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아닌 가족 ‘노랑이와 예랑이’
최지현 대학원생. loveandpeace.co.kr
10여 년 전이다. 지하도에서 우연히 아랑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토끼를 발견했을 때, 반가움만큼이나 두려움이 들었다. ‘아랑이’란 토끼를 길렀다가 얼마 안 되어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냈던 일 때문이었다. 어미젖도 못 뗀 채 길에서 팔리는 토끼들은 면역력이 매우 약하여 생야채를 먹이면 안 된다는 걸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 됐던 나는 다시 그 토끼를 집으로 데려왔고, 이전과 달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노랑이’라 이름을 붙이고 건강한 토끼로 길러냈다. 처음에는 슬픈 일이 되풀이될까 봐 걱정했던 가족들도, 노랑이에게 애정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았다. 노랑이는 아기 때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우람하게 자라났다.
사람들은 웬 토끼가 이렇게 무시무시하냐며 덩치를 보고 놀라고 또 놀렸지만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토끼였기에 나는 매일매일 노랑이에게 “노랑아, 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는 말을 해주곤 했다. 그랬더니 노랑이는 정말로 자기가 제일 예쁜 토끼인 것처럼 굴었고, 예랑이가 올 때까지 집안의 막내둥이로서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예랑이’ 역시 우연한 기회에 우리 집으로 왔다. 노랑이를 데려온 지 약 반년 후, 휴학을 하고 학원에서 일할 때 어떤 학생이 뽑기 상품으로 팔리던 아기 토끼를 데려온 걸 대신 기르게 된 것이다. 예랑이는 노랑이와 달리 몸집이 크지 않은 애완용 품종이었다. 우려와 달리 노랑이는 예랑이를 금방 받아들였고, 예랑이는 그런 노랑이를 엄마처럼 따랐다. 마치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여 우리 가족은 노랑이와 예랑이를 볼 때마다 웃음 짓곤 했다.
노랑이는 어릴 적부터 사람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이마를 쓰다듬어주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를 긁어댔다. 이것은 토끼가 기분이 좋다는 걸 뜻한다. 반면에 예랑이는 사람보다 노랑이를 따라서, 언젠가 노랑이가 몸이 아파 새벽 중 병원에 갔을 때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노랑이를 찾을 정도였다.
토끼는 기질적으로 매우 깔끔한 동물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운 게 묻으면 탈탈 털어내고, 수시로 자기 몸을 닦는다. 게다가 초식 동물이라서 특유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아, 깔끔하신 부모님이 유일하게 뽀뽀하고, 사람 쓰는 접시를 공유했을 정도였다. 반면에 개나 고양이에 비해 기르기 어려운 동물이다. 약하고, 예민하고, 아파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고로 주인까지 덩달아 예민해지곤 한다. 또한 인간에 대한 친밀감이 부족하여 기르는 사람을 섭섭하게 만들 수 있다. 개나 고양이처럼 누군가를 따르거나 동반자로 여기는 개념이 없어서 훈련이 어려운 데다 독립적이고 시크(도도)하기까지 한 토끼에게 모든 걸 맞춰줘야 한다. 동물을 기른 경험이 풍부한 나였지만, 토끼 양육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름 즐거웠다. 제멋대로에 먹을 것만 밝히는 줄 알았던 토끼들이 가끔씩 가족들의 손과 얼굴을 핥으면서 애정 표현을 하면 우리는 감동받았고 기뻐했다. 노랑이는 토끼치곤 애정 표현을 자주 했는데, 사람을 정성껏 핥아주는 걸로 보답하곤 했다(토끼의 혀에는 침이 없고, 초식 동물이라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아무리 핥아내도 찜찜하지 않고 씻어낼 필요도 없다.^^).
때론 둘 다 기분이 좋아 침대 위를 뛰어다니거나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때면 우리도 덩달아 행복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인 존재를 순전히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사는 건 생각만큼 낭만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를 아끼고 보살피다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만큼 그들을 책임지려는 자세뿐만 아니라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기쁨과 가치를 알게 해준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인 셈이다.
그러나 동물을 기르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나의 부주의가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왔고, 죽음 또한 우발적이든 자연적이든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무게를 감당하는 것도 버거웠다. 특히 토끼는 중성화수술을 받더라도 수명이 10년을 채 넘기지 못한다. 그래서 아랑이에 이어 노랑이, 예랑이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내야 했고,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존재든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마다 펑펑 울면서 다른 동물을 기르는 데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괴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동물을 만날 때면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배우기도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정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신 부모님의 배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햄스터, 병아리, 강아지, 토끼 등등 많은 동물을 기르면서 무언가를 보살피는 데 따른 행복감과 책임감, 그리고 세상을 이루는 자연의 법칙을 가슴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