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SNOWPIERCER

드디어 설국열차에 탑승했다.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를 홍대 서점에서 선 자리에서 다 보고 판권을 사서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430억 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의 글로벌 프로젝트이자 크리스 에반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등 해외 유명 배우들의 출연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왔다.

지구온난화로 인간은 CW-7을 살포, 그로 인해 신빙하기가 와서 모든 생물이 멸종하고, 지구를 순환하며 달리는 설국열차만이 인류가 살아갈 유일한 공간이란 설정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기차’는 바로 인류가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이고, 폐쇄된 공간이기 때문에 기차에 탑승한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인위적인 생태계의 법칙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다. 비극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피의 전쟁과 같은 아비규환을 겪고 생존 본능 하나만으로 살아남은 인간들이 이제 문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기차’라는 공간 안에서만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벌어질 일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기차를 만든 윌포드는 기차 안에서의 인류 문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되어 지배한다. 인간을 개체화시켜 기차 안의 인구, 식량 배급 등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말이다.

영화는 기차의 계급 질서 맨 아래에 속한 꼬리 칸 사람들의 혁명으로 출발한다. 인류 역사에서도 늘 있어왔던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향한 저항 운동이 벌어지고 꼬리 칸의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는 지배자가 있는 맨 앞 칸으로 한 칸씩 전진해가면서 기차 안의 평등과 자유를 찾고자 한다. 여기서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 분)는 기차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고, 그의 딸 요나(고아성 분)는 닫힌 문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로 나온다. 이들이 앞 칸으로 한 칸씩 전진해가면서, 칸칸의 자리에서 일하는 각각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최후의 앞 칸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 그리고 반전이 드러난다.

남궁민수가 열고 싶었던 문은 앞 칸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던 것. 너무나 오래 닫혀 있어서 문이라고도 인식하지 못했던 밖으로 나가는 문을.

이 영화에서 문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계급을 나누는 벽이고, 열차 밖과 열차 안이라는 소멸과 생존을 나누는 벽이며,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희망’의 유일한 통로를 상징하는 것이다.

커티스는 앞으로만 나아가려 하지만, 남궁민수는 우리의 아이들을 진짜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으로 내보내고자 한다. 그렇게 억압받는 시스템 안에서도 본능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역사의 진리이자 인간이 추구할 궁극의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한발 더 나아가서 묻는다.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온 세상이 설원으로 뒤덮인 멸망한 지구에서 그래도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 의지’를 가졌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개척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과연 그 선택은 옳은가?라는 질문까지.

그래서 사실 관객에게 불친절하고, 불편한 영화이기도 하다. 설국열차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통찰은 돋보였다. 그는 ‘아이’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열차에서 태어나 자라온 요나, 열차 안에서 태어난 많은 아이들을 통해 디스토피아의 세상에서도 인간은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그래서 난 이 영화 <설국열차>가 좋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 ‘문’ 너머의 희망, 더 나은 삶을 꿈꾸니까.

이상분

 

엄마와 함께한 90일간의 남미 여행

이 일기는 내가 열 살 때 세 달간 남미를 여행하며 적은 거다. 나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학교를 가는 것보다, 어른이 될 때까지 여행을 가는 것이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게 훨씬 많은 것 같다.  

– 오중빈 <그라시아스, 행복한 사람들> 중에서

페루의 와카치나라는 마을은 사막으로 둘러싸였는데 한가운데에 오아시스가 있다. 이 오아시스 때문에 와카치나가 유명해진 것이다. 우린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버기카를 탔다. 버기카는 어떤 큰 지프 같은 것이다. 그림을 보면 얼마나 무섭고 재밌었는지 알 것이다. 롤러코스터 같았다. 오늘을 까먹지 않을 것이다.

마추픽추는 생각한 것이랑 조금 달랐다. 집도 어디 좀 초가집 같고 벽도 엄마가 말한 것같이 옆의 돌의 모양과 맞추려고 돌을 자른 티가 전혀 안 났다. 그래도 궁금한 게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수백 미터 위에 있는 마추픽추에 엄청나게 무거운 돌과 물을 날랐을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거기는 태양신의 신전, 해시계가 있었고 잉카 사람들은 퓨마를 존경해서 엄청 커다란 바위를 퓨마 모양으로 자른 것도 있었다.

볼리비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다. 버스 파업 때문에 라파스에 오래 있게 되면서 생각해 본 것이다. 여기는 사람들도 친절하고 물가도 싸서 살기에 되게 좋은 것 같다. 여기서 하루 세 끼 먹는 게 2,400원쯤 된다. 그러니까 한국에 살다 여기에 오면 엄청 부자가 된다. 아주 평화로운 곳 같다. 이 나라를 여행해서 좋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세계에서 가장 큰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떠났다. 오늘은 아르헨티나 쪽에서 폭포를 보기 때문에 먼저 아르헨티나로 간다. 중간에 나라를 건너간다고 도장도 찍었다. 작은 벽에 브라질 국기가 쭉 그려져 있었다. 계속 달리다 보니 브라질 국기가 아르헨티나 국기로 바꿔졌다. 우린 거기서 멈췄다. 그리고 난 그 국기 벽을 올라가 한 발은 브라질, 한 발은 아르헨티나에 섰다. 기분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에콰도르 오타발로는 남미에서 제일 큰 시장이 있기로 유명하다. 엄마가 축구공을 사줬다! 시장은 정말 컸다. 정말 구경할 것도 먹을 것도 많았다. 길에서 부모를 돕는 아이들을 보며 대단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난 학교를 여행하느라고 안 가는데 걔네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난 20분만 공부해도 머리가 아픈데 세 살짜리 애도 엄마를 돕고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나는 운이 좋아서 배울 수 있으니 잘 배워야겠다.

칠레에서 볼리비아로 국경을 넘고 4륜구동 지프로 갈아타서 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라군(호수)에 잠깐 들렀는데 풍경이 아주 대단했다. 뒤에 산, 중간에 호수, 앞에 모래, 위에는 끝없는 새. 정말 대단했다. 아무리 달려도 질리지는 않고 놀라기만 했다. 산을 보면 내가 산이었던 것 같았고, 끝없는 새들을 보면 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제일 환상적인 것 같다. 잠을 자며 생각한 것은 이것뿐이다. 하지만 4,850미터!!!!를 올라가며 힘들었다. 그리고 4,200미터에서 자며 정말 힘들었다. 끝없는 악몽이 아주 괴로웠다. 다음 날 나는 아침을 못 먹고 힘들어했다. 엄마가 꾀병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상했다.

드디어 우유니에 도착했다. 그 고생을 하고 힘들었는데 그것의 보답이 됐으면 좋겠다. 보답 맞았다. 정말 이것보다 더 멋진 것은 못 본 것 같다. 저 멀리까지 펼쳐진 하얀 소금.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열 살이, 아니 어른,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최고다.

“새로운 느낌도 참 많았지만 다른 느낌도 많았다. 이런저런 느낌이 너무 많아서 다 표현할 수 없다. 금 7톤으로 코팅된 교회에 앉아 있을 때는 잠이 확 깨며 바로 옆에 번개가 친 것 같았다. 이구아수 폭포 옆에서는 전기가 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나한테 바이올린을 배우는 애들을 보며 자랑스러웠다. 나도 세상을 보고 기억으로 가져가지만 나도 세상에서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좋다.”

글&그림 오중빈 사진 오소희

여행 소년 오중빈군은 2001년에 태어났으며 네 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현재까지 제3세계 25개국을 여행했으며, 언젠가 혼자서 극지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오중빈의 꿈은 판타지와 SF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10살 여름 방학 때 떠난 90일간의 남미 여행에 대해 직접 쓰고 그린 오중빈군의 여행 일기 <그라시아스, 행복한 사람들>(북하우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나일강가에

아프리카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하는 백나일강과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에서 발원하는 청나일강이 하나로 만나 흐르는 땅, 누비아사막의 땅, 수단Sudan. 나일강은 누비아사막을 굽이굽이 적시며 이집트와 지중해를 향해 흘러간다. 이런 막막한 누비아사막 곳곳에 씨 뿌리고 경작하고 노래하며 대를 이어온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모래 폭풍인 하붑이 지나가고 나면 농토는 낙타 발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그동안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지만, 농부들은 원망도 불평도 없이 논밭에 쌓인 모래를 거둬내고 다시 씨앗을 뿌린다.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듯이…. 사진 & 글 박노해

나 여기 살아 있다

Old Dongola, Nubian, Sudan, 2008.

모래 바람을 뚫고 살아남았다.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나를 지켜줄 것은 작은 흙담 하나. 그마저 하붑이 쓸어가 버렸어도 나는 이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가며 끝내 푸른 잎을 휘날리리라.

나일강가의 저녁 기도

Old Dongola, Nubian, Sudan, 2008.

나일강에 붉은 석양이 내리면 수단 사람들은 저문 강에 얼굴을 씻고 네 번째 기도인 마그립을 올린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아는 나일강처럼 나 또한 나의 길을 굽힘 없이 흘러가리라 다짐하면서. 모래에서 태어나 한 줌 모래로 돌아가는 인생을 신의 뜻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겠노라고.

엄마의 손

Old Dongola, Nubian, Sudan, 2008.

우리에겐 힘든 시간을 걸어온 정직한 두 발이 있단다. 우리에겐 어둠 속을 뚫고 나온 빛나는 두 눈이 있단다. 막막한 사막의 모래바람 속을 걸을지라도 아이야, 네 손을 꼭 잡은 엄마의 믿음의 손이 있단다.

노을녘에 종려나무를 심는 사람

Old Dongola, Nubian, Sudan, 2008.

누비아사막에 석양이 물들면 하루 일을 마치고 종려나무를 심는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치면 말라 죽고 다시 심으면 또 말라 죽어가도 수단 사람들은 날마다 모래 둑을 북돋고 나일강 물을 길어다 종려나무를 심어간다. 이름 없는 사막의 수행자처럼.

뜨거운 하붑이 지나가면

Karima, Nubian, Sudan, 2008.

거대한 모래 폭풍인 하붑이 지나가면 농부들은 논밭에 쌓인 모래를 거둬내고 말린 낙타 똥을 빻은 거름을 뿌린 뒤 나일강 물을 끌어와 씨앗을 뿌린다.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듯이.

박노해님은 195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하며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졌습니다. 2000년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했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뛰어들면서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며 평화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저서로는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등이 있으며, 글로벌 평화나눔 사진전 <나일강가에>가 2013년 7월 12일에서 11월 13일까지 라 카페 갤러리(www.racafe.kr)에서 열립니다. (무료 관람)

금슬

지리산 산자락 어느 외딴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늙은 아내가 병들어 눕고 늙은 남편이 집안일을 맡았다. 남편이 아침부터 담숭담숭 일을 한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방 청소하고, 하얀 요강 단지를 씻어 햇살 잘 드는 앞뜰에 엎어 두었다. 마루를 닦고 마당을 쓸고, 흰 고무신 두 켤레를 뽀득뽀득 씻어 댓돌 아래 가지런히 두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요강과 흰 고무신이 반짝반짝 눈부시다. 그러는 내내 아픈 아내는 마루 끝에 앉아 남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했다.

“남자한테 그런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해요.”

늙은 아내가 울적해 보여 영감은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닭장으로 갔다. 노인 얼굴이 소년처럼 밝아져서 닭장을 나왔다. 노인의 손 안에 달걀 두 개가 소담하게 있다. 남편이 상기된 소년의 표정으로 아내에게 달걀을 건넨다. 오랜 세월에도 식지 않는 남편의 온기가 고스란히 아내에게 전해진다. 늙은 아내가 소녀처럼 함박웃음을 짓는다.

“추운데 그만하고 이제 이쪽으로 오세요.” 아내가 손으로 마루를 쓰다듬어 자리를 권한다. 따스한 햇살이 어느새 금빛 돗자리를 깔았다. 남편이 아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산 아래 낮은 들판처럼 늘 곁에 있는 아내가 고맙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나한테 시집와 오래 살아줘서 할멈이 좋소.” “영감도 바람 한번 안 피우고 옆에 있어 주어 고맙소.”

땅거미 내린 저녁, 늙은 아내가 부뚜막과 방을 통하는 쪽문을 열고 부엌일을 하는 남편을 본다. 돌아서서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남편의 굽은 등이 송구하다. 남편도 아내의 애틋한 시선이 등에 머무르고 있음을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작은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밀어 넣으며 남편이 말했다.

“할멈, 우리 한날 한시에 같이 갑시다.” “그래요. 영감, 한날 한시에 같이 가요.”

여느 날처럼 남편은 따뜻한 물을 데워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아내는 순한 아이처럼 머리를 맡겼다. 늙은 남편이 서리 내린 아내의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어주었다. 아내가 얌전하게 돌아앉아 비녀를 꽂는다. 남편이 말했다.

“자네, 머릿결이 시집올 때처럼 곱소.”

남편의 목소리가 옛날 옛적 사대관모를 쓴 신랑 때와 똑같았다. 홍조 띤 아내의 모습이 첫날밤 족두리를 쓰고 수줍던 그대로다. 이윽고 밤이 깊어가고 노부부도 잠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운 늙은 남편이, 옆으로 손을 내밀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할멈 우리 한날 한시에 같이 갑시다.” “그래요. 한날 한시에 같이 가요.”

늙은 내외는 감실감실 단잠이 들었다. 옛 악기 ‘금슬’이 그러하단다. 거문고 금(琴)과 비파 슬(瑟)은 제 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곡조를 빚어낸단다. 기쁜 자리나 슬픈 자리나 오래오래 금슬지락의 애틋한 정으로 함께하였단다. 그래서 ‘금슬’이란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한국 농업의 근간 이룬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정리 김혜진

‘김치의 은인’ ‘농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그의 노력 덕분에 한국전쟁으로 척박했던 땅에는 한국형 배추와 무가 자랐고, 강원도에선 씨감자가 제주도에선 감귤이 여물어갔다. 그가 만들어낸 씨앗들은 굶주린 백성들의 따듯한 식량이자, 한국 농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우량 채소 종자를 개발하여 자급자족의 길을 열고 한국의 육종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한 우장춘 박사. 그의 삶은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매년 8월이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945년 조선은 독립했지만 농촌 현실은 처참했다. 농사를 지어도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넘쳐났다. 현실을 직시한 각계 인사들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 우장춘에 주목했다.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뜻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쌈짓돈을 보탤 정도였다.

당시 우장춘은 육종학 연구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게 당시 학계의 정설이었지만, 우장춘은 배추 속 식물의 유전체를 분류하고 분석한 결과 서로 다른 종끼리 인공적으로 교배했을 때 유채 같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이 연구가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진화론을 주장했지만 새로운 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설명하지 못한 다윈. 이에 반해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유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 공존이라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두 개 종을 인위적으로 교배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음을, 생태계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 땅에 씨를 뿌리고 연구해, 실용 가치가 높은 새로운 품종을 육성, 보급해주기만 한다면 식량 문제 해결뿐 아니라, 미래 농업 발전에 큰 계기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1947년부터 불기 시작한 환국추진운동은 우장춘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1950년 3월,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에 돌아온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그는 추진위원회에서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비로 쓰라고 준 100만 엔 전액을 실험 기구, 종자, 육종 서적 등을 사는 데 사용하는 등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한국의 농업 위기를 극복하려 애썼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 전보를 받고도 “지금 일본에서 가져온 종자를 이 시기를 놓치면 못 심게 됩니다. 한 해 늦춰집니다. 인사는 한두 달 늦어도 되지 않습니까”라며 인사를 가지 않을 정도였다.

“피를 피로 씻어내는 역사, 나는 평화로운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1857~1903). 어린 시절부터 그에겐 ‘우범선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붙었고, 6살 때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란 이유로 놀림당하며 자라야 했다.

“길가에 핀 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 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어머니의 말씀 때문일까, 우장춘은 세상의 어떠한 시선에 대해서도 변명도 항변도 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해내었다. 그리고 1936년 유채 연구를 하면서 쓴 논문 <종의 합성>이 세계 육종학계를 깜짝 놀라게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50년 한국으로 환국한 후에도 그는 철저하게 실용적인 연구와 후배 양성에 매달렸다. 연구소 사람들에게도 연구와 논문을 위한 시험은 당분간 미룰 것을 당부했다. 농림부장관직 제의도 거절하는 등 오로지 종자 개발에만 헌신했던 그는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있어 ‘고무신 박사’라고도 불렸다.

“이제 이 종자를 심으면 속이 꽉 차고 사각사각하면서도 고소한 배추가 나올 것입니다.”

우장춘은 먼저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의 품질 개량에 힘썼다. 사람들은 대개 예전부터 지금과 같은 배추를 먹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 한국 배추와 무의 품질은 최악이었다. 대부분의 재래종 배추는 배춧잎이 모아지지 않고 상추처럼 힘이 없었다. 반면 일본 배추는 잎의 두께가 두꺼웠다. 우장춘은 이 둘을 교배해 오늘날 속이 꽉 차고, 무르지 않고, 사각사각하면서도 고소한 배추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무와 일본 무를 교배해 크고 아삭하며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최상의 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가 새로 개량한 무, 배추 종자를 보급했지만 정작 농민들은 일본에서 밀수입한 종자를 이용했던 것. 일본 종자에 대한 믿음과 우리 종자에 대한 불신이 그 이유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한 가지 묘안을 냈는데 그것이 바로 ‘씨 없는 수박 시식회’였다. 씨 없는 수박은 사람들의 많은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 최초 개발자라는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기도 했다. 원래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사람은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가졌던 기하라 히토시 교수다.

그는 이후에도 식량난 해결을 위한 강원도 무병 씨감자 생산과 제주도 감귤 재배 성공에 이르기까지 절망뿐이었던 우리 농촌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노력 덕분에 1957년부터는 종자의 국내 자급이 가능하게 되었고, 훗날 우리 배추가 국제 게놈 해석 연구의 주축이 되는 등 오늘날 김치가 대표적인 음식이 된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숱한 밤샘 작업 끝에 몸이 쇠약해져 결국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 와중에도 한창 연구 중이던 벼를 관찰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우장춘 박사. 사망 하루 전 그에겐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됐고, 1959년 8월 10일,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했습니다. 1950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 연구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9년 타계하기 전까지 배추, 무, 감자, 감귤 등 한국에 맞는 우량 채소 종자를 개발, 식량난 해결 및 자급자족 체계를 구축하는 등 한국의 농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위 기사는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쓰노다 후사코 지음, 교문사) <우장춘의 마코토>(이영래 지음, HNCOM)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마음 말하기 연습> 책 펴낸 KBS 아나운서 김재원

KBS-1TV <아침마당>은 1991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진행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근 5년 동안 이 프로를 진행해오며 진솔하면서도 시의적절한 멘트와 공감 어린 진행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재원(47) 아나운서. 그리고 지난 4월 <6시 내 고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전하던 그가 최근에 <마음 말하기 연습>이란 책을 펴내며 화제를 모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듣고 싶어 마음을 말하는 연습 중’이라는 김재원 아나운서를 만나보았다.

지난 4월, 김재원 아나운서가 <아침마당>을 하차했을 당시, 해당 홈페이지에는 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담은 글들로 넘쳐났다. 한 시청자의 글은 그의 아나운서로서의 면모를 짐작게 한다. “김재원 아나운서를 처음 봤을 때는 젊고 말끔하게 생긴 그가 아주머니들 특유의 맞장구와 감성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이 아나운서는 출연진들과 방청객 어머니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많은 얘기를 끌어내는 그의 반응과 표정은 이색적이었다. 말끔한 얼굴로 그렇게 푸근한 표정을 짓다니… 보고 싶을 거예요….’

<TV는 사랑을 싣고> <사랑의 리퀘스트> 등 주로 휴머니즘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19년 차 아나운서 김재원.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는 그를 가리켜 ‘전 세계를 돌면서 수많은 생방송을 했지만, 출연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MC는 처음’이라며 찬사를 보냈고, 비록 소리를 듣진 못하지만 입 모양을 보고 4개 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김수림씨와 원활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런 그가 전하는 <마음 말하기 연습>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마음 말하기 연습>을 통해 담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요?

저는 아나운서는 말하는 직업이 아닌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듣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누군가의 마음을 들으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말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마음 말하기도 연습이 필요하거든요. 말하기에는 따로 원칙이나 비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생각, 미래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 사람만의 원칙과 비법이 있거든요. 그래서 책에선 방법보다는 마음을 말하는 텃밭을 가꾸는 정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마음을 말하는 텃밭을 가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3년 전인가 제가 어떻게 말하는지 궁금해서 일주일간 관찰 실험을 해본 적이 있어요. 평상시 하는 말을 녹음하고 언어일지에 적어본 거죠. 근데 70% 이상이 부정적인 말이더라고요. 얼마나 무심코 그런 말들을 하는지 깨달은 거죠. 불평하지 않고 21일을 버티는 게 밥 안 먹고 2주 금식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할 정도로 고치기가 어렵거든요. 그걸 아니까 ‘나는 불평, 불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안 할래요’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웬만하면 부정적인 말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 거죠. 알면 줄어드니까요.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때였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내려놓았던 아나운서란 꿈에 도전하게 된 기회는 뒤늦게 찾아왔다. 결혼 후, 유학길에 오른 그는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급히 귀국해야 했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는 병원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다 병원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된 KBS 아나운서 모집 공고. ‘한번 해볼까’ 했던 그에게 다음 날 아내가 건네준 건 입사 지원서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입사 공부가 시작됐다. 같은 병실의 보호자들은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을 그에게 양보해주었고, 늦은 밤 병원 복도 벤치는 훌륭한 독서실이 되어주었다. 결국 1995년 그는 아나운서가 되었고, 춘천지국으로 발령이 난 후에도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아버지를 보살폈다. 텔레비전은 병상에 누운 아버지에게 아들을 보는 기쁨을 선사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세상의 아픈 아버지들을 위해 마무리 인사를 이렇게 건네곤 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아버지와 각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후로 아버지와 둘이 살았죠. 아버지가 엄마 역할까지 하려고 무척 애쓰셨어요. 무뚝뚝하고 엄격하셨지만, 도시락도 직접 싸주실 정도로 헌신적이셨죠. 특히 아침잠을 깨우던 아버지의 도마 소리가 잊혀지지 않아요. ‘탁탁’ 뭔가 서툴고 투박했지만, 제겐 깊은 사랑의 울림으로 들렸죠. 아버지는 매일 파와 소시지 등을 넣은 튼실한 계란말이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셨는데, 싫어도 내색을 못 했어요. 아버지에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아나운서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신 아버지는 결국 6년 뒤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가 만난 사람들은 아나운서로서 살아가는 데 길잡이가 돼주었다. 1996년 무렵 골수 기증 캠페인이 열릴 때였다. 백혈병으로 고통받는 성덕 바우만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전국적으로 특별 생방송이 진행됐고, 그 역시 춘천 명동의 중계차에 올랐다. 무사히 방송을 마친 후 기쁨과 흥분도 잠시, 병실에 있던 한 중년 환자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큰 충격이었다. “골수 기증을 하라는 말을 하도 잘해서 묻는 거요. 그럼 당신은 골수 기증과 헌혈은 했소?” 순간 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한다. 그 후로 그는 골수 기증을 신청했고, 지금도 일년에 몇 차례씩 헌혈을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방송을 할 때는 단돈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모금함에 넣어 마음을 모은다.

그에겐 팔, 다리가 없는 호주 청년 닉 부이치치와의 만남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팔로 안는 게 아니라 턱으로 안을 수 있다는 것, 다리가 아니라 열정으로 걷는다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소중한 삶의 성찰은 방송에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따듯한 배려와 인간적이고 진솔한 모습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아나운서란 어떤 일인가, 많은 생각을 하셨을 거 같아요.

10년 전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를 캐스팅하신 책임프로듀서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김재원씨가 방송국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사랑의 리퀘스트를 하는 동안만큼은 유흥업소도 가지 마시고 책 잡힐 만한 일은 안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방송이 아닙니다. 일종의 구제 사역이고 성직자들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그 프로그램뿐이겠습니까. 내 삶이 정제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아나운서로서 저는 솔직히 많이 부족해요.

<아침마당>을 보면 출연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져준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성악가 최성봉씨를 안으면서 용서를 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5살 때 고아원에서 나와 껌을 팔면서 어른들로부터 혹사당했던 최성봉씨의 기구한 사연을 들으면서 앞으로 그 친구가 잘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굴레에서 빨리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건 어른들이 만들어준 거잖아요. 그럼에도 아무도 그 친구에게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역시도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서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이 친구에겐 용서와 화해의 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싶어 “정말 미안합니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하면서 저 나름대로 진정성을 담아 사과했는데 흔쾌히 받아줘 울컥했어요. 그 순간 제 아들, 아버지, 저를 스쳐간 어른들, 주변의 아이들이 다 떠오르더라고요. 덕분에 오히려 제가 치유받았어요.

언제나 상대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아나운서를 하면서 익숙해진 것도 있고, 자라온 환경도 영향을 준 거 같아요. 사실 한부모가족만이 갖는 아픔과 고통이 있거든요. 저는 학창 시절 매 학년 진급할 때마다 그런 전화를 받았어요. 학기 초에 반장 엄마가 학부모 모임을 만들고 전화를 하거든요. “엄마 계시니?” “엄마 안 계신데요.” “늦게 오시니?” “아니요, 안 계신데요.” 조금만 관심 가지면 미리 알 수 있는데도 말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맘이 있었어요. 솔직히 그 말은 저 사람이 내 마음과 상황을 헤아렸으면 좋겠다는 걸 포함하기도 하죠. 엄마가 없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 사람이 미안해하는 순간을 굳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게 아닐까요.

그는 인생을 ‘나라’에 비유한다. 태어나자마자 아들의 나라에 살다가 결혼한 후 남편의 나라에 입성하고, 아이를 낳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가장 힘든 거 같다고 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밖에서는 누구보다 대화에 능숙한 사람이지만, 아버지로서 자식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의외의 고백도 이어졌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공감할 겁니다.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사실 요즘 저희 집 아이가 말을 안 해요. 쉽게 말하면 묵언 수행 중이죠. 이 시기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웬만하면 말을 안 하게끔 유전자가 형성돼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친구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부모 욕심으로 다 공유하려 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오히려 소통하려는 욕심을 놓았어요. 대신 아빠는 늘 너와 대화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뜻으로, “오늘 별일 없었어? 밥은 먹었고?” 몇 가지 질문만 해요. 유독 아이가 말을 길게 하면 말할 마음이 있구나 생각해 대화를 해나가고, “어, 아니”로 일관하면 아이한테 시간을 주는 거죠.

‘소통’ 하면 대화를 떠올리지만, 다양한 형태가 될 수도 있는 거네요. 기다림이 될 수도 있고 지켜봄도 될 수 있고요.

그럼요. 최근에 아이가 집에서 너무 말을 안 하니까 아내가 학교에 갔었어요. 근데 선생님이 다행히 친구들과는 잘 말한다고 하시면서 해주신 말씀이 아이들이 아침마다 휴대전화를 내는데, 매일 잘 내던 아이가 하루는 안 내더래요. 그 이유를 물으니까 한참 머뭇거리더니 “실은 우리 아빠가 오늘 아침마당을 마지막으로 하는 날이에요. 제가 그 방송을 꼭 보고 싶어요” 하더래요. 그 말을 듣고 뭐랄까…. 아,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빠가 들어가 있구나. 그날 저녁 “오늘 아빠 마지막 방송했어” 얘기했더니 “아빠 검색어 1위였더라” 하면서 의외로 쿨하게 얘기해주는 거예요. ‘아, 이 아이는 이 아이의 방법대로 날 위로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사람들은 대개 말을 잘한다, 못한다고 평가하지만, 각자 고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고 그대로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말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다 다르게 하는 거니까요.

소통을 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먼저 나는 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없고 저 사람은 나의 마음이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소통 강의를 할 때면 소 그림과 통 그림을 사람들한테 보여줘요. 그럼 일단 웃으세요.(웃음) “소통이란 이렇게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소와 통이 무슨 연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 통이 소에게 여물통이 되어줄 때 그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소한테 여물통이 되어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소의 마음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과의 연관 고리를 찾아 나가는 것, 그게 소통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김재원 아나운서의 책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사람은 1분에 120단어를 말하지만 1천 단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 120단어를 말하는 동안 880단어의 공백은 딴생각들로 채워진다. … 나는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대화를 유리 공을 주고받는 것에 비유했다. 잘 받으려고 조심하고, 잘 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무수히 던진 게 아니었을까. 돈, 명예, 성공 대신 내 마음과 양심이 내 삶의 코치가 될 때 말은 가슴에서 익어가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세상이 될 거라 말하는 김재원 아나운서.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빠, 아빠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 추억들…. 우리들의 아빠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리어카를 밀어드리지 못했을까

이좌연 47세. 직장인. blog.naver.com/avimss

우리 부모님은 서울 구석의 동네 시장에서 그릇 가게를 하셨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인가 여러 문제로 장사가 잘되지 않았고, 다급해진 아버지는 가게를 어머니에게 맡기시고 따로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게에서 파는 그릇들을 리어카에 싣고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셨지만 그것도 그닥 잘되지는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다른 것들을 팔기 시작하셨다. 그중 가장 많이 파신 것은 신발과 곶감이었다. 곶감은 제일 이문이 나는 것이었지만 파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지금이야 보관 기술이 발달해서 일년 내내 먹을 수 있지만, 늦가을부터 나오는 곶감은 겨울에만 팔 수 있는 품목이었다.

처음에는 도매상에서 물건을 사서 파시다가 어느 때부터인가는 직접 상주로 내려가셨다. 저녁 야간열차를 타고 상주로 내려가 역전에서 저녁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장에서 곶감을 사다가 서울로 부치고, 다시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셔서 장사를 하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에서 두 번,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아버지는 영등포부터 우리 동네까지 물건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셨다. 그 거리가 걸어서도 한 시간 이상인데 매일 다니시면서 물건을 파셨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곶감은 우리 식구를 지탱해주는 일거리였다. 겨울 장사를 잘하면 한 해를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모였다. 하지만 낮에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고 밤 기차를 타고 상주로 가서 물건을 사서 부치고 다시 돌아와 장사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건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 학창 시절, 잠자는 머리맡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랑 그날 번 돈을 열심히 정산하시던 모습, 잠결에 들리던 돈을 세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해 지기 전, 일찍 도서관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곶감을 팔고 있는 아버지를 집에서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날 보시고 환하게 웃으면서 곶감을 건네주시던 아버지.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아는 아이들이 있나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만날 먹는데 무슨 곶감을 또 주냐”고 떼를 쓰고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얼른 자리를 떴는데 왜 그리도 창피하던지…. 집에 들어와서도 아버지가 곶감을 파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동시에 가슴 가득 불만이 밀려들었다. ‘다른 동네에서 파시지 왜 우리 동네에서 친구들 다 보는데 파신담.’

혹시나 학교 가면 아이들이 놀리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고, 장사를 하고 길에서 아는 아들 친구들을 만나면 선심으로 곶감을 한두 개씩 집어주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난 곶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내는 곶감을 진짜 좋아했다. 따로 놀 거리도 별로 없을 때 아버지 리어카를 만나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곶감도 먹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가끔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장사가 잘돼 콧노래를 부르시는 아버지와 리어카를 밀고 있는 막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난 막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결국 난 아버지의 리어카를 한 번도 밀어드리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서 이제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면 정말 부끄러운 짓이었다. 자식 대학 보내려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넓은 방으로 이사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신 아버지에게 난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들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진 그냥 웃으신다. 그래도 말썽 안 피우고 공부 잘해서 대학 가고 직장 얻고 아이들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하시는 아버지.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경비원, 막노동도 하시며 우리 삼 형제를 키우셨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 쭈글쭈글한 손은 훈장처럼 깊은 흔적으로 남았고,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오늘은 아버지께 고기라도 한 근 사드려야겠다. “아버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안 그럴게요. 더 착한 아들이 되도록 할게요. 아버지 건강하세요.”

오순환 작. <바다>

100×8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치매 걸린 할머니 보살피던 아빠의 정성을 보며

김수미 43세. 직장인. 경북 구미시 진평동

내 나이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재혼을 하셨다.

나는 새어머니가 생긴다는 게 기뻤지만, 상황은 생각과 달랐다. 새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사는 게 불편했는지, 아버지와 다른 집에서 새 출발을 했고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 함께 따로 살게 되었다.

그 후 새엄마와 살기 위해 자식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은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내심 그냥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지냈으면 됐지, 하며 원망을 버려보려 했지만 어린 나이에 얻은 마음의 상처는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성장을 하고서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고, 나는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방으로 가 독립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그분과 헤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돌보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림에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가 할머니를, 그것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를 요양 병원에 보내자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요양 병원에서는 정성스럽게 보살핌을 받지 못할 거라고, 또 낯선 환경에서 할머니도 불편하실 거라며 당신이 직접 할머니를 돌보신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모든 생활은 할머니 중심으로 바뀌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아버지는 할머니가 잠든 새벽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셨다. 틈틈이 할머니의 영양을 생각해서 곰국, 추어탕 등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서 사다 드리고 과일은 직접 갈아서 드렸다. 목욕도 직접 시켜드리고, 손잡고 아장아장 걸음마 운동도 하루에 한 번씩 꼭 시켜드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속옷 빨래도 직접 하셨다. 아버지에게 저런 바보 같은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셨다.

한 번은 아버지가 미숫가루를 드리는데, 가루가 목에 걸리지 않게 풀어서 드려야 한다며 20분 동안 수저로 저어서 할머니에게 드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똑같은 미숫가루였지만 그냥 휘리릭 저어서 먹던 미숫가루와는 고소함과 부드러움, 맛의 차이는 완전 달랐다. 같은 미숫가루로 이런 다른 맛이 날 수 있다니…. 정말 정성이라는 것이 맛도 변화 시키는구나, 작은 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성스런 보살핌에도 할머니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임종 직전까지 아버지만을 기억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고모 역시 “어머니 좋은 데 가서, 복은 오빠한테 다 줘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지금도 아버지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세상 못 만나고 고생만 하다 가셨다고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을 죄송해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신다.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 어렸을 때 보이지 않은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예전에 이해가 안 되던 것들이 이해가 되곤 한다. 이제 와 보면 아마도 아버지도 아버지가 외로우셨던 만큼 할머니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치사랑을 나에게 몸소 보여주셨다.

사실 이제 와 보면 아버지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싶으면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는 내 마음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어릴 적 묻어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과감히 벗어던져 버리고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해드린 헌신의 마음을 배워보려 한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한참 모자라겠지만 말이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삶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모자란 시간들이니까.

오순환 작. <풍경>

100×72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아버지, ‘호로록 팔팔’ 딸이 변했어요

민교순 59세. 직장인. 태국 방콕 거주

나는 8남매 중 다섯 번째인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 당시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했던 사회 상황으로는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조건이었는데도 꽤나 까탈을 떨며 자란 것 같다.

싫어하는 콩이 입에 들어가면 벌레를 씹은 듯이 뱉어내고, 학교에 가져갈 빗자루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고, 월사금을 제때 주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면서 팔딱팔딱 뛰어서 아버지께서 내게 지어주신 별명은 ‘호로록 팔팔’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나는 내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면 외국에 보내서라도 공부하게 할 거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농사꾼의 딸이었던 나는 월사금조차 제때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멀어져갔다. 그런 데다 학교에서는 남녀평등을 가르치는데 ‘여자는 삼종지도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내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는 아버지가 고리타분하고 창피하고 미웠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식은 줄줄이 낳아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골탕 먹일까’ ‘내가 죽으면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겠지’ 하는 엉뚱하고 삐뚤어진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내가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고2 때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집안 형편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마음으로는 포기했으면서도, 아버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저 고집쟁이 안 보내주면 난리가 날 텐데 돈을 꾸어서라도 보내줘” 하시는 말씀을 엿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 무턱대고 아버지를 오해하고 미워만 했던 게 너무나 죄송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간섭했던 아버지의 잔소리들은 성질이 불같은 내가 어른이 되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아픔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왜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이후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마음이 바뀌니 모든 게 사랑이고 이해고 행복이었다. 농사꾼인 아버지는 항상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흥건해진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밤에 버스에서 내려 먼 거리를 걸어 하교해야 했는데 농사와 해소라는 질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다 키운 딸 도둑맞으면 안 된다’며 매일 마중을 나오셨다. 요즘 아버지들조차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는 나의 입학식, 졸업식, 입학 시험, 진로 상담 등 학교 행사에 꼭꼭 함께해 주셨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나라는 존재가 귀한 존재라는 걸,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아버지의 그 사랑이 느끼게끔 만들어주셨다.

내가 직장 생활, 결혼 생활로 바쁘다고 핑계대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도 불평 한마디 안 하셨고, 어쩌다 용돈이라도 조금 드리면 “생활하기도 빠듯할 텐데 고맙다”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나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 형제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기일에 모인 형제들이 아버지께서 생전에 하셨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감사해하는 걸 보면 아버지는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없는 살림에도 나누는 분이셨다. 우리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은데 누군가 그 당시 귀한 사탕을 사오면 ‘다른 아이들도 먹어야 한다’면서 가지고 나가서 나눠주고, 농한기가 되면 사랑방을 개방하고, 보릿고개에도 거지가 오면 꼭 동냥을 주라 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싫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어느새 “왜 그렇게 못 줘서 안달이냐”고 남편이 말할 정도로 어디서고 나누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태국 방콕에서 나누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기쁘고 흐뭇하시죠? 고집쟁이 호로록 팔팔이었던 딸이 결혼 생활도 행복하게 하고, 든든해하시던 사위와 함께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니!

오순환 작. <父女佛>

130×89cm. 캔버스에 아크릴

2001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빠, 아빠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 추억들…. 우리들의 아빠 이야기입니다.

이젠 나의 신념이 되어버린 아버지

김구민 43세. 일본 야마나시현 거주. 학원강사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초등학교 앞에서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 정말 코딱지만 한 가게였지만 문방구, 제과점, 슈퍼, 주거 공간이 결합된 ‘초울트라복합융합’ 구멍가게(?)였다. 그땐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못 살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도 오른팔을 어깨 위로 올리시지 못하는 후유증이 남았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반신불수로 살아야 할 거라는 진단이 내려질 정도로 큰 사고였다. 아버지에게 가혹한 운명은 연이어 다가왔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통에, 혼자 가게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마저 고된 생활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운구가 나갈 때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왔다. 그리곤 구급차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관이 운구차에 실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다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몇 개월 뒤 아버지의 퇴원과 더불어 우리는 이사를 했다. 이른바 달동네였다. 베니어판으로 엉성하게 지은 방 한 칸짜리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달동네. 아버지는 요리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깍두기였다. 큰 함지박에 깍두기를 가득 해놓고 그것만 먹었다. 매일매일 맨밥과 깍두기였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다.

어느새 나도 마흔이 넘은 나이가 돼 버렸다. 가정을 꾸리면서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었다. 내가 당시의 아버지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의지박약한 나 같은 인간은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내와 사별하고 성치 않은 몸으로 아들 3형제를 키우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환경이 아닌가.

한 번은 온 가족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다. 후일 아버지가 그때 일을 말하면서 한마디 하셨다.

“정말 아무 미련도 없었어. 그런데 실패했지. 한 번 실패하고 나니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역시 아버지도 인간이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중고 오토바이로 석유 배달을 시작하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기름보일러 대리점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고향 후배에게 큰 사기를 당하셨다. 서울 본사에서는 내려보내기로 한 보일러들을 모두 동결시켜 버렸고 오히려 아버지를 사기죄로 집어넣겠다고 나섰다. 나도 잘 알던 그 후배 아저씨는 병을 핑계로 입원을 해서 아버지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서 사장에게 자신의 말을 한마디만 들어 달라고 면담을 신청했다. 여관에 방을 잡고 몇 날 며칠을 비서에게 애원하자 사장이 한번 만나나 보자고 승낙을 하셨단다. 사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정말 한마디만 하셨다.

“전 제 삶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장님.”

사장은 한동안 물끄러미 아버지의 눈을 응시하고선 비서에게 아버지 앞으로 된 모든 어음을 돌리지 말 것이며 아버지가 필요한 만큼의 보일러를 당장 내려보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각서라도 쓰겠다고 볼펜을 집어 든 아버지를 향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눈을 봤지 않습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후일 그 사장님의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 때, 아버지 또한 집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그 사장님을 도왔다고 하니 참 세상이 그렇게 더럽지만은 않은가 보다.

몇 년 전부터 갑상선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는 형제들에게 ‘큰 병이라도 걸려서 자식들한테 폐 끼칠 바에는, 어느 날 갑자기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상처투성이인 아버지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몇 번 뿌리치시다가 내가 힘을 꾹 넣어서 잡았더니 힘을 푸시고 손을 맡기신다. 그리곤 시선을 피하신다.

“구민아. 나는 지금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가 돼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잠든다. 힘들겠지만 넌 아직 젊잖아. 열심히 살아라. 힘들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너의 땀 흘리는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단다.”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르신다. 그냥 묵묵한 바위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의 이 말이 나에겐 신념이 되었다. 볼테르나 괴테가 아니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오늘도 자식 같은 원장한테 온갖 심한 말을 들으면서도 후줄근한 차림으로 학원 봉고차를 몰러 아침 6시에 집을 나서는 아버지가 이제 내… 신념이다.

오순환 작. <훈장을 단 아버지>

194×13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5

아빠가 삼촌이야? 나 아빠 딸 아니야?

박재윤 35세. 작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항상 꿈을 좇아다니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음악에 한평생을 다 바치신 분이기에 나는 딸로서 내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어린 내 눈에 비춰진 아버지는 항상 바람 내음이 짙은 분이셨다.

1년에 한 번 내 생일에나 볼 수 있었던 아버지는 코트 자락 안으로 차가운 바람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셨다. 그게 아버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자라면서 아버지나 가족은 내가 기대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사람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되었던 어느 해인가, 음악이라는 것을 해서 아버지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게 이뤄놓은 것은 몇십 장의 앨범들과 오선지들밖에 없지. 그런데 말이다. 아빠가 너에게 다른 아버지들처럼 평범한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건 평생 맘의 짐으로 짊어지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한길을 걸었던 인생을 후회한 적은 없단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난 후회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지. 다만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을 많이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었고 아버지 또한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온 한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생각한 아버지도 나로 인해 포기한 것들이 있음을 알았다.

내가 한참 꼬물꼬물 아롱 짓을 할 무렵, 아버지의 밴드는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었고 꽤 이름 있는 음반사에서 솔로 제의가 들어왔더란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빛’이었다. 그런데 음반을 내고 라디오 방송부터 인지도가 쌓여갈 무렵, 회사에서 그러더란다. 무조건 방송에서는 미혼이어야 한다고. 그땐 그런 게 참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도 쉽게 생각해 수락을 했고 소녀 팬들도 꽤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였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어린 내가 다리에 매달려서 “아빠가 삼촌이야? 나 아빠 딸 아니야?” 하고 묻더란다. 그리고 어린 나의 그 말이 아버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왕방울만한 큰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보며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셨단다.

아버지는 노래하는 사람이 굳이 사생활을 속일 필요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회사며 방송국 PD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 그렇게 젊은 아버지는 쉬운 길을 포기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내가 어찌 아버지의 꿈을 위해 나를 내버려두었냐 얘기할 수 있겠는가. 좀 독하게 마음먹지 그랬냐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너도 결혼해서 아이 낳아보면 알 거다. 그 어린 것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울먹이는데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출세하겠다고 그걸 외면하겠니….”

인생에선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데 아버지의 첫 번째 커다란 기회는 그렇게 나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래도록 아버지를 괴롭혔다.

자신보다 더 어린 아내의 남편으로, 고집불통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게 된 젊은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철들면서부터 늘 누군가를 부양해야 했던 사람. 기댈 곳 하나 없는 그 심정,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이제 다 커버린 딸내미는 아버지의 어깨를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시려옴을 느낀다.

제주도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시며 조용히 곡 작업을 하고 계신 아버지.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에야 미완성으로 남은 그 꿈을 보상해 드릴 순 없겠지만, 인생의 기회를 반납한 대가로 얻은 ‘나’라는 존재를 통해 기쁨을 드리고 싶다. 아버지의 남은 일생에 언제나 손을 맞잡고 다정히 걸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친구가 되고 싶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합니다.

오순환 작. <소년>

72×53 cm. 캔버스에 아크릴

2003

아빠와의 걷기 여행 12년째

박진석 17세. 고등학교 1학년. 강원도 춘천시 신동

나는 12년째 아빠와 매년 걷기 여행을 하고 있다. 매년 적게는 1회, 많게는 4회까지, 때로는 하루, 때로는 4박 5일간의 걷기 여행을 해왔다. 아빠 말로는 내가 다섯 살, 정확히는 생후 3년 8개월 1일째 되는 날 처음 아빠와 걷기 여행을 출발했다고 한다.

아빠는 아들인 나와 함께 우리나라 국토를 한 바퀴 돌겠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늘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면 우리나라를 두 발로 걸어봐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국토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뭔지도 모르고 아빠가 ‘걷기 여행 가자!!’ 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그때만 해도 우리 반 친구들 모두가 나처럼 아빠하고 걷기 여행을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만 도보 여행을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걷는 게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고 야영하는 것도 귀찮아 가기 싫다고 투정과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예전엔 갔다 오면 그냥 ‘힘들었다’ ‘몇 킬로미터를 걸었지?’였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고부터 ‘도보 여행 가자’ 하면 별말 없이 따라나섰던 것 같다.

춘천 집에서부터 시작한 걷기 여행은 어느새 가평, 서울, 인천, 충청도, 전라도를 지나 부산을 조금 지난 지점까지 걸은 상태다. 걸었던 마지막 지점까지는 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한다. 특히 아빠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야영을 하고 밤새 걷기도 한다. 걸으면서 아침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차를 타고 가면서는 도저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보기도 한다.

물론 힘들 때도 많았다. 제일 짜증 날 때는 지도를 잘못 봐서 걸어갔던 길을 되돌아올 때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힘든데 왜 실수했냐고 투정 부리고 그만 걷자고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어느 더운 여름날 바닷가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내가 “에고… 힘들다~” “아빠! 그만 걷고 해수욕이나 하자” 하소연을 했더니 아빠가 “이런 아빠 만나서 고생이 많다”라고 하시는 거 아닌가. 난 그냥 한 말인데 아빠가 그런 말을 하니 엄청 미안했다. 그래서 그날은 더워서 땀이 나고 배낭이 무거워 어깨가 아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 걸었던 것 같다.

아빠 발만 보고 따라가다 자동차 전용 도로인 마창대교라는 길로 잘못 들어가, 결국 경찰차를 탔지만 정말 멋있는 남해 바다를 봤던 일, 겨울에 야영할 곳을 찾지 못해 남의 집 옥상에 텐트 치고 잔 일 등 아빠와 함께 무수히 많은 일을 겪으며 많이 성장한 거 같다.

어릴 때부터 걷기 여행을 다녀서인지 힘든 일이 있어도 즐겁게 하게 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키는 모든 심부름을 내가 다 하고 있다. 이상하게 선생님들이 나만 시킨다.(^^;;) 그리고 사춘기 때 욱~ 하는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잘 참고 잘 이겨낸 것이 도보 여행을 통해서 길러진 것 같다.

사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네 아빠는 무섭다, 대화도 못 하겠다, 바빠서 얼굴도 못 본다, 이런 말을 듣는데 나에게 아빠는 친구 같은 아빠라는 게 참 감사하다. 어떤 일이든 이야기하면 마냥 떠들 수 있고 그냥 서로 웃는 그런 친구. 아빠와 이렇게 친구가 된 것에는 걷기 여행이 많은 도움이 됐다. 일단 친구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걷기 여행을 떠나게 되면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2011년, 10년 만에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던 순간은 매우 기억에 남는다.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절반을 조금 더 걸은 셈이다. 그리고 10년간의 이야기를 담아 <아빠와 아들 대한민국을 걷다>라는 책도 발간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아빠가 한번은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 낳으면 걷기 여행 할 거니?”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였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요”이다. ‘아니요’에서 점점 ‘글쎄요’로 바뀌는 나 자신이 나도 신기하다.

다시 걸어서 국토 한 바퀴를 돌아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아빠와 함께하는 걷기 여행은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목표가 달성이 된 이후에도 계속 아빠와 함께하고 싶다. 그때는 내가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이번에는 아빠가 따라오는 것으로 해야겠다.(^^)

아빠, 지금까지 이런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함께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세상을 보다 넓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빠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오순환 작. <풍경>

100×72cm. 캔버스에 아크릴

2004

착한 여자, 나쁜 여자

‘영화 속 천사 같은 여주인공, 그 옆에 더 끌리는 나쁜 여자~’ 가수 이효리가 부른 ‘Bad Girls’의 가사입니다. 가요계뿐 아니라 드라마 속에서도, 온라인게임에서도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한 나쁜 여자 캐릭터가 인기라지요. 기존의 여성상을 깨는 ‘나쁜 여자’라는 개념이 나온 지는 오래전이지만 이제는 일탈이 아닌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착한 여자로 살아봤자 남는 거 없다, 나쁘게 살자~!며 독려하는 주장도 나오는데요. 나쁜 여자, 착한 여자라는 관념도 넘어, 멋진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행복 찾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칼 융

일시적으로 저지르는 엉뚱한 짓들이 삶의 묘미를 더해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로만 사는 건 너무 지루해요.
– 파울로 코엘료 <마법의 순간>에서

나는 이미 그 자체로 멋진 여자다. 당당한 여자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만든다. 좋은 여자로 남지 말고 인생의 주인이 되자.
– 데비 포드 <좋은 여자 콤플렉스>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노골적으로 말하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스스로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을 과소평가해 주춤하며 물러서지(lean back) 말고, 편견과 차별의 유리 천장을 끊임없이 두드려 적극적으로 기회를 잡아야(lean in) 한다.

– 셰릴 샌드버그(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린 인(Lean In)>에서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인생이 달라진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 듀크 로빈슨


착한 딸들이여, 나쁜 여자가 돼라

‘착한 딸’이란 어릴 적부터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자신의 욕구보다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결혼을 하여서도 남편과 자녀 또는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살아가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착한 딸’은 어느 순간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에 빠져 ‘못된 여자’로 변해버릴 수 있다. ‘착한 딸’에서 벗어나 당당하고 아름다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상대방의 호의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고맙습니다. 친절하시군요!” 이 말은 상대방이 도움의 손길을 뻗거나 혹은 누군가가 함께 돕고자 할 경우 지금까지 여러분이 했던 대답 대신 적합하다. 그동안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저 혼자 하겠습니다”라고만 하지 않았는가. 여러분의 집을 찾은 손님이 식사 테이블을 차리거나 설거지를 도와주면 왜 안 되는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여러분이 들고 가는 무거운 장바구니 들어주는 것을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이 베푸는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라. 어린 시절 ‘착한 딸’들은 ‘노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다. 이미 노는 것보다 주변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을 해야 했으므로.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보내보라.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비해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라. 누구든지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능력을 타고났겠는가? 자신의 관심사를 개발하면 자존감은 배양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애정을 얻고자 고군분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게 될 것이고, 전형적인 착한 딸의 특성이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갈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당당하게 내보이는 여러분과 소통하고자 할 것이다. 함께 있는 것이 그냥 좋기 때문이다.

– <나쁜 여자로 사는 법>(만프레드 셰르만, 베아테 셰르만 저 I 파프리카) 중에서


‘착한 여자’들이여, 이제 자신을 표현하라

좋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거나, 마찰이 두려워 참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표현해야 비로소 원활한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 있다. 이제는 마음을 표현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면 부정적이거나 간접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이고 분명한 말을 써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진솔하게 느끼고 그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 할 것이다. 가령 애인에게 꽃을 받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말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꽃 좀 자주 사줬으면 좋겠어’(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말) ‘꽃 사오는 거 잊지 마’(부정적인 말) ‘왜 꽃을 사주다 만 거야?’(부정적인 데다 간접적인 말) ‘꽃은 자주 사줘야 해’(엄격하게 선을 긋는 말) ‘좋은 남자는 여자 친구한테 꽃 사주는 걸 잊지 않던데 말이야’(부정적인 데다 간접적이며 교묘히 유도하는 말)

– <좋은 사람 콤플렉스>(듀크 로빈슨 저 I 소울메이트) 중에서


정말 ‘나쁜 여자’의 참회록

‘난 여왕벌 난 주인공 / 당장 어디로 튈지 몰라 럭비공~ ’ 씨엘(CL)이 부른 ‘나쁜 기집애’의 가사이다. 이 가사 속 나쁜 여자, 딱 나의 20대 때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 몸이 약했던 나는 항상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다. 가정형편도 부유했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었고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싹텄다.

직장 생활할 때도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눈치도 보지 않았다. 언제나 최신 신상으로 나를 꾸미고 다녔다. 내가 그렇게 할수록 남자들은 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에게 대시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삶이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나를 처절하게 돌아본 순간이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왕공주병 정말 ‘나쁜’ 여자였다. 언제나 내 감정에 치우쳐 남의 감정이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착한 여자들처럼 ‘나쁜 여자’였던 나 역시 남의 시선에 갇혀 있었다. “나만 바라봐줘” 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나를 치장하며 과시했던 것이다. 재밌게 사네, 멋지다, 부럽다는 소리를 즐기며,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나서 씩씩대며….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주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 죄송했다.

진정 매력적인 여자는 남들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 여자, 스스로의 삶을 진실되게 만들어갈 줄 아는 여자,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여자인 것 같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 송경옥 /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착한 여자’라는 틀을 깨버리고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당당한 여자. TV 속에서 나오는 소위 ‘나쁜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후련하고 늘 부러웠다. 나는 항상 친절하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속칭 ‘착한 여자’의 대표 주자였다. 여자는 착실해야 해, 다소곳해야 해, 남들 앞에서는 양보해야 해…. 어린 시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께 받은 교육은 그랬다. 엄마도 무조건 참으라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엄마의 삶이 싫으면서도 닮아가고 있었다. 한 번도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 감정을 솔직히 표출해본 적이 없다.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화가 나더라도 꾸욱 참고 있다가, 우회적으로 빗대어서 말하면서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늘 사람 대하는 게 공포스러웠고 깊은 관계는 맺을 수가 없었다. 늘 부지런히 살았지만 우울증 같은 것도 오고 삶이 답답했다. 이런 마음들을 다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마음수련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쌓아온 마음을 정말로 버릴 수가 있었다. 항상 잘해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삶을 다 빼고 나니 너무 시원했다. 날아갈 거 같았다. 그냥 우주가 나였고, 모두가 다 하나였다. 누구나 완전한 존재였다. 자유로웠다. 온 세상이 내 것이었다. 진짜 행복했다.

그렇게 나를 버려본 후에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부당한 상황에서 화가 나면 화도 낸다.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게 되었고, 솔직하게 부탁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상대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렇게 솔직하게 다가가니 사람들하고도 더 친밀해졌다.

한번은 남편하고 말다툼할 일이 있었다. 애들 성적이 떨어진 게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서라는 남편의 말에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당신한테 그 말 들으니까 되게 속상하다. 아이가 공부를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데, 왜 내 탓을 하냐…” 남편도 아차 싶었는지 미안하다고 했다. 애들에게도 할 이야기가 있으면 바로 표현하고,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표현하니 오히려 아이들도 편안해했고, 나도 편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배려를 하고 나눈다. 삶이 행복해졌다.

혹시 나처럼 ‘착한 여자’라는 틀에 갇혀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을 돌아보고 버려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예전에는 나쁜 여자를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좋다. 언젠가부터 착한 여자의 이미지는 무능하고 버려야 하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착하고 남을 배려하며 나눌 줄 아는 게 뭐가 나쁜가? 이제는 ‘착한 여자’라는 틀도 넘어 진정한 ‘착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다.

– 장수진 / 자영업.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

중독, 멈출 수 있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하루는 무의식적인 행위들로 이어져 있다.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일들의 반복. 하지만 이런 행동들이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면 어떨까? 수면을 방해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면, 월급의 대부분을 투자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중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문제시되는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보다도 어쩌면 더 극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에게는 담배나 약물, 술 등 특정 물질 섭취뿐 아니라 운동, 쇼핑, 성형, 문신, SNS, 채팅, 여행 등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행위 중독’ 증상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고, 그 행위를 그만두었을 경우에는 우울, 불안, 분노를 느끼게 되는 등 삶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반복적 행위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독적 습관이 인간 내면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공허하고 결핍된 감정이 있는 한 그것을 회피하고 감추기 위한 행동은 겉모습만 바꿔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평소 억눌린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을 비우는 과정이 중독을 극복하는 근본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훌륭한 멘토가 되어 마음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중독 증상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문진정 참조 도서 <어떻게 나쁜 습관을 멈출 수 있을까>

(프레드릭 울버튼, 수잔 샤피로 | 소울메이트)

중독
진단하기

생활 습관을 살펴보면 중독이 보인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가? 상사와 미팅을 한 후에는 초콜릿을 찾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마트폰에 손이 가는가? 사소해 보이는 습관도 하나하나 살펴보자. 잠들기 전의 칵테일 한잔, 껌 씹기 같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일들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주 1회로, 그러다가 매일 하는 중독으로 바뀔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건강상의 문제나 가족 관계 갈등, 경제적 어려움, 불법이나 부도덕한 행동 등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음의 질문들에 공감한다면 중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① 습관적 행동(술, 담배, 스마트폰, 인터넷 서핑, 쇼핑 등)을 1~2주간 그만뒀을 때 우울, 불안, 분노 또는 강한 그리움을 느낀다. ② 중독적인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월급의 상당량이 정기적으로 지출된다. ③ 주변 사람들에게 중독 습관 때문에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④ 혼자 있을 때 주로 폭식을 하거나 게임을 하는 등 비밀스럽게 하고 있는 행동이 있다.

중독
진단하기

★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 버리기

인생에서 놓친 기회, 간절히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의 목록을 만들어보자. 내가 죽었다고 가정하고 부고 기사를 써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미련이 남는 사건들을 깨끗이 포기하자. 담배, 술, 쇼핑 등 나의 습관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 사회적 보상과 성취에 집착하지 않기

성공에 집착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성취를 위해 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배우나 모델, 운동 선수들이 계속해서 인기를 얻고 활동하기 위해 식사량을 제한하거나 운동을 과하게 하고, 성형이나 스테로이드제, 마약 등에 중독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 보상을 많이 받더라도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정신적 혹은 육체적 건강을 해치고 보상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 다른 사람 위주로 살아보기

지금까지 평생을 내 위주로 일, 사랑, 수면, 식사, 운동을 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 중심적인 패턴은 한번 만들어지면 깨기란 쉽지 않지만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해오던 모든 것을 재평가하고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시간 일찍 잠자리에 들기, 소다 음료 대신 차를 마시기 등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부터 고쳐나가자. 함께 밥을 먹는 친구가 내 취향과 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면 친구에게 양보해보자. 때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잠시 제쳐두고 소외된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칭찬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일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좋은 연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