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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는 대학, 시골 어르신들의 푸근한 인생 강좌

취재 문진정

2011년 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후 평균 연령이 높아진 강화도 온수리에 20대의 용감한 자매가 발을 디뎠다. ‘OO은 대학’ 프로젝트의 하나로 강화 ‘온수리대학’을 만든 우민정, 우민희 자매다. ‘답 없는 고민들만 가득한 도시의 청년들이여, 농촌 마을을 돌아보면서 한 템포 쉬어가자’는 취지로 시작한 강화 온수리대학에는 현재 우민희, 신일진, 조성현, 세 명의 술래(‘OO은 대학’에 참여하는 청년들을 부르는 호칭)가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 무작정 들어가 지역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공통 관심사를 찾기 힘든 어르신들을 일일이 만나 대화를 이어가야 했고, 혹여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닌지 곱지 않은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할머니들 옆에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면서 마음의 벽을 낮추어갔다.

우리나라 변천사가 인생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순무 김치 할머니, 100년 전통 막걸리 만드는 법을 전수해주신 양조장 아저씨, ‘유행은 돌고 돈다’는 철학으로 강화도에 3명의 미용사를 키워내신 은하미장원 할머니 등 훌륭한 교수님들도 발굴했다. 그리고 이제 말투는 조금 투박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듯한 어르신들의 진짜 속마음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청년들은 ‘마을출장대학’을 통해 이곳에서 배움을 얻어가고, 어르신들은 자신의 인생 노하우를 가르쳐주며 기쁨을 나누는 대학. 한 걸음 느리게 서로에게 귀 기울여줄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강화는 대학’의 베이스캠프인 ‘모두의 별장’. 소셜펀딩을 통해 마련한 보증금으로 지난 6월 문을 열었다. 11월의 마을 축제, 청소년 방학 캠프 등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술래 유자(신일진) 이야기
처음에는 이렇게 조용한 시골에서 무슨 재미로 지낼까 했는데 어르신들의 오랜 지혜를 배우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순무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저희는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드리기도 하고요. ‘이 나이에 무슨 교수냐’ 쑥스러워하시다가도 저희가 만든 교수 위촉장을 받으실 때는 경건함, 기대와 설렘, 뿌듯함이 다 느껴져요. 그래서 더 보람이 느껴지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술래 하루(우민희) 이야기

도시의 삶은 늘 바쁘고 복잡했던 것 같아요. 지하철 환승은 너무 어렵고 마트 계산대에서는 다음 손님 때문에 쫓겨나고요. 그러다가 여기 강화도에 왔는데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도 모두가 여유롭게 볼 수 있는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이런 소통 방식, 서로 들어주고 지켜봐줄 수 있는 시간들을 많은 청년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제 죽을 텐데 내가 뭘 해’ 하시는 할머니들이 계세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참 속상하죠. 그런 어르신들과 작은 것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서 더 다가가려고 해요. 3년째 되니까 이제 어르신들도 청년들 온다고 ‘사탕 하나 사놔야겠네’ 하세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서로 다가가고 믿음을 쌓아나가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강화도 온수리 양조장에 학생들이 만든
간판이 걸렸다.
‘강화는 대학’ 교수님들이 청춘에게 고함
모이세 붕어빵집의 김형섭 교수님
인내심을 갖고 하는 것이 붕어빵 맛의 비결이다. 나는 항상 손님들에게 얘기를 듣고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여러분들도 무슨 일을 선택하든 꾸준히 끝까지 끌고나가다 보면 걱정할 게 없다.
귀금속점 광명당의 유환규 교수님
청춘이여! 노력에는 나이가 없다. 내가 중학교도 중퇴한 사람이지만 세상 속에서 살면서 공부했기에 알파벳도 한자도 알고 외국 간판도 신문도 볼 줄 안다. 모든 건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 돈이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우리들의 노바이처

“왜 그렇게 울었어요? 그깟 놈 보내기가 그렇게 서러웠어요?”
두 번째 수술(전절제) 후 첫 회진 때 오셔서 하신 노동영 박사님의 첫 말씀이었다.
수술 결과가 어땠는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이 난다.

긴장되고 아마득한 상황에서도 박사님의 ‘툭’ 던지는 한마디는 긍정의 힘이 되어 잔뜩 웅크렸던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대한민국 최고 명의답지 않은 소탈함과 친근함에 두려움은 어느덧 절반이 된다. 대부분의 환자가 여성이라는 특성도 있겠지만 몇 백 명의 여성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게 우리와 한마음이 되어 잘 어울리신다.

어느 해인가 워터파크가 있는 리조트로 수련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곳 풀장에서 유일한 청일점이었던 박사님이 하얀 가운 대신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환자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느꼈었다. 환우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시간을 쪼개어 함께하시는 박사님, 우리 또한 박사님이 떴다 하면 구름처럼 모여든다.

등산, 야유회, 수련회, 트레킹…. 오죽하면 노교주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환자에 대한 배려는 수술실 안에서도 나타난다. 서울대 의대 오케스트라 지도 교수이기도 한 박사님은 공포에 떠는 환자를 위해 수술실에서도 은은한 음악을 틀어놓고 특유의 부드럽고 개구진 미소로 맞이하신다.

암 병원장이기도 하신 박사님은 한국유방건강재단 상임이사장이기도 하고 한국유방건강재단 설립 초기인 2000년부터 이사로서 아모레퍼시픽과 함께 국내 핑크리본캠페인을 해왔으며, 유방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유방암 조기 검진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고 계신다.
학술적으로는 유방암 수술 방법인 감시림프절 생검술의 장기적 안전성을 세계 최초로 입증하는 등 국내 유방암 연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끌어왔으며 2011년에는 분쉬의학상, 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학회에 따르면 유방암의 맞춤 진단 및 치료를 위한 7건의 바이오마커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와 관련한 논문 170여 편을 국제학술잡지에 게재했다고 한다.

외과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분쉬상 수상 소감에서 박사님은 “환자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더 많은 환자의 완치를 위해 계속 연구하고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언제 어디서나 환자가 우선이고 환자만이 박사님 가슴 안에 있는 것 같은 대목이다.
당신의 인생도 리셋을 할 때가 되었다며 함께하셨던 장장 13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5천 미터 정상을 300미터 남기고 고산병으로 하산해야 했던 박사님.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면서도 죽네, 사네, 울고, 불고하던 그녀들이 당신 걸음을 앞질러 정신력과 체력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씩씩하게 설산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셨다.

그 많은 환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 알아보시는 세심함, 어마어마한 진단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설명해주시는 자상함, 환우회 모임 때는 항상 드레스 코드를 핑크로 하시는 패션 센스, 체력을 길러야 많은 환자를 돌보신다며 스스로의 관리에도 철저하신 강인함을 지니신 분. 유방암이 아니었으면 못 만났을 큰 분을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져가신 만큼 주는가 보다. 이런 분을 내게 보내주셨으니 말이다.

지난 5월에 홍콩유방암협회와 한인여성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드레곤스백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박사님의 수술로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된 서혜경씨도 함께했는데 어찌나 박사님에 대한 사랑이 큰지 1,500석 홀에서 박사님만을 위한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고, 트레킹하는 환우들을 산 중턱에 모아놓고 스승의 노래를 즉석 개사하여 연습을 시켜서 박사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었다. 마지막 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 영원하리~ 노~바이처~~’
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노동영 박사이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분께 내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나누어 드리고 싶다.

김지윤 54세. 여행치유가. 인천시 서구 가정동

‘고고씽 킬리만자로~!!!’
내년에는 꼭 킬리만자로에 함께 가자는, 김지윤 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노동영 박사님께 난 화분을 보내드렸습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 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파는 화분만 화분이 아니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시장에 나가 보면 화초보다 화분 값이 훨씬 비싸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안에 화분으로 쓸 만한 물건이 아주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요즘 대세인 다육식물의 경우 해물탕을 먹은 후에 남은 소라 껍데기나 굴 껍데기에 흙을 채우고 작은 다육식물을 심으면 흔히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답니다. 달걀 껍데기도 좋아요. 외국 인테리어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이템은 보기에도 재밌지만 달걀 안의 얇은 막이 영양제 구실을 해서 식물이 좋아하지요.

또한 아이가 어릴 때 신다가 작아진 고무장화나 장난감을 화분으로 만들어주면, 매일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아이 마음에는 정서의 안정과 함께 자연의 신비도 자란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화분 재료는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가서 쓰지 못하게 된 사기그릇일 거예요.

그런 사기그릇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만들어 보세요. 평범한 그릇의 깜짝 변신,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신기함과 즐거움은 내 몸속의 엔도르핀을 퐁퐁 샘솟게 해줍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얼룩덜룩해지고 찌그러진 주전자도 개성 넘치는 화분이 될 수 있고, 녹슨 깡통은 그야말로 빈티지한 멋이 철철 흘러넘치는 멋진 화분으로 부활하지요.

이런 물건들을 어떻게 화분으로 만드느냐고요? 물구멍만 만들어주면 되기 때문에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요. 못과 망치, 또는 송곳을 이용해 물건의 밑바닥에 작은 구멍만 뚫어주면 된답니다. 우리 주변 흔한 물건들의 화분으로의 재탄생! 돈 주고 산 것보다 훨씬 멋지고 매력적인 화분 만들기 이후 저의 가드닝이 백배는 더 재밌어졌답니다. 자,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화분을 만들어볼까요?

스위스 감자전

요즘 예능 프로그램 중 연예인들이 나와 자신만의 야식을 직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영향인지 야식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지는 듯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라면처럼 만들어진 제품에 다른 것을 섞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야식이라고 꼭 간단해야 하나! 저녁 겸 야식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면 조금은 복잡해도 만들고 먹는 보람이 있다. 스위스 감자전은 여행길에서 만난 스위스의 전통 음식인 로스티를 따라 만들어 본 메뉴이다. 어느 집에나 있는 감자로 푸짐하게 만들어 보면 좋을 듯하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재료

감자 2개,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베이컨(햄으로 대체 가능) 2줄, 달걀 1개

1 감자 2개는 껍질을 벗겨 가늘게 채 썰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한다.

2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감자 채를 넣어 익힌다.

3 다른 팬에 베이컨 2줄을 굽고 달걀 1개는 프라이한다.

4 감자전 위에 달걀과 베이컨을 얹는다.

레이저 캡 Laser Cap

이름은?  레이저 캡(Laser Cap). 레이저(Laser)와 뚜껑(Cap)의 합성어로 줄이 없는 백지에서도 정확하고 반듯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뚜껑에서 레이저 가이드선이 나오는 볼펜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여자 친구와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바로 이거다! 하고 우연히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산업디자인과를 전공 중인 나와 여자 친구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 엉뚱한 생각을 잘해 서로 아이디어 공유를 많이 하는 편이다.

제품의 원리는?  줄이 없는 백지에 글을 쓸 때 종이에 레이저 캡을 끼워서 사용하면 된다.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레이저 부분이 상하로 움직이며,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글의 레이아웃에 맞게 높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레이저가 나오는 부분의 버튼으로 글자 크기에 맞게 레이저 가이드선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어느 부분에서 레이저 가이드선이 나와야 할지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자 어려웠던 점이다. 처음에는 레이저가 나오는 구조를 연필 그립에 적용시켜 보았는데 쓰기에 불편해 포기하고, 결국 볼펜 뚜껑에 적용시켰다. 이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는 많은 노력들이 숨어 있다. 직접 제품을 사서 써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물어보고 수용하고,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변의 반응은?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하고 재밌어했다. 다들 한 번씩은 겪어본 문제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현재 레이저 키보드(레이저로 나오는 키보드)가 개발된 것을 보았을 때, 충분히 현재 기술로 상용화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은?  산업디자인과 전공이라 해서 그 분야만 전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 환경,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발휘하는 유능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리고 항상 응원해주는 부모님과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나의 목표인 ‘디자인의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을 디자인해 나갈 것이다.

만든 사람

허진원, 김다솜, 손창만

동서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재학 중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를 일컫는 말이다. ‘주변의 의견은 모으되, 결정은 내가 한다.’ 가지런하게 써내려간 일본어 위로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다.<엔딩 노트9>.

스나다 도모아키는 정년 퇴임과 동시에 건강 검진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스나다씨는 담담한 마음으로 꼼꼼하게 엔딩 노트를 준비한다. 그리고 영화는 스나다씨의 일상과 생각을 근접한 위치에서 담아낸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기꺼이 손주들의 머슴 노릇하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등. 스나다씨의 버킷리스트는 가벼운 듯 가볍지 않다. 삶을 살아오며 행하지 않았던, 혹은 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완성해가며 스나다씨는 새로운 인생의 맛을 경험한다.

장례식장 사전 답사를 가고 초대장을 준비하며 꼼꼼하게 점검한다. “내가 호스트인 행사인데, 초청 명단 관리도 잘해야지”라고 말하는 행사는 사실 본인의 장례식이다. 아이러니함에 웃음이 날 만도 하지만 엔딩 노트가 완성되어 갈수록 관객 또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스나다씨는 ‘잘, 죽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사람은 왜 죽을까?’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그때, 스나다씨의 어린 손주가 답을 말해준다. 설핏 웃음이 나는 순진한 대답이지만 꽤나 명쾌한 대답이다.

이제 마지막을 맞이하며 스나다씨의 상태는 급격하게 악화된다. 부인과의 대화를 담은 장면이 스크린에 비춰질 땐 극장이 엄숙해지기까지 한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버킷 한편에 담아두었던 작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엔딩 노트가 판매되고 있다. 법적 효력을 지니는 문서는 아니지만 사후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병이 들었을 때 조치를 바라는지 여부, 장의 절차와 상속,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통장의 자동이체 목록 등.

‘죽어감’을 생각하며 작성하는 엔딩 노트는 삶을 돌아보는 계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내가 없음으로 인해 생길 일들에 대한 민폐를 줄이는 일, 이 얼마나 배려 있는 삶인가! 아니, 죽음인가! <엔딩 노트>에는 두 가지 매력이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스나다씨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레이션이 흐르는데, 이는 사실 영화의 감독이자 스나다씨의 막내딸인 마미 스나다의 목소리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아빠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레이션. 어색할 법도 하지만 죽음을 공포의 시각이 아닌 받아들임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기에 영화의 맛이 달라진다. 어느새 관객도 스나다씨의 가족과 함께 스나다씨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매력은 스나다씨 본인의 유쾌함이다. 분명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자락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나다씨는 유머러스한 모습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소탈하게 웃는 스나다씨의 모습에서 관객이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살아감’과 ‘죽어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빠의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담아갔던 감독조차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던 하나레 구미의 ‘천국님’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할아버진 보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셨지
마음의 보물은 돌아보면 항상 그곳에 있다고
있어요, 있어요. 거기에 있어요. 항상 거기에 있어요

항상 거기에 있었던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과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엔딩 노트를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조유림



기찻길에서 자전거 타요, 레일바이크

글 & 사진 김홍수 여행작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 저자

레일바이크는 유럽의 산악 관광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철도(Rail)와 자전거(Bike)를 합친 말입니다. 기찻길에서 자전거를 타듯이 페달을 돌려서 레일바이크를 움직이는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신나는 체험이지요. 이번에는 대표적인 레일바이크 몇 군데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 정선 레일바이크
절리역을 출발, 아오라지역에 도착합니다. 7.2km나 되는 전국에서 가장 긴 코스로 4인용의 경우 아직 어린아이들은 페달을 밟을 수 없으므로 양쪽에서 부모님이 열심히 밟아야 합니다. 조금 힘은 들지만 주변 풍경이 워낙 좋아 힘든 줄 모릅니다. 레일바이크는 설명할 수 없는 묘미가 있어요. 무엇보다도 레일을 따라 송천이 흐르고 단풍 지는 나무들과 밭에 무럭무럭 커가는 무, 배추들. 아이들에게 자연을 만끽하게 해줄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지요. 아오라지역에서 다시 구절리역으로 돌아갈 때는 풍경열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 체험까지 할 수 있어 아이들에게 더 큰 추억을 안겨줍니다.

TIP  매달 1일 0시에 그다음 달의 레일바이크, 기차펜션, 캡슐하우스 예약이 가능합니다.

■ 문경 레일바이크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때 호남 지방이나 경상도 남쪽 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했던 유명한 길이지요. 하지만 요즘 문경에는 문경새재보다 더 유명해진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문경 레일바이크입니다. 레일바이크라는 것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한 이곳은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철로를 따라 총 4km 길이를 왕복하는데 철로 옆 강바람과 산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TIP  문경관광사격장 이용자 등에게 요금이 30% 할인됩니다.

■ 삼척 해양레일바이크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바닷가의 해안을 따라 운행되는 레일바이크입니다. 5.4km의 거리를 복선으로 운행합니다. 다른 곳과 달리 지붕까지 있어 비가 오거나 추울 때는 비닐로 덮개까지 씌어줍니다. 문경, 정선 등과 마찬가지로 과거 광물을 수송하던 철로를 재사용하여 만든 레일바이크이지만, 바다를 끼고 달리기에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바다를 따라가다 보면 2개의 터널을 통과하는데 각 터널에는 다양한 빛 예술품이 전시돼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궁촌 파도역과 용화 조개역에서 출발해, 편도로 운행되는 것이라 종착지에 내리면 버스를 타고 다시 출발지로 와야 합니다.

TIP  인터넷 예약 필수. 궁촌에서 출발하는 것을 예약하고 용화에서 궁촌으로 돌아올 때는
셔틀을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이외에도 규모는 작지만, 수도권에서 즐길 수 있는 양평 레일바이크, 곡성, 여수, 대천 등에서 운행되는 레일바이크도 있답니다. 깊어가는 가을, 신나게 달리는 레일바이크. 아이와 함께 온몸으로 이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행복해집니다.


그리 높지 않은 하늘에서 바라본 우리 땅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사진 & 글 신병문

평생의 꿈이 항공사진 촬영이었다. 그것은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헬기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서 다른 방법을 찾던 중 우연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모터패러글라이딩을 보고 난 후 그 꿈에 다가갈 수 있었다. 비행 훈련을 받은 후 2011년 가을, 드디어 평생 꿈이었던 항공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 경남 사천시 가을 다랑논

↑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단풍

모터패러글라이더를 타고 찍은 사진들은 헬기나 비행기와 달리 그리 높지 않다. 때문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풍경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때론 황토밭을 일구는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자연이 펼치는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산하 등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전혀 다른 풍광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 희열과 감동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다.

↓전남 고흥군 김 양식장

하지만, 항공사진 촬영은 하루하루가 자기와의 싸움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바람을 체크하며 길을 나서고, 현장에 도착해서 비행 준비를 하는 데만 30분이 족히 걸린다. 막상 비행을 시작했는데 거대한 구름을 만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이 헤맬 때도 있다. 이륙 또한 중요하다. 바로 이륙을 성공하면 괜찮지만, 두서너 번 실패할 때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매 순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이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초보 비행가로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100회가 넘는 비행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사진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이 땅의 모습, 이 순간을 그렇게 담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날고 또 날았다.

사진가 신병문님은 1971년 경남 창녕 출생으로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우리 땅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진 작업을 해오다가, 최근에는 ‘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란 주제로 하늘과 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 비행 장비를 타고 하늘에서 찍은 우리 땅 풍경을 통해 이 땅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소명 의식을 갖고 작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5년간의 국토대장정 사진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저서로는 <비상-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몸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기생충.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기생충 하면 떠오른 건 징그럽다 , 해롭다, 나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수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딱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며 기생충 변호에 나선 이가 있다. 20년간 기생충을 연구해 온 단국대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서민(47) 교수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인지도를 높여서 많은 청소년들한테 과학을 주제로 강연하는 게 꿈이에요.” 현재 MBC-TV <컬투의 베란다쇼>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인 그가 방송을 하는 이유다.

‘기생충 감염자가 150만 명, 봄가을로 구충제를 먹는 게 일상화된 나라에서 일반인을 위한 기생충 교양서가 이렇게 없다니…. 아차 싶은 생각에 책을 쓰게 됐어요.”

최근<기생충 열전>이란 책을 펴낸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서민 교수. 지난 1년간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과학’에 연재한 글들을 묶어낸 이 책은 네티즌들로부터 쉽고 재밌다는 평가를 받으며, 과학 칼럼으로는 이례적인 ‘우글우글’한 댓글로도 화제를 모았다. 어느새 기생충도 귀여워지는 묘한 경험을 한다는 네티즌의 고백까지 있을 정도. 일간지 칼럼을 통해 기생충을 통한 사회 풍자를 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그의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국내 50명의 기생충학자 중 유일하게 ‘나대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이 기생충 같은 놈아’란 욕도 알고 보면 외모 지상주의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진담과 농담과 유머를 넘나드는 서민 교수와의 인터뷰는 내내 유쾌하고 새로웠다.

궁금한 것부터 여쭐게요. ‘봄가을마다 구충제를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 하셨는데, 정말 괜찮은가요?
현재 회충 감염률이 0.003%로 극히 낮은 데다 회충이 그리 나쁜 애는 아니거든요. 평생 사람 몸속에서 기껏해야 밥풀 몇 알 먹을 정도죠. 우리나라에서 기생충 박멸 운동이 일어난 건 1964년 한 소녀의 죽음이 발단이 됐어요. 사인은 영양실조였는데도 당시 소녀의 몸에서 회충이 1,063마리가 나와 대대적으로 구충제를 먹기 시작했죠. 당시 사람들에게 회충이 많았던 이유는 회충알은 대변으로 나오는데 그걸 배추밭의 인분 비료로 쓰다 보니 계속 감염되는 구조였거든요. 그러다 인분 비료 사용을 금지하고, 화장실이 점차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회충은 멸종의 길을 걷게 됐지요.

기생충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사실 기생충만큼 편견에 시달리는 것도 없어요. 기성세대들은 채변 봉투로 기생충 검사를 했던 기억이 있고, 젊은 사람들은 기생충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 갖고 혐오하고 두려워하거든요. 어떤 분들은 기생충이 거의 멸종됐는데 연구할 필요가 있냐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로서 그동안 사실을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구나 싶어 부끄러웠습니다. 특히 우리 식습관이 보양식, 회를 잘 먹다 보니 기생충 연구는 더 중요해요. 치명적인 증상을 일으키는 기생충도 있거든요. 가령, 스파르가눔은 주로 뱀을 먹으면 걸리는데 문제는 뱀을 안 먹는 사람도 걸린다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감염되는지 별로 알려진 게 없어요. 또한 우리 국민의 10% 정도가 감염되는 개회충도 마찬가지예요. 소간을 먹으면 걸리는데 조사 자료가 거의 없죠. 연구해야 할 과제들이 하면 할수록 많은 거죠.

그는 기생충을 주인 몰래 세 들어 사는 객식구에 비유한다. 그 옛날, 천적이 널려 있는 들판에서 불안에 떨며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일부 동물들은 “다른 동물 몸에 들어가 살면 어떨까?”란 아이디어를 낸다. 그렇게 동물들에게 들어가 살아가며 일방적인 이득을 보는 생물체를 기생충, 손해를 보는 생물체를 숙주라 하는데, 살아야 할 터전(숙주)을 망가뜨리는 건 기생충 입장에서도 손해여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게 기생충의 기본 생존 전략이다. 따라서 대개 증상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 기생충 같은 놈아! 하며 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에 비유한 것도 잘못됐다. 기생충은 언제나 먹을 만큼만 먹는다.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 대식가의 몸에 있던 회충도 채식주의자의 몸에 있는 회충도 길고 가늘다. 왜? 자기 분수를 지켜서 먹으니까. 기생충은 비열할 수는 있어도 탐욕스럽지는 않다.’-<기생충 열전>중에서

사람들에게 기생충이 비호감인 이유로, 특유의 생김새도 한몫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때론 기생충들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한다. 외모로 인해 힘들었던 자신의 삶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많이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인데 제 얼굴을 거울로 보고 더 악화됐죠.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엎드려 자고 있는데 애들이 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쟤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냐?’ 심지어 길을 가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붙들려 “넌 왜 이렇게 바보같이 생겼냐?”는 말까지 들어봤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한번도 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한 적이 없었어요. 인간쓰레기다, 이 사회에 하나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스무 살 때까지 했던 거 같아요. 정말 앞이 캄캄했죠. 그래서 속죄의 일환으로 항상 헌혈을 했어요.(웃음) 38번 정도.

그런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너무 밝고 재밌으시잖아요.
가만 보니까 재밌는 친구들이 인기가 많더라고요. 그때부터 유머 연습을 했어요. 유머는 원래 자기를 낮추는 데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런 면에서 전 유리했어요. 일단 눈이 작아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니까. 하지만 외모에 안주하면 안 돼요.(웃음) 제가 20년간 죽어라 한 노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날 정도예요. 또 하나는 글쓰기였어요. 대학 입학 후 모토가 ‘외모가 안되니까 글로 일어나자, 웃겨 보자’였거든요. 저는 정말 말하기가 안됐어요. 떨리기도 하고 외모 콤플렉스로 오랫동안 땅바닥만 보고 걸어서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못 봤거든요. 글이 제겐 편했어요. 일간지 칼럼을 쓰면서 좋았던 건 제 글을 남들이 평해준다는 거였는데, 타인에게 인정받은 건 글쓰기가 처음이라 정말 기뻤죠. 돌이켜보면 12년간 서울(집)~천안(학교)까지 왕복 4시간 동안 해마다 100권씩 책 읽은 게 비결이 된 거 같아요.

어찌 보면 기생충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의 ‘글빨’ 덕분이었다. 의대 진학 후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그러다 의대 본과 2학년 때 쓴 기생충 드라마 <킬리만자로의 회충>을 눈여겨본 기생충학과 교수님의 제안으로 그는 기생충학 연구에 발을 디디게 된다. 평소 좋아했던 교수님이 “21세기에는 기생충의 시대가 올 거야” 하며 제안한 점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기생충학 하면 대변 검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이란 점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의학과 달리 연구 위주의 기초과학이라는 점에서 심적 부담이 적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서민 교수에게 기생충이 그랬다. 대개 기생충이 몸 안에 있으면 배가 아프다 등의 증상만 접하다 보니 기생충이 마냥 나쁜 줄로만 알았지만, 막상 접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고. 말라리아와 같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기생충도 있었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기생충들도 있었다.

기생충이 인류 건강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대개 기생충하면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하지만 주혈흡충의 알, 돼지편충처럼 당뇨병이나 알레르기 치료에 사용되는 착한 기생충도 있거든요. 사실 기생충은 우리 면역계와 오랜 기간 공존해왔어요. 근데 기생충 박멸로 인해 면역계로서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해 황당한 상황에 처한 거죠. 이렇듯 알레르기성 비염, 아토피 등 면역계가 다른 외부 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알레르기 질환이라면,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면역계가 미쳐버려서 우리 몸을 공격하는 게 자가면역질환이에요. 근데 이 자가면역질환 치료에 기생충이 도움이 된다는 게 여러 연구들로 증명됐거든요. 잘사는 나라는 알레르기 질환이 많은 반면, 못사는 나라가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주죠.

하지만 연구 대상인 기생충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 선모충의 감염 경로를 찾기 위해 2년간 118마리 남짓한 멧돼지 근육과 씨름하고, 심지어 무덤 근처에서 몇 시간 동안 땅 파는 수고로움도 뒤따른다. 과거 유적에서 기생충을 조사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알아가는 학문을 고(古)기생충학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미라나 유적에서 기생충을 찾는 일도 그가 하는 연구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피로가 싹 풀린다’는 그는 천생 기생충 학자다.

연구를 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을 텐데요, 과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요?
과학자들이 연구 과정이 힘들고, 연구 결과가 잘 안 나오면 조급한 맘에 가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어요. 가령 실험 과정에서 쥐가 죽었으면 좋겠는데 안 죽어, 그래서 몰래 죽이고 나서, 어머 죽었네~ 하고 데이터를 위조하는 거죠. 근데 그게 돈을 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거란 거죠.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니까요. 그래서 과학자에겐 윤리 의식과 최소한의 양심, 누군가의 주춧돌이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의학 발전에 공헌한다는 인류애를 갖추는 게 중요하겠네요.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정답에 가기 위한 동반자인 거죠. 논문에 연구 방법을 쓰는 이유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그 누군가가 더 나은 연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거거든요. 제가 도요새의 장에서 희한한 기생충을 발견한 적이 있었어요. 이게 뭘까 하고 논문을 찾아보는데 브라질의 한 학자가 똑같은 걸 발견한 걸 보고 참 반가웠어요. 그 사람 덕분에 내가 하는 일이 편해지니까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주고 싶어요. 나중에 후세들이 이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쓸 때 제 이름이 심심치 않게 있는 거죠. 진실, 정답을 향해 후대의 과학자들이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것. 그런 게 과학자로서의 뿌듯함 아닐까요.

“앞으로 외부 강의를 많이 하면서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과학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요. 특히 오지나 섬 등 과학 교육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많이 가고 싶어요. 사실 저는 강의는 죽어도 못 할 줄 알았어요. 애들이 강의 평가 때마다 선생님 눈 좀 맞춰주세요, 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지금은 재미와 보람도 느끼고 많이 편안해졌어요. 이게 다 기생충 덕분이죠.(웃음) 사람들이 의미 없는 생명은 없다는 것, 하찮게 보일지라도 다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외모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당당히 대중 앞에 선 과학자 서민 교수. “임상 의사는 눈앞의 환자 한 명을 고치지만, 기생충 연구자는 큰 거 한 방을 노린다”며 활짝 웃는 그는 이제 오직 인류의 건강을 위해 연구할 뿐이다. 수줍음 많고 자신감 없던 그가 매력 만점 교수가 되는 반전이 일어났듯이, 존재감 제로의 기생충 역시 인류의 희망으로 자리하게 될 그날이 곧 오기를 기다리며. “기생충아, 기다려! 서민이 간다.”

서민 교수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저서로는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기생충 열전> 등이 있습니다.

내가 한 작은 약속이 큰 기적을 만들 것 같은 이 가을, 우리들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생을 걸고 지키신 아빠의 약속

구자숙 36세. 직장인. 인천시 부평구 산곡3동

아빠는 아빠의 삶에 대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다. 가끔 내가 우리 아기를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씩 하실 때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뿐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너무 어릴 적의 심한 고생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돼서 평생 맘속에 남아 있어. 너무너무 가난해서 고생 징하게 했지. 나는 엄마한테 아주 많이 맞으며 커서 엄마 품 좋은 줄 모르고 컸지.”

아빠가 해주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추측해 보면 할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돈벌이를 거의 못하신 듯하다. 그래서 첫째인 우리 아빠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하면서 밑에 동생들을 다 거둬야 했나 보다. 아마도 아빠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고 외롭게 컸지 싶다.

그렇게 부모 사랑 모르고 험하게 살아온 아빠였지만 나는 크면서 아빠로부터 험한 말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중3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 모두 몹시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견뎌내야 했을 때조차도 아빠는 우리에게 힘든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예전에는 한두 잔이었던 반주가 소주 반병쯤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한 해에 한 번씩 꼭 도지는 허리 병 때문에 하루쯤 일을 쉬는 날이 아빠가 낮에 등 붙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아빠는 돈벌이가 되든 안되든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절대 빚을 지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만큼만 쓰며 산 셈이다. 당연히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것을 거의 참아가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그로 인한 불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아빠가 왜 그토록 빚을 지지 않으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빠가 빚이 있는 채로 나이가 들면 그건 모두 자식들 몫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으리라.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면 못이 박여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잠든 우리들 등을 쓱쓱 쓸어주셨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묵묵히 키워오셨다.

이제는 나와 두 동생들 모두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다 키운 셈이다. 그런데도 몇 년 전까지도 이삿짐센터에서 자동차를 고치고 사다리차를 운전하고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내가 아빠가 하는 일은 자동차를 고치는 일인데 왜 운전하고 짐 나르는 일까지 다 하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아빠는 이 나이에 돈 받고 일하려면 시키든 시키지 않든 눈에 보이는 일은 다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일을 하다 그만두신 다음에는 당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미뤄왔던 자기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계신다.

한자 공부 삼매경에 빠져 밤낮없이 공부를 하더니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까지 자격증을 얻으셨고,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한자 교실에도 나가시고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으로 한자도 가르치신다. 문화원에서 하는 한시 공부도 즐겁게 하고 계신다. 또 굴삭기 운전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시다. 그리고 아빠가 진짜로 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일이다.

아빠가 그리는 그림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한자를 가르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 엄마 묘가 있는 선산을 굴삭기로 예쁘게 더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요즘 아빠의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인다.

아빠를 보면 늘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삼촌이 어느 날 아침 우리를 낮은 목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지난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한다. 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나는 들어가면 사실이 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삼촌이 끌다시피 해서 들어가니 아빠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 계셨다. 고개 숙인 아빠 모습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우리 셋은 아빠에게 달려갔고 아빠는 우리 셋을 팔로 감싸 안아 등을 쓸어주면서 한마디 한마디 정성 들여 말씀하셨다.

“걱정 마라. 아빠가 엄마 몫까지 할 거니까 아무 걱정 마라.”
아빠는 그 약속을 정말로 자기 인생을 걸고 지키셨다.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빠가 계셔서 나도 있는 거예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카미유와 장)>

100×81cm. 캔버스에 유채. 1875.

워싱턴 국립미술관.

지리산 종주, 천왕봉에서 한 나와의 약속

임경철 47세. 인천시 서구 불로동

8년 전, 내 나이 40세 되던 해 나는 2박 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50여 분을 걸어 노고단에 도착, 하늘에 제를 지내던 노고단 돌무덤에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지리산의 영봉들을 바라보자니 그 산세의 위용과 백두대간의 장엄함이 나를 압도했다.

이제 지리산 정상을 향한 험하고 외로운 25킬로미터의 단독 종주 길이 시작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지난 5년간 힘겨웠던 자영업 생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대학 졸업 후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8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었다. 밖에서는 대우 좋고 연봉 높다고 부러워했지만 내부 조직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이트했고, 매일 반복되는 야근으로 인한 건강 악화, 그리고 힘든 직장 선배를 만나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한 채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경험이 없는 생계형 자영업을 하게 되었다.

근면 성실하면 성공하리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활비조차 빚이 되는 지경이었다. 그 지옥 같았던 5년, 수없는 좌절과 낙심 그리고 적지 않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지친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리산을 종주하게 된 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단한 인생길처럼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을 넘으면서 이미 병들어 버린 내 육신은 더욱더 혹사되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한없이 맑아오는 듯한 느낌은 왜일까?

승승장구하던 직장 생활,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었기에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는 부조리한 세상을 탓하고 나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모두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세상에 독기를 품기도 했었다.

그렇게 지난 힘든 시간들을 되새기며 10킬로미터 정도를 지나자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와버렸던 상황.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이제 남은 절반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무릎에 손수건을 동여매고 산행을 계속했다. 지리산 종주 코스에서 가장 힘들다는 마의 코스를 지나면서부터 나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천왕봉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장터목산장에 이르렀을 때는 결국 해내고 말았다는 감동과 희열을 느꼈다. 장터목산장은 그야말로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 하여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는 다시 천왕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구간은 경사가 가파르고 고산지대라 힘에 겹지만, 그래도 꼭 정상을 밟아보리라, 패배 의식과 나약한 정신을 버리고 성취욕을 느껴보리라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나에게도 허락한 정상, 천왕봉 그리고 일출. 마침내 해가 떠올랐고, 무한 감동이 밀려왔다. 지난 2박 3일간의 고행길이 한순간에 잊혀졌다!

감격의 해돋이를 맞이하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천왕봉 주변 바위에 걸터앉았다. 지리산 천왕봉은 나에게 조그만 것을 빼앗겨도 분해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듯했다. 지리산의 은혜를 입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며 나는 나와의 약속을 하였다.

첫째,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여기 바위나 나무처럼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리라. 둘째, 세상과 부딪쳐 싸워 이기려 하지 말고 낮은 자세로 더불어 살리라. 셋째, 남은 인생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의 강산을 둘러보며 자연의 진리를 배우리라. 넷째, 건강해야 이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으므로 틈틈이 몸 관리를 하리라.

그렇게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반환점을 돌며,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실망하고 좌절했던 마음들을 정리하며 지리산 종주를 갈무리했다. 그 후 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천왕봉에서 한 나와의 약속을 되새기며 크나큰 위로를 삼았다.

앞으로도 그때의 감동과 약속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 다짐해 본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베퇴유의 모네 집 정원> 151.4×121.

캔버스에 유채. 1880.

내셔널 갤러리.

(A. 멜런 브루스 컬렉션), 워싱턴.

그 아이들을 위해 나의 모든 걸 나눌 겁니다

권희재 25세. 대학생. 서울시 강동구 암사2동

2년 전, 군에서 전역하며 들었던 생각은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세상과 부딪쳐보고 싶다는 거였다. 돈 300만 원으로 시작된 목적지 없는 여행. 부모님은 외동아들의 여행을 만류하셨고, 그런 부모님을 뒤로한 채 여행은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을 경유한 끝에 미국 LA에 도착하니 정말 막막하였다. 첫날부터 잘 곳이 없었기에 공항 내 벤치에서 노숙하고, 화장실에서 세안을 했다. 거울에 비춰진 어색한 내 모습을 보며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나가는 차를 운 좋게 얻어 탄 뒤부터, 누군가의 차에 같이 타게 되는 히치하이킹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돈을 최대한 아껴야 했기에 바나나와 빵 그리고 수돗물로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너무나 행복한 미국 횡단 여행은 계속됐다.

여행을 통해 수많은 친구들과 여행자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으며 나는 인류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날 믿어주고 자기 집에서 2주 이상 머물게 해주었던 친구들, 차에 타라고 손짓을 건네던 수많은 자동차들, 그리고 힘들지 않느냐며 손을 건네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그때 받았던 은혜들을 내가 살면서 다 갚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LA에서 보스턴까지의 횡단 여행이 끝날 무렵 문득 ‘아마존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쥐어짜낸 돈으로 남미 여행을 시작하며,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페루 한 시골 마을에서 전문 산악 장비와 준비 없이 안데스 산맥을 오르다 고산병을 얻으며 시작되었다. 빈민굴 같은 호스텔에 머물렀던 나는 그곳을 관리하던 15살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소녀는 고산병에 걸려 끙끙거리고 있는 나를 수녀님처럼 간호해 주었다. 고산병에 좋은 차를 끓여주고, 따뜻한 죽을 만들어주었다.

친해진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층이나 되는 호스텔을 하루 12시간 이상 청소하고 관리한다고 했다. 중노동을 하면서 한 달에 버는 돈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15만원. 소녀는 호스텔과 집까지 약 2시간 거리인데도 버스비가 아까워 걸어 다닌다고 했다. 15살 소녀의 손과 발은 서커스단 코끼리 발처럼 퉁퉁 부었고 온통 상처뿐이었다.

그 소녀를 뒤로한 채 남미 최대 빈민국인 볼리비아로 떠난 나는, 두 번째 가슴 아픈 광경을 만나게 되었다. 거리의 고아들이 서로 뭉쳐 다니며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를 닦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구두를 닦던 고사리 같은 손들은 온통 새까만 구두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일하면 잘 벌어야 700원을 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리 아껴 써도 하루에 3천 원.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나 자신과 약속했다.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을 보호하고,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겠노라고.

지금 생각하면 약 6개월간의 여행은 작은 강에만 살았던 나라는 물고기를 커다란 세상이란 바다에 도전하게 만들어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현재 나는 국제기구에 들어가려 부단한 노력을 하는 한편, 아이들을 도와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대학생들이 무동력으로 여행을 할 때 km당 일정 금액을 후원받아 제3국의 빈민을 도와주는 프로젝트다. 지금은 이 프로젝트를 같이할 기업을 찾고 있는 중이다.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구 반대편 아이들과의 약속이기에 나는 계속 꿋꿋하게 전진할 것이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는 여인> 81.1×60cm.

캔버스에 유채. 1880.

내셔널 갤러리.

(체스터 데일 컬렉션), 워싱턴.

할아버지 할머니, 꼭 올림픽 금메달 걸어드릴게요

김광규 16세. 온양중학교 유도부, 전국소년체전 금메달리스트

아테네올림픽에서 이원희 선수가 금메달 따는 걸 TV로 보고 한눈에 빠졌다. 결승전에서 기술을 딱 해내고 이기고 나서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었다. 바로 유도 체육관으로 찾아갔다. 유도를 하고 싶다고.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배우겠다고 한 마음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나를 키워준 분은 외증조할아버지, 할머니시다. 두 분이 잘해주셔서, 부모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그런 마음뿐이다.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메달을 할아버지, 할머니 목에 걸어드린다. 나는 꼭 열심히 해서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도 걸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중학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도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합숙 훈련을 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새벽 운동을 시작으로 오전에는 수업받고 오후 3시부터 유도를 시작한다. 한 2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나면 바로 밥을 먹고, 1시간 휴식을 갖고, 바로 야간 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첨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운동 너무 힘든데 그만두면 안 돼?” 울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걸 들으신 할아버지는 걱정이 되셔서 바로 나에게로 오신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신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나에게 물으신다.
“광규야, 그럼 너의 꿈이 무엇이니?”

번뜩 정신이 든다. 나의 꿈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금메달을 걸어드리는 것이었지. 그렇게 약속을 했었지. 난 공부도 안 된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유도밖에 없다. 그 약속은 너무나도 힘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유도한다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런 시기가 지나면서 1학년, 2학년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3학년, 나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바로 42회 전국소년체전에서의 금메달. 두려웠다. 소년체전이 두려운 게 아니고 그 과정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는 언제나 힘이 되는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했던 약속이었다. 약속을 생각하면서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소년체전 한 달 전, 수업도 안 들어가고 완전 지옥훈련이다. 경사가 높은 산을 정상까지 올라갔다 몇 분 안에 들어와야 하는 기초 훈련 등 기술이 안 되더라도 될 때까지 하는 게 유도다. 온몸이 안 움직일 정도로,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훈련을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한 단계 발전되었다는 걸 느낀다. 온몸이 아프다,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아 운동을 쉬고 싶다는 생각도 계속 갖게 된다.

하지만 나는 더 노력했다. 하늘은 노력한 자에게 기회를 주는 걸 알기에. 마침내 소년체전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대진표를 본 순간 좌절하였다.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난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힘이 생긴다. 자기 전에 기도를 했다. 1시간가량.
‘하느님 부탁입니다. 꼭 저 내일 좋은 성적 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계속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편하게 들었다. 소년체전 때 나는 결승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정말 힘들게 그렇게 갈망하던 금메달을 땄다. 믿기지도 않는 일이다.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그 결승은 아직도 생생하다. 노력한 자에게 기회가 오는 건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금메달을 걸어드리며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안아주면서 웃으셨다. 그렇게 중학교 목표는 달성했다. 이제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노력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들어도 노력할 거다. 올림픽을 위해서 아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수련>

200×200cm. 캔버스에 유채. 1914.

도쿄 국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