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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라는 생명체, 그것이 알고 싶다!

본 사건은 얼마 전 올림픽공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저희 제작진 앞으로 한 통의 문자가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학교 2학년 딸아이의 문자였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아빠 9시까지 데리러 와줘요~ ♥♥

제작진은 급히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딸아이의 엄마 즉 아내와도 동행을 했습니다. 그 시각 이후 올림픽공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제작진은 딸아이와의 약속 시간보다 30분쯤 이른 8시 반에 올림픽공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시각 그곳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가 막 끝나고 딸아이 또래의 아이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두 달 전 이미 예매를 마치고 조금 전까지 저 공연장 안에서 미친 듯 직렬 5기통 점핑을 3시간가량 했을 것입니다.

제작진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려는데 동승한 아내가 제작진을 만류했습니다. 순간 제작진이 멈칫한 사이에 아내는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제작진의 차가 주차한 바로 맞은편 벤치였습니다. 제작진이 놀란 건 운 좋게 바로 그 자리에 딸아이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딸아이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우리는 차 안에서 딸아이의 행동을 잠시 지켜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작진에 비친 딸아이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색함의 실체는 곧 드러났습니다. 딸아이의 안경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늘 끼고 다녔던 안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딸아이가 눈을 희번덕 까뒤집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옆에 동승했던 아내의 방언이 터졌습니다.

“저 가시나 렌즈는 또 언제 몰래 샀데? 저 삐~~ 삐~~”

얼마가 지났을까 딸아이는 렌즈를 정리하고 안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벗었습니다. 신발은 집에서 신고 나갔던 그대로의 운동화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운동화에서 검은 물체의 무엇을 꺼내는 듯 보였습니다. 이때 아내의 2차 방언이 터졌습니다.

“저 삐~~~ 깔창까지 깔고 다니네… 어머나! 두 겹이야! 저 삐~ 가시나!”

그리고 곧이어 제작진을 더욱 놀라게 한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딸아이의 흰색 블라우스였습니다. 바로 시스루룩이었습니다. 집에서 후다닥 입고 나갈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모기장 같았습니다. 아내의 3차 방언이 터졌습니다. “삐~ 삐~ 삐~~~~~~~~~~~ 저 미친 XX 염색체!”

올해 마흔세 살의 백일성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최근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제작진은 이쯤에서 동승한 아내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니 요즘 애들 저 정도는 다 하고 다니잖아. 송이가 배꼽에 피어싱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런데 제작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딸아이가 벤치 뒤로 가더니 블라우스를 약간 걷어 올렸습니다. 제작진과 아내가 동시에 숨이 멈춘 그 순간… 딸아이는 흐트러졌던 옷을 추슬렀습니다. 잠시 긴장됐던 차 안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게 딸아이는 20여 분간의 단장(?)을 마치고 제작진과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물론 지켜본 거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3일이 지나서 이 생명체가 배가 아프다며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위염기가 있다고 스트레스 주지 말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기가 차고 억울해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아니 정말 지가 뭘 했다고.

이런 제작진의 마음, 중2 생명체를 키우시는 모든 분들은 다 공분하실 거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중2 생명체를 키우시는 모든 시청자들에게 한마디만 묻고 싶습니다.

첫 뒤집기를 성공하고 방긋 웃었고 배밀이를 하며 바동거리고 첫 걸음마를 하며 뒤뚱뒤뚱 아빠에게 걸어와 두 팔을 흔들며 안겼던 그 깨물어 버리고 싶었던 딸아이는 도대체 어디 가고 하루 종일 휴대폰으로 같은 생명체들과 교신하는 그냥 물어 버리고 싶은 저 외계인은 어디서 툭 하고 나온 걸까요? 그것이 정말 알고 싶습니다.

구로는 예술대학

‘OO은 대학’이란?  ‘누구나 가르치고, 어디서나 배운다’는 슬로건을 가지고 탄생한 ‘OO은 대학’ 네트워크는 2009년 사회적기업 ‘노리단’의 프로젝트 ‘마포는 대학’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OO’에는 마포, 성북, 구로, 친구, 가족 등 어떤 단어가 들어가도 되고, 어느 곳이든 교실이 되며 누구든 수강생이 되는 틀을 벗어난 교육의 장이다. ‘OO은 대학’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은 지역의 숨겨져 있는 문화 예술 자원을 찾아내는 ‘술래’라고 불리는데 이름 대신 별명을 지어 부르며 수평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이들이 지역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놀거리와 배울거리를 발굴해 나가는 것이 OO은 대학의 특징이다. 현재 지역별로 6개의 대학이 운영되고 있다. 그중 ‘구로는 예술대학’을 만나본다. 취재 문진정

‘구로는 예술대학’은 ‘공단’으로 굳어진 구로의 이미지를 바꾸고 구로만의 문화 예술 활동을 만들어가고자, 지역 청년 활동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2010년 처음 만들어졌다. 구로예대의 첫 번째 강좌는 ‘마을대학 만들기학과’로 20명 남짓한 청년들이 구로시장 곳곳을 다니며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고 마을 지도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웬 젊은이들이?’ 하며 의아해하던 상인들은 3년이 지난 지금, 친근하게 서로의 별명을 불러가며 생생한 인생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선생님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더불어 작년 화재로 피해를 입은 시장 건물들도 정비하고 먹고사는 일에 바빠 서먹했던 앞집, 옆집 상인들과도 30년 만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시장의 분위기도 훨씬 화기애애해졌다고 한다. 벼룩시장과 콘서트를 열고 동네 잡지, 영화를 만드는 일 등 이제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마을기획단이 꾸려져 주민이 함께 구로만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구로예대는 서툴지만 즐거움으로 무장한 구로만의 아이콘이자 자랑거리가 되었다.
구로예대
수강생 선발 기준
구로에 살거나 직장이나 대학을 다니는 청년, 동네 친구를 만들고 싶은 청년, 동네 친구들과 재미난 것을 만들어보고 싶은 청년, 사회적 경제나 마을에 관심 있는 분이면 누구나 환영. 나이 제한 없음. 수강료 없음.
구로예대 수업들
‘기운 센 장어집’ 사장님의 룸바 교실 / 패션 연구원 박선생님의 연애를 부르는 코디법 강좌 / 미장원 아줌마에게 듣는 머리 자르는 교실 / 동네 카페 사장님께 듣는 커피 교실 / 동네 잡지 ‘구로커’ 만들기 / 주민들에게 디스코를 가르쳐주는 ‘토요일밤의 열기’ / 구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만들기가 진행되었고, 구로 아트밸리 앞 공원에서 매달 넷째 주 금요일에 열리는 ‘구로별별시장’ / 정년 퇴임한 선생님의 난타 교실 외 여러 강좌가 진행 중이다.

구로는 예술대학의 대표 술래 ‘삐융’ 박종호씨 이야기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자동차 업계의 직장을 다니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여러 달 치료를 받으면서 쉬는 동안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죠.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인가? 바라던 삶인가?’ 그러던 중에 ‘OO은 대학’을 알게 되었고 2010년 구로예대의 첫 번째 수강생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시장 상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구로의 숨은 고수를 발견하는 즐거움, 새로운 친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는 경험이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 2년 전부터 ‘OO은 대학’이 저의 직장이 되었습니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짜고 강좌를 만들기보다는 누구든 자신의 아이디어를 잘 펼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제가 그랬듯이 많은 청년들이 지역에 애정을 갖기 위해서는 즐거운 경험이 필요하고, 관심과 재미를 갖는 것이 그 지역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는 입문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포에는 ‘홍대’라는 문화의 아이콘이 있듯이 구로에도 자랑스러운 구로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서툴고 뭔가 부족하지만 ‘재밌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구로예대만의 특색도 유지하고 싶고요. 그렇게 하다 보면 구로에서 친구를 사귀고, 놀고 배우고, 가정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오늘도 아빠처럼 전진합니다

아빠는 군인이 천직이셨다. 군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 강직, 규율, 성실은 아빠와 잘 어울렸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 넘어 주무실 때까지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는 법이 없이 스스로를 엄격하게 컨트롤하셨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아빠는 항상 무언가를 배우며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자식들도 그러한 성향을 닮기 바라셨는지 초등학생 때까지 한 달에 한 번 서점에 데려가 책을 사주셨고, 방학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숙제를 내주셨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한 번도 그 숙제를 다 해본 적이 없다.

그사이 당신은 긴 출퇴근 버스에서의 독서로 목 디스크를 얻으셨고 거의 모든 동창회의 간부 역할로 바쁘셨던 가운데에도 대학원 졸업장을 4번이나 집에 가져오셨다. 하고 싶으신 일이 많았던 아빠는 하루가 늘 모자랐다.

고등학교 때까지 TV 성공시대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하루를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은 본받아야 할 표본 그 자체였다. 공부에 뜻이 없던 내가 대학 입학과 회사 입사를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빠를 보며 배운 시간관념과 습관 덕분이었다.

그러나 사회에 발을 딛고 머리가 크기 시작하면서 아빠가 꿈꾸는 것들이 이상적 사회였음을 알고 속이 불편해지곤 했다. 아빠의 장군 진급 실패 소식을 들으며 능력에 보상해주지 않는 사회에 분노하기도 했고, 남들처럼 약삭빠르게 자신의 잇속을 챙기지 못하고 미련하고 정직하게 일만 하는 아빠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태어나면서부터 심어준 노력, 성실이라는 가치관은 개미와 베짱이 동화 속에 나오는 해피엔딩일 뿐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TV 속 성공시대는 결과론적 이야기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사회생활로 인한 독립과 결혼 생활로 왕래가 줄어든 만큼 딱 그만큼의 대화와 왕래를 하며 지냈다. 그리고 지난해 봄 37년간의 ‘군인’이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제2의 인생을 축하하는 전역식 행사가 열렸고 아빠는 10명을 대표해서 전역사를 발표하셨다.

여러분! 저는 전역자를 대표하고, 전역사를 나타내는 의미를 시인 고은의 시 한 구절로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 시는 가장 짧은 시로서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시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귀한 것이 너무 많았고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 삶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30여 년의 군 생활을 되돌아보니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보람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부족한 저희들을,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철저하게 지도해준 수많은 지휘관님과 직속상관 및 선배님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았던 저를, 묵묵히 잘 따라주었던 부하들의 진심 어린 충정, 그리고 한평생 같이 살아온 나의 가족들에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감사와 존경을 바칩니다….

전역사는 아빠를 우러러보았던 작은 나를 기억나게 했다. 그 속에는 내가 눈을 돌려버린 후에도 지속되던 아빠의 인생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할 대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했다. 아빠는 이미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오늘도 즐겁게 인생을 달리고 계셨다. 부끄럽게도 열정에 대한 보상을 운운했던 나는 그 가치관의 기준을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지금 아빠는 비록 군복은 벗으셨지만 여전히 새벽 5시에 일어나는 바쁜 삶을 살고 계신다. 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아빠는 군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자마자 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추진하고 계신다. 학식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고 군에 대한 사랑을 펼칠 수 있는 연구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니 말이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그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의 길로 접어들었다. 때때로 아빠의 전역사를 보며 우리의 인생을 응원하는 작은 즐거움도 생겼다.

김지은 33세. 프리랜서. 서울시 강서구 염창동

김지은님의 아버지께는 ‘오늘도 전진하는 아빠께’라는 딸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꽃바구니를 보내드렸습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 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화초 물 주기에 대하여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실내 화초가 죽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물 주기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란 거 아세요? 물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물을 너무 자주 주어서지요.

‘일주일에 한 번 줘라’ ‘2~3일에 한 번 주면 된다’ 등 여러 말들을 하지만 사실 계절마다 날씨가 달라 흙이 마르는 속도가 다르고 집집마다 환경에 따라 햇빛과 바람이 들어오는 양이 다른데 마치 세상의 모든 화분에 담긴 흙이 똑같이 마르는 것인 양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라’는 식의 이야기는 잘못된 거지요. 대부분의 실내 화초에 알맞은 물 주기는 화분의 흙이 말랐을 때 한 번에 흠뻑 주는 것이랍니다. 어느 날 한번은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화분의 흙이 말랐을 때 물을 줘야 한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어. 근데 지난번 물을 준 지가 열흘이 지났는데도 흙이 마르질 않는 거야. 아무리 흙이 축축하다고 해도 물을 준 지 열흘이나 지났다면 화초가 목마를 거 아니니? 그래서 물을 흠뻑 줬는데 며칠 지나 줄기가 물컹해지면서 이상해지더라고.”

이런 경우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은 말로는 화초를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지 않을까. 그건 마치 내 방식대로 하는 일방적인 사랑 같다고나 할까요. 진짜로 좋아한다면 화초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화초가 원하는 조건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자기 입장에서 ‘내 생각대로, 내 조바심 때문에, 내 만족을 위해서’ 물을 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축축한 흙 속에서 이미 뿌리가 젖어 있는 상태인데 거기에 또 물을 주면 썩는 게 당연한 거겠죠. 그런 모습들은 비단 화초 키우기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TIP 물 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 입장, 즉 화분의 흙 상태를 먼저 점검하는 거란 걸 기억해주세요. 물 주기만 잘해도 화초 키우기, 절반은 성공입니다.

느끼하지 않은 과일 채소 잡채

어릴 적 온 동네에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메밀~~~묵! 찹쌀~~~떡!”을 외치던 메밀묵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긴 밤의 정적을 깨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였습니다. 지금이야 전화 한 통이면 만한전석이 부럽지 않을 다양한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지만 어쩐지 어릴 적 밤마다 기다리던 그 맛은 아닌 것 같아요. 배달 음식은 기름진 것이 많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념들로 버무려져 먹고 나면 편안해야 할 잠자리가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집에 있는 친근한 재료로 만든 가벼운 음식들이 여러분의 출출한 밤을 기분 좋게 채워주길 바랍니다. 건강한 야참으로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해 보세요.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주재료

당면 150g, 참기름 2큰술, 사과 1/4개, 배추 잎 2장, 표고버섯 2개, 느타리버섯 1/2줌, 양파 1/4개, 당근 1/8개, 오이 1/2개, 식용유와 소금 약간, 통깨 1큰술

당면 간장 재료 간장 1, 설탕 4, 물엿 4, 다시마(10×10cm) 1장, 후춧가루 약간

1 당면은 찬물에 20분 정도 불려 먹기 좋은 길이로 잘라 끓는 물에 삶은 후 물기를 쪽 뺀 다음 참기름을 뿌려 무친다.

2 사과는 씻어 껍질째 4cm 길이로 채 썰고 배추 잎도 비슷한 크기로 채 썬다.

3 표고버섯은 밑동을 잘라내고 도톰하게 채 썰고, 느타리버섯은 가닥가닥 떼고, 양파와 당근, 오이도 채 썬다.

4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썰어둔 야채를 각각 볶아 소금으로 간한다.

5 당면에 ‘당면 간장’ 1/4컵을 넣고 버무린 다음, 볶은 채소를 넣고 한 번 더 버무리고 사과를 섞은 다음 통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사켓SOCCET

이름은?  사켓(SOCCKET). 축구soccer와 전기 소켓socket의 합성어로 에너지를 활용하는 축구공이다. 30분간 축구공을 가지고 놀면 3시간 동안 LED 전등을 켤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버드대 학부생 시절이던 2008년, 엔지니어링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멀티 플레이어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우리는 실질적이고 세계적인 이슈인 에너지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 수업의 수행 과제로 SOCCKET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제품의 원리는?  공 안에 시계추 같은 장치가 있다. 이것은 축구 게임으로 만들어진 운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어 저장하는데, 작은 발전소 같은 개념이다. 전기 수도 등 공공시설이 전혀 없는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해가 지면 공부할 방법이 없는데 이 축구공이 즐거운 놀이뿐 아니라 LED 램프의 빛으로 공부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중점을 둔 부분은?  SOCCKET은 공놀이를 할 때 잘 버틸 수 있어야 하기에 기술뿐 아니라 내구성도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튼튼한 방수 에틸렌 비닐 아세테이트 폼으로 만들었고 표준 크기 축구공에 비해서 30g 정도 무거울 뿐 다른 것은 거의 비슷하다. LED 등을 켜는 대신 휴대폰 충전을 할 수도 있고 이동식 손전등도 출시 예정이기 때문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하고 싶은 말?  현재 미국과 멕시코의 가정에 2천 개의 SOCCKET이 있고 올해 1천4백 개를 추가로 배포할 예정이다. 처음 2년간은 독자적으로 자금을 마련했지만 2013년 3월부터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기금 마련을 위한 Kickstarter 캠페인이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앞으로도 SOCCKET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에너지 활용 기능과 재미를 갖춘 제품군을 다양하게 만들고 싶다.

만든 사람

제시카 매튜(Jessica O. Matthews)

줄리아 실버만(Julia Silverman)

Uncharted Play 공동 창립자

Mnet <댄싱9>

<댄싱9>. 이건 실로 오디션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핵심이 이제는 더 이상 경쟁과 서바이벌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중들이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제아무리 경쟁의 시스템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보여지는 ‘공존과 협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K팝스타>가 배출했던 수펄스가 그랬고, <보이스 코리아>의 백미인 콜라보레이션 미션이 그랬다.

그런데 <댄싱9>은 차원이 다르다. 가창의 영역에서 콜라보레이션은 이미 일상화된 것이지만 춤은 아직까지 실험적인 단계가 아닌가. 도대체 현대무용과 스트릿댄스가 어우러지고, 한국무용과 재즈댄스가, 또 댄스스포츠와 스트릿댄스가 어우러지는 무대를 우리가 어디서 접하겠는가. 물론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작품을 통해 비보잉과 발레가 접목됐을 때, 숙명가야금 연주단과 비보잉 그룹 라스트포원이 만나 절묘하게 꾸며지는 무대를 봤을 때 그 감동이 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나.

단 6시간 정도를 주고 이 다양한 장르의 춤을 한 무대로 선보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자못 무모한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무대 위에 올라온 결과물을 보면 이건 기대 이상이다. 단지 춤이라는 공유점 하나만을 갖고도 이들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를 보이는 걸까. 스트릿댄스를 하는 서영모가 캡틴인 무대에서 한국무용을 하는 김해선이 압도적인 표정으로 무대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나, 스트릿댄스의 하위동이 캡틴으로 나선 무대에서 현대무용을 하는 이선태가 그 느낌을 맞춰주는 장면은 순간 이 무대가 오디션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물론 오디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최선의 무대를 향한 이들의 의지는 심지어 합격과 불합격의 차원을 넘어서는 느낌이다.그래서일까. 거의 모든 무대 미션은 울음바다가 되기 마련이다. 팀을 이끌었던 캡틴은 누군가 떨어진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기 일쑤고, 떨어진 팀원들은 오히려 캡틴에게 감사를 표한다. 심지어 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린 마스터들도 눈물을 글썽인다. 이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틀 속에 들어와 있지만 모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눈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댄싱9>이라는 무대가 이들 춤꾼들에게 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일 게다.

춤. 사실 지금껏 춤은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온 적이 별로 없었다. 현대무용이나 발레 같은 클래식은 어딘지 대중과 유리된 어떤 세계처럼 치부되어왔고, 비보잉 같은 스트릿댄스는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에 반짝 관심이 모였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의 위상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댄스스포츠는 <무한도전>이나 <댄싱 위드 더 스타> 같은 프로그램으로 전면에 세워진 적이 있으나 여전히 대중문화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 춤 하면 여전히 대중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백댄서. 춤바람. 심지어 제비가 아니던가. 이런 편견은 고전무용이나 현대무용 같은 클래식을 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딘지 대중과 유리된 귀족들만을 위한 춤처럼 여겨지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게 현실 아니던가.

‘백댄서’로 표상되듯 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서서 누군가를 돋보이게 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비로소 온전히 무대의 중심에 세워준 <댄싱9>이라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을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게다. 경쟁과 콜라보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댄싱9>이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는 ‘춤꾼’의 세계는 그들이 갖고 있는 경쟁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춤’이라는 공유 지점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지극히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적어도 춤꾼들을 백댄서 혹은 화석화된 고전을 여전히 시연하는 존재 정도로 보는 시선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 누가 이들을 더 이상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토록 아름답고 인간적인 몸의 언어들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려 몸부림치는 그들을.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net

오토캠핑, 아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글 & 사진 김홍수 여행작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 저자

직장 생활로 바쁜 아빠들은 아이와 함께 지낼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주말, 소파에서 뒹굴다 보니 어느새 아이가 쑥 자라 있었습니다. 아빠로서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주말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놀이로 생각합니다. 놀면서 배우는 아이들은 심신이 건강합니다.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가 많을수록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만큼 높아지고 가정의 행복지수도 올라갑니다. 1년은 52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떠난다면 이미 행복한 아빠이겠지요. 그 첫 회로 요즘 대세인 오토캠핑을 소개할까 합니다.

오토캠핑이란 ‘오토모빌(Automobile)’과 ‘캠핑(Camping)’의 합성어로 자동차에 텐트와 취사도구를 싣고 야영장까지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캠핑은 아이들에게 아빠의 멋진 모습도 보여줄 수 있어 좋습니다. 아빠가 무거운 짐을 척척 나르고, 텐트를 치고, 요리를 하고, 모닥불을 피우는 등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아빠의 존재감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텐트를 치는 방법, 커다란 참나무 장작에 불을 붙이는 방법, 물고기 잡는 방법 등을 이야기하며 가족 간 대화의 장도 만들어지지요.

호텔과 펜션의 편안함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불편함이 있지만, 자연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며 체험 활동도 하고 가족이 함께 신나는 추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캠핑에 한 번 다녀온 아이들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캠핑 장비 구입은 한꺼번에 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대부분의 아빠들은 오래전 산이나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과 국을 해먹으면서 야영을 해본 경험이 있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변변한 장비 없이도 작은 텐트에서 비와 바람만 피할 수 있으면 최고의 캠핑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은 첫 캠핑을 떠날 때 15년 된 텐트, 집에서 사용하던 휴대용 가스레인지, 주방에서 사용하던 밥솥과 주방기구 몇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새로 구입한 것은 텐트 바닥에 까는 캠핑용 매트가 유일했지요. 이 장비들만 가지고도 추억을 쌓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캠핑 장비는 풀세트로 한꺼번에 구입하는 것보다는 작은 텐트만 하나 준비하여 캠핑을 해본 다음에 차근차근 하나씩 구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텐트 하나만 가지고 캠핑을 떠나는 것이 망설여진다면 한 번쯤 캠핑 장비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캠핑장에서 만나는 다양한 프로그램

최근에는 캠핑장에서도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커피바리스타교실, 음악힐링캠프, 미술힐링캠프, 국악난타배우기, 미니콘서트 등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지요. 캠핑을 하면서 힐링을 하고 다양한 문화 체험도 할 수 있는 테마 캠핑이라 볼 수 있습니다. 먹고 노는 캠핑 문화가 아닌 즐겁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통해 힐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캠핑을 시작하는 캠핑 초보들에게 제격입니다.

캠핑 정보 도움: 네이버 카페 <홍반장의 에듀캠핑>

풍성한 가을, 스치는 바람이 고맙습니다

도회지 생활은 바빴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나이 사십을 넘어가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나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운명처럼 지리산행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산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농사는 단순하지만 농사가 일깨우는 것은 다양합니다. 논이나 밭을 지날 때 그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연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갑니다. 농사의 깊은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드는 나는 행복합니다. 고된 육체노동이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푸근하게 해줍니다. 스치는 바람이 고맙고 살아감이 고맙습니다.

사진, 글 이창수

명품 농부

모심기 전 논에서 해야 할 일은 가래질과 쟁기질과 써레질입니다. 가래질은 논둑을 다지는 일이고, 쟁기질은 묵은 땅을 뒤집는 일이고, 써레질은 흙을 잘게 부수어 고르는 일입니다.

논을 보아 하니 쟁기질은 끝나고 써레질은 아직 남았습니다. 담배를 문 아저씨가 등허리 빠지게 논둑을 다지고 있습니다. 논농사에서 제일 힘든 일이 가래질입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힘이 빠진 논둑을 다지고 다져야 합니다. 쥐 새끼나 뱀이 낸 구멍으로 논물이 빠지지 않게 잘 다져야 합니다. 귀농해 논농사하는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아침에 들판서 보니 어떤 이가 논둑을 방바닥 미장하듯 공들여 하던데.” “아이고 형님, 어디 논둑은 혓바닥으로 핥듯이 해놨어요. 저는 힘들어서 절대 안 해요. 이쪽 분들이나 하지 우리 같은 놈들은 못 합니다.” ‘이쪽 분’은 원래부터 살던 ‘명품 농부’이고 ‘우리 같은 놈’은 귀농한 약간 젊은 ‘짝퉁 농부’를 말합니다. 농부나, 흙이나, 물이나 쌀 한 톨 만드는 데 참으로 노고가 많습니다. 밥 한술 뜨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어 그냥”

해거름 들길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디 다녀오세요?” “어~어 논에.” “다 저녁에 무슨 논예요?” “어~어 그냥.” 대개 길에서 만나는 어르신과의 대화는 기름기 없는 담백한 말이 이어집니다. 지난밤 내린 비가 논에 가득합니다. 이른 아침 비 그치기가 무섭게 아랫마을 아저씨는 논에 들어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어 그냥”입니다. 내가 농사짓는다고 떠들고 다녀도 실패한 농사꾼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어 그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도회지 출신이라 잡생각 많고, 이유도 많아 그들의 무심한 마음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농사는 마음으로 짓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내게는 참으로 멀고 먼 길입니다. 둔덕에 앉아 조용히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내딛는 발끝마다, 풀 뽑는 손끝마다 동심원이 일어 건너편 산 그림자가 깨집니다. 깨진 산 그림자는 그의 뒤를 따라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여름 해에 벼가 소리 없이 익어갑니다.

쨍한 햇빛

스치며 지나치는 길에 나무 사이로 농부를 보았습니다. 장마 중에 잠시 햇빛이 나니 서둘러 논에 나왔나 봅니다. 비는 벼도, 잡초도 무럭무럭 자라게 합니다. 비는 무엇에나 동등합니다. 자연이 그러하니 농사짓는 이는 제 노동만큼 결실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잡초를 뽑아내는 농부의 모습에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가을 빛 잔치

먼 길 달려 온 햇빛이 논에 내려 빛 잔치를 벌입니다. 건너편 둔덕에 앉아 빛 잔치에 젖어듭니다. 현란한 가을빛에 눈을 감습니다. “너는 지난여름 무엇을 했는고?” 감은 눈에 비친 밝은 빛이 묻습니다.

뜨끔합니다. 고추도 심고, 가지도, 토마토도 두루 심었건만 근무 태만에 결국 잡초로 뒤엉킨 밭을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할머니의 다랑논은 이삭이 충만하지만 근무 태만인 우리 밭은 잡초가 충만합니다. 개미의 논에도 베짱이의 밭에도 빛은 고루 비추나 결국 준비된 사람만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합니다. 자연은 분별함이 없으니 모두 제 할 따름입니다.

사진가 이창수님은 1960년생으로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17년간 사진 기자로 근무해왔습니다. 1999년 지리산으로 내려가 수시로 산과 들을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지리산 악양골에 살면서 내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히말14, 희망14>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하사탕

어린 시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인내’라는 과일이 진짜 있는 줄 알았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다음에 커서 돈 벌면 그 요상한 과일을 꼭 사 먹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신(神)은 ‘옜다! 네가 바라는 인내다’ 하고 인내를 주셨다. 그 맛은 이랬다.

중학교 때 집안이 사정없이 기울어졌다. 그래서 한때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나는 깊은 밤 자전거를 타고 읍내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는 밤 열두 시에 하동역에 도착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면 나는 재빨리 수하물 칸으로 달려가서,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신문 꾸러미를 내려 받아 자전거에 옮겨 싣고 신문보급소로 왔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우편으로 보낼 신문지마다 독자의 집 주소가 적힌 띠지를 끼우는 작업을 하였다.

겨울밤 추위는 혹독했다. 어둠이 내리자 바람은 도적같이 읍내를 휘젓고 다녔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아걸었다. 하지만 나는 춥고 어두운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칼바람은 어리다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손발은 얼고 코와 귀가 떨어질 듯 아팠다. 겨우 신문 보급소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나는 울었다. 너무나 추워서 아무도 없는 길에서 엉엉 울었다. 얼떨결에 처음 맛본 인내는 그렇게 매웠다.

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에 실습을 나갔다. 일만 열심히 하면 공장에서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다 해결해주었다.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즈음 울산조선소에 다니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기능직 사원 모집이 있어서 담당 과장님한테 부탁해두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그곳은 방위산업체, 즉 월급 받고 5년간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회사였다. 나는 곧바로 방직공장을 퇴사하고 울산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철석같이 믿었던 담당 과장의 부름이 없었다. 나는 친구 기숙사에서 꼬박 보름을 기다리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집안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녔지만, 나는 자꾸 지쳐갔다. 결국 첫 직장 대구 방직공장 부장님께 사정을 전하였다. 다행히 회사에서 재입사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옷가방을 싸들고 대구로 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그리 서럽던지…. 나는 차 안에서 고개를 떨군 채 꺽꺽 울었다. 쓰디쓴 두 번째 인내였다. 그 후에 있었던 세 번째 인내는 아직은 말하지 못하겠다. 대신 이제 열매를 이야기하고 싶다.

대구 방직공장 담 너머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날 나는 오전 작업을 끝내고 면장갑을 빨아 철제 구조물에 널고 있었다. 그때 멀리 학교 창문 밖으로 나온 아이 얼굴 하나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공장에 근무한 지 일년이 넘었지만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도 이쪽 사람과 처음 눈길이 닿은 듯 재빨리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람쥐처럼 사라졌다. 사랑스러웠다. 아! 내가 선생님이 되어 저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신기루 같은 희망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딱 10년 후 어느  날, 내가 초등학교에서 부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시골 학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바라보는 조회대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반갑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최형식 선생님입니다.”

젊은 날, 공장 담벼락 아래서 꿈꾸었던 희망의 뱃머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은 대체 얼마나 맛있는 열매를 주시려고, 이토록 오랫동안 쓰디쓴 인내를 맛보게 하실까’ 하고 내가 구시렁 구시렁거리던 어느 평범한 날, 불현듯 이곳에 나를 내려놓은 것이다.

부임 첫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뒤, 나는 교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슴을 펴고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어릴 때 박하사탕을 오드득 깨물었을 때처럼, 콧속에서부터 시작한 상쾌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인내가 맺은 열매는 박하사탕 맛이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