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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카프레제

간단하지만 푸짐하게! 영양이 듬뿍 들어간 카프레제예요. 달걀에 현미가루만 넣었는데 근사한 한 접시 요리가 탄생했네요. 조금만 신경 쓰면 황제 밥상도 어렵지 않아요.^^

재료(2인분)

생식용 두부(1/2모), 토마토(1개), 달걀(1개), 현미가루(5큰술), 양념 소금(약간), 간장(1작은술), 참기름(1/2작은술)

만들기

1 생식용 두부는 사방 4cm 크기로 두껍게 썰고 토마토는 세로로 반 갈라 0.5cm 두께로 슬라이스합니다.

2 달걀은 현미가루와 섞어 소금으로 간하고 동그랗게 지단을 부친 뒤 한 김 식혀 6등분(피자 모양)으로 잘라주세요.

3 그릇에 두부, 토마토, 달걀지단을 돌려 담고 간장과 참기름 섞은 것을 뿌려 마무리합니다.

이보은 요리연구가 & 자료 제공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요리연구가 겸 푸드스타일리스트 이보은님은 20여 년간 건강 요리를 알리는 데 힘써왔습니다. 현재 쿡피아쿠킹스튜디오 대표이며 저서로 <행복한 아침밥상>(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외 다수가 있습니다.

자가 조정 안경 Self-Adjustable Glasses

● 이름은?

자가 조정 안경(Self-Adjustable Glasses). 사용자가 스스로 시력을 조절할 수 있는 안경이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나는 원래 실험원자물리학자였다. 그러다 시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80년대에 얇은 막 사이에 액체를 채운 렌즈를 개발하면서 내 시력을 꽤 정확하게 교정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동시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시력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개발도상국에는 전문 교육을 받은 안과 전문의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은 백만 명 중에 한 명 정도 검안사가 있다(영국에는 8천 명당 1명의 검안사가 있다). 십 억이 넘는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은 오직 안경 하나가 없어서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고 일의 생산성 저하, 전체적인 건강 저하, 나아가 실명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력 저하는 국가가 도시화됨에 따라, 사람의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방대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렌즈 조절 기술을 더 많은 개발도상국의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 제품의 원리는?

자가 조정 안경은 특수 렌즈를 포함하고 있다. 양쪽 안경 다리에는 주사기(다이얼)가 연결되어 렌즈 속에 실리콘 액체를 채울 수 있는데 렌즈에 집어넣은 액체의 양에 따라서 굴곡을 조절할 수 있다. 렌즈는 근시, 원시, 노안 등 다양한 시력의 범위를 조절할 수 있으며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선진국 최고 기술과 비교했을 때도 손색없는 시력 교정 효과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자가 조정 안경은 검안사가 아주 부족한 개발도상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졌고 기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조작할 수 있다.

● 상용화 계획은?

현재는 5만 개의 안경이 20개국의 개발도상국에서 쓰이고 있으며 많은 회사에서 상용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상용화될 경우에는 하나에 15달러 이하 가격으로 예상하고 있다. 많이 생산할수록 그 가격은 줄어들 것이며 5달러 이하로 낮추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만든 사람 조슈아 실버(Joshua D. Silver) 교수

영국 거주, Centre for Vision in the Developing World 창립자

사용 방법

1단계 시력 검사 차트를 이용하여 기본 검사를 합니다.

2단계 각각의 눈이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3단계 안경 다리에 달린 다이얼을 천천히 돌립니다.

4단계 안경 프레임에 있는 버튼을 눌러 렌즈를 밀봉합니다.

5단계 더 이상의 조정을 방지하기 위해 조절 튜브를 분리합니다. 안경 다리에서 조절 튜브를 제거하고 안전하게 폐기합니다. 조정이 완료된 안경을 씁니다.

<MBC 휴먼다큐 사랑> 해나의 기적

세상의 모든 기적 같은 이야기는 가슴 아픈 사연과 동시에 말로 표현 못 할 감동을 준다. 특히 <MBC 휴먼다큐 사랑> ‘해나의 기적’은 보는 내내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인형같이 귀여운 외모의 3살짜리 꼬마 숙녀 해나는 선천적으로 기도가 없이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도 끝부분이 겨우 폐와 연결되어 있는 덕에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해나와 같은 희귀병을 가진 아이들 대부분은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잃거나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데 해나는 폐에 연결된 튜브를 입에 끼운 채 숨을 쉬고, 배로 연결된 튜브로 분유를 먹으며 2년 반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기도가 없는 것 말고는 퍼펙트한’ 아기로 놀라울 만큼 의젓하게 잘 견뎌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사랑과 에너지가 솟아오르게 하는 해나. 매 순간 기적 같은 삶을 사는 해나에게 정말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재미 교포 간호사 린제이 손이 서울대병원에 방문했다가 해나를 보게 됐고, 그녀는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마크 홀터만 박사에게 해나 이야기를 한다. 해나를 만난 마크 홀터만 박사는 인공 기도 이식의 세계적 권위자 스웨덴의 파울로 마키아리니 박사에게 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2년간의 노력의 결과로 해나는 줄기세포로 만든 인공 기도 삽입 수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술에 이르기까지 해나 친가인 캐나다 사람들의 자선 행사와 모금 운동, 무료로 수술을 해주는 의사들, 무상으로 도움을 준 의료 기관들 등 10억 원에 달하는 수술 비용과 기타 제반 여건들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야말로 기적의 프로젝트라 아니할 수 없다.

“해나가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프로젝트가 결국 가능하게 된 것이야말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년의 기다림 끝에 미국 FDA의 수술 허가를 받게 된 후 해나 아버지 대런이 한 말이 가슴을 쳤다.

주사 맞기 싫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작은 손을 내젓는 세 살짜리 아기의 두려움과 고통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자신을 보러 온 낯선 의사의 “이 튜브를 빼고 싶니?”라는 질문에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는 해나를 보면서는 눈물과 동시에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린 아기임에도 불구하고, 해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무한한 희망과 긍정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해나를 지금껏 지탱케 해준 원동력이었으며 만나는 순간 빠져들 수밖에 없는 해나의 마력이자, 에너지였다. 이 어린아이가 지닌 삶에 대한 그 무한한 에너지를 나도 닮고 싶었다.

해나가 미국에서 수술을 받은 후 처음으로 사탕을 입에 넣고 맛을 보는 장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껏 혀와 입술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해나가 서툴게 사탕의 맛을 보는 그 장면은 정말 그 누구도 연출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인간의 본능인 입과 혀로 빨고 맛을 보는 그 느낌을 이제 처음 시작하는 해나의 그 얼떨떨하고 경이로운 표정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아이도 아니건만 해나를 살리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던 사람들. 그 사랑과 열정이 기적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 ‘해나의 기적’은 TV를 보는 내내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왜 아름다운지, 어떻게 삶을 대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고 그 답을 찾아가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사랑스런 해나, 아무쪼록 이 천사 같은 아이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그 소명을 찾아 더 밝고 따뜻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성장해 주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김시연 & 사진 제공 MBC-TV

 

불가리아에서 만난 한류 열풍

글&사진 이동춘

지난 4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사진가 이동춘씨의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안동, 봉화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전통문화 및 종가 문화를 주제로 사진 작업을 해온 그가 전시회 기간 동안 불가리아에서 체험한 한류 열풍을 본지에 전해왔습니다. 사진가 이동춘씨의 불가리아 여행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 12시간, 이스탄불 공항에서 다시 이어지는 1시간의 비행. 하늘에서 내려다본 흰 눈이 덮인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비토샤산과 산 아래로 보이는 소피아 시내가 낯선 이국땅에 대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발칸반도에 자리한 불가리아는 남쪽은 그리스, 터키, 북쪽은 루마니아 등을 포함하는 삼각형 반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지형적 특성상 대립과 갈등으로 지금까지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는 이곳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공산국가에서 다시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하기까지 많은 희생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다 우리나라와는 1989년 외교 관계를 맺게 된다.

그들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민족과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매우 높다. 러시아 등 슬라브족이 사용하는 키릴문자가 자신들이 만든 문자란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오랜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와 종교를 지켜낸 데 대한 긍지 또한 대단하다.

이런 불가리아에서 한국대사관 초청으로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선비 정신과 예를 간직한 집 종가>란 주제로, 매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리는 ‘살롱 데 자르 페스티발’ 기간에 맞춰 2주간 진행됐다. 전시장 NDK[National Palace of Culture]는 소피아 시내의 중심에 자리한 명소로, 많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찾아와 한국 문화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지구 반대편 멀리 있는 나라가 한류로 인해 지구를 뜨겁게 달구었다. 반면 한국의 전통 종가는 매우 고요하고 정적으로 보인다.” “한식을 먹어 보고 싶고 한옥 온돌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안동을 방문하고 싶다.”

전시회를 방문한 사람들 중엔 올해 서른 살인 장애인 여성 실비아가 있었다. 3년 전 교통사고로 뇌성마비 환자가 되었는데, 여행가를 꿈꾸던 그녀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사고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통해 갈 수 없는 나라의 문화를 엿보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며 내 손을 붙들고 손등 키스를 해주는데, 나 역시 울컥하여 한참을 껴안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또한 한식을 잘 만드는 스물여섯 살의 아가씨 크리스와의 만남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녀는 참치, 햄, 혼합 김밥 등 세 가지 김밥과 배추겉절이, 파김치 등을 도시락에 싸서 방문해 주었다. 한식이 맛있고 건강식이어서 좋다는 그녀는 인터넷에 있는 한식 만드는 법을 보고 번역기를 돌려 불가리아 말로 된 레시피를 만든다고 했다. 막걸리가 맛있어서 직접 담가 먹기까지 하는 그녀는 앞으로 한국에서 한식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불가리아 학생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한국어과가 있는 국립 소피아 대학 학생들과 윌리엄 골드스톤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선택한 학생들까지…. 앞으론 초등학교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칠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과 노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한류 문화를 사랑하는 K-Pop 팬들과의 만남이었다. 불가리아 전역에서 온 500여 명의 젊은이들이 NDK 앞 스베타 네델리아 광장에서 K-Pop을 외치고 태극기와 불가리아 국기를 흔들며 모여들었다. K-Pop 팬들의 저력을 보여주고, K-Pop 가수들의 불가리아 공연을 기원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2NE1, 샤이니, 티아라, 소녀시대, 미쓰에이,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와 춤을 펼쳐 보였다.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모습들을 보며, 문화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가 이동춘님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구대 사진과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1987년부터 10년간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에서 에디토리얼 포토그래퍼로 일하며 여행, 리빙, 푸드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현재 한국의 전통문화와 관련된 종가 문화 사진을 촬영하며 선현들의 의(義)와 정신을 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차와 더불어 삶> <한옥, 오래 묵은 오늘> 등이 있습니다.

공존과 나눔의 섬 아누타에 가다

남태평양에 위치한 작은 섬 아누타.
지난해 가을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 제작 촬영을 위해
돛단배를 타고 아누타 섬으로 향했다.
인간의 무한 경쟁과 탐욕으로 인해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 떠난 길이었다.
하지만 섬으로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나흘간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겨우 아누타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 & 글 박종우

아누타 섬에 도착하자 먼저 아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얀 모래사장, 비취색의 바다, 섬을 뒤덮은 야자수 등 천혜의 자연은 우리가 상상했던 낙원을 떠올리게 했다.하지만 이곳은 풍요의 땅은 아니었다. 지름 6백여 미터의 작은 섬 대부분이 언덕인데다 사방이 암초로 둘러싸여 있어서 배를 댈 곳도 마땅치 않을 정도로 척박했다. 이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때론 두려운 전쟁터였다. 수시로 닥치는 자연재해나 태풍에 가족을 잃기도 하고,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바다에 나가 고기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을에선 노래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벌거벗은 채 뛰어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흥겨움과 화음은 섬 안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아누타 섬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함께 해결한다. 한 집 건너 입양한 아이가 있을 정도로 부모 잃은 아이를 키워주는 건 당연하고,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기력을 찾을 때까지 순번을 정해 돌봐주고, 비록 고기잡이를 못 해도 잡은 물고기는 24가구가 골고루 나눠 갖는다. 아누타 사람들은 이를 ‘아로파’라 부른다. ‘사랑, 연민, 동정’의 뜻을 지닌 아로파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눔과 공존’의 가치다.‘아로파’를 통해 이들은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셈이다. 아로파가 아누타 섬에서 삶의 철학으로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3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옛날 좁은 영토 안에서 한정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결국 단 4명의 사람만 남으면서 이들은 공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는 법인 ‘아로파’로 전해졌다.

섬 주민 280명 대부분의 이름을 외우게 될 무렵, 한 달간의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섬을 떠나게 되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이 해변에 나와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별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오지 마을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이 수천수만 년 살아온 원래의 방식은 오늘날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일깨워준 곳, 아누타. 갈수록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아로파’가 희망의 언어가 되어 널리 전파되길 소망해본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박종우님은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영상매체를 전공했습니다. 11년간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근무하다가 다큐멘터리스트로 전환한 후 티베트 지역, 몽골리안 루트 등 전 세계를 돌며 사라져가는 소수민족 문화의 기록을 남기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다큐멘터리 영상물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사향지로> <최후의 제국> 등이 있습니다.

참외

며칠 전, 발송자를 알 수 없는 참외 한 상자가 어머니 집으로 부쳐 왔습니다. 단내가 코끝에 느껴지는 노란 참외였습니다. 엄마는 노란 참외를 보다가 당신 가슴속에 있던 70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딸만 둘 낳았습니다. 그것이 멍에가 되어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였습니다. 아들 보자고 딴살림 차린 아버지한테 말대답한다고 발길에 차이고,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꾸역꾸역 밥 먹는다고, 할머니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낯선 여인이 갓난아기를 업고 왔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화낼 줄도 모르고 소리 내어 울 줄도 몰랐습니다. 얼마 안 있어 작은어머니는 남동생을 한 명 더 낳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저 개미처럼 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해, 학교 갔다 돌아오니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언니와 나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낮에는 엄마 냄새가 나는 무명 치마와 흰 저고리에 부비며 울고, 밤에는 이불을 둘러쓰고 흑흑 울었습니다.

세월이 가면 모든 일이 잊혀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떨어진 지 두 해가 되던 어느 여름 날, 언니와 나는 초록이 넘실거리는 들판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들길에서 아버지 친구분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인사를 하자,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애기들아, 어디 가냐?” “우리 어무니 찾으러 가요.”

비록 열한 살 어린 나이지만 당찬 언니 덕에 집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 쫓겨나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산마을에서 내려와, 긴 들길이 끝나는 방죽에 이르자 섬진강이 보였습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강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탔습니다. 뱃전에 앉아 손을 내밀었습니다. 맑은 강물이 엄마처럼 부드럽게 내 손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나루터에 내려 신작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한여름 땡볕에 숨이 막혔지만, 언니와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모가 산다는 동네를 물어물어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걷다가 어느 동네 장마당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 행인이 뜸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길가에 소쿠리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아!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우리는 “어무니! 어무니!” 하면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모녀가 불쌍해서 어머니를 그렇게 만나게 해준 모양입니다.

어머니 앞에 놓여 있는 소쿠리에는 노란 참외와 겉보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참외를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팔아 곡식을 샀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이모 집 살림을 도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가에 선 채 부둥켜안고 그저 눈물만 흘렸습니다.

하지만 날이 저물기 전에 우리는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어머니는 이모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엄마가 노란 참외 일곱 개와 돈을 주었습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만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우리는 또 헤어졌습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때 아홉 살이던 나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름날 참외를 보면 우리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노란 참외는 사무치게 보고 싶은 우리 엄마 얼굴입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천문학자 박석재 박사

구술 정리 김혜진 & 사진 제공 박석재

별과 달을 포함한 우주를 바라볼 때면 가슴마저 탁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본다는 건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천문학의 대중화에 힘써온 분이 있습니다. 바로 천문학자 박석재(57) 박사입니다. 누구보다 별과 우주를 사랑했던 우리 민족이었지만, 언제부턴가 하늘 보기를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던 그는 누구나 쉽게 별을 볼 수 있는 천문대 건립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2001년 대전시민천문대를 시작으로 전국에 수십 군데의 시민천문대가 생겼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별을 관측하게 됩니다. 박석재 박사가 들려주는 별과 우주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어린 시절엔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게 제일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잡다 보면 밤이 되고, 물질하다가 허리가 아파서 일어서면 하늘 가득히 여름철 은하수가 보였죠. 마치 아이맥스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별이 너무 좋아 천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의외의 어려움도 많았어요. 전공한 교수님이 없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거의 독파하다시피 공부해야 했고, 비인기학과로서의 서러움도 많았죠. 천문학을 공부하는 환경이 워낙 척박해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으로 만들 수 있을까 했던 게 당시 저의 고민이었어요. 어릴 때를 돌아봐도 주위에 천체망원경도 없었고, 재미있는 천문학 책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천체망원경을 보여주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고향이자 근무지인 대전에 시민천문대를 건립하는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보현산천문대, 소백산천문대가 있었지만 천문학자들의 연구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학생과 일반인들은 볼 수가 없었거든요. 그야말로 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거였죠. 반면 일본의 경우 시민천문대가 공사립 합쳐 300개가 넘어요.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평생 망원경으로 달 한 번 보지 못합니다. 망원경을 통해 보는 달이나 금성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운데도 말이죠.

천문학자로서 저의 소원은 달빛에 사람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도 모르고 자란 요즘 아이들에게 별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시민천문대 건립이었죠. 하지만 시민천문대가 무얼 하는 곳인지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대전시민천문대가 처음 문을 열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이후에도 시민천문대가 여기저기 만들어지게 됩니다.

사실 천문학은 우리 실생활과도 아주 밀접합니다. 일·월식과 같은 천문 현상이나 일몰시간에 대한 정확한 예보, 해가 바뀔 때마다 달력을 만드는 것도 천문학과 관련이 깊습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가 융성할 때는 반드시 천문학이 발전한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천문학 선진국이었습니다. 우리 조상의 우주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어요. 고구려 때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 불렀고, 수천 년 된 고인돌에도 북두칠성을 새길 정도로 별을 숭상했습니다. 또한 12층 365개의 돌로 만들어진 첨성대나 천상열차분야지도 같은 문화재들도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특히 조선 태조 4년(1395)에 만든 <천상분야열차지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모든 별을 돌에 새겨 만든 하늘의 지도인 셈이죠. 원본은 고구려 성좌도의 탁본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의 순우천문도보다 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걸 추측할 수 있으며, 중국의 천문도와는 달리 1,460여 개의 별을 그 밝기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새긴 아주 과학적인 천문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가 담긴 태극기, ‘하늘이 열린다’는 뜻을 가진 개천절이란 공휴일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주와 하늘을 숭상하면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살고자 했던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 별을 잊고 사는 게 저는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물체를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꿈을 이야기하게 되고 우주를 이야기하게 되는 거거든요.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많이 있다는 걸 알고 자란 아이하고, 별을 모르고 자란 아이하고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주를 알고 자란 아이들은, 영화를 만들더라도 한국판 스타워즈를 만들 것이고, 시를 쓰더라도 깊이가 다르고, 사람과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도 훨씬 클 거라고 믿습니다.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주를 태양계보다 조금 더 큰 정도로 인식했어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으로 100억 광년 떨어진 천체를 볼 수 있습니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니까 100억 광년은 그야말로 굉장히 먼 거리죠. 100억 광년의 우주를 지구만큼 축소한다고 가정할 때, 지구는 놀랍게도 원자보다도 작아집니다. 현미경으로도 안 보이죠. 원자보다도 작은 지구에 살면서 지구만 한 크기의 우주를 천문학자들이 관측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광활한 우주를 깨우칠 때마다 정말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람이 있다면 세계인들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참 별을 좋아한다’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 여름밤, 하늘을 보며 견우성 직녀성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달을 보며 방아를 찧는 토끼를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혹시 아나요? 유난히 어떤 별 하나가 너무 좋아질지 말입니다.

천문학자 박석재님은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블랙홀 천체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5년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천문연구원 원장(2005~2011)을 역임했습니다. 저서로는 <블랙홀이 불쑥불쑥> <개천기> <하늘에 길을 묻다> 외 다수가 있습니다.

이왈종 화백,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를 말하다

20여 년째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라는 단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온 이왈종 화백. 1991년 안정된 교수직을 내려놓고 제주에 내려간 후 계속해서 천착해온 주제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 화가로 평가받는 이화백은 지난 5월 말, 왈종미술관을 개관했다. 20여 년간 그에게 행복을 주었던 제주 서귀포에 감사하며,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인생의 이치와 행복을 발견해 갔다는 이왈종 화백이 이 시대에 전하는 행복 이야기.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 폭포로 유명한 제주 정방폭포, 그 바로 옆에 왈종미술관이 있다. 그곳엔 이왈종(69) 작가의 40여 년 작품 생활을 총망라하는 수장고, 작품 전시 공간, 작가의 작업실, 그리고 10여 년 넘게 제주 어린이들을 위해 무료로 진행해온 어린이 미술 교육을 위한 공간도 포함되었다. 살던 집을 헐어 미술관을 짓기로 한 그는 우선 도자기를 빚어 건물 모형을 만들었다. 모나고 각진 것 없이 부드럽고 둥근 선을 지닌 조선백자 다완(茶碗)을 닮은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미술관 완공에 앞서 문화재단을 만들어, 전시된 작품과 수익이 사회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미술관을 재단에 귀속하기로 했다. 이것이 20년 넘게 제주의 자연과 함께하며 갖게 된 ‘왈종 스타일’이었다.

미술관 개관을 축하드립니다. 미술관을 문화재단에 기증하셨다고 했는데, 그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바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죠.(웃음) 그런데 솔직히 우리가 태어날 때 뭘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없이 나오고 갈 때도 그냥 가는 거죠. 단지 그동안 제가 가진 걸 이렇게 한데 모아놨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화백은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무척 몸이 약했기에 부모님은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는 것을 포기하셨고, 덕분에 그는 그가 원하는 미술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 등을 수상하며 일찍이 화단에서 주목받던 젊은 작가였던 그는, 1979년 추계예술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크고 작은 업무들. 그러다 보면 겨우 밤에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어느 순간 그는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이게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1990년 결국 그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자연은 그의 생각과 화풍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제주도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우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웃음) 그래도 저는 그랬죠. 밥 세끼 먹으며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성공한 거다. 우리 시대 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환쟁이 취급받고 그랬어요. 그런 상황을 어려서부터 겪었기 때문에 늘 마음 편히 사는 방법,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 마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들여다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교수 생활을 하면서는 마음이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처음에 제주에서 작업을 하는데, 바다에 엄청 파도가 센 날이었어요. 창밖으로 고깃배 하나가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데 보였다 안 보였다 아슬아슬해요. 그때 인간의 어떤 목표를 위해서 나아가는 억센 의지를 본다고 할까. 그 배를 보면서 그럼 나의 목표는 뭐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론은 나에겐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겠더라고요.

작품 속 색이 밝고 화사해서 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밝은 색을 쓰는 편이 아니었는데 여기 와서 많이 달라졌어요. 색과 선이 그림을 만드는 건데 색을 컴컴하게 써서 남을 스트레스받게 할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여기 와서 자연의 색에 감탄할 때가 많았어요. 겨울에 동백꽃을 보면 왁스 칠해놓은 거 같아요. 반짝반짝. 그리고 새벽에 흙을 뚫고 올라오는 싹들을 보면 그 색깔이 정말 아름답지요. 그런 데서 오는 쾌감, 자연의 신비로움, 그런 색을 구현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합니다.

‘중도中道’라는 주제로 꾸준히 작업을 하셨는데 작가님께서 말하는 중도란 무엇인가요?

중도는 양극을 피하는 것.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이에요.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거고.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람은 끊임없이 양면의 감정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 양면성을 융합시켜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평등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물이나 파리나 사람이나 생명의 선상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하나고 다 평등하고 소중하잖아요.

그러한 생각도 제주의 자연을 통해서 갖게 되신 건가요?

한번은 길가에 잡초를 들여다보는데 질서정연해요. 우거진 나무들도 부딪칠 거 같은데 서로 다치게 하지를 않잖아요. 식물도 이렇게 자기 관리를 잘하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오직 인간만 만나면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잖아요. 그리고 여기에는 1년 사계절 꽃이 계속 펴요. 목단, 장미 같은 화려한 꽃들뿐만 아니라 잘 안 보이는 아주 작은 꽃들도 많아요. 그런 작은 꽃들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자기 질서를 가지고 있어요. 크나 작으나 모두 자기 역할을 다 하는 거예요. 생명의 선상에서는 땅바닥에 붙어 있는 이 작은 꽃이나 인간이나 다 평등한 거구나, 이곳에서 그런 걸 더 많이 느끼게 되었죠.

낮에는 온갖 꽃들과 새들의 울음소리가, 밤이면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귀뚜라미, 여치, 곤충들의 오케스트라가 끊이지 않는 천상 낙원 같은 제주도. 그러한 자연에 감동하며 즐겁게 작업을 하면서 이화백은 더욱 마음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과 증오, 탐욕과 미움, 번뇌와 자유, 슬픔과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천상 낙원 같은 이곳도 마음에 따라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동백나무에서 뚝뚝 떨어진 동백꽃처럼, 뚝뚝 떨어져간 친구들을 보며, 시간의 힘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생의 무상함도 많이 경험했다. 꽃이 피고 지고 다시 생성되듯, 그러한 자연의 섭리 속에 인간 또한 속해 있음을 느꼈던 시간들. 그것은 스스로를 겸허하게 만들어준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된 성찰 속에서 ‘제주 생활의 중도와 연기’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

“도대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만 깊게 생각해왔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보았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란 생각도 해봤다. 살다 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緣起)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일생을 걸었다.” – 작업노트 중에서

결과적으로 그림을 통해서 말하고 싶으신 게 무엇인가요?

결과적으로 그림을 통해서 말하고 싶으신 게 무엇인가요? 행복이 뭐냐? 그런 걸 주제로 삼고 싶은 거죠. 그런데 행복이 뭔가 이런 것을 그림에 표현하려면, 내 자신의 마음이 밝아야 하잖아요. 그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기가 추구하는 세계가 긍정적일 때 작품에도 밝게 표현됩니다. 그래서 집착하고 치우치지 않고 마음을 어떻게든지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데서부터 작업이 시작됩니다.

작가님만의 마음 다스리는 비법이 궁금해집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쉬워요. 저 우주에서 바라볼 때는 나는 세균이나 똑같은 거잖아요?(웃음) 나는 세균덩어리다, 그렇게 내가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내려놓아져요. 내 고집, 내 생각, 나라는 존재가 별거 아니다 하면 간단하죠. 그리고 마음을 낮춰서 개한테도 고맙다, 새한테도 고맙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요. 그런 마음을 이곳 자연에서 많이 배웠죠. 그리고 제가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팔자예요.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내 팔자다 그렇게 생각하고 빨리 잊어먹으면 마음이 편하지요. 한번 해봐요. 좋아요.(웃음)

<제주 생활의 중도>

91×117cm. 장지 위에 혼합. 2011

동백꽃, 수선화, 물고기, 배 등 그가 만나는 제주의 자연과 더불어 그의 그림 소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골프다. 처음에는 작품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린 것이 인연이 되어 골프를 시작했고, 골프를 하면서의 경험을 그림에 담는다.

“집착은 버리되 자신의 작업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기 생각을 자꾸 변형하고 탈바꿈시키고 껍질을 벗겨내는 훈련이 행복”이라 말하는 이왈종 화백은 제주에 와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평면에서 부조, 목조, 판각, 도자기와 향로, 테라코타 설치…. 그리고 최근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미디어아트도 시도하고 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정체되면 썩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화백의 그림 속에는 어떤 일정한 틀을 찾아보기 어렵다. 상하좌우, 크기의 틀도 없다. 그의 그림 속에는 집보다 갈대가, 수선화나 분꽃이 훨씬 크기도 하고, 사람과 강아지의 크기가 같기도 하다. 사슴, 새, 연꽃, 잉어 등 행운과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색이, 전화기, 자동차, 골프채 등 현대를 상징하는 이미지와 색들과 조화를 이룬다. 전통과 현대, 일상과 환상, 고요와 역동… ‘제주 생활의 중도와 연기’라는 주제처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담아낸 작품. 소박하지만 격조 높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현대적인 이화백의 그림은 한국화다, 서양화다 하는 개념마저 무색하게 만들었고,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두고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도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나의 그림은 보다 자유롭다. 인간이 새도 되고 새가 인간도 되고 꽃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 그림은 물질과 만나면 인연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가상을 그린 것이다.” – 작업노트 중에서

이화백은 인터뷰 내내 때로는 무척 진지하고, 때로는 크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 모습이 마치 극과 극의 화합, 중도를 추구하는 그의 그림 같았다.

이화백은 밤 9시면 잠자리에 들어 새벽 3시면 일어난다고 한다. 그 시간에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한잔 벗 삼아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화백.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제주 생활의 중도>

46×38cm. 장지 위에 혼합. 2010

작가님께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저는 스타가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유명한 화가다 예술가다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생긴 것도 뒷골목 할아버지잖아요.(웃음) 전 세계에 저 밤하늘의 별처럼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지만, 저는 그런 예술가 대열에 끼는 것보다는 어떻게든지 내가 편안하고 나의 작은 편안한 마음을 또 행복한 마음을 내 그림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이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 목표고 행복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한국화의 매력을 민화에서 찾는데, 이름도 없이 사인도 없이 그렇게 그림만 남기고 간 민화 작가들처럼, 그런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이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이왈종 화백. ‘이미 늙은 몸은 허약하고 말랐으나 온갖 꽃들과 새를 벗 삼아 살아가는 마음만은 풍요롭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언제나 자연과 함께하고자 했고, 그만큼 자연을 닮아 있었다.

한결같이 믿고 따라주는 반려동물들. 상처받고 힘들 때면 더욱 큰 위로가 되어주는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행운의 삼색 고양이 그리고 내게 힘이 돼준 길고양이들

고경원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 저자. 서울시 도봉구 도봉2동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쯤 잊지 못할 인연을 만난다. 내겐 2002년 7월에 만난 ‘행운의 삼색 고양이’가 그랬다. 당시 인터넷서점에 전시 리뷰를 쓰며 생계를 유지하던 때라, 종로 일대 서점가를 돌며 신간을 훑고 인사동과 사간동 화랑가에 들러 전시를 취재했다가 다시 전철역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자주 다녀 익숙해진 그 경로를 ‘개미길’이라고 불렀는데, 행운의 삼색 고양이를 만난 것도 그런 개미길에서였다.

다른 길고양이 같았으면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금세 달아났을 텐데, 녀석은 좀 특별했다. 화단에 몸을 숨기고 행인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던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겁을 먹기는커녕 동그란 눈을 빛내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닌가. 어린 고양이다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 사랑스러워 한참을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이후로 10여 년간 지켜보게 된 화단 길고양이의 첫 기록이다.

단지 귀여운 길고양이를 만났다는 추억으로만 남았다면 행운의 삼색 고양이를 금세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화단 근처에서 간간이 얼굴을 비치던 녀석은 1년 뒤 어미 고양이가 되어 나타났다. 너무 일찍 엄마가 되어 새끼들을 키우는 일이 힘들었던지 통통했던 두 볼도 홀쭉해지고, 보송보송했던 콧등 털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헌데 내겐 귀여운 어린 고양이 시절의 모습보다, 어른 고양이의 의연함이 자리 잡은 그 얼굴이 더 큰 감동을 주었다. 엄마가 된 그 고양이가 내게 눈빛으로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참 고단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살아야지. 기왕에 태어났으니까, 사는 동안에는 있는 힘껏 힘내서 살아야지.’

돌이켜 보면 내가 길고양이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도시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을 향한 동지애에 가까웠다. 20대 중반에 비정규직 기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 프리랜서와 정규직 사이를 오가던 무렵, 길고양이가 살기 위해 눈에 띄는 음식을 일단 집어삼키고 보는 것처럼 나도 온갖 글을 쓰며 하루하루 버티곤 했다.

그렇게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을 느낄 때마다 힘이 되어준 건 길고양이였다. 집고양이처럼 살갑게 다가와 위로해주는 법은 없었지만, 길고양이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시달려 고단해질 때면, 화단 고양이들의 은신처로 찾아가 30분이고 1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게 그 무렵의 낙이었다. 회양목과 사철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화단은 그네들의 집이었지만 동시에 내게도 지친 마음을 쉬어가는 은신처였다. 집이 멀어서 매일 밥을 챙겨주진 못했지만, 취재가 있어 근처에 들른 날은 사료를 챙겨 갖다주곤 했다. 오늘만은 한 끼라도 제대로 된 밥을 먹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무심코 스쳐 지나는 길고양이 동네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노릇을 기꺼이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짧은 생을 살다 떠날 길고양이들이지만, 그들이 한때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갔다는 사실조차 잊히는 건 안타까웠다. 그들의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그들도 영원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있을 테니까.

길고양이를 찍을 때면 최대한 몸을 낮춘다. 때론 흙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때론 쓰레기 봉지 곁에 쭈그리고 앉는다. 잔돌에 무릎이 배기고 시큼털털한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찌를 때, 눈비에 젖은 바지에서 으슬으슬 한기가 밀려올 때 ‘길고양이가 이런 환경 속에서 버텨왔구나’ 싶다. 그렇게 몸을 낮춰 길고양이의 눈높이가 되어보고 길고양이의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오랜 시간 지켜본 길고양이의 희로애락을 사진과 글로 전하면서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이런 작업이 계기가 되어,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길고양이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거리의 고양이에게도 제각기 사연과 감정이 있고 소중한 삶이 있음을 글과 사진으로 접하다 보면, 그들이 지닌 생명의 무게가 언젠가 묵직하게 와 닿지 않을까. 우리 주변의 길고양이 이야기를 10여 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도, 내가 그들에게 위로받으며 느낀 마음의 빚을 그렇게라도 갚아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길고양이가 행복하기를!

전영미 작.

< Cute Cup Pup> 20×20cm

장지에 채색 / 2011

나의 안내견 찬미창조

김예지 34세. 피아니스트.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교 박사 과정 재학 중

워낙 어려서부터 잘 안 보였기에,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내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2000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친구들이 한 시간이면 하는 과제를 나는 며칠이 걸리곤 했다. 나는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걸 절실히 느낄 즈음 안내견 창조를 만났다. 창조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의 아주 덩치가 큰 남자아이였다. 사람을 무척 좋아해 처음 만나자마자 나에게 달려와 내가 넘어질 뻔할 정도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 이후로 언제나 창조와 함께했다.

길을 다닐 때는 물론이고, 수업 시간에도,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보통 나를 기다려야 할 때면 창조는 잠을 잤다. 피아노 연습을 할 때도 자는데, 내가 연주를 잘하면 잘 자는 것 같고, 좀 부족한 듯싶으면 잘 못 자는 거 같았다. 어느새 창조가 심사 위원이 되어 있었다고 할까.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설 때도 함께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좋아해, 나름 무대 위에서 박수받고 사진 찍히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2000년만 해도, 우리나라에 안내견은 흔한 존재가 아니어서 창조와 어디에 가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출입을 거부당하곤 했다. 그러면 그게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낀 창조도 의기소침해졌다. 나도 속상해서 있으면 나에게 다가와 앞발을 내 무릎에 올려놓거나, 가만히 턱을 괴고 있기도 했다.

1년, 2년, 3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창조와 24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렇게 창조는 7년을 함께하다 9살 때 은퇴를 했다. 2007년 창조의 몸도 안 좋아지고, 그해 9월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하게 됐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창조를 떠나보낸다는 건 말로 할 수 없이 슬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은퇴 후 무척 좋은 은퇴견 홈케어 가정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지금 내 곁에 있는 찬미를 만났다. 창조가 늠름한 남자아이였다면 찬미는 새침데기 여자아이다. 처음에는 창조랑 너무 달라 적응하기가 힘들었는데, 찬미는 여자아이를 키우는 것 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내가 외롭고 힘들어하는 거 같으면 나에게 다가와 갑자기 뒤집어져 배를 보여주며 허리를 막 움직이는 등의 애교를 보여준다. 언어도 사람도 모든 게 낯선 미국에서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어준 찬미. 사람들은 변하는 경우도 많은데, 창조와 찬미는 언제나 한결같다. ‘더욱더 사람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더욱더 개를 좋아하게 된다.’ 언젠가 책에서 쇼펜하우어가 했다는 이 말을 읽게 되었는데 무척 공감이 갔다.

내가 스스로 독립된 인생을 살게 도와준,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반려생명체. 언제나 내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친구. 나를 절대 속이지 않는 나의 눈. 식사 챙기기, 목욕시키기…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자식 같은 존재. 그로 인해 나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주는 존재.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받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나의 안내견 창조와 찬미.

나는 지금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음악 교육을 하는 데 필요한 교재 등을 연구 중이다. 후배들은 나 같은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장애인 비장애인 구별 없이 모두가 하나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 나의 안내견들은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전영미 작.

<숨바꼭질> 34×44cm

비단에 채색 / 2012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내 동생, 푸근이

김채은 18세. 경기도 과천시 원문동

많은 분들이 인사말로 “형제자매가 어떻게 되니?” 자주 물으시잖아요. 전 그때 당당히 “오빠랑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어린 동생이 하나 있어요”라고 답합니다. 저에겐 동생의 정체성(?)이 중요하진 않지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제 동생은 푸들이에요.(^^;;) 이름은 ‘푸근이’랍니다!!

어릴 적부터 늘 강아지 키우는 게 소원이었지만, 한번 키우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러기 쉽지 않다며 부모님은 단호히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러다 2년 전, 저희 가족은 10여 년 동안 살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니 새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친했던 친구들도 없으니 학교생활도 쉽지 않았고요. 그렇게 힘들어하는 저를 보며 부모님은 의논 끝에 그렇게 반대하셨던 강아지를 선물해주셨죠. 단, 생명을 키운다는 건 단순히 재미가 아니고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지요.

맑고 또랑또랑한 눈망울과 소시지 같은 꼬리를 달고 있던 복슬복슬 갈색 푸들. 아직 두 달밖에 안 된 조그마한 푸근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저를 푸근하게 감싸주는 거 같았습니다.

제 발소리만 들리면 문 앞까지 나와 반겨주고, 무릎 위에 올라와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리던 푸근이. 지치고 힘든 학교생활 속에서도 그런 푸근이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고, 푸근이는 그렇게 그 누구도 위로해주지 못했던 저의 마음을 위로해주었지요. 덕분에 좀 힘들더라도 다시 일어나 밝은 마음으로 생활하자고 다짐하였구요. 씻겨주고, 안아주고, 예방접종 시켜주고…. 그렇게 푸근이를 보살피면서 저의 마음도 더 커져갔습니다.

어려서 배변 판에 오르기도 벅차 낑낑대던, 마냥 바깥세상이 신기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푸근이가 어느덧 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 푸근이가 있어서 저는 2년의 시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작년, 신중한 고민 끝에 고등학교 입학 대신 검정고시를 선택했지요. 가끔 과연 잘한 선택인지 불안할 때도 있지만, 참 고맙게도 푸근이는 그때마다 저에게 더욱 달라붙어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 넣어줍니다.

어느새 저희 집 막둥이로서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푸근이와 함께 저도 같이 힘든 일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내 동생 푸근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제 삶도 책임감 있게 가꿔갈 것입니다.

며칠 전 두 살을 맞은 푸근아!!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 살자~ 고마워~^^.

전영미 작.

<수국이 피었어요> 37×44cm

비단에 채색 / 2012

한결같이 믿고 따라주는 반려동물들. 상처받고 힘들 때면 더욱 큰 위로가 되어주는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여동생이 남기고 간 선물, 나의 조카 행운이

김영숙 59세. 주부.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반려동물, 내게는 참으로 생소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옆에는 행운이라는 갈색 푸들 한 마리가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어디를 가든 함께한다. 행운이는 막내 여동생이 함께 살아온 강아지였다. 쉰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여동생이 자식마냥 십 년을 넘게 동고동락해온 가장 가까운 식구였다.

2011년도에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다가 대장암 말기라는 청천병력 같은 선고를 받은 동생은, 수술에 요양에 한방에 열심히 치료를 받았지만, 2012년 설날 부모 형제를, 사랑하는 행운이를 이 세상에 둔 채 쓸쓸히 저세상으로 갔다.

동생은 투병 생활을 하는 1년 동안 행운이 걱정을 참 많이 했다. 자기가 죽으면 유기견이 될까 봐, 거리에서 유기견을 보고 온 날이면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리고 나에게 언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며, 자신이 어떻게 된다면 행운이를 맡아달라고 어렵사리 부탁을 했다. 짐승이라면, 아니 벌레 한 마리에도 기겁을 하는 나는 개를 집에서 기른다는 사실이 정말 무섭고 싫었지만 막내 여동생에게는 웃으며 그러마 했다. 아무 걱정 말라고.

여동생의 49재를 지내고 행운이는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내게로 왔다. 그날부터 나와 행운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물이라고는 한 번도 키워보지 않았던 나는 실수투성이였다. 간혹 행운이를 만질 때면 가슴이 펄떡펄떡하며 무서움에 떨었다.

12년을 돌봐주던 엄마가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을까. 행운이는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고, 멍하니 풀이 죽어 있을 때가 많았다. 동생이 마지막 침상에서 투병 생활을 할 때 행운이는 언제나 동생 발밑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동생을 만지려고만 해도 으르렁거리곤 했던 행운이였다. 낮에는 꼼짝 안 하고 가만히 있고, 밤이 돼도 잠도 안 자던 행운이는 나를 포함해 낯선 사람들이 다가가면 사납게 대했다. 거기다 자동차도 못 타고, 아무 데서나 다리 들고 오줌 싸고, 성질나면 왕왕 짖어대고….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이 병원 저 병원 돌며 행운이에게 맞는 병원을 정하고 동물병원 원장 선생님의 조언도 듣고 거실 개집 옆에서 잠도 함께 자고, 동물농장 TV도 열심히 보며 참고했다.

풍선으로 놀래주기, ‘짖지마’ 구입하기 등등 노력을 하는 동안 점차 행운이와 가까워져 갔다. 그렇게 동생을 잃은 슬픔에 바깥 외출은 일절 하지 않은 채 나는 행운이랑 1년을 보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그렇게 춥던 지난겨울도 행운이와 산책하고, 행운이 목욕시켜주고 간식 주고 하며 열심히 같이 살았다. 이제 행운이는 신발도 신고, 오줌도 가려 누고, 아침이면 산책 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자동차도 잘 타는 등 정말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동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한 가슴에 눈물이 고이지만, 이젠 행운이도 주인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고 나도 동생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조금씩 세상과 어울리려 한다.

평생 이런 글을 써서 보내보는 건 처음이다. 이 글을 통해 막내 동생에게 전해주고 싶다. 행운이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곳에서 편안히 지내라고.

행운이를 조카처럼 생각하며 이모가 되어 평생을 돌볼 것이다. 지금도 내 옆에서 네 다리 쭉 뻗고 쌔근쌔근 잠자고 있다. 사랑스런 내 조카 행운이가.

전영미 작.

<우리 누나> 45×37cm

비단에 채색 / 2011

토끼가 아닌 가족 ‘노랑이예랑이

최지현 대학원생. loveandpeace.co.kr

10여 년 전이다. 지하도에서 우연히 아랑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토끼를 발견했을 때, 반가움만큼이나 두려움이 들었다. ‘아랑이’란 토끼를 길렀다가 얼마 안 되어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냈던 일 때문이었다. 어미젖도 못 뗀 채 길에서 팔리는 토끼들은 면역력이 매우 약하여 생야채를 먹이면 안 된다는 걸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 됐던 나는 다시 그 토끼를 집으로 데려왔고, 이전과 달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노랑이’라 이름을 붙이고 건강한 토끼로 길러냈다. 처음에는 슬픈 일이 되풀이될까 봐 걱정했던 가족들도, 노랑이에게 애정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았다. 노랑이는 아기 때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우람하게 자라났다.

사람들은 웬 토끼가 이렇게 무시무시하냐며 덩치를 보고 놀라고 또 놀렸지만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토끼였기에 나는 매일매일 노랑이에게 “노랑아, 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는 말을 해주곤 했다. 그랬더니 노랑이는 정말로 자기가 제일 예쁜 토끼인 것처럼 굴었고, 예랑이가 올 때까지 집안의 막내둥이로서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예랑이’ 역시 우연한 기회에 우리 집으로 왔다. 노랑이를 데려온 지 약 반년 후, 휴학을 하고 학원에서 일할 때 어떤 학생이 뽑기 상품으로 팔리던 아기 토끼를 데려온 걸 대신 기르게 된 것이다. 예랑이는 노랑이와 달리 몸집이 크지 않은 애완용 품종이었다. 우려와 달리 노랑이는 예랑이를 금방 받아들였고, 예랑이는 그런 노랑이를 엄마처럼 따랐다. 마치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여 우리 가족은 노랑이와 예랑이를 볼 때마다 웃음 짓곤 했다.

노랑이는 어릴 적부터 사람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이마를 쓰다듬어주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를 긁어댔다. 이것은 토끼가 기분이 좋다는 걸 뜻한다. 반면에 예랑이는 사람보다 노랑이를 따라서, 언젠가 노랑이가 몸이 아파 새벽 중 병원에 갔을 때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노랑이를 찾을 정도였다.

토끼는 기질적으로 매우 깔끔한 동물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운 게 묻으면 탈탈 털어내고, 수시로 자기 몸을 닦는다. 게다가 초식 동물이라서 특유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아, 깔끔하신 부모님이 유일하게 뽀뽀하고, 사람 쓰는 접시를 공유했을 정도였다. 반면에 개나 고양이에 비해 기르기 어려운 동물이다. 약하고, 예민하고, 아파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고로 주인까지 덩달아 예민해지곤 한다. 또한 인간에 대한 친밀감이 부족하여 기르는 사람을 섭섭하게 만들 수 있다. 개나 고양이처럼 누군가를 따르거나 동반자로 여기는 개념이 없어서 훈련이 어려운 데다 독립적이고 시크(도도)하기까지 한 토끼에게 모든 걸 맞춰줘야 한다. 동물을 기른 경험이 풍부한 나였지만, 토끼 양육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름 즐거웠다. 제멋대로에 먹을 것만 밝히는 줄 알았던 토끼들이 가끔씩 가족들의 손과 얼굴을 핥으면서 애정 표현을 하면 우리는 감동받았고 기뻐했다. 노랑이는 토끼치곤 애정 표현을 자주 했는데, 사람을 정성껏 핥아주는 걸로 보답하곤 했다(토끼의 혀에는 침이 없고, 초식 동물이라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아무리 핥아내도 찜찜하지 않고 씻어낼 필요도 없다.^^).

때론 둘 다 기분이 좋아 침대 위를 뛰어다니거나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때면 우리도 덩달아 행복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인 존재를 순전히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사는 건 생각만큼 낭만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를 아끼고 보살피다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만큼 그들을 책임지려는 자세뿐만 아니라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기쁨과 가치를 알게 해준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인 셈이다.

그러나 동물을 기르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나의 부주의가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왔고, 죽음 또한 우발적이든 자연적이든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무게를 감당하는 것도 버거웠다. 특히 토끼는 중성화수술을 받더라도 수명이 10년을 채 넘기지 못한다. 그래서 아랑이에 이어 노랑이, 예랑이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내야 했고,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존재든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마다 펑펑 울면서 다른 동물을 기르는 데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괴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동물을 만날 때면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배우기도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정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신 부모님의 배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햄스터, 병아리, 강아지, 토끼 등등 많은 동물을 기르면서 무언가를 보살피는 데 따른 행복감과 책임감, 그리고 세상을 이루는 자연의 법칙을 가슴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

전영미 작.

<동백이의 꽃나들이> 49×58cm

비단에 채색 / 2012

16살 아롱아 떠나는 그날까지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줄게

조보람 30세. 교사.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중학교 2학년 때, 내 생일날의 일이다. 친구와 엄마 가게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신발 끈이 끊어져 버렸다. 지하철 근처에서 구두 수선집을 발견했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운명이었을까? 그곳에서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좁은 바구니 속에서 앉지도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들어 있는 걸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귀엽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수선을 하며 기다리는 동안 조금씩 그 아이가 내 심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었나 보다. 수선집을 떠난 후에도,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자꾸 그 아이가 눈에 아른거렸다.

내 나이 14살. 나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는 나이에 친구와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다시 그 수선집에 갔다. 우리는 가격을 깎았고 1만5천 원에 친구가 생일 선물로 그 아이를 내게 사주었다. 수선집 아저씨에게 들으니, 강아지 주인이 “이 아이는 혼혈견이니 싸게 팔아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우리는 가게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2개월이 된 아이를 안고 있는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엄마에게 혼날 생각에 겁이 났다. 미리 아빠에게 전화로 이야기했지만 역시 엄마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하라며 화를 내셨다. 그렇게 수선집의 하얀 강아지, ‘아롱이’와의 생활이 시작되고 어언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아롱이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롱이가 도로로 뛰어들어 간발의 차로 트럭 밑으로 들어갔던 아찔한 일, 두 번이나 잃어버려 애타게 찾았던 일, 큰 사고로 수술을 받았던 일…. 아롱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가슴이 덜컹, 가슴이 메어 울었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가족의 일원으로 아롱이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나도 조금씩 성장해갔다.

그런데 요즘엔 아롱이를 보면 자주 마음이 아프다. 15살이 넘어가면서 점점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자리에서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운 채 왼쪽으로 뱅글뱅글 돌고, 어두운 구석으로 찾아 들어가고, 뒷걸음질도 못 치고, 안 먹던 사료도 먹고, 밤새도록 낑낑대고,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처음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잘 몰랐는데, 아롱이가 16살이 된 지금에서야 왜 그런 행동들을 반복하는지 알게 되었다.

뱅글뱅글 돌기만 하니 대소변은 만날 밟아 바닥에 다 발라놓고, 다리에 힘이 없어 대소변 위에 미끄러져 몇 번씩 발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려, 눈앞의 간식도 못 찾고 밥과 물은 밟아 엎지르고 코만 가려져도 갇힌 줄 알고 낑낑거리다 짖어대서 하루에 10번 이상을 꺼내줘야 한다. 사람이 옆에서 하루 종일 봐줘야 할 정도로 이제는 점점 정신이 멀어지고 있다. 정신이 희미해진 후부터는 많이 온순해져 내가 안아도 물지 않아 옆에서 돌보는 게 그나마 좀 수월해졌다. 대신 간식과 손가락을 구분 못 해 물리기 일쑤이지만 100번을 씹히고 피를 보더라도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아릴 뿐이다. 이런 아롱이를 돌보느라 엄마도 정말 많이 고생하고 계셔서 너무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상행동을 고쳐보려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며 여러 방법을 시도하면서, 그래도 가끔 앞으로 가기도 하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감사한다. 고통받지 않고 떠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내 옆에서 함께해 준다면 나는 바랄 게 없다.

아롱이의 이상행동을 보면서 예전에 잘해주지 못했던 순간이 후회가 된다. 어린 나이에 데리고 와 잘해주지도 못했고 그때에는 반려견이라는 의미와 동물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야 오랫동안 함께 있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하나의 생명을 키우기 위해선, 단순히 좋을 때만이 아니고 아프고 힘들 때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지금 마음의 준비 중이다. 막상 일이 생기면 심장이 멈춘 듯 아프겠지만 눈감는 그날까지 가족으로서 보살피며 몇 만 배의 사랑을 듬뿍 안겨주어 떠날 때 행복한 모습으로 보내주고 싶다. 아롱아, 사랑한다. 우리 다음에도 가족으로 꼬옥 만나자~♥

전영미 작.

<모정1_백조 엄마> 52×65cm

비단에 채색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