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금슬

지리산 산자락 어느 외딴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늙은 아내가 병들어 눕고 늙은 남편이 집안일을 맡았다. 남편이 아침부터 담숭담숭 일을 한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방 청소하고, 하얀 요강 단지를 씻어 햇살 잘 드는 앞뜰에 엎어 두었다. 마루를 닦고 마당을 쓸고, 흰 고무신 두 켤레를 뽀득뽀득 씻어 댓돌 아래 가지런히 두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요강과 흰 고무신이 반짝반짝 눈부시다. 그러는 내내 아픈 아내는 마루 끝에 앉아 남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했다.

“남자한테 그런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해요.”

늙은 아내가 울적해 보여 영감은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닭장으로 갔다. 노인 얼굴이 소년처럼 밝아져서 닭장을 나왔다. 노인의 손 안에 달걀 두 개가 소담하게 있다. 남편이 상기된 소년의 표정으로 아내에게 달걀을 건넨다. 오랜 세월에도 식지 않는 남편의 온기가 고스란히 아내에게 전해진다. 늙은 아내가 소녀처럼 함박웃음을 짓는다.

“추운데 그만하고 이제 이쪽으로 오세요.” 아내가 손으로 마루를 쓰다듬어 자리를 권한다. 따스한 햇살이 어느새 금빛 돗자리를 깔았다. 남편이 아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산 아래 낮은 들판처럼 늘 곁에 있는 아내가 고맙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나한테 시집와 오래 살아줘서 할멈이 좋소.” “영감도 바람 한번 안 피우고 옆에 있어 주어 고맙소.”

땅거미 내린 저녁, 늙은 아내가 부뚜막과 방을 통하는 쪽문을 열고 부엌일을 하는 남편을 본다. 돌아서서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남편의 굽은 등이 송구하다. 남편도 아내의 애틋한 시선이 등에 머무르고 있음을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작은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밀어 넣으며 남편이 말했다.

“할멈, 우리 한날 한시에 같이 갑시다.” “그래요. 영감, 한날 한시에 같이 가요.”

여느 날처럼 남편은 따뜻한 물을 데워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아내는 순한 아이처럼 머리를 맡겼다. 늙은 남편이 서리 내린 아내의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어주었다. 아내가 얌전하게 돌아앉아 비녀를 꽂는다. 남편이 말했다.

“자네, 머릿결이 시집올 때처럼 곱소.”

남편의 목소리가 옛날 옛적 사대관모를 쓴 신랑 때와 똑같았다. 홍조 띤 아내의 모습이 첫날밤 족두리를 쓰고 수줍던 그대로다. 이윽고 밤이 깊어가고 노부부도 잠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운 늙은 남편이, 옆으로 손을 내밀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할멈 우리 한날 한시에 같이 갑시다.” “그래요. 한날 한시에 같이 가요.”

늙은 내외는 감실감실 단잠이 들었다. 옛 악기 ‘금슬’이 그러하단다. 거문고 금(琴)과 비파 슬(瑟)은 제 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곡조를 빚어낸단다. 기쁜 자리나 슬픈 자리나 오래오래 금슬지락의 애틋한 정으로 함께하였단다. 그래서 ‘금슬’이란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한국 농업의 근간 이룬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정리 김혜진

‘김치의 은인’ ‘농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그의 노력 덕분에 한국전쟁으로 척박했던 땅에는 한국형 배추와 무가 자랐고, 강원도에선 씨감자가 제주도에선 감귤이 여물어갔다. 그가 만들어낸 씨앗들은 굶주린 백성들의 따듯한 식량이자, 한국 농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우량 채소 종자를 개발하여 자급자족의 길을 열고 한국의 육종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한 우장춘 박사. 그의 삶은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매년 8월이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945년 조선은 독립했지만 농촌 현실은 처참했다. 농사를 지어도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넘쳐났다. 현실을 직시한 각계 인사들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 우장춘에 주목했다.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뜻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쌈짓돈을 보탤 정도였다.

당시 우장춘은 육종학 연구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게 당시 학계의 정설이었지만, 우장춘은 배추 속 식물의 유전체를 분류하고 분석한 결과 서로 다른 종끼리 인공적으로 교배했을 때 유채 같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이 연구가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진화론을 주장했지만 새로운 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설명하지 못한 다윈. 이에 반해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유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 공존이라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두 개 종을 인위적으로 교배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음을, 생태계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 땅에 씨를 뿌리고 연구해, 실용 가치가 높은 새로운 품종을 육성, 보급해주기만 한다면 식량 문제 해결뿐 아니라, 미래 농업 발전에 큰 계기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1947년부터 불기 시작한 환국추진운동은 우장춘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1950년 3월,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에 돌아온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그는 추진위원회에서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비로 쓰라고 준 100만 엔 전액을 실험 기구, 종자, 육종 서적 등을 사는 데 사용하는 등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한국의 농업 위기를 극복하려 애썼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 전보를 받고도 “지금 일본에서 가져온 종자를 이 시기를 놓치면 못 심게 됩니다. 한 해 늦춰집니다. 인사는 한두 달 늦어도 되지 않습니까”라며 인사를 가지 않을 정도였다.

“피를 피로 씻어내는 역사, 나는 평화로운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1857~1903). 어린 시절부터 그에겐 ‘우범선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붙었고, 6살 때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란 이유로 놀림당하며 자라야 했다.

“길가에 핀 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 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어머니의 말씀 때문일까, 우장춘은 세상의 어떠한 시선에 대해서도 변명도 항변도 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해내었다. 그리고 1936년 유채 연구를 하면서 쓴 논문 <종의 합성>이 세계 육종학계를 깜짝 놀라게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50년 한국으로 환국한 후에도 그는 철저하게 실용적인 연구와 후배 양성에 매달렸다. 연구소 사람들에게도 연구와 논문을 위한 시험은 당분간 미룰 것을 당부했다. 농림부장관직 제의도 거절하는 등 오로지 종자 개발에만 헌신했던 그는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있어 ‘고무신 박사’라고도 불렸다.

“이제 이 종자를 심으면 속이 꽉 차고 사각사각하면서도 고소한 배추가 나올 것입니다.”

우장춘은 먼저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의 품질 개량에 힘썼다. 사람들은 대개 예전부터 지금과 같은 배추를 먹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 한국 배추와 무의 품질은 최악이었다. 대부분의 재래종 배추는 배춧잎이 모아지지 않고 상추처럼 힘이 없었다. 반면 일본 배추는 잎의 두께가 두꺼웠다. 우장춘은 이 둘을 교배해 오늘날 속이 꽉 차고, 무르지 않고, 사각사각하면서도 고소한 배추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무와 일본 무를 교배해 크고 아삭하며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최상의 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가 새로 개량한 무, 배추 종자를 보급했지만 정작 농민들은 일본에서 밀수입한 종자를 이용했던 것. 일본 종자에 대한 믿음과 우리 종자에 대한 불신이 그 이유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한 가지 묘안을 냈는데 그것이 바로 ‘씨 없는 수박 시식회’였다. 씨 없는 수박은 사람들의 많은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 최초 개발자라는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기도 했다. 원래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사람은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가졌던 기하라 히토시 교수다.

그는 이후에도 식량난 해결을 위한 강원도 무병 씨감자 생산과 제주도 감귤 재배 성공에 이르기까지 절망뿐이었던 우리 농촌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노력 덕분에 1957년부터는 종자의 국내 자급이 가능하게 되었고, 훗날 우리 배추가 국제 게놈 해석 연구의 주축이 되는 등 오늘날 김치가 대표적인 음식이 된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숱한 밤샘 작업 끝에 몸이 쇠약해져 결국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 와중에도 한창 연구 중이던 벼를 관찰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우장춘 박사. 사망 하루 전 그에겐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됐고, 1959년 8월 10일,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했습니다. 1950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 연구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9년 타계하기 전까지 배추, 무, 감자, 감귤 등 한국에 맞는 우량 채소 종자를 개발, 식량난 해결 및 자급자족 체계를 구축하는 등 한국의 농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위 기사는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쓰노다 후사코 지음, 교문사) <우장춘의 마코토>(이영래 지음, HNCOM)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마음 말하기 연습> 책 펴낸 KBS 아나운서 김재원

KBS-1TV <아침마당>은 1991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진행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근 5년 동안 이 프로를 진행해오며 진솔하면서도 시의적절한 멘트와 공감 어린 진행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재원(47) 아나운서. 그리고 지난 4월 <6시 내 고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전하던 그가 최근에 <마음 말하기 연습>이란 책을 펴내며 화제를 모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듣고 싶어 마음을 말하는 연습 중’이라는 김재원 아나운서를 만나보았다.

지난 4월, 김재원 아나운서가 <아침마당>을 하차했을 당시, 해당 홈페이지에는 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담은 글들로 넘쳐났다. 한 시청자의 글은 그의 아나운서로서의 면모를 짐작게 한다. “김재원 아나운서를 처음 봤을 때는 젊고 말끔하게 생긴 그가 아주머니들 특유의 맞장구와 감성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이 아나운서는 출연진들과 방청객 어머니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많은 얘기를 끌어내는 그의 반응과 표정은 이색적이었다. 말끔한 얼굴로 그렇게 푸근한 표정을 짓다니… 보고 싶을 거예요….’

<TV는 사랑을 싣고> <사랑의 리퀘스트> 등 주로 휴머니즘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19년 차 아나운서 김재원.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는 그를 가리켜 ‘전 세계를 돌면서 수많은 생방송을 했지만, 출연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MC는 처음’이라며 찬사를 보냈고, 비록 소리를 듣진 못하지만 입 모양을 보고 4개 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김수림씨와 원활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런 그가 전하는 <마음 말하기 연습>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마음 말하기 연습>을 통해 담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요?

저는 아나운서는 말하는 직업이 아닌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듣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누군가의 마음을 들으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말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마음 말하기도 연습이 필요하거든요. 말하기에는 따로 원칙이나 비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생각, 미래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 사람만의 원칙과 비법이 있거든요. 그래서 책에선 방법보다는 마음을 말하는 텃밭을 가꾸는 정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마음을 말하는 텃밭을 가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3년 전인가 제가 어떻게 말하는지 궁금해서 일주일간 관찰 실험을 해본 적이 있어요. 평상시 하는 말을 녹음하고 언어일지에 적어본 거죠. 근데 70% 이상이 부정적인 말이더라고요. 얼마나 무심코 그런 말들을 하는지 깨달은 거죠. 불평하지 않고 21일을 버티는 게 밥 안 먹고 2주 금식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할 정도로 고치기가 어렵거든요. 그걸 아니까 ‘나는 불평, 불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안 할래요’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웬만하면 부정적인 말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 거죠. 알면 줄어드니까요.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때였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내려놓았던 아나운서란 꿈에 도전하게 된 기회는 뒤늦게 찾아왔다. 결혼 후, 유학길에 오른 그는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급히 귀국해야 했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는 병원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다 병원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된 KBS 아나운서 모집 공고. ‘한번 해볼까’ 했던 그에게 다음 날 아내가 건네준 건 입사 지원서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입사 공부가 시작됐다. 같은 병실의 보호자들은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을 그에게 양보해주었고, 늦은 밤 병원 복도 벤치는 훌륭한 독서실이 되어주었다. 결국 1995년 그는 아나운서가 되었고, 춘천지국으로 발령이 난 후에도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아버지를 보살폈다. 텔레비전은 병상에 누운 아버지에게 아들을 보는 기쁨을 선사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세상의 아픈 아버지들을 위해 마무리 인사를 이렇게 건네곤 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아버지와 각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후로 아버지와 둘이 살았죠. 아버지가 엄마 역할까지 하려고 무척 애쓰셨어요. 무뚝뚝하고 엄격하셨지만, 도시락도 직접 싸주실 정도로 헌신적이셨죠. 특히 아침잠을 깨우던 아버지의 도마 소리가 잊혀지지 않아요. ‘탁탁’ 뭔가 서툴고 투박했지만, 제겐 깊은 사랑의 울림으로 들렸죠. 아버지는 매일 파와 소시지 등을 넣은 튼실한 계란말이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셨는데, 싫어도 내색을 못 했어요. 아버지에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아나운서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신 아버지는 결국 6년 뒤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가 만난 사람들은 아나운서로서 살아가는 데 길잡이가 돼주었다. 1996년 무렵 골수 기증 캠페인이 열릴 때였다. 백혈병으로 고통받는 성덕 바우만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전국적으로 특별 생방송이 진행됐고, 그 역시 춘천 명동의 중계차에 올랐다. 무사히 방송을 마친 후 기쁨과 흥분도 잠시, 병실에 있던 한 중년 환자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큰 충격이었다. “골수 기증을 하라는 말을 하도 잘해서 묻는 거요. 그럼 당신은 골수 기증과 헌혈은 했소?” 순간 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한다. 그 후로 그는 골수 기증을 신청했고, 지금도 일년에 몇 차례씩 헌혈을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방송을 할 때는 단돈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모금함에 넣어 마음을 모은다.

그에겐 팔, 다리가 없는 호주 청년 닉 부이치치와의 만남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팔로 안는 게 아니라 턱으로 안을 수 있다는 것, 다리가 아니라 열정으로 걷는다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소중한 삶의 성찰은 방송에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따듯한 배려와 인간적이고 진솔한 모습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아나운서란 어떤 일인가, 많은 생각을 하셨을 거 같아요.

10년 전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를 캐스팅하신 책임프로듀서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김재원씨가 방송국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사랑의 리퀘스트를 하는 동안만큼은 유흥업소도 가지 마시고 책 잡힐 만한 일은 안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방송이 아닙니다. 일종의 구제 사역이고 성직자들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그 프로그램뿐이겠습니까. 내 삶이 정제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아나운서로서 저는 솔직히 많이 부족해요.

<아침마당>을 보면 출연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져준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성악가 최성봉씨를 안으면서 용서를 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5살 때 고아원에서 나와 껌을 팔면서 어른들로부터 혹사당했던 최성봉씨의 기구한 사연을 들으면서 앞으로 그 친구가 잘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굴레에서 빨리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건 어른들이 만들어준 거잖아요. 그럼에도 아무도 그 친구에게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역시도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서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이 친구에겐 용서와 화해의 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싶어 “정말 미안합니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하면서 저 나름대로 진정성을 담아 사과했는데 흔쾌히 받아줘 울컥했어요. 그 순간 제 아들, 아버지, 저를 스쳐간 어른들, 주변의 아이들이 다 떠오르더라고요. 덕분에 오히려 제가 치유받았어요.

언제나 상대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아나운서를 하면서 익숙해진 것도 있고, 자라온 환경도 영향을 준 거 같아요. 사실 한부모가족만이 갖는 아픔과 고통이 있거든요. 저는 학창 시절 매 학년 진급할 때마다 그런 전화를 받았어요. 학기 초에 반장 엄마가 학부모 모임을 만들고 전화를 하거든요. “엄마 계시니?” “엄마 안 계신데요.” “늦게 오시니?” “아니요, 안 계신데요.” 조금만 관심 가지면 미리 알 수 있는데도 말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맘이 있었어요. 솔직히 그 말은 저 사람이 내 마음과 상황을 헤아렸으면 좋겠다는 걸 포함하기도 하죠. 엄마가 없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 사람이 미안해하는 순간을 굳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게 아닐까요.

그는 인생을 ‘나라’에 비유한다. 태어나자마자 아들의 나라에 살다가 결혼한 후 남편의 나라에 입성하고, 아이를 낳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가장 힘든 거 같다고 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밖에서는 누구보다 대화에 능숙한 사람이지만, 아버지로서 자식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의외의 고백도 이어졌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공감할 겁니다.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사실 요즘 저희 집 아이가 말을 안 해요. 쉽게 말하면 묵언 수행 중이죠. 이 시기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웬만하면 말을 안 하게끔 유전자가 형성돼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친구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부모 욕심으로 다 공유하려 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오히려 소통하려는 욕심을 놓았어요. 대신 아빠는 늘 너와 대화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뜻으로, “오늘 별일 없었어? 밥은 먹었고?” 몇 가지 질문만 해요. 유독 아이가 말을 길게 하면 말할 마음이 있구나 생각해 대화를 해나가고, “어, 아니”로 일관하면 아이한테 시간을 주는 거죠.

‘소통’ 하면 대화를 떠올리지만, 다양한 형태가 될 수도 있는 거네요. 기다림이 될 수도 있고 지켜봄도 될 수 있고요.

그럼요. 최근에 아이가 집에서 너무 말을 안 하니까 아내가 학교에 갔었어요. 근데 선생님이 다행히 친구들과는 잘 말한다고 하시면서 해주신 말씀이 아이들이 아침마다 휴대전화를 내는데, 매일 잘 내던 아이가 하루는 안 내더래요. 그 이유를 물으니까 한참 머뭇거리더니 “실은 우리 아빠가 오늘 아침마당을 마지막으로 하는 날이에요. 제가 그 방송을 꼭 보고 싶어요” 하더래요. 그 말을 듣고 뭐랄까…. 아,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빠가 들어가 있구나. 그날 저녁 “오늘 아빠 마지막 방송했어” 얘기했더니 “아빠 검색어 1위였더라” 하면서 의외로 쿨하게 얘기해주는 거예요. ‘아, 이 아이는 이 아이의 방법대로 날 위로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사람들은 대개 말을 잘한다, 못한다고 평가하지만, 각자 고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고 그대로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말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다 다르게 하는 거니까요.

소통을 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먼저 나는 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없고 저 사람은 나의 마음이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소통 강의를 할 때면 소 그림과 통 그림을 사람들한테 보여줘요. 그럼 일단 웃으세요.(웃음) “소통이란 이렇게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소와 통이 무슨 연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 통이 소에게 여물통이 되어줄 때 그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소한테 여물통이 되어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소의 마음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과의 연관 고리를 찾아 나가는 것, 그게 소통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김재원 아나운서의 책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사람은 1분에 120단어를 말하지만 1천 단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 120단어를 말하는 동안 880단어의 공백은 딴생각들로 채워진다. … 나는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대화를 유리 공을 주고받는 것에 비유했다. 잘 받으려고 조심하고, 잘 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무수히 던진 게 아니었을까. 돈, 명예, 성공 대신 내 마음과 양심이 내 삶의 코치가 될 때 말은 가슴에서 익어가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세상이 될 거라 말하는 김재원 아나운서.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빠, 아빠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 추억들…. 우리들의 아빠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리어카를 밀어드리지 못했을까

이좌연 47세. 직장인. blog.naver.com/avimss

우리 부모님은 서울 구석의 동네 시장에서 그릇 가게를 하셨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인가 여러 문제로 장사가 잘되지 않았고, 다급해진 아버지는 가게를 어머니에게 맡기시고 따로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게에서 파는 그릇들을 리어카에 싣고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셨지만 그것도 그닥 잘되지는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다른 것들을 팔기 시작하셨다. 그중 가장 많이 파신 것은 신발과 곶감이었다. 곶감은 제일 이문이 나는 것이었지만 파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지금이야 보관 기술이 발달해서 일년 내내 먹을 수 있지만, 늦가을부터 나오는 곶감은 겨울에만 팔 수 있는 품목이었다.

처음에는 도매상에서 물건을 사서 파시다가 어느 때부터인가는 직접 상주로 내려가셨다. 저녁 야간열차를 타고 상주로 내려가 역전에서 저녁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장에서 곶감을 사다가 서울로 부치고, 다시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셔서 장사를 하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에서 두 번,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아버지는 영등포부터 우리 동네까지 물건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셨다. 그 거리가 걸어서도 한 시간 이상인데 매일 다니시면서 물건을 파셨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곶감은 우리 식구를 지탱해주는 일거리였다. 겨울 장사를 잘하면 한 해를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모였다. 하지만 낮에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고 밤 기차를 타고 상주로 가서 물건을 사서 부치고 다시 돌아와 장사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건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 학창 시절, 잠자는 머리맡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랑 그날 번 돈을 열심히 정산하시던 모습, 잠결에 들리던 돈을 세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해 지기 전, 일찍 도서관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곶감을 팔고 있는 아버지를 집에서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날 보시고 환하게 웃으면서 곶감을 건네주시던 아버지.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아는 아이들이 있나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만날 먹는데 무슨 곶감을 또 주냐”고 떼를 쓰고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얼른 자리를 떴는데 왜 그리도 창피하던지…. 집에 들어와서도 아버지가 곶감을 파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동시에 가슴 가득 불만이 밀려들었다. ‘다른 동네에서 파시지 왜 우리 동네에서 친구들 다 보는데 파신담.’

혹시나 학교 가면 아이들이 놀리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고, 장사를 하고 길에서 아는 아들 친구들을 만나면 선심으로 곶감을 한두 개씩 집어주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난 곶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내는 곶감을 진짜 좋아했다. 따로 놀 거리도 별로 없을 때 아버지 리어카를 만나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곶감도 먹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가끔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장사가 잘돼 콧노래를 부르시는 아버지와 리어카를 밀고 있는 막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난 막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결국 난 아버지의 리어카를 한 번도 밀어드리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서 이제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면 정말 부끄러운 짓이었다. 자식 대학 보내려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넓은 방으로 이사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신 아버지에게 난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들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진 그냥 웃으신다. 그래도 말썽 안 피우고 공부 잘해서 대학 가고 직장 얻고 아이들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하시는 아버지.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경비원, 막노동도 하시며 우리 삼 형제를 키우셨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 쭈글쭈글한 손은 훈장처럼 깊은 흔적으로 남았고,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오늘은 아버지께 고기라도 한 근 사드려야겠다. “아버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안 그럴게요. 더 착한 아들이 되도록 할게요. 아버지 건강하세요.”

오순환 작. <바다>

100×8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치매 걸린 할머니 보살피던 아빠의 정성을 보며

김수미 43세. 직장인. 경북 구미시 진평동

내 나이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재혼을 하셨다.

나는 새어머니가 생긴다는 게 기뻤지만, 상황은 생각과 달랐다. 새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사는 게 불편했는지, 아버지와 다른 집에서 새 출발을 했고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 함께 따로 살게 되었다.

그 후 새엄마와 살기 위해 자식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은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내심 그냥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지냈으면 됐지, 하며 원망을 버려보려 했지만 어린 나이에 얻은 마음의 상처는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성장을 하고서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고, 나는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방으로 가 독립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그분과 헤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돌보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림에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가 할머니를, 그것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를 요양 병원에 보내자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요양 병원에서는 정성스럽게 보살핌을 받지 못할 거라고, 또 낯선 환경에서 할머니도 불편하실 거라며 당신이 직접 할머니를 돌보신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모든 생활은 할머니 중심으로 바뀌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아버지는 할머니가 잠든 새벽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셨다. 틈틈이 할머니의 영양을 생각해서 곰국, 추어탕 등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서 사다 드리고 과일은 직접 갈아서 드렸다. 목욕도 직접 시켜드리고, 손잡고 아장아장 걸음마 운동도 하루에 한 번씩 꼭 시켜드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속옷 빨래도 직접 하셨다. 아버지에게 저런 바보 같은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셨다.

한 번은 아버지가 미숫가루를 드리는데, 가루가 목에 걸리지 않게 풀어서 드려야 한다며 20분 동안 수저로 저어서 할머니에게 드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똑같은 미숫가루였지만 그냥 휘리릭 저어서 먹던 미숫가루와는 고소함과 부드러움, 맛의 차이는 완전 달랐다. 같은 미숫가루로 이런 다른 맛이 날 수 있다니…. 정말 정성이라는 것이 맛도 변화 시키는구나, 작은 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성스런 보살핌에도 할머니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임종 직전까지 아버지만을 기억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고모 역시 “어머니 좋은 데 가서, 복은 오빠한테 다 줘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지금도 아버지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세상 못 만나고 고생만 하다 가셨다고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을 죄송해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신다.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 어렸을 때 보이지 않은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예전에 이해가 안 되던 것들이 이해가 되곤 한다. 이제 와 보면 아마도 아버지도 아버지가 외로우셨던 만큼 할머니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치사랑을 나에게 몸소 보여주셨다.

사실 이제 와 보면 아버지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싶으면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는 내 마음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어릴 적 묻어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과감히 벗어던져 버리고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해드린 헌신의 마음을 배워보려 한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한참 모자라겠지만 말이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삶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모자란 시간들이니까.

오순환 작. <풍경>

100×72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아버지, ‘호로록 팔팔’ 딸이 변했어요

민교순 59세. 직장인. 태국 방콕 거주

나는 8남매 중 다섯 번째인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 당시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했던 사회 상황으로는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조건이었는데도 꽤나 까탈을 떨며 자란 것 같다.

싫어하는 콩이 입에 들어가면 벌레를 씹은 듯이 뱉어내고, 학교에 가져갈 빗자루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고, 월사금을 제때 주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면서 팔딱팔딱 뛰어서 아버지께서 내게 지어주신 별명은 ‘호로록 팔팔’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나는 내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면 외국에 보내서라도 공부하게 할 거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농사꾼의 딸이었던 나는 월사금조차 제때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멀어져갔다. 그런 데다 학교에서는 남녀평등을 가르치는데 ‘여자는 삼종지도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내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는 아버지가 고리타분하고 창피하고 미웠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식은 줄줄이 낳아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골탕 먹일까’ ‘내가 죽으면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겠지’ 하는 엉뚱하고 삐뚤어진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내가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고2 때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집안 형편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마음으로는 포기했으면서도, 아버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저 고집쟁이 안 보내주면 난리가 날 텐데 돈을 꾸어서라도 보내줘” 하시는 말씀을 엿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 무턱대고 아버지를 오해하고 미워만 했던 게 너무나 죄송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간섭했던 아버지의 잔소리들은 성질이 불같은 내가 어른이 되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아픔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왜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이후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마음이 바뀌니 모든 게 사랑이고 이해고 행복이었다. 농사꾼인 아버지는 항상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흥건해진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밤에 버스에서 내려 먼 거리를 걸어 하교해야 했는데 농사와 해소라는 질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다 키운 딸 도둑맞으면 안 된다’며 매일 마중을 나오셨다. 요즘 아버지들조차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는 나의 입학식, 졸업식, 입학 시험, 진로 상담 등 학교 행사에 꼭꼭 함께해 주셨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나라는 존재가 귀한 존재라는 걸,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아버지의 그 사랑이 느끼게끔 만들어주셨다.

내가 직장 생활, 결혼 생활로 바쁘다고 핑계대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도 불평 한마디 안 하셨고, 어쩌다 용돈이라도 조금 드리면 “생활하기도 빠듯할 텐데 고맙다”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나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 형제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기일에 모인 형제들이 아버지께서 생전에 하셨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감사해하는 걸 보면 아버지는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없는 살림에도 나누는 분이셨다. 우리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은데 누군가 그 당시 귀한 사탕을 사오면 ‘다른 아이들도 먹어야 한다’면서 가지고 나가서 나눠주고, 농한기가 되면 사랑방을 개방하고, 보릿고개에도 거지가 오면 꼭 동냥을 주라 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싫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어느새 “왜 그렇게 못 줘서 안달이냐”고 남편이 말할 정도로 어디서고 나누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태국 방콕에서 나누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기쁘고 흐뭇하시죠? 고집쟁이 호로록 팔팔이었던 딸이 결혼 생활도 행복하게 하고, 든든해하시던 사위와 함께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니!

오순환 작. <父女佛>

130×89cm. 캔버스에 아크릴

2001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빠, 아빠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 추억들…. 우리들의 아빠 이야기입니다.

이젠 나의 신념이 되어버린 아버지

김구민 43세. 일본 야마나시현 거주. 학원강사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초등학교 앞에서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 정말 코딱지만 한 가게였지만 문방구, 제과점, 슈퍼, 주거 공간이 결합된 ‘초울트라복합융합’ 구멍가게(?)였다. 그땐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못 살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도 오른팔을 어깨 위로 올리시지 못하는 후유증이 남았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반신불수로 살아야 할 거라는 진단이 내려질 정도로 큰 사고였다. 아버지에게 가혹한 운명은 연이어 다가왔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통에, 혼자 가게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마저 고된 생활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운구가 나갈 때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왔다. 그리곤 구급차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관이 운구차에 실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다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몇 개월 뒤 아버지의 퇴원과 더불어 우리는 이사를 했다. 이른바 달동네였다. 베니어판으로 엉성하게 지은 방 한 칸짜리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달동네. 아버지는 요리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깍두기였다. 큰 함지박에 깍두기를 가득 해놓고 그것만 먹었다. 매일매일 맨밥과 깍두기였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다.

어느새 나도 마흔이 넘은 나이가 돼 버렸다. 가정을 꾸리면서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었다. 내가 당시의 아버지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의지박약한 나 같은 인간은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내와 사별하고 성치 않은 몸으로 아들 3형제를 키우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환경이 아닌가.

한 번은 온 가족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다. 후일 아버지가 그때 일을 말하면서 한마디 하셨다.

“정말 아무 미련도 없었어. 그런데 실패했지. 한 번 실패하고 나니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역시 아버지도 인간이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중고 오토바이로 석유 배달을 시작하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기름보일러 대리점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고향 후배에게 큰 사기를 당하셨다. 서울 본사에서는 내려보내기로 한 보일러들을 모두 동결시켜 버렸고 오히려 아버지를 사기죄로 집어넣겠다고 나섰다. 나도 잘 알던 그 후배 아저씨는 병을 핑계로 입원을 해서 아버지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서 사장에게 자신의 말을 한마디만 들어 달라고 면담을 신청했다. 여관에 방을 잡고 몇 날 며칠을 비서에게 애원하자 사장이 한번 만나나 보자고 승낙을 하셨단다. 사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정말 한마디만 하셨다.

“전 제 삶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장님.”

사장은 한동안 물끄러미 아버지의 눈을 응시하고선 비서에게 아버지 앞으로 된 모든 어음을 돌리지 말 것이며 아버지가 필요한 만큼의 보일러를 당장 내려보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각서라도 쓰겠다고 볼펜을 집어 든 아버지를 향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눈을 봤지 않습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후일 그 사장님의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 때, 아버지 또한 집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그 사장님을 도왔다고 하니 참 세상이 그렇게 더럽지만은 않은가 보다.

몇 년 전부터 갑상선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는 형제들에게 ‘큰 병이라도 걸려서 자식들한테 폐 끼칠 바에는, 어느 날 갑자기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상처투성이인 아버지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몇 번 뿌리치시다가 내가 힘을 꾹 넣어서 잡았더니 힘을 푸시고 손을 맡기신다. 그리곤 시선을 피하신다.

“구민아. 나는 지금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가 돼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잠든다. 힘들겠지만 넌 아직 젊잖아. 열심히 살아라. 힘들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너의 땀 흘리는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단다.”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르신다. 그냥 묵묵한 바위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의 이 말이 나에겐 신념이 되었다. 볼테르나 괴테가 아니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오늘도 자식 같은 원장한테 온갖 심한 말을 들으면서도 후줄근한 차림으로 학원 봉고차를 몰러 아침 6시에 집을 나서는 아버지가 이제 내… 신념이다.

오순환 작. <훈장을 단 아버지>

194×13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5

아빠가 삼촌이야? 나 아빠 딸 아니야?

박재윤 35세. 작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항상 꿈을 좇아다니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음악에 한평생을 다 바치신 분이기에 나는 딸로서 내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어린 내 눈에 비춰진 아버지는 항상 바람 내음이 짙은 분이셨다.

1년에 한 번 내 생일에나 볼 수 있었던 아버지는 코트 자락 안으로 차가운 바람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셨다. 그게 아버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자라면서 아버지나 가족은 내가 기대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사람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되었던 어느 해인가, 음악이라는 것을 해서 아버지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게 이뤄놓은 것은 몇십 장의 앨범들과 오선지들밖에 없지. 그런데 말이다. 아빠가 너에게 다른 아버지들처럼 평범한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건 평생 맘의 짐으로 짊어지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한길을 걸었던 인생을 후회한 적은 없단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난 후회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지. 다만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을 많이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었고 아버지 또한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온 한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생각한 아버지도 나로 인해 포기한 것들이 있음을 알았다.

내가 한참 꼬물꼬물 아롱 짓을 할 무렵, 아버지의 밴드는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었고 꽤 이름 있는 음반사에서 솔로 제의가 들어왔더란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빛’이었다. 그런데 음반을 내고 라디오 방송부터 인지도가 쌓여갈 무렵, 회사에서 그러더란다. 무조건 방송에서는 미혼이어야 한다고. 그땐 그런 게 참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도 쉽게 생각해 수락을 했고 소녀 팬들도 꽤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였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어린 내가 다리에 매달려서 “아빠가 삼촌이야? 나 아빠 딸 아니야?” 하고 묻더란다. 그리고 어린 나의 그 말이 아버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왕방울만한 큰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보며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셨단다.

아버지는 노래하는 사람이 굳이 사생활을 속일 필요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회사며 방송국 PD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 그렇게 젊은 아버지는 쉬운 길을 포기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내가 어찌 아버지의 꿈을 위해 나를 내버려두었냐 얘기할 수 있겠는가. 좀 독하게 마음먹지 그랬냐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너도 결혼해서 아이 낳아보면 알 거다. 그 어린 것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울먹이는데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출세하겠다고 그걸 외면하겠니….”

인생에선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데 아버지의 첫 번째 커다란 기회는 그렇게 나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래도록 아버지를 괴롭혔다.

자신보다 더 어린 아내의 남편으로, 고집불통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게 된 젊은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철들면서부터 늘 누군가를 부양해야 했던 사람. 기댈 곳 하나 없는 그 심정,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이제 다 커버린 딸내미는 아버지의 어깨를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시려옴을 느낀다.

제주도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시며 조용히 곡 작업을 하고 계신 아버지.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에야 미완성으로 남은 그 꿈을 보상해 드릴 순 없겠지만, 인생의 기회를 반납한 대가로 얻은 ‘나’라는 존재를 통해 기쁨을 드리고 싶다. 아버지의 남은 일생에 언제나 손을 맞잡고 다정히 걸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친구가 되고 싶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합니다.

오순환 작. <소년>

72×53 cm. 캔버스에 아크릴

2003

아빠와의 걷기 여행 12년째

박진석 17세. 고등학교 1학년. 강원도 춘천시 신동

나는 12년째 아빠와 매년 걷기 여행을 하고 있다. 매년 적게는 1회, 많게는 4회까지, 때로는 하루, 때로는 4박 5일간의 걷기 여행을 해왔다. 아빠 말로는 내가 다섯 살, 정확히는 생후 3년 8개월 1일째 되는 날 처음 아빠와 걷기 여행을 출발했다고 한다.

아빠는 아들인 나와 함께 우리나라 국토를 한 바퀴 돌겠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늘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면 우리나라를 두 발로 걸어봐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국토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뭔지도 모르고 아빠가 ‘걷기 여행 가자!!’ 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그때만 해도 우리 반 친구들 모두가 나처럼 아빠하고 걷기 여행을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만 도보 여행을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걷는 게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고 야영하는 것도 귀찮아 가기 싫다고 투정과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예전엔 갔다 오면 그냥 ‘힘들었다’ ‘몇 킬로미터를 걸었지?’였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고부터 ‘도보 여행 가자’ 하면 별말 없이 따라나섰던 것 같다.

춘천 집에서부터 시작한 걷기 여행은 어느새 가평, 서울, 인천, 충청도, 전라도를 지나 부산을 조금 지난 지점까지 걸은 상태다. 걸었던 마지막 지점까지는 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한다. 특히 아빠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야영을 하고 밤새 걷기도 한다. 걸으면서 아침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차를 타고 가면서는 도저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보기도 한다.

물론 힘들 때도 많았다. 제일 짜증 날 때는 지도를 잘못 봐서 걸어갔던 길을 되돌아올 때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힘든데 왜 실수했냐고 투정 부리고 그만 걷자고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어느 더운 여름날 바닷가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내가 “에고… 힘들다~” “아빠! 그만 걷고 해수욕이나 하자” 하소연을 했더니 아빠가 “이런 아빠 만나서 고생이 많다”라고 하시는 거 아닌가. 난 그냥 한 말인데 아빠가 그런 말을 하니 엄청 미안했다. 그래서 그날은 더워서 땀이 나고 배낭이 무거워 어깨가 아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 걸었던 것 같다.

아빠 발만 보고 따라가다 자동차 전용 도로인 마창대교라는 길로 잘못 들어가, 결국 경찰차를 탔지만 정말 멋있는 남해 바다를 봤던 일, 겨울에 야영할 곳을 찾지 못해 남의 집 옥상에 텐트 치고 잔 일 등 아빠와 함께 무수히 많은 일을 겪으며 많이 성장한 거 같다.

어릴 때부터 걷기 여행을 다녀서인지 힘든 일이 있어도 즐겁게 하게 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키는 모든 심부름을 내가 다 하고 있다. 이상하게 선생님들이 나만 시킨다.(^^;;) 그리고 사춘기 때 욱~ 하는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잘 참고 잘 이겨낸 것이 도보 여행을 통해서 길러진 것 같다.

사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네 아빠는 무섭다, 대화도 못 하겠다, 바빠서 얼굴도 못 본다, 이런 말을 듣는데 나에게 아빠는 친구 같은 아빠라는 게 참 감사하다. 어떤 일이든 이야기하면 마냥 떠들 수 있고 그냥 서로 웃는 그런 친구. 아빠와 이렇게 친구가 된 것에는 걷기 여행이 많은 도움이 됐다. 일단 친구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걷기 여행을 떠나게 되면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2011년, 10년 만에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던 순간은 매우 기억에 남는다.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절반을 조금 더 걸은 셈이다. 그리고 10년간의 이야기를 담아 <아빠와 아들 대한민국을 걷다>라는 책도 발간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아빠가 한번은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 낳으면 걷기 여행 할 거니?”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였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요”이다. ‘아니요’에서 점점 ‘글쎄요’로 바뀌는 나 자신이 나도 신기하다.

다시 걸어서 국토 한 바퀴를 돌아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아빠와 함께하는 걷기 여행은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목표가 달성이 된 이후에도 계속 아빠와 함께하고 싶다. 그때는 내가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이번에는 아빠가 따라오는 것으로 해야겠다.(^^)

아빠, 지금까지 이런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함께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세상을 보다 넓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빠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오순환 작. <풍경>

100×72cm. 캔버스에 아크릴

2004

착한 여자, 나쁜 여자

‘영화 속 천사 같은 여주인공, 그 옆에 더 끌리는 나쁜 여자~’ 가수 이효리가 부른 ‘Bad Girls’의 가사입니다. 가요계뿐 아니라 드라마 속에서도, 온라인게임에서도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한 나쁜 여자 캐릭터가 인기라지요. 기존의 여성상을 깨는 ‘나쁜 여자’라는 개념이 나온 지는 오래전이지만 이제는 일탈이 아닌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착한 여자로 살아봤자 남는 거 없다, 나쁘게 살자~!며 독려하는 주장도 나오는데요. 나쁜 여자, 착한 여자라는 관념도 넘어, 멋진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행복 찾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칼 융

일시적으로 저지르는 엉뚱한 짓들이 삶의 묘미를 더해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로만 사는 건 너무 지루해요.
– 파울로 코엘료 <마법의 순간>에서

나는 이미 그 자체로 멋진 여자다. 당당한 여자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만든다. 좋은 여자로 남지 말고 인생의 주인이 되자.
– 데비 포드 <좋은 여자 콤플렉스>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노골적으로 말하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스스로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을 과소평가해 주춤하며 물러서지(lean back) 말고, 편견과 차별의 유리 천장을 끊임없이 두드려 적극적으로 기회를 잡아야(lean in) 한다.

– 셰릴 샌드버그(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린 인(Lean In)>에서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인생이 달라진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 듀크 로빈슨


착한 딸들이여, 나쁜 여자가 돼라

‘착한 딸’이란 어릴 적부터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자신의 욕구보다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결혼을 하여서도 남편과 자녀 또는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살아가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착한 딸’은 어느 순간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에 빠져 ‘못된 여자’로 변해버릴 수 있다. ‘착한 딸’에서 벗어나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상대방의 호의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고맙습니다. 친절하시군요!” 이 말은 상대방이 도움의 손길을 뻗거나 혹은 누군가가 함께 돕고자 할 경우 지금까지 여러분이 했던 대답 대신 적합하다. 그동안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저 혼자 하겠습니다”라고만 하지 않았는가. 여러분의 집을 찾은 손님이 식사 테이블을 차리거나 설거지를 도와주면 왜 안 되는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여러분이 들고 가는 무거운 장바구니 들어주는 것을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이 베푸는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라. 어린 시절 ‘착한 딸’들은 ‘노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다. 이미 노는 것보다 주변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을 해야 했으므로.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보내보라.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비해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라. 누구든지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능력을 타고났겠는가? 자신의 관심사를 개발하면 자존감은 배양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애정을 얻고자 고군분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게 될 것이고, 전형적인 착한 딸의 특성이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갈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당당하게 내보이는 여러분과 소통하고자 할 것이다. 함께 있는 것이 그냥 좋기 때문이다.

– <나쁜 여자로 사는 법>(만프레드 셰르만, 베아테 셰르만 저 I 파프리카) 중에서


‘착한 여자’들이여, 이제 자신을 표현하라

좋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거나, 마찰이 두려워 참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표현해야 비로소 원활한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 있다. 이제는 마음을 표현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면 부정적이거나 간접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이고 분명한 말을 써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진솔하게 느끼고 그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 할 것이다. 가령 애인에게 꽃을 받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말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꽃 좀 자주 사줬으면 좋겠어’(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말) ‘꽃 사오는 거 잊지 마’(부정적인 말) ‘왜 꽃을 사주다 만 거야?’(부정적인 데다 간접적인 말) ‘꽃은 자주 사줘야 해’(엄격하게 선을 긋는 말) ‘좋은 남자는 여자 친구한테 꽃 사주는 걸 잊지 않던데 말이야’(부정적인 데다 간접적이며 교묘히 유도하는 말)

– <좋은 사람 콤플렉스>(듀크 로빈슨 저 I 소울메이트) 중에서


정말 ‘나쁜 여자’의 참회록

‘난 여왕벌 난 주인공 / 당장 어디로 튈지 몰라 럭비공~ ’ 씨엘(CL)이 부른 ‘나쁜 기집애’의 가사이다. 이 가사 속 나쁜 여자, 딱 나의 20대 때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 몸이 약했던 나는 항상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다. 가정형편도 부유했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었고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싹텄다.

직장 생활할 때도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눈치도 보지 않았다. 언제나 최신 신상으로 나를 꾸미고 다녔다. 내가 그렇게 할수록 남자들은 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에게 대시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삶이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나를 처절하게 돌아본 순간이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왕공주병 정말 ‘나쁜’ 여자였다. 언제나 내 감정에 치우쳐 남의 감정이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착한 여자들처럼 ‘나쁜 여자’였던 나 역시 남의 시선에 갇혀 있었다. “나만 바라봐줘” 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나를 치장하며 과시했던 것이다. 재밌게 사네, 멋지다, 부럽다는 소리를 즐기며,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나서 씩씩대며….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주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 죄송했다.

진정 매력적인 여자는 남들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 여자, 스스로의 삶을 진실되게 만들어갈 줄 아는 여자,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여자인 것 같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 송경옥 /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착한 여자’라는 틀을 깨버리고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당당한 여자. TV 속에서 나오는 소위 ‘나쁜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후련하고 늘 부러웠다. 나는 항상 친절하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속칭 ‘착한 여자’의 대표 주자였다. 여자는 착실해야 해, 다소곳해야 해, 남들 앞에서는 양보해야 해…. 어린 시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께 받은 교육은 그랬다. 엄마도 무조건 참으라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엄마의 삶이 싫으면서도 닮아가고 있었다. 한 번도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 감정을 솔직히 표출해본 적이 없다.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화가 나더라도 꾸욱 참고 있다가, 우회적으로 빗대어서 말하면서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늘 사람 대하는 게 공포스러웠고 깊은 관계는 맺을 수가 없었다. 늘 부지런히 살았지만 우울증 같은 것도 오고 삶이 답답했다. 이런 마음들을 다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마음수련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쌓아온 마음을 정말로 버릴 수가 있었다. 항상 잘해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삶을 다 빼고 나니 너무 시원했다. 날아갈 거 같았다. 그냥 우주가 나였고, 모두가 다 하나였다. 누구나 완전한 존재였다. 자유로웠다. 온 세상이 내 것이었다. 진짜 행복했다.

그렇게 나를 버려본 후에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부당한 상황에서 화가 나면 화도 낸다.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게 되었고, 솔직하게 부탁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상대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렇게 솔직하게 다가가니 사람들하고도 더 친밀해졌다.

한번은 남편하고 말다툼할 일이 있었다. 애들 성적이 떨어진 게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서라는 남편의 말에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당신한테 그 말 들으니까 되게 속상하다. 아이가 공부를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데, 왜 내 탓을 하냐…” 남편도 아차 싶었는지 미안하다고 했다. 애들에게도 할 이야기가 있으면 바로 표현하고,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표현하니 오히려 아이들도 편안해했고, 나도 편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배려를 하고 나눈다. 삶이 행복해졌다.

혹시 나처럼 ‘착한 여자’라는 틀에 갇혀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을 돌아보고 버려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예전에는 나쁜 여자를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좋다. 언젠가부터 착한 여자의 이미지는 무능하고 버려야 하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착하고 남을 배려하며 나눌 줄 아는 게 뭐가 나쁜가? 이제는 ‘착한 여자’라는 틀도 넘어 진정한 ‘착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다.

– 장수진 / 자영업.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

중독, 멈출 수 있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하루는 무의식적인 행위들로 이어져 있다.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일들의 반복. 하지만 이런 행동들이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어떨까? 수면을 방해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면, 월급의 대부분을 투자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중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문제시되는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보다도 어쩌면 더 극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에게는 담배나 약물, 술 등 특정 물질 섭취뿐 아니라 운동, 쇼핑, 성형, 문신, SNS, 채팅, 여행 등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행위 중독’ 증상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고, 그 행위를 그만두었을 경우에는 우울, 불안, 분노를 느끼게 되는 등 삶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반복적 행위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독적 습관이 인간 내면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공허하고 결핍된 감정이 있는 한 그것을 회피하고 감추기 위한 행동은 겉모습만 바꿔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평소 억눌린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을 비우는 과정이 중독을 극복하는 근본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훌륭한 멘토가 되어 마음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중독 증상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문진정 참조 도서 <어떻게 나쁜 습관을 멈출 수 있을까>

(프레드릭 울버튼, 수잔 샤피로 | 소울메이트)

중독
진단하기

생활 습관을 살펴보면 중독이 보인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가? 상사와 미팅을 한 후에는 초콜릿을 찾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마트폰에 손이 가는가? 사소해 보이는 습관도 하나하나 살펴보자. 잠들기 전의 칵테일 한잔, 껌 씹기 같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일들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주 1회로, 그러다가 매일 하는 중독으로 바뀔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건강상의 문제나 가족 관계 갈등, 경제적 어려움, 불법이나 부도덕한 행동 등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음의 질문들에 공감한다면 중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① 습관적 행동(술, 담배, 스마트폰, 인터넷 서핑, 쇼핑 등)을 1~2주간 그만뒀을 때 우울, 불안, 분노 또는 강한 그리움을 느낀다. ② 중독적인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월급의 상당량이 정기적으로 지출된다. ③ 주변 사람들에게 중독 습관 때문에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④ 혼자 있을 때 주로 폭식을 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 비밀스럽게 하고 있는 행동이 있다.

중독
진단하기

★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 버리기

인생에서 놓친 기회, 간절히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의 목록을 만들어보자. 내가 죽었다고 가정하고 부고 기사를 써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미련이 남는 사건들을 깨끗이 포기하자. 담배, 술, 쇼핑 등 나의 습관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 사회적 보상과 성취에 집착하지 않기

성공에 집착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성취를 위해 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배우나 모델, 운동 선수들이 계속해서 인기를 얻고 활동하기 위해 식사량을 제한하거나 운동을 과하게 하고, 성형이나 스테로이드제, 마약 등에 중독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 보상을 많이 받더라도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정신적 혹은 육체적 건강을 해치고 보상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 다른 사람 위주로 살아보기

지금까지 평생을 내 위주로 일, 사랑, 수면, 식사, 운동을 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 중심적인 패턴은 한번 만들어지면 깨기란 쉽지 않지만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해오던 모든 것을 재평가하고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시간 일찍 잠자리에 들기, 소다 음료 대신 차를 마시기 등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부터 고쳐나가자. 함께 밥을 먹는 친구가 내 취향과 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면 친구에게 양보해보자. 때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잠시 제쳐두고 소외된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칭찬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일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좋은 연습이 될 수 있다.

직장인 박진수 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

정리 & 사진 최창원

SK C&C 외주구매팀 박진수(36) 대리. 항상 활력 있고 여유로워 보이는 그를 사람들은 ‘만만디 대리’ 에너지 만땅 ‘빠때리’라 부른다 한다. 하지만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입사 원서를 넣는 곳마다의 탈락, 단짝 친구의 허무한 죽음 등으로 인해 힘들었다는 박진수씨. 입사 초만 해도 신경질적이고 늘 피곤해 있었던 그가 이렇듯 긍정 ‘에너자이저’로 변화될 수 있었던 건 그즈음 만난 마음수련 덕분이었다고 한다. 마음 빼기를 하며 그토록 궁금했던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박진수씨. 4년 차 직장인 박대리가 전하는 직장 생활의 지혜와 빼기 이야기.

“박대리 뭐 좋은 일 있어?” “뭐 믿는 빽이라도 있어?”

요즘 경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회사 분위기도 예전과는 사뭇 다르지만 언제나 잘 웃고 여유 있어 보여서인지, 지나가는 분들이 한마디씩 하곤 하십니다.

일할 때는 일하고, 먹을 때는 먹고, 잘 때는 자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게 된 지금의 제 모습이 감사할 뿐이죠.

사실 저는 2010년, 입사 초기만 해도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화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이건 아니다 싶은 상황에서는 상사고 뭐고 상관없이 싸우다 보니, 성격 장난 아니다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많았고, 파이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죠.

몸도 굉장히 안 좋았어요. 당시 오랜 불면증을 앓고 있었거든요. 제가 우여곡절이 좀 많았는데 특히 제 주변에 죽음이 많았어요. 스무 살 때는 고1 때 짝이었던 친구가 죽고, 20대 중반에는 친했던 형이 죽고…, 그러다 29살 때에는 가장 친했던 단짝 친구가 허무하게 죽고 말면서 정신적인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은 왜 태어났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내가 재수 없는 인간인가 싶기도 하고 그즈음 불면증이 생겼어요. 누우면 잠이 안 와서 네다섯 시간 뒤척이다, 겨우 한 시간 자고, 낮에는 허덕이고…. 그때 제 모습이 꼭 좀비 같았어요. 잠을 자려고 운동도 해보고 정신과 상담도 받아보고 온갖 것을 해봤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불면증이 더 심해졌죠.  100여 군데 입사 원서를 냈는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줄줄이 탈락을 했으니까요. 그래도 좋은 대학, 대학원에 연구소도 인턴 경험도 했으니 다 나를 받아줄 줄 알았는데 아닌 겁니다. 열등감, 자격지심, 불안감…. 그런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올라오면서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그즈음에 한 한의원에서 월간<마음수련> 책을 보게 되었어요.

‘사람은 눈, 귀, 코, 입, 몸으로 자기 마음속에 사진을 찍어 놓고, 자기가 만든 비디오테이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비디오테이프를 없애고 세상이 되어 살면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지혜자인 성인이 될 것이다.’ ‘우명 선생의 세상 너머의 세상’ 칼럼의 그 글이 강하게 다가왔어요. 아, 내가 찾던 거다~! 다행히 그때 신입 공채 합격 통보를 받았고 본격적으로 마음수련을 시작했어요.

충남 논산의 마음수련원 본원에서.

주말이면 마음수련원 본원에 간다는 박진수씨. 탁 트인 전원 풍경을 보며 마음을 빼고 나면 한 주의 활력을 받게 된다고 한다.

1과정에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삶을 하나하나 돌아보는데, 깜짝 놀란 게 제가 정말 나만의 사진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더라고요. 그 가짜인 사진세상을 다 버리고, 나라는 존재마저 다 버리니 어느 순간 크기를 설명할 수 없는 넓은 우주가 내가 되어 있었어요. 아, 원래 우주가 나였구나, 나는 원래 없었구나…. 한마디로 저는 꿈을 꾼 것과 같이 깨고 보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더라고요. 그 꿈에서 벗어나야 진짜 삶을 살 수 있는 건데. 색즉시공공즉시색 등 그렇게 어렵던 경구의 뜻, 그토록 고민해왔던 세상의 이치도 이해가 되었지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친구도 편안하게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점점 잠을 잘 자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너무 행복했죠.

직장 생활을 해보니 가장 힘든 게 인간관계더라고요. 수련할 당시에 정말 미워했던 상사들이 있었어요. 부하 직원에게 일은 다 주고 자기는 놀러 다니는 상사, 일은 안 가르쳐주면서 나만 괴롭히는 것 같은 상사….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것도 다 나만의 사진세상 속에서 미워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데 정말 제가 죽일 놈이더라고요. 저는 누나 셋에 막내로 오냐오냐 자라면서 이기적인 면이 많았거든요. 자기주장 강하고 고집 세고, 신입사원이 그러는데 어느 상사가 좋아했겠어요. 나만이 옳다며 오만방자했던 내 모습이 너무 참회가 되어, 잘못했다 하면서 많이 울었죠. 그렇게 참회가 되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도 많이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귀 기울이게 되고, 들어드리게 되고….

“박진수 요즘 싹 바뀌었다고 소문났더라, 진수씨 바뀐 거 보고 놀랐어.”

입사 초부터 저를 지켜본 상사분의 말씀에 ‘아, 내가 바뀌었구나’ 저도 다시 한 번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잘하고 싶어서 여러 책도 봤지만 제 것이 되지 않았는데, 마음 빼기를 하면서 근본적으로 바뀌어가는 제 모습이 저 스스로도 참 신기했습니다.

예전에 경주 석굴암에서 ‘부는 스스로 만족하는 데 있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진짜 행복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더라고요. 제 삶을 돌아보면 항상 저보다 더 좋은 상황의 사람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잘사는 편이었는데도 저보다 더 좋은 집안의 친구를 부러워하고. 대학, 대학원, 회사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죠. 다른 회사가 더 좋아 보이고, 다른 팀 일이 더 좋아 보이고…. 비교하는 마음이 있는 한 어떤 조건이 와도 행복할 수 없었죠.

솔직히 대기업에 다닌다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많아요. 특히 경제적인 불안감요. 그래서 가끔씩 주식에 풀배팅을 하거나 복권 등을 사면서 한꺼번에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을 봐요. 하긴 저도 처음에는 있지도 않은 막연한 10년 후를 생각하느라 지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살았더라고요. 하지만 그 불안한 미래도 내 마음속에만 있는 거였고, 그냥 이 순간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하루하루를 그냥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일을 즐겨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직장의 신 되는 거? 어렵지 않아요~^^

걸림돌과 디딤돌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 말한다.”
토마스 칼라일의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삶의 돌들을 만나게 되지요.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 역시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같은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한다면
그 마음의 자세는 참으로 차이가 큽니다.
삶에서 오는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자가 되느냐,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깔려 있는 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에 있다’고
지금 참으로 뻔한 모범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몰라서 그렇게 못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일로 경황없이 살다 보니,
잠시 잊어버려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으니 오늘 그 뻔한 말 되새겨 봅니다.
 
그 말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지금의 나에게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훗날
“오늘이 있기까지 지나온 나의 삶에는 참 좋은 디딤돌이 많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이란

 

생명이란 살아 있는 것이고

생명이란 세상의 근원인 영과 혼이 살아 있는 진리의 존재다.

생명은 살아 있는 존재이나 인간은 이 생명에 관하여 한 번도 배운 적도 없고

또 자기의 마음에 생명이 없기에 생명을 아는 이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닮은 마음이라.

세상은 생명 자체이지만

닮은 마음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마음속에 사진을 찍어

그 세상을 복사한 마음속에 인간이 살기에 생명의 근원을 모르는 것이다.

이 생명만이 영원불변하게 사는 존재이고

이 세상에 나 있는 모든 물질은 이 생명의 표현인 것이다.

이 생명인 근원이 살아 있어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살아 있고

근원인 이 생명에서 왔다가 생명으로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진리인 것이다.

흔히들 인간의 관념에서 물질이 살아 있다 죽어 있다는

인간마음에서 하는 말이고 진정한 죽음은 인간이 죽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자리를 이탈한 허상이고

없는 자기의 마음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이것은 없는 세상인 것이다.

사진기는 세상의 것을 사진 찍으면 세상과 같은 사진이 나오나

그것이 실이 아닌 것은 인간은 비디오테이프와 같이 움직이고 말하고 숨 쉬고

음식도 먹으나 그것이 실이 아니듯,

자기의 마음의 세계 속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그 프로그램에 의하여

일생의 운명이 주어져 있기에 자기의 비디오테이프의 각본에 사는 것이다.

비디오테이프가 이 세상에 없는 다른 세계이듯 인간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다.

비디오테이프가 제작된 일체의 것이 세상에 있어야 생명이 있듯이

인간도 세상에 있어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대우주의 근원인 창조주인 만상이 나기 이전의 자리인

물질이 없는 빈 하늘인 대우주인 것이다.

이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기에 인간도 이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인간마음을 근원인 세상의 마음으로 바꾸어

그 세상에 다시 나는 것이 참 생명인 것이다.

근원을 닮은 마음을 버리고 근원이 되는 것이 생명이 있는 것이다.

비디오테이프 속에서는 허상이지만 그 비디오테이프를 버리면

실체의 세상이 있고 살고 있는 나는 실이 되듯 똑같은 이치다.

마음수련회는 이 비디오테이프를 없애고

참세상에 나 살게 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등 다수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 < Stop Living In This Land, Go To The Everlasting World Of Happiness, Live There Forever>는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주간 종합 1위를 기록했으며, 국제도서 시상식 IPPY, NIEA, IBA 그리고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www.woom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