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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감자전

요즘 예능 프로그램 중 연예인들이 나와 자신만의 야식을 직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영향인지 야식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지는 듯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라면처럼 만들어진 제품에 다른 것을 섞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야식이라고 꼭 간단해야 하나! 저녁 겸 야식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면 조금은 복잡해도 만들고 먹는 보람이 있다. 스위스 감자전은 여행길에서 만난 스위스의 전통 음식인 로스티를 따라 만들어 본 메뉴이다. 어느 집에나 있는 감자로 푸짐하게 만들어 보면 좋을 듯하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재료

감자 2개,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베이컨(햄으로 대체 가능) 2줄, 달걀 1개

1 감자 2개는 껍질을 벗겨 가늘게 채 썰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한다.

2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감자 채를 넣어 익힌다.

3 다른 팬에 베이컨 2줄을 굽고 달걀 1개는 프라이한다.

4 감자전 위에 달걀과 베이컨을 얹는다.

레이저 캡 Laser Cap

이름은?  레이저 캡(Laser Cap). 레이저(Laser)와 뚜껑(Cap)의 합성어로 줄이 없는 백지에서도 정확하고 반듯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뚜껑에서 레이저 가이드선이 나오는 볼펜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여자 친구와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바로 이거다! 하고 우연히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산업디자인과를 전공 중인 나와 여자 친구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 엉뚱한 생각을 잘해 서로 아이디어 공유를 많이 하는 편이다.

제품의 원리는?  줄이 없는 백지에 글을 쓸 때 종이에 레이저 캡을 끼워서 사용하면 된다.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레이저 부분이 상하로 움직이며,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글의 레이아웃에 맞게 높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레이저가 나오는 부분의 버튼으로 글자 크기에 맞게 레이저 가이드선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어느 부분에서 레이저 가이드선이 나와야 할지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자 어려웠던 점이다. 처음에는 레이저가 나오는 구조를 연필 그립에 적용시켜 보았는데 쓰기에 불편해 포기하고, 결국 볼펜 뚜껑에 적용시켰다. 이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는 많은 노력들이 숨어 있다. 직접 제품을 사서 써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물어보고 수용하고,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변의 반응은?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하고 재밌어했다. 다들 한 번씩은 겪어본 문제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현재 레이저 키보드(레이저로 나오는 키보드)가 개발된 것을 보았을 때, 충분히 현재 기술로 상용화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은?  산업디자인과 전공이라 해서 그 분야만 전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 환경,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발휘하는 유능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리고 항상 응원해주는 부모님과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나의 목표인 ‘디자인의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을 디자인해 나갈 것이다.

만든 사람

허진원, 김다솜, 손창만

동서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재학 중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를 일컫는 말이다. ‘주변의 의견은 모으되, 결정은 내가 한다.’ 가지런하게 써내려간 일본어 위로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다.<엔딩 노트9>.

스나다 도모아키는 정년 퇴임과 동시에 건강 검진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스나다씨는 담담한 마음으로 꼼꼼하게 엔딩 노트를 준비한다. 그리고 영화는 스나다씨의 일상과 생각을 근접한 위치에서 담아낸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기꺼이 손주들의 머슴 노릇하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등. 스나다씨의 버킷리스트는 가벼운 듯 가볍지 않다. 삶을 살아오며 행하지 않았던, 혹은 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완성해가며 스나다씨는 새로운 인생의 맛을 경험한다.

장례식장 사전 답사를 가고 초대장을 준비하며 꼼꼼하게 점검한다. “내가 호스트인 행사인데, 초청 명단 관리도 잘해야지”라고 말하는 행사는 사실 본인의 장례식이다. 아이러니함에 웃음이 날 만도 하지만 엔딩 노트가 완성되어 갈수록 관객 또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스나다씨는 ‘잘, 죽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사람은 왜 죽을까?’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그때, 스나다씨의 어린 손주가 답을 말해준다. 설핏 웃음이 나는 순진한 대답이지만 꽤나 명쾌한 대답이다.

이제 마지막을 맞이하며 스나다씨의 상태는 급격하게 악화된다. 부인과의 대화를 담은 장면이 스크린에 비춰질 땐 극장이 엄숙해지기까지 한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버킷 한편에 담아두었던 작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엔딩 노트가 판매되고 있다. 법적 효력을 지니는 문서는 아니지만 사후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병이 들었을 때 조치를 바라는지 여부, 장의 절차와 상속,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통장의 자동이체 목록 등.

‘죽어감’을 생각하며 작성하는 엔딩 노트는 삶을 돌아보는 계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내가 없음으로 인해 생길 일들에 대한 민폐를 줄이는 일, 이 얼마나 배려 있는 삶인가! 아니, 죽음인가! <엔딩 노트>에는 두 가지 매력이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스나다씨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레이션이 흐르는데, 이는 사실 영화의 감독이자 스나다씨의 막내딸인 마미 스나다의 목소리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아빠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레이션. 어색할 법도 하지만 죽음을 공포의 시각이 아닌 받아들임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기에 영화의 맛이 달라진다. 어느새 관객도 스나다씨의 가족과 함께 스나다씨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매력은 스나다씨 본인의 유쾌함이다. 분명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자락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나다씨는 유머러스한 모습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소탈하게 웃는 스나다씨의 모습에서 관객이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살아감’과 ‘죽어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빠의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담아갔던 감독조차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던 하나레 구미의 ‘천국님’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할아버진 보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셨지
마음의 보물은 돌아보면 항상 그곳에 있다고
있어요, 있어요. 거기에 있어요. 항상 거기에 있어요

항상 거기에 있었던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과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엔딩 노트를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조유림



기찻길에서 자전거 타요, 레일바이크

글 & 사진 김홍수 여행작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 저자

레일바이크는 유럽의 산악 관광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철도(Rail)와 자전거(Bike)를 합친 말입니다. 기찻길에서 자전거를 타듯이 페달을 돌려서 레일바이크를 움직이는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신나는 체험이지요. 이번에는 대표적인 레일바이크 몇 군데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 정선 레일바이크
절리역을 출발, 아오라지역에 도착합니다. 7.2km나 되는 전국에서 가장 긴 코스로 4인용의 경우 아직 어린아이들은 페달을 밟을 수 없으므로 양쪽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밟아야 합니다. 조금 힘은 들지만 주변 풍경이 워낙 좋아 힘든 줄 모릅니다. 레일바이크는 설명할 수 없는 묘미가 있어요. 무엇보다도 레일을 따라 송천이 흐르고 단풍 지는 나무들과 밭에 무럭무럭 커가는 무, 배추들. 아이들에게 자연을 만끽하게 해줄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지요. 아오라지역에서 다시 구절리역으로 돌아갈 때는 풍경열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 체험까지 할 수 있어 아이들에게 더 큰 추억을 안겨줍니다.

TIP  매달 1일 0시에 그다음 달의 레일바이크, 기차펜션, 캡슐하우스 예약이 가능합니다.

■ 문경 레일바이크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때 호남 지방이나 경상도 남쪽 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했던 유명한 길이지요. 하지만 요즘 문경에는 문경새재보다 더 유명해진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문경 레일바이크입니다. 레일바이크라는 것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한 이곳은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철로를 따라 총 4km 길이를 왕복하는데 철로 옆 강바람과 산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TIP  문경관광사격장 이용자 등에게 요금이 30% 할인됩니다.

■ 삼척 해양레일바이크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바닷가의 해안을 따라 운행되는 레일바이크입니다. 5.4km의 거리를 복선으로 운행합니다. 다른 곳과 달리 지붕까지 있어 비가 오거나 추울 때는 비닐로 덮개까지 씌어줍니다. 문경, 정선 등과 마찬가지로 과거 광물을 수송하던 철로를 재사용하여 만든 레일바이크이지만, 바다를 끼고 달리기에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바다를 따라가다 보면 2개의 터널을 통과하는데 각 터널에는 다양한 빛 예술품이 전시돼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궁촌 파도역과 용화 조개역에서 출발해, 편도로 운행되는 것이라 종착지에 내리면 버스를 타고 다시 출발지로 와야 합니다.

TIP  인터넷 예약 필수. 궁촌에서 출발하는 것을 예약하고 용화에서 궁촌으로 돌아올 때는
셔틀을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이외에도 규모는 작지만, 수도권에서 즐길 수 있는 양평 레일바이크, 곡성, 여수, 대천 등에서 운행되는 레일바이크도 있답니다. 깊어가는 가을, 신나게 달리는 레일바이크. 아이와 함께 온몸으로 이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행복해집니다.


그리 높지 않은 하늘에서 바라본 우리 땅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사진 & 글 신병문

평생의 꿈이 항공사진 촬영이었다. 그것은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헬기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서 다른 방법을 찾던 중 우연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모터패러글라이딩을 보고 난 후 그 꿈에 다가갈 수 있었다. 비행 훈련을 받은 후 2011년 가을, 드디어 평생 꿈이었던 항공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 경남 사천시 가을 다랑논

↑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단풍

모터패러글라이더를 타고 찍은 사진들은 헬기나 비행기와 달리 그리 높지 않다. 때문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풍경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때론 황토밭을 일구는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자연이 펼치는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산하 등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전혀 다른 풍광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 희열과 감동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다.

↓전남 고흥군 김 양식장

하지만, 항공사진 촬영은 하루하루가 자기와의 싸움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바람을 체크하며 길을 나서고, 현장에 도착해서 비행 준비를 하는 데만 30분이 족히 걸린다. 막상 비행을 시작했는데 거대한 구름을 만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이 헤맬 때도 있다. 이륙 또한 중요하다. 바로 이륙을 성공하면 괜찮지만, 두서너 번 실패할 때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매 순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이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초보 비행가로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100회가 넘는 비행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사진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이 땅의 모습, 이 순간을 그렇게 담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날고 또 날았다.

사진가 신병문님은 1971년 경남 창녕 출생으로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우리 땅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진 작업을 해오다가, 최근에는 ‘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란 주제로 하늘과 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 비행 장비를 타고 하늘에서 찍은 우리 땅 풍경을 통해 이 땅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소명 의식을 갖고 작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5년간의 국토대장정 사진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저서로는 <비상-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몸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기생충.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기생충 하면 떠오른 건 징그럽다 , 해롭다, 나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수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딱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며 기생충 변호에 나선 이가 있다. 20년간 기생충을 연구해 온 단국대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서민(47) 교수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인지도를 높여서 많은 청소년들한테 과학을 주제로 강연하는 게 꿈이에요.” 현재 MBC-TV <컬투의 베란다쇼>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인 그가 방송을 하는 이유다.

‘기생충 감염자가 150만 명, 봄가을로 구충제를 먹는 게 일상화된 나라에서 일반인을 위한 기생충 교양서가 이렇게 없다니…. 아차 싶은 생각에 책을 쓰게 됐어요.”

최근<기생충 열전>이란 책을 펴낸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서민 교수. 지난 1년간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과학’에 연재한 글들을 묶어낸 이 책은 네티즌들로부터 쉽고 재밌다는 평가를 받으며, 과학 칼럼으로는 이례적인 ‘우글우글’한 댓글로도 화제를 모았다. 어느새 기생충도 귀여워지는 묘한 경험을 한다는 네티즌의 고백까지 있을 정도. 일간지 칼럼을 통해 기생충을 통한 사회 풍자를 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그의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국내 50명의 기생충학자 중 유일하게 ‘나대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이 기생충 같은 놈아’란 욕도 알고 보면 외모 지상주의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진담과 농담과 유머를 넘나드는 서민 교수와의 인터뷰는 내내 유쾌하고 새로웠다.

궁금한 것부터 여쭐게요. ‘봄가을마다 구충제를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 하셨는데, 정말 괜찮은가요?
현재 회충 감염률이 0.003%로 극히 낮은 데다 회충이 그리 나쁜 애는 아니거든요. 평생 사람 몸속에서 기껏해야 밥풀 몇 알 먹을 정도죠. 우리나라에서 기생충 박멸 운동이 일어난 건 1964년 한 소녀의 죽음이 발단이 됐어요. 사인은 영양실조였는데도 당시 소녀의 몸에서 회충이 1,063마리가 나와 대대적으로 구충제를 먹기 시작했죠. 당시 사람들에게 회충이 많았던 이유는 회충알은 대변으로 나오는데 그걸 배추밭의 인분 비료로 쓰다 보니 계속 감염되는 구조였거든요. 그러다 인분 비료 사용을 금지하고, 화장실이 점차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회충은 멸종의 길을 걷게 됐지요.

기생충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사실 기생충만큼 편견에 시달리는 것도 없어요. 기성세대들은 채변 봉투로 기생충 검사를 했던 기억이 있고, 젊은 사람들은 기생충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 갖고 혐오하고 두려워하거든요. 어떤 분들은 기생충이 거의 멸종됐는데 연구할 필요가 있냐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로서 그동안 사실을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구나 싶어 부끄러웠습니다. 특히 우리 식습관이 보양식, 회를 잘 먹다 보니 기생충 연구는 더 중요해요. 치명적인 증상을 일으키는 기생충도 있거든요. 가령, 스파르가눔은 주로 뱀을 먹으면 걸리는데 문제는 뱀을 안 먹는 사람도 걸린다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감염되는지 별로 알려진 게 없어요. 또한 우리 국민의 10% 정도가 감염되는 개회충도 마찬가지예요. 소간을 먹으면 걸리는데 조사 자료가 거의 없죠. 연구해야 할 과제들이 하면 할수록 많은 거죠.

그는 기생충을 주인 몰래 세 들어 사는 객식구에 비유한다. 그 옛날, 천적이 널려 있는 들판에서 불안에 떨며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일부 동물들은 “다른 동물 몸에 들어가 살면 어떨까?”란 아이디어를 낸다. 그렇게 동물들에게 들어가 살아가며 일방적인 이득을 보는 생물체를 기생충, 손해를 보는 생물체를 숙주라 하는데, 살아야 할 터전(숙주)을 망가뜨리는 건 기생충 입장에서도 손해여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게 기생충의 기본 생존 전략이다. 따라서 대개 증상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 기생충 같은 놈아! 하며 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에 비유한 것도 잘못됐다. 기생충은 언제나 먹을 만큼만 먹는다.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 대식가의 몸에 있던 회충도 채식주의자의 몸에 있는 회충도 길고 가늘다. 왜? 자기 분수를 지켜서 먹으니까. 기생충은 비열할 수는 있어도 탐욕스럽지는 않다.’-<기생충 열전>중에서

사람들에게 기생충이 비호감인 이유로, 특유의 생김새도 한몫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때론 기생충들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한다. 외모로 인해 힘들었던 자신의 삶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많이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인데 제 얼굴을 거울로 보고 더 악화됐죠.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엎드려 자고 있는데 애들이 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쟤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냐?’ 심지어 길을 가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붙들려 “넌 왜 이렇게 바보같이 생겼냐?”는 말까지 들어봤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한번도 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한 적이 없었어요. 인간쓰레기다, 이 사회에 하나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스무 살 때까지 했던 거 같아요. 정말 앞이 캄캄했죠. 그래서 속죄의 일환으로 항상 헌혈을 했어요.(웃음) 38번 정도.

그런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너무 밝고 재밌으시잖아요.
가만 보니까 재밌는 친구들이 인기가 많더라고요. 그때부터 유머 연습을 했어요. 유머는 원래 자기를 낮추는 데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런 면에서 전 유리했어요. 일단 눈이 작아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니까. 하지만 외모에 안주하면 안 돼요.(웃음) 제가 20년간 죽어라 한 노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날 정도예요. 또 하나는 글쓰기였어요. 대학 입학 후 모토가 ‘외모가 안되니까 글로 일어나자, 웃겨 보자’였거든요. 저는 정말 말하기가 안됐어요. 떨리기도 하고 외모 콤플렉스로 오랫동안 땅바닥만 보고 걸어서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못 봤거든요. 글이 제겐 편했어요. 일간지 칼럼을 쓰면서 좋았던 건 제 글을 남들이 평해준다는 거였는데, 타인에게 인정받은 건 글쓰기가 처음이라 정말 기뻤죠. 돌이켜보면 12년간 서울(집)~천안(학교)까지 왕복 4시간 동안 해마다 100권씩 책 읽은 게 비결이 된 거 같아요.

어찌 보면 기생충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의 ‘글빨’ 덕분이었다. 의대 진학 후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그러다 의대 본과 2학년 때 쓴 기생충 드라마 <킬리만자로의 회충>을 눈여겨본 기생충학과 교수님의 제안으로 그는 기생충학 연구에 발을 디디게 된다. 평소 좋아했던 교수님이 “21세기에는 기생충의 시대가 올 거야” 하며 제안한 점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기생충학 하면 대변 검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이란 점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의학과 달리 연구 위주의 기초과학이라는 점에서 심적 부담이 적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서민 교수에게 기생충이 그랬다. 대개 기생충이 몸 안에 있으면 배가 아프다 등의 증상만 접하다 보니 기생충이 마냥 나쁜 줄로만 알았지만, 막상 접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고. 말라리아와 같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기생충도 있었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기생충들도 있었다.

기생충이 인류 건강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대개 기생충하면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하지만 주혈흡충의 알, 돼지편충처럼 당뇨병이나 알레르기 치료에 사용되는 착한 기생충도 있거든요. 사실 기생충은 우리 면역계와 오랜 기간 공존해왔어요. 근데 기생충 박멸로 인해 면역계로서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해 황당한 상황에 처한 거죠. 이렇듯 알레르기성 비염, 아토피 등 면역계가 다른 외부 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알레르기 질환이라면,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면역계가 미쳐버려서 우리 몸을 공격하는 게 자가면역질환이에요. 근데 이 자가면역질환 치료에 기생충이 도움이 된다는 게 여러 연구들로 증명됐거든요. 잘사는 나라는 알레르기 질환이 많은 반면, 못사는 나라가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주죠.

하지만 연구 대상인 기생충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 선모충의 감염 경로를 찾기 위해 2년간 118마리 남짓한 멧돼지 근육과 씨름하고, 심지어 무덤 근처에서 몇 시간 동안 땅 파는 수고로움도 뒤따른다. 과거 유적에서 기생충을 조사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알아가는 학문을 고(古)기생충학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미라나 유적에서 기생충을 찾는 일도 그가 하는 연구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피로가 싹 풀린다’는 그는 천생 기생충 학자다.

연구를 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을 텐데요, 과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요?
과학자들이 연구 과정이 힘들고, 연구 결과가 잘 안 나오면 조급한 맘에 가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어요. 가령 실험 과정에서 쥐가 죽었으면 좋겠는데 안 죽어, 그래서 몰래 죽이고 나서, 어머 죽었네~ 하고 데이터를 위조하는 거죠. 근데 그게 돈을 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거란 거죠.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니까요. 그래서 과학자에겐 윤리 의식과 최소한의 양심, 누군가의 주춧돌이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의학 발전에 공헌한다는 인류애를 갖추는 게 중요하겠네요.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정답에 가기 위한 동반자인 거죠. 논문에 연구 방법을 쓰는 이유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그 누군가가 더 나은 연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거거든요. 제가 도요새의 장에서 희한한 기생충을 발견한 적이 있었어요. 이게 뭘까 하고 논문을 찾아보는데 브라질의 한 학자가 똑같은 걸 발견한 걸 보고 참 반가웠어요. 그 사람 덕분에 내가 하는 일이 편해지니까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주고 싶어요. 나중에 후세들이 이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쓸 때 제 이름이 심심치 않게 있는 거죠. 진실, 정답을 향해 후대의 과학자들이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것. 그런 게 과학자로서의 뿌듯함 아닐까요.

“앞으로 외부 강의를 많이 하면서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과학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요. 특히 오지나 섬 등 과학 교육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많이 가고 싶어요. 사실 저는 강의는 죽어도 못 할 줄 알았어요. 애들이 강의 평가 때마다 선생님 눈 좀 맞춰주세요, 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지금은 재미와 보람도 느끼고 많이 편안해졌어요. 이게 다 기생충 덕분이죠.(웃음) 사람들이 의미 없는 생명은 없다는 것, 하찮게 보일지라도 다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외모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당당히 대중 앞에 선 과학자 서민 교수. “임상 의사는 눈앞의 환자 한 명을 고치지만, 기생충 연구자는 큰 거 한 방을 노린다”며 활짝 웃는 그는 이제 오직 인류의 건강을 위해 연구할 뿐이다. 수줍음 많고 자신감 없던 그가 매력 만점 교수가 되는 반전이 일어났듯이, 존재감 제로의 기생충 역시 인류의 희망으로 자리하게 될 그날이 곧 오기를 기다리며. “기생충아, 기다려! 서민이 간다.”

서민 교수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저서로는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기생충 열전> 등이 있습니다.

내가 한 작은 약속이 큰 기적을 만들 것 같은 이 가을, 우리들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생을 걸고 지키신 아빠의 약속

구자숙 36세. 직장인. 인천시 부평구 산곡3동

아빠는 아빠의 삶에 대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다. 가끔 내가 우리 아기를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씩 하실 때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뿐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너무 어릴 적의 심한 고생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돼서 평생 맘속에 남아 있어. 너무너무 가난해서 고생 징하게 했지. 나는 엄마한테 아주 많이 맞으며 커서 엄마 품 좋은 줄 모르고 컸지.”

아빠가 해주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추측해 보면 할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돈벌이를 거의 못하신 듯하다. 그래서 첫째인 우리 아빠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하면서 밑에 동생들을 다 거둬야 했나 보다. 아마도 아빠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고 외롭게 컸지 싶다.

그렇게 부모 사랑 모르고 험하게 살아온 아빠였지만 나는 크면서 아빠로부터 험한 말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중3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 모두 몹시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견뎌내야 했을 때조차도 아빠는 우리에게 힘든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예전에는 한두 잔이었던 반주가 소주 반병쯤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한 해에 한 번씩 꼭 도지는 허리 병 때문에 하루쯤 일을 쉬는 날이 아빠가 낮에 등 붙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아빠는 돈벌이가 되든 안되든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절대 빚을 지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만큼만 쓰며 산 셈이다. 당연히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것을 거의 참아가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그로 인한 불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아빠가 왜 그토록 빚을 지지 않으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빠가 빚이 있는 채로 나이가 들면 그건 모두 자식들 몫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으리라.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면 못이 박여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잠든 우리들 등을 쓱쓱 쓸어주셨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묵묵히 키워오셨다.

이제는 나와 두 동생들 모두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다 키운 셈이다. 그런데도 몇 년 전까지도 이삿짐센터에서 자동차를 고치고 사다리차를 운전하고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내가 아빠가 하는 일은 자동차를 고치는 일인데 왜 운전하고 짐 나르는 일까지 다 하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아빠는 이 나이에 돈 받고 일하려면 시키든 시키지 않든 눈에 보이는 일은 다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일을 하다 그만두신 다음에는 당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미뤄왔던 자기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계신다.

한자 공부 삼매경에 빠져 밤낮없이 공부를 하더니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까지 자격증을 얻으셨고,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한자 교실에도 나가시고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으로 한자도 가르치신다. 문화원에서 하는 한시 공부도 즐겁게 하고 계신다. 또 굴삭기 운전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시다. 그리고 아빠가 진짜로 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일이다.

아빠가 그리는 그림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한자를 가르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 엄마 묘가 있는 선산을 굴삭기로 예쁘게 더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요즘 아빠의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인다.

아빠를 보면 늘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삼촌이 어느 날 아침 우리를 낮은 목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지난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한다. 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나는 들어가면 사실이 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삼촌이 끌다시피 해서 들어가니 아빠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 계셨다. 고개 숙인 아빠 모습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우리 셋은 아빠에게 달려갔고 아빠는 우리 셋을 팔로 감싸 안아 등을 쓸어주면서 한마디 한마디 정성 들여 말씀하셨다.

“걱정 마라. 아빠가 엄마 몫까지 할 거니까 아무 걱정 마라.”
아빠는 그 약속을 정말로 자기 인생을 걸고 지키셨다.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빠가 계셔서 나도 있는 거예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카미유와 장)>

100×81cm. 캔버스에 유채. 1875.

워싱턴 국립미술관.

지리산 종주, 천왕봉에서 한 나와의 약속

임경철 47세. 인천시 서구 불로동

8년 전, 내 나이 40세 되던 해 나는 2박 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50여 분을 걸어 노고단에 도착, 하늘에 제를 지내던 노고단 돌무덤에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지리산의 영봉들을 바라보자니 그 산세의 위용과 백두대간의 장엄함이 나를 압도했다.

이제 지리산 정상을 향한 험하고 외로운 25킬로미터의 단독 종주 길이 시작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지난 5년간 힘겨웠던 자영업 생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대학 졸업 후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8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었다. 밖에서는 대우 좋고 연봉 높다고 부러워했지만 내부 조직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이트했고, 매일 반복되는 야근으로 인한 건강 악화, 그리고 힘든 직장 선배를 만나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한 채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경험이 없는 생계형 자영업을 하게 되었다.

근면 성실하면 성공하리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활비조차 빚이 되는 지경이었다. 그 지옥 같았던 5년, 수없는 좌절과 낙심 그리고 적지 않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지친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리산을 종주하게 된 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단한 인생길처럼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을 넘으면서 이미 병들어 버린 내 육신은 더욱더 혹사되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한없이 맑아오는 듯한 느낌은 왜일까?

승승장구하던 직장 생활,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었기에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는 부조리한 세상을 탓하고 나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모두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세상에 독기를 품기도 했었다.

그렇게 지난 힘든 시간들을 되새기며 10킬로미터 정도를 지나자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와버렸던 상황.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이제 남은 절반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무릎에 손수건을 동여매고 산행을 계속했다. 지리산 종주 코스에서 가장 힘들다는 마의 코스를 지나면서부터 나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천왕봉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장터목산장에 이르렀을 때는 결국 해내고 말았다는 감동과 희열을 느꼈다. 장터목산장은 그야말로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 하여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는 다시 천왕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구간은 경사가 가파르고 고산지대라 힘에 겹지만, 그래도 꼭 정상을 밟아보리라, 패배 의식과 나약한 정신을 버리고 성취욕을 느껴보리라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나에게도 허락한 정상, 천왕봉 그리고 일출. 마침내 해가 떠올랐고, 무한 감동이 밀려왔다. 지난 2박 3일간의 고행길이 한순간에 잊혀졌다!

감격의 해돋이를 맞이하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천왕봉 주변 바위에 걸터앉았다. 지리산 천왕봉은 나에게 조그만 것을 빼앗겨도 분해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듯했다. 지리산의 은혜를 입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며 나는 나와의 약속을 하였다.

첫째,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여기 바위나 나무처럼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리라. 둘째, 세상과 부딪쳐 싸워 이기려 하지 말고 낮은 자세로 더불어 살리라. 셋째, 남은 인생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의 강산을 둘러보며 자연의 진리를 배우리라. 넷째, 건강해야 이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으므로 틈틈이 몸 관리를 하리라.

그렇게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반환점을 돌며,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실망하고 좌절했던 마음들을 정리하며 지리산 종주를 갈무리했다. 그 후 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천왕봉에서 한 나와의 약속을 되새기며 크나큰 위로를 삼았다.

앞으로도 그때의 감동과 약속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 다짐해 본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베퇴유의 모네 집 정원> 151.4×121.

캔버스에 유채. 1880.

내셔널 갤러리.

(A. 멜런 브루스 컬렉션), 워싱턴.

그 아이들을 위해 나의 모든 걸 나눌 겁니다

권희재 25세. 대학생. 서울시 강동구 암사2동

2년 전, 군에서 전역하며 들었던 생각은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세상과 부딪쳐보고 싶다는 거였다. 돈 300만 원으로 시작된 목적지 없는 여행. 부모님은 외동아들의 여행을 만류하셨고, 그런 부모님을 뒤로한 채 여행은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을 경유한 끝에 미국 LA에 도착하니 정말 막막하였다. 첫날부터 잘 곳이 없었기에 공항 내 벤치에서 노숙하고, 화장실에서 세안을 했다. 거울에 비춰진 어색한 내 모습을 보며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나가는 차를 운 좋게 얻어 탄 뒤부터, 누군가의 차에 같이 타게 되는 히치하이킹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돈을 최대한 아껴야 했기에 바나나와 빵 그리고 수돗물로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너무나 행복한 미국 횡단 여행은 계속됐다.

여행을 통해 수많은 친구들과 여행자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으며 나는 인류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날 믿어주고 자기 집에서 2주 이상 머물게 해주었던 친구들, 차에 타라고 손짓을 건네던 수많은 자동차들, 그리고 힘들지 않느냐며 손을 건네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그때 받았던 은혜들을 내가 살면서 다 갚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LA에서 보스턴까지의 횡단 여행이 끝날 무렵 문득 ‘아마존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쥐어짜낸 돈으로 남미 여행을 시작하며,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페루 한 시골 마을에서 전문 산악 장비와 준비 없이 안데스 산맥을 오르다 고산병을 얻으며 시작되었다. 빈민굴 같은 호스텔에 머물렀던 나는 그곳을 관리하던 15살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소녀는 고산병에 걸려 끙끙거리고 있는 나를 수녀님처럼 간호해 주었다. 고산병에 좋은 차를 끓여주고, 따뜻한 죽을 만들어주었다.

친해진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층이나 되는 호스텔을 하루 12시간 이상 청소하고 관리한다고 했다. 중노동을 하면서 한 달에 버는 돈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15만원. 소녀는 호스텔과 집까지 약 2시간 거리인데도 버스비가 아까워 걸어 다닌다고 했다. 15살 소녀의 손과 발은 서커스단 코끼리 발처럼 퉁퉁 부었고 온통 상처뿐이었다.

그 소녀를 뒤로한 채 남미 최대 빈민국인 볼리비아로 떠난 나는, 두 번째 가슴 아픈 광경을 만나게 되었다. 거리의 고아들이 서로 뭉쳐 다니며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를 닦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구두를 닦던 고사리 같은 손들은 온통 새까만 구두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일하면 잘 벌어야 700원을 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리 아껴 써도 하루에 3천 원.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나 자신과 약속했다.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을 보호하고,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겠노라고.

지금 생각하면 약 6개월간의 여행은 작은 강에만 살았던 나라는 물고기를 커다란 세상이란 바다에 도전하게 만들어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현재 나는 국제기구에 들어가려 부단한 노력을 하는 한편, 아이들을 도와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대학생들이 무동력으로 여행을 할 때 km당 일정 금액을 후원받아 제3국의 빈민을 도와주는 프로젝트다. 지금은 이 프로젝트를 같이할 기업을 찾고 있는 중이다.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구 반대편 아이들과의 약속이기에 나는 계속 꿋꿋하게 전진할 것이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는 여인> 81.1×60cm.

캔버스에 유채. 1880.

내셔널 갤러리.

(체스터 데일 컬렉션), 워싱턴.

할아버지 할머니, 꼭 올림픽 금메달 걸어드릴게요

김광규 16세. 온양중학교 유도부, 전국소년체전 금메달리스트

아테네올림픽에서 이원희 선수가 금메달 따는 걸 TV로 보고 한눈에 빠졌다. 결승전에서 기술을 딱 해내고 이기고 나서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었다. 바로 유도 체육관으로 찾아갔다. 유도를 하고 싶다고.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배우겠다고 한 마음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나를 키워준 분은 외증조할아버지, 할머니시다. 두 분이 잘해주셔서, 부모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그런 마음뿐이다.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메달을 할아버지, 할머니 목에 걸어드린다. 나는 꼭 열심히 해서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도 걸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중학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도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합숙 훈련을 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새벽 운동을 시작으로 오전에는 수업받고 오후 3시부터 유도를 시작한다. 한 2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나면 바로 밥을 먹고, 1시간 휴식을 갖고, 바로 야간 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첨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운동 너무 힘든데 그만두면 안 돼?” 울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걸 들으신 할아버지는 걱정이 되셔서 바로 나에게로 오신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신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나에게 물으신다.
“광규야, 그럼 너의 꿈이 무엇이니?”

번뜩 정신이 든다. 나의 꿈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금메달을 걸어드리는 것이었지. 그렇게 약속을 했었지. 난 공부도 안 된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유도밖에 없다. 그 약속은 너무나도 힘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유도한다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런 시기가 지나면서 1학년, 2학년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3학년, 나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바로 42회 전국소년체전에서의 금메달. 두려웠다. 소년체전이 두려운 게 아니고 그 과정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는 언제나 힘이 되는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했던 약속이었다. 약속을 생각하면서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소년체전 한 달 전, 수업도 안 들어가고 완전 지옥훈련이다. 경사가 높은 산을 정상까지 올라갔다 몇 분 안에 들어와야 하는 기초 훈련 등 기술이 안 되더라도 될 때까지 하는 게 유도다. 온몸이 안 움직일 정도로,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훈련을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한 단계 발전되었다는 걸 느낀다. 온몸이 아프다,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아 운동을 쉬고 싶다는 생각도 계속 갖게 된다.

하지만 나는 더 노력했다. 하늘은 노력한 자에게 기회를 주는 걸 알기에. 마침내 소년체전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대진표를 본 순간 좌절하였다.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난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힘이 생긴다. 자기 전에 기도를 했다. 1시간가량.
‘하느님 부탁입니다. 꼭 저 내일 좋은 성적 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계속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편하게 들었다. 소년체전 때 나는 결승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정말 힘들게 그렇게 갈망하던 금메달을 땄다. 믿기지도 않는 일이다.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그 결승은 아직도 생생하다. 노력한 자에게 기회가 오는 건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금메달을 걸어드리며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안아주면서 웃으셨다. 그렇게 중학교 목표는 달성했다. 이제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노력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들어도 노력할 거다. 올림픽을 위해서 아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수련>

200×200cm. 캔버스에 유채. 1914.

도쿄 국립미술관.

내가 한 작은 약속이 큰 기적을 만들 것 같은 이 가을, 우리들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펜팔 7년, 얼굴도 보지 않고 했던 결혼 약속

신재숙 50세. 자유기고가, 독일어 통·번역가. 독일 린덴시 거주

“네 남편은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꽤 많은 돈을 포기했었지. 밴쿠버에서 독일행 비행기가 파업을 하는 바람에 항공사에서 하루만 일정을 연기하는 대가로 숙박권과 보상비를 제의했는데도 굳이 그날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우겼단다. 이유는 말도 하지 않고 말야. 밴쿠버에 사는 고모부는 이해를 못 하겠다고 꽤 흥분했었지.”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나온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랬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크고 작은 약속들을 한다. 3년 후에 결혼하자는 약속도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때론 3월의 눈처럼 허무하게 스러진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은 추억의 숲 속에서 별똥벌레처럼 희미한 빛을 낸다.

반면 꿋꿋하게 시간과 공간을 이겨내고 지켜진 약속은 기적을 만드는 열쇠가 된다. 내 삶의 기적은 그의 약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리는 펜팔 친구였다. 알량한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었던 대학 신입생과 독일에서 태어났어도 선비를 연상케 하는 품성을 가진 그는 펜팔 소개소에서 엽서를 통해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과 취업을 겪으며 나의 이십 대 청춘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지쳐가는 동안 그는 내게 편지를 쓸 때 항상 사용하던 녹색 잉크처럼 변함없이 내 곁에 있었다. 전화 요금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아날로그 시절, 사진 몇 장과 손으로 쓴 편지들이 우리가 공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당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 외국인 남편이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하고 함께 출국했지만, 한국에 오기 전 시아버님과의 캐나다 여행으로 연 휴가를 다 써버린 남편은 다시 한국에 나오기가 어려웠고, 우리는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독일로 가 결혼하기로 결정을 하고, 그는 캐나다에서 독일로 돌아가는 대로 결혼식에 필요한 서류들을 알아서 전화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돌아간 첫 월요일에 전화를 하겠다던, 그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시아버님께만 양해를 구하고, 비행기 파업에도 불구하고 바로 귀국한 것이었다. 겨우 하루 늦어질 뿐인 출국 일정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그를 시고모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물론 결혼식도 하지 않고 떠나는 나를 가족과 직장 상사와 친구들이 염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뭘 믿고 그러느냐면서. 하지만 7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어도 좋은 펜팔 친구로서 그가 보여준 신뢰감의 무게는 컸다. 그리고 서른 살부터는 다른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던 내게 그의 청혼은 신의 뜻으로 보였고 나는 그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함께한 지난 22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부부 싸움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약속도 잘 지키는 것이 부부 사이든 친구 사이든 인간관계에 있어 기적을 만들어주는 열쇠라고 믿는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카퓌신 대로>

79.4×60.6cm. 캔버스에 유채. 1873.

넬슨 아트킨즈 갤러리 (K.A. 스펜서와 H.F.

스펜서 재단), 캔자스시티.

6학년 7반 얘들아, 우리 10년 후에 꼭 다시 만나자

김종화 25세.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2002년 2월 14일, 인천승학초등학교의 졸업식. 그중에서도 6학년 7반의 교실에서는 학생들과 선생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모두 학교 운동장에서 모이자.”

14살 당시 10년 후라는 건 막연해 보였다. 24살, 엄청난 어른이 되어 있을 거 같았다. 과연 그날이 올까?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러갔고, 한창 군 생활을 하던 2011년 4월, 그때의 약속을 떠올리며 어렸을 적 적어둔 이메일 주소를 찾아내어 선생님께 메일로 연락을 드렸다. 과연 선생님도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당시 영국 런던에서 꽤 오랫동안 생활을 하고 계셨던 선생님 또한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계셨다~!!! 마침내 2012년 2월이 되었다. 연락되는 몇몇 동창들 또한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부터 반장이었던 나를 비롯, 몇 친구들과 함께 6학년 7반 친구들을 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무려 25명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시도할 수 있었다.

바로 그날, 2월 14일 운동장. 정말 10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엊그제 교실에서 함께 생활했던 그때의 느낌처럼 너무나 편안했다.

우리 반은 유난히 단합이 잘되었던 반이었다. 정말 함께 모인 자리가 꿈만 같았고, 너무도 행복했다.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저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벌어졌다는 둥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이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가끔씩 되새기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친구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으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정말로 신기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너무도 감격스럽다고 말씀하시며 눈물까지 글썽이셨다. 하지만 한편으론 성인이 된 우리가 어색하셨나 보다. 10년 전 꼬맹이 초등학생들이, 어느덧 선생님보다 키가 훌쩍 자랐으니 말이다. 우리가 자란 만큼이나 선생님의 얼굴에도 주름이 조금 생긴 걸 보니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찡해졌다.

그 10년 만의 반창회를 기점으로 우리는 꼭 10년마다 한 번씩 모이자고 다시 한 번 약속을 하였다. 2022년 2월 14일, 34살이 된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초등학교 졸업식을 하던 그때는 까마득했던 그날이 이렇게 빨리 와버렸듯이, 그날도 어느새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약속은 때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 약속은 내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약속을 지켜낸 순간 펼쳐질 우리들의 멋진 미래를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면서 살 것이다.

6학년 7반 친구들, 그리고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여전히 예쁘신 이상미 선생님.
우리의 10년 후 만남을 기약하며…. 너무도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인상, 해돋이> 48×63cm.

캔버스에 유채. 1873.

마르모탕 미술관, 파리.

약속은 연속성이 생명

홍경석 55세. 경비원. 대전시 동구 성남동

오늘도 일어난 시간은 새벽 4시 30분.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오늘 하루를 일하자면 아무리 밥맛이 없더라도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 냉장고를 뒤져 엊저녁 아내가 만들어놓은 된장찌개를 데웠다. 그처럼 혼자서 밥을 먹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일어난 겨?” “응, 당신도 같지 먹지 그랴?”
“아녀, 난 이따 먹을 텨.”

우린 전형적 충청도 사람인지라 사투리 역시도 똑같이 사용한다. 아침을 먹은 뒤 목욕을 시작했다. 향기가 좋은 비누로 전신을 씻어내니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그럴 즈음 스마트폰에 설정해 둔 알람이 다섯 시가 되었다며 마구 울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오늘도 내가 너보다 먼저 일어났구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며, 또한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다소 거창한 비유가 어울리진 않지만 하여간 나의 아침 습관은 늘 이렇다.

이어 다섯 시엔 뉴스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머릿속에 입력한다. 그리곤 다섯 시 반 전에 집을 나서 05시 40분 발차의 첫 시내버스에 오른다. 회사에 도착하면 06시 15~20분이 된다. 내가 출근해야만 비로소 퇴근이 ‘성립되는’ 동료 경비원은 벌써부터 가방을 싸놓고 나의 출현을 쌍수를 들어 반겼다. “야근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퇴근하세요!”

2인 1조로 6명이 일하면서 하루는 주간 근무, 이튿날엔 야간 근무의 업무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게 바로 경비원 직무 매뉴얼이다. 나와 업무 인수인계를 마친 경비원은 자신의 동료, 즉 짝꿍 경비원보다 한 시간 먼저 퇴근한다.

왜냐면 오전 7시 30분까지 출근하여도 되는 것을 나는 늘 그렇게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하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은 야근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7시 40분까지의 출근이건만 이 또한 나는 16시 30분이면 벌써 출근하여 교대를 해주니 말이다.

처음엔 이로 인해 오해도 받고, 말도 많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늘 습관으로 그리 하니까 이젠 나의 조기 출근에 대하여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그럼 왜 나는 1년 이상을 이같이 일찍 출근하는 습관의 소유자가 된 것일까?

30년 가까이 출판과 언론사에서 밥을 먹다가 재작년에 그만두고 경비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건 바로 작년 초부터이다. 비록 이 직종에서의 경험은 전무했지만 이 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다부진 각오로써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였다.

첫째,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한다. 둘째, 누구에게든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한다. 셋째, 책임감을 가지고 주인 의식으로 일한다.

약속이란 연속성이 관건이자 생명이라 생각한다. 내일도 나는 한 시간 이른 행보를 변함없이 계속할 것이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아르장퇴유의 다리> 60×79.7cm.

캔버스에 유채. 1874.

내셔널 갤러리 (폴 멜런 부부 컬렉션), 워싱턴.

우리는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

외출하기 전, 옷장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어만 갑니다. 꽉 찬 옷장을 빤히 보고서도 ‘아, 입을 게 없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요. 그만큼 옷 잘 입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옷은 남에게 보이는 제2의 자아라고 할 만큼 우리의 의식, 바람, 내면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작정 유행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옷장 문을 열고 옷과 대화를 나눠보세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색깔이 어울리는지, 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가끔은 과감한 스타일에 도전하면서 그 마음을 떨쳐버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 시도를 통해 나만의 스타일, 만족한 하루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 편집자 주

옷걸이 총량제와 옷 입기 실험 나에겐 왜 입을 옷이 없을까? 누구나 겪는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론은 내겐 입을 옷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이다.
딱 몇 벌의 옷만 단정히 걸려 있는 가게와 수많은 옷들이 모여 있는 쇼핑센터. 어디서 옷 고르기가 더 쉬울까? 실제로 옷이 적게 걸린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찾을 확률이 더 높다. 옷이 너무 많이 걸려 있으면 오히려 옷 입기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옷 버리기였다.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① 2년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버려라.
② 사이즈가 안 맞는 옷은 과감히 정리하라.
③ 수선이 필요한 옷은 수선하거나 정리하라.

옷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이제는 옷을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옷을 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옷걸이 총량제’다. 일단 가지고 있는 옷을 계절에 상관없이 전부 옷걸이에 건다. 티셔츠 한 장까지도. 전체 옷걸이의 개수를 정해두고 새로운 옷을 사고 싶으면 옷장을 보며 버릴 옷을 고른다. 그다음 옷걸이를 비우고 거기다 새 옷을 거는 것이다. 버릴 만한 옷이 없으면 새 옷도 사지 못하니 이래저래 정리에 도움이 된다. 최근엔 ‘옷 입기 실험’이란 걸 시작했다. 일단 있는 옷들로 매일 다른 코디를 만들어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 실험해 보기로 했다. 규칙은 간단하다.

① 매일 다른 코디로 입을 것.
② 단, 외투, 신발, 가방은 같은 걸 들어도 상관없다.
③ 같은 바지에 윗도리만 바꾼 것도 다른 코디로 인정한다.

과연 몇 가지 조합이 나오게 될까? 의외로 수많은 조합이 등장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옷을 덜 사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 이제는 옷 입기가 예전처럼 힘들지도 않고 가끔은 옷장 앞에 서서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실험을 통해 나는 내 옷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올가을, 새 계절을 맞아 새 옷을 사는 것보다 내 옷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옷 입기가 힘든 우리에겐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봄날 님(블로거)

옷장을 비우면 스타일이 보인다 1.옷장 비우기
나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달해줄 수 있는 옷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즐겨 입고 자신감이 생기 는 옷을 제외 한 나머지들은 모두 버려야 한다. 우선 4개의 박스를 만들어 분류해 보자.
① 애착이 가는 옷 박스: 가슴이 설레고 행복해지는 옷.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넣는다.
② 수선 옷 박스: 수선을 미뤘던 옷을 담아 5일 안에 반드시 수선한다.
③ 폐기 옷 박스: 보풀이 일거나 손상된 옷, 입기에 곤란한 옷을 넣는다.
④ 기부 옷 박스: 몸에 안 맞는 옷, 맞지만 핏이 만족스럽지 않은 옷, 다이어트를 위해 산 작은 옷, 입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면서 입지 않게 되는 옷들도 넣는다. 너무 비싸 버리기에는 자책감이 드는 옷도 넣는다. 그런 옷은 바라볼 때마다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더 괴로울 것이다. 행복한 추억이 서린 옷, 어릴 적 꿈이 담긴 옷도 넣는다. 행복했던 순간들과 감격은 옷이 없어진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2.옷장에 남은 옷 분석하기
옷장에 남아 있는 옷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찾아보자. 회색 계열인가? 실루엣에 공통점 이 있는가? 헐렁한 옷들로 가득하다면 아마 살찐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입 당시의 심리를 떠올리며 옷장에 걸린 옷을 하나씩 살펴보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버린 것은 언제였는지, 언제부터 결점을 감추려고 짙은 색 옷만 샀는지 옷을 통해 내면의 감정 변화를 파악해 보자. 과거를 대면하면서 억눌렸던 미련, 후회, 절망감과 맞닥 뜨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감정을 발산함으로써 스타일 변화는 물론 긍정적인 삶의 변화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

3.내 몸에 대한 자신감을 갖자
미디어에서 보이는 날씬한 이미지가 성형 수술과 포토샵으로 가공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미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맞추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자신을 가치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막상 쇼핑을 하러 가도, 아무리 예쁜 옷도 잘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중 매체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와 자신을 분리시키자. 그리고 ‘이런 옷은 내게 안 어울려, 난 못생겼고, 내게 어울리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버리자. 이런 감정을 이기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정말 어울리는 옷과 안 어울리는 옷을 구분할 수 있다.

참조 도서 <옷장 심리학>(제니퍼 바움가르트너 | 명진출판)과
<팀 건의 우먼 스타일북(팀 건, 케이트 몰로니 | 웅진리빙하우스)

세계적인 패션컨설턴트 팀 건이 제안하는
옷장 속 기본 아이템 10가지

제대로 된 기본 아이템만 있어도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어서 옷 가짓수가 더 풍성하게 느껴진다. 기본 아이템은 한 번 살 때 몸에 잘 맞고 제대로 된 것으로 장만하는 것이, 오래 입을 수 있어 결과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이다.
1 트렌치코트 2 운동복 스타일의 캐주얼 3 기본 검은 드레스 4 잘 맞는 전천후 재킷
5 캐주얼 원피스 6 정장 바지 7 청바지 8 스커트 9 흰 셔츠 10 캐시미어 스웨터

정리된 옷은 기부하는 센스 ● 스토리스토어 옷을 기부받아서 판매한 수익금으로 절단장애 아동에게 기능성 의류를 지원한다. www.storystore.or.kr
● 열린옷장 자주 입지 않는 정장을 기부받아 청년 구직자에게 저렴하게 대여해준다. 서울 시민이라면, 홈페이지에서 옷장 정리를 신청하면 전문가가 방문하여 옷장을 정리해주고, 옷도 기증할 수 있는 ‘서울시민 열린옷장’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www.theopencloset.net
● 옷캔 헌옷을 기부받아 재활용하고, 수익금으로 제3세계 빈곤층 아이들의 교육 활동을 지원한다. www.otcan.org

곧은 자세가 패션을 돋보이게 한다 매력적인 스타일을 살려주는 것은 명품이 아니라 곧은 자세이다. 특히 프랑스 여성들은 화려하거나 좋은 옷을 입지 않아도 도도해 보이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데, 전체적으로 곧은 자세가 주는 느낌 때문이다. 엉덩이를 바싹 당기고 배꼽을 척추 쪽으로 끌어당겨보자. 이런 상태로 골반을 조이면 배도 쏙 들어가고 날씬해지고 키가 커 보이며 허리에도 힘이 생긴다.

만화가 천계영의 리얼 변신 프로젝트 <드레스 코드> 나에게 패션이란, 갤러리의 그림처럼 멀리서 바라만보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레스 코드>를 준비하면서 깨달 았어요. 패션이란 멋진 화보 속의 의상도, 9등신의 모델이나 패셔니스타의 전유물도,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아닌 바로 나의 일상이라는 사실을요. 저는 ‘패션은 마음이다’라는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서 출발했어요. 옷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걸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패션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하지만 옷으로 마음을 드러내려면 우선 옷을 입는 기술이 필요하겠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은 ‘옷을 입음으로써 내 몸을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패셔니스타의 스타일을 무작정 따라 하기 전에, 우선 내 몸을 중심에 딱! 놓고, 어떤 옷들이 어울리는지 그 원리를 근본적으로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드레스 코드>가 목표하는 옷 입기 기술의 출발입니다.
세상 어떤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최선의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스타일리스 트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을 모델로 옷을 입혀보는 것이지요.
저 또한 매번 맞닥뜨리는 새로운 상황들 앞에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난처해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발전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느덧 자료 조사를 시작한 때로부터 7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때와 지금 저의 가장 달라진 모습은? 물론 옷차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제 삶의 경험치입니다. 옷을 잘 입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일은 아닐까요?
천계영, 만화가 <드레스 코드>(예담) 중에서

감정 폭풍에서 벗어나기

월간 마음수련 5년째 막내 문진정 기자입니다. 이번 달에 저는 갑작스런 우울, 화와 짜증으로 감정 기복 심한 26년을 살았다는 그녀를 만났습니다. 혹시 인터뷰 중에 버럭 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찾아간 카페에서 그녀는 의외의 해맑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해주었습니다. 지난겨울 대학생캠프를 통해 마음수련을 시작한 후 이제는 ‘별일 없이’ 살게 되었다는 그녀와의 짧고 담백한 토크입니다. – 편집자 주

● 요즘 어떻게 지내나?  

취업 준비 중이다. 한창 공채 기간이라 지금도 원서 쓰다 나왔다.

● 바쁘겠다. 근데 의외로(?) 인상이 정말 좋다.

많이 좋아진 거다. 예전에는 만날 울상이었다. 가만 있으면 화났냐는 소리 들었는데, 마음수련하고 말이 터지면서(^^) 얼굴이 밝아졌다. 친구들이 나보고 비포 & 애프터 사진 꼭 찍어야 한다고 한다.ㅋㅋ

● 예전에는 어느 정도였기에?  

우울하고 짜증이 많았다. 잘 놀다가도 갑자기 어둠의 기운이 드리운다. 심할 때는 며칠씩 우울하다가 또 멀쩡해진다. 특히 미래에 대한 걱정이 항상 있었다. 친구들끼리 “나중에 뭐 할 거냐” “지금 뭐 하는 거라도 있어?” 이런 식으로 얘기가 흘러가다 보면 친구들은 미래가 창창한데, 나는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 아무것도 못 하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나? 요즘 친구들은 뭐 하고 싶은지 몰라서 고민이라던데. 

맞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서 많이 고민했다. 방송 쪽이나 복지학과도 생각했는데 부모님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셨다. 그뿐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마다 지적을 하셨다. 학과도 아빠가 정해줘서 다녔는데 4년 내내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만 사니까 ‘나는 왜 사는가’ 싶고 부모님 앞에서조차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니, 나는 살 필요가 없다, 이런 식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식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 부모님이야 다 자식 잘되라고 그러시는 건데 그것도 이해 못 했나. 

기자님 지금 남 얘기라고 막말하시는 거?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잘되라는 뜻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원망스러웠다. 부모님은 성공할 자신이 없을 바에야 평균을 따라가라고 하셨다. 내가 실력을 갖췄으면 자신 있게 내 꿈을 주장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내세울 게 없으니까. 아빠 엄마와 진로 문제로 많이 부딪쳤는데 소리 지르고 화내고 때리시려고 하면 정말 겁이 많이 났다. 그렇다고 내가 숙이고 들어가기만 한 건 아니고(^^;) 같이 목소리 높여서 싸우니까 상황이 더 안 좋은 쪽으로 갔다. 이게 다 부모님 때문이라고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했다. 그러면 화를 내시다가도 “그래 이렇게 키워서 진짜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시니까 엄청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막상 다음 날이면 그 마음이 안 되더라. 또 원망이었다.

● 그러다 보니 감정 기복이 심해진 거군.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끝까지 내 성격은 괜찮은데 남이 나를 이해 못 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친구들이 이해해주고 받아주기만 은근히 바랐다. 그러다가 4학년 때 나한테도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한답시고 표정 관리도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다들 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스님들 책도 읽고. 읽을 때는 나도 잘할 수 있겠다, 하다가 얼마 못 갔다. 결국 내 문제니까 내가 해결을 해야 되는데 방법이 없어 많이 고민했다. 심리 상담도 알아봤는데 비용이 많이 비싸더라.(웃음) 그러다가 학교에서 마음수련 대학생캠프 포스터를 봤다. 일주일 동안 나도 편하게 쉬다 오자. 어디 힐링이란 것 좀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다.

● 그래서 감정 기복의 근본 원인을 찾았나?

내 삶을 돌아보면서 열등감이 많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 때 남자애들이 외모를 가지고 심한 장난을 쳤다. 하루는 학급 사진 내 얼굴 위에 압정을 꽂았다! 엄청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진짜 못난 애구나,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한 거 같다.

● 이궁, 초딩 때 그런 애들 꼭 있다. 암튼 한번 열등감이 생기면 계속 그런 식으로 생각되기는 할 거다.  

남이 별생각 없이 던지는 말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눈치도 보고. 열등감이 있으니까 화를 더 낸다. 상처 안 받으려고 자존심이 세진다. 표정도 더 차갑게 된다. 부모님께도 상처 주고 못할 말 했던 것도 다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마음을 버리며 제3자 입장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다 보니까 내 행동들이 부끄럽고 반성도 많이 됐다. 열등감, 자존심을 버릴수록 편해졌다. 빨리 없애서 더 이상 이런 데 얽매여서 힘들어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죽을 마당에는 뭐라도 다 해봐야겠다는 의지로 마구 버렸다. 어느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과거를 떨쳐버리니까 홀가분했다. 어떻게 살아야 되나, 취직은 어쩌지, 그런 걱정도 버리고 보니까 현실에는 없는 거였다. 이게 뭔 소린지 버려 보면 다 안다.ㅋㅋ 누가 못났고 잘났고 상처받고 신경 쓸 일이 하나도 없고 너무 자유롭다. 내가 없으면 나와 남을 비교하고 구분하는 마음도 없지 않나. 나를 보호하고 지킬 필요도 없고, 모두가 하나이니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 오~ 굉장히 고차원이다. 고로 지금은 부모님 입장도 이해가 된다는 뜻? 

예전에는 부모님 행동만 봤다면 지금은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그동안 엄마 아빠만 무조건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까 다 제가 잘못했더라’고 했더니,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다. 이제 스스럼없이 얘기도 하고 부모님과 나와의 의견 차이도 많이 좁혀졌다.

● 좀 이해는 안 되지만 요즘엔 오히려 우울한 감정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더라. 

그거는 솔직히 관심을 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중독이라고 해야 되나? 다 의미 없는 감정 소모다. 자기 속에 쌓아두고 곱씹으면서 힘들어할 게 아니고 훌훌 털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했으면 좋겠다.

● 마무리로 멋진 말 한마디 부탁~ 

옛날부터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사람들이 엄청 부러웠다. 부러워만 했는데 마음속 감정들을 다 털어내니까 나도 그렇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감정 기복’에 감사한다. 뼛속 깊이 긍정적이 되면 힘들었던 과거도 긍정적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뜻이다. 흠~ 나 좀 멋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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