 이끄는 로봇 소프트웨어 개발팀은 소규모의 UN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 최고의 개발팀이었다. 40세에 공학 공부를 시작, 1995년 브룩스에 입사한 지 4년 만에 이사의 자리에 오른 동양인 여성. 그녀는 미국인 상위 5%의 연봉을 받을 정도로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풀지 못했던 삶의 근원적 문제를 찾아 고민하던 중 마음수련을 만나게 된다. 마음수련 후 그녀가 찾은 인생의 해답에 대한 이야기.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겠구나’. 2002년, 50세가 되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부터라도 남은 여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봉사를 하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무엇보다 제 마음이 전혀 봉사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나를 낮추고 상대를 모시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거든요. 좋은 책도 보고, 좋다는 강연도 찾아다녔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을 보내다가 마음수련에 대한 책을 보게 되었어요. ‘마음을 뺀다’는 말이 와 닿아서 2010년 7월, 휴가를 내서 한국에 있는 마음수련 본원으로 갔지요.

저는 항상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어요.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이라는 힘든 날도 있었지만, 마흔 살에 새롭게 찾은 공학의 길을 걸은 후부터는 모든 게 순조로웠으니까요.

40세에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공학을 전공, 3년 만에 졸업하고, 43살에 브룩스 오토메이션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죠. 로봇을 연구하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정말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신입 사원이 4년 만에 이사로 승진을 하는 것은 이 회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삶이 결국 나만 돋보이고 싶고, 나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행동임을 아는 순간 어찌나 부끄러운지. 그 ‘잘난 나’를 제발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수련을 해나갔습니다. 우월감, 열등감, 노후 걱정…. 그런 마음들을 버려가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너무나 편안한 거예요. 아, 이게 자유고 행복이구나…. 그러면서 본래의 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원래 없었구나, 원래 우주가 나였구나. 그 본래의 자리에는 아픔도, 걱정도, 잘나고 못남도 없고…. 본래와 하나 되어 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 로봇이 로봇의 뇌와 연결된 신경망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듯, 사람도 마찬가지. 최춘보씨가 그 구조를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해 주었다. 로봇이 그들의 컨트롤러 안에 기억을 빼지 않고 계속 쌓아만 두면 결국 과부하가 걸려 멈추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 17년 전 회사의 자동화 시스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최춘보씨. 당시 회사의 홍보지에 실린 사진.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수련을 이어나갔어요. 그렇게 꾸준히 수련을 하니 몸도 좋아졌어요. 15년 넘게 먹어오던 위장약도 끊고, 오른쪽 마비 증상도 없어졌으니까요.

과학자라서일까요. 마냥 좋기도 하면서 그만큼 마음과 몸의 관계, 마음을 버리면 몸이 건강해지는 원리가 궁금했는데, 그것도 어느 순간 수련을 하다가 알게 됐어요.

로봇에서 가장 위험한 버그(bug)가 메모리 릭(memory leak)이에요. 간단히 설명하면, 로봇이 다음 작업을 잘하기 위해선 이전 작업에 대한 내용을 메모리(Random Access Memory)에서 싹 다 지워야 하는데, 이 버그가 생기면 그 내용들을 다 지우지 못하고 조금씩 남겨놓게 돼요. 그럼 나중엔 결국 로봇의 뇌에 정보가 꽉 차서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로봇을 다시 리셋하는 과정에서 Brooks 로봇을 사용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수억의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 메모리 릭을 고치기 위해 Brooks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엄청난 돈을 투자해요. 근데 저희 팀이 치밀한 연구를 통해 이 버그를 완전히 고쳤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 로봇을 세계 최고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마음을 빼지 않고 계속 쌓아놓으면 어느 순간 두뇌가 제 기능을 못하는 거예요. 사람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뇌세포가 있고 각 뇌세포는 축과 가지들로 형성되어 있는데, 뇌세포가지들은 다른 뇌세포의 축으로부터 시냅시스를 통해 정보 전달을 받습니다. 치매 환자들의 뇌를 분석해보면 이 뇌세포가지들이 막 뒤엉켰다고 해요. 뇌세포가지들과 뇌세포축이 연결된 시냅시스들도 다 끊겨 있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명령이 전달될 수가 없는 거예요.

로봇의 가장 큰 버그가 메모리 릭이라면, 사람의 가장 큰 버그는 ‘자기만의 마음사진을 찍어 쌓아놓는다’는 거였어요. 마치 카메라처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눈, 코, 귀, 입, 몸을 통해, 나 중심적인 사진들을 찍으며 살고 있고, 그것이 차오르는 만큼 몸 마음에 버그가 생기는 거죠. 하지만 그 사진들을 빼주면 본래의 나로 돌아가니, 하나님이 프로그래밍한 대로 건강하게 순리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고요.

그 원리를 정확히 알고 나니까 마음수련의 빼기 방법이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이렇게 마음을 빼는 방법을 확실하고 명쾌하게 알려주는 곳은 처음이니까요. 가장 기쁜 것은 마음수련을 통해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저는 하나님조차도 내 마음 안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하나의 상을 만들어놓고 있었더라고요.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관념, 관습을 일체 모두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즉 ‘나’란 존재를 일체 다 버린 순간,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라는 걸 아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너무 행복합니다. 이전의 그 어떤 즐거움도 이 행복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요. 이제 제대로 봉사하는 삶을 살 자신도 생겼습니다. 굳이 내가 낮아져야 한다 마음먹지 않아도 원래 우리는 하나니까, 저절로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거더라고요. 사직을 하고 회사에서 나오는데 정말 설레었습니다. 이제 나는 한 여자로서, 과학자로서의 삶을 넘어 정말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는구나 싶었으니까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정확히 보일 때의 그 통쾌함이랄까.(웃음) 과학자들은 물론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 빼기의 방법을 알고 할 수 있도록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제 앞의 그 한 사람이 점점 편안해지고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사랑하고 나누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개미의 질문

개미’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먹이를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행렬.
언제나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
‘개미와 베짱이’라는 동화도 있듯이 ‘개미’ 하면 근면성실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일개미들이 모두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의외로 일하는 개미는 20%밖에 안 되고,
일하는 척만 하며 띵까띵까 노는 게으른 개미가 80%나 된다는군요.
재밌는 것은, 일하는 20%의 개미만 따로 모아 놓고 보니,

처음에는 모두 열심히 일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역시나 20:80으로,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로 나누어지더라는 겁니다.
그것은 처음의 노는 개미 80%만 모아 놓아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개미 이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우연히 개미들을 관찰하게 된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입니다.
파레토는 이러한 20:80의 법칙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20%의 근로자가 80%의 일을 하거나,
20%의 소비자가 매출의 80%를 차지하고,
20%의 인구가 지구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 중 20%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사람이 느끼는 행복한 기간은 인생의 20%이며,
나머지 80%는 고민, 고통, 시기, 질투 등의 불행을 느끼며 산다는군요.
 
그리고 보니, 저 작은 일개미들조차 우리에게 묻는 듯합니다.
“자, 20%로 살래요? 80%로 살래요?”
봄 햇살이 화창합니다.
그 햇살 아래서 앉아 개미들을 바라보며 답해봅니다.
“인생 뭐 있니? 어차피 한번 사는 거 20%로 살아보지 뭐.”

허망에서 희망으로

그 옛날 한 옛날에도 사람이 살았지.

수없는 사람이 이 땅에 살다가

소리도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졌구나.

그러고 보니 뜻과 의미가 없는 인생사에 수많은 이가 고뇌하고

현실에 집착하고 가지려는 고통 속서 살다가 흔적이 없으니

삶의 의의와 뜻이 없구나.

인간이 영원히 살고 인간이 고통과 짐에서 벗어나는 것은

살아서 죽어봐야 참 자기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라.

참 자기는 인간이 죽고 신으로 다시 남이라.

 

세상도 가고 인간도 모두가 떠나가도

남는 것은 살아 있는 형체도 없고 맛도 냄새도 보고 듣는 것 감각도 없는

그 마음이 끊어진 본바닥만이 남아 있고 이 본바닥에서 다시 나면,

인간은 세상은 영원불사신 되어

세상도 나도 죽지 않는 신이 되어 살아 있는 것이라.

가짜를 버리고 진짜가 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

사람들이 가짜를 두고 진짜가 되려고 하나

가짜는 버려야 진짜가 될 수가 있는 이치를 아는 자도 드물다.

그 가짜에 집착이 너무 심하여 그 속서 참 찾으니

참은 가짜 속에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가짜는 버리고 진짜만 남아

진짜로 다시 나는 것만이 정답일 것이다.

인간 완성을 이루는 곳이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등 다수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 <Stop Living In This Land, Go To The Everlasting World Of Happiness, Live There Forever>는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닷컴’에서 명상, 행복, 건강, 철학, 자기 계발 등 10개 분야 1위에 이어, 주간 전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전 세계에 마음과 비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Wild Flower

Nuphra pumilum usually blooms during summer near a small stream or a pond in the countryside. When bunches of flowers appear above the sparkling water under sunlight, it looks as though yellow butterflies are rising up.

Written and photo by Yi Nam-hee

Water plants are one of the few photographed in challenging environments. For many hours, one has to wait quietly without making even the smallest waves, in waist deep waters. It is incredible when beaming flowers are finally met, through such demanding processes.

▲▲ A hedging plant, ‘Eu-rum’ bears brown fruits that looks like bananas in the fall, and it is called Korean banana.

▲ Kobresia bellardii

is a part of Carex lanceolata plant family which blooms during March and April, seen often near mountain edges.

A frozen ground is no big deal, a snowed terrain is no issue. On the top of waters, in a midst of muddy dirt, those which bloom through the rock-filled mountains are flowers. Once the seed falls on the ground, it only says, “this is my place,” It does not blame the place or fault others. It says, “Doesn’t matter where it bloomed, isn’t it still a flower” only holding a dazzling smile.

▲▶ Leontice microrhyncha

blooms in a spring snow during spring days of April. It is a northern plant that blooms down south in Han-gye-rung; hence, its Korean name is Han-gye-rung. It’s amazing to behold the life of nature when it blooms with its flower buds hanging down in a bitter cold.

▶ Eranthis byunsanensis

blooms in a small island ‘Poong-do’ of western sea region and it’s also called ‘Poong-do baram flower.’

▼ Pulsatilla tongkangens

is blooms only in Dong-kang, Kang-won-do and Jung-sun area, it grows well near limestone rocks.

Flower is lingering. Early spring, it endures a bitter cold in order to bloom. But there is no loudness or rushing about, nor is it self-conceited for its beauty. Could we live as such flower which accepts the nature’s flow and blooms through the frozen ground, against the rain and wind…. Even without anyone paying attention, the flower blooms. In any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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