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북덕 바람

어머니가 살고 계신 동네 근처로 근무지를 옮겨 일 년을 살았다. 떨어져 있을 때는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늘 미안할 뿐이었는데, 막상 함께 살게 되니 괜한 일로 속상할 때가 많았다.

작년 김장철이었다. 퇴근하고 대문을 들어서니, 여기저기 배추 이파리와 김장용 비닐 같은 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어머니가 또 혼자 기어코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수돗가 커다란 물통에 소금 간을 절인 배추가 가득 차 있는 걸 보니 왈칵 화가 났다.

“지금 혼자 뭐 하는 겁니까?”
“내일 모레 비도 오고 더 추워진다고 해서….”
“김장은 다음 주에 다 같이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어머니는 작년에도 혼자 김장해서 우리들 애간장을 태웠다. 올해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또다시 혼자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모기 소리만 하게 말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배추 간물 씻어낼 때 자네가 좀 도와주게.”

나는 들은 척 만 척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슬그머니 거실로 나가보았더니, 거실에 빨간 고무장갑과 털모자와 마스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도 완전 무장을 하고 조용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두워져가는 마당에서 찬물에 배추 포기를 마구 흔들어 헹구었다. 하지만 갑갑한 내 속의 간물은 빠지지가 않았다. 배추 전쟁은 밤 아홉 시가 넘어 끝났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이구, 됐다. 이제 시나브로 양념만 치대면 된다.”

나는 아침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 대신 “나, 갑니다”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 대문을 나섰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오니 저녁상에 몽어회 한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새벽 시장에 가면 갯가에 사는 할머니들이 싱싱한 어물을 팔았다. 그중 갯벌에 쳐놓은 발에 걸린 잡어들은 진짜로 싸고 싱싱한 횟감이었다. 어머니는 몽어새끼 삼천 원어치를 사와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를 기다렸다. 저녁 반주 삼아 꼬들꼬들한 몽어회를 곁들여 소주 한잔을 털어 넣었더니, 뭉쳤던 화가 스르르 풀려 내려갔다. 참 신기했다. 나는 가끔 그렇게 내 풀에 토라졌다가 풀어지곤 하였다.

어느덧 파견 기간이 끝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복귀할 때가 가까워졌다. 새벽녘,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어머니가 비설거지를 하나 싶어 불을 켜보니, 당신은 아랫목에 콜콜 잘 주무시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바람 소리였다. 밤바람은 괜히 유리창을 툭툭 치고, 낡은 창고 문을 흔들고, 마당에 있던 고양이 밥그릇을 끌고 다녔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고양이 밥그릇을 제자리에 두고, 거름통 앞에서 허리춤을 풀고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금이 간 듯 여기저기 샛별이 반짝였다. 도깨비 같이 바람이 뒤로 돌아와 내 등을 밀었다. 하지만 소리만 컸지 하나도 맵지 않은 특이한 겨울바람이었다. 방에 들어오니 어머니도 잠을 깼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바람이 왜 저렇게 유별하게 분답니까?”
“북덕 바람이여.”
어머니는 그 바람을 내게 말해주었다.

옛날 손으로 농사짓던 시절, 늦가을 벼를 타작할 때 부는 바람이라고 했다. 해가 떨어지는 벌판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은, 지푸라기와 검불은 멀리 날려 보내고 알곡만 떨어지게 할 만큼만 불었단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도 북덕 바람이 불었다. 내 부끄러운 잡념을 검불처럼 날려 보내고, 알곡 같은 모정(母情)만 고스란히 남겨주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

정리 김혜진

& 자료 제공 환기미술관

수화(樹話) 김환기.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탐구하고 도전했다. 국내에서의 명성과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미술의 중심지 파리, 뉴욕으로 향했다. 항아리, 달, 산 등 한국적인 소재에서 더 나아가 점, 선, 면의 순수 조형을 통해 인간의 근원인 자연과 영원한 우주로의 회귀를 노래한 화백 김환기.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나는 남방의 따사로운 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랐다. 고향 우리 집 문간을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김환기는 1913년 신안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안좌도에서 대지주였던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육지와 통하는 연락선조차 드문 시대였지만 김환기는 화실까지 두고 그림 공부에 매진할 정도로 미술에 빠져 있었다. 아름다운 고향 풍경은 그의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 1933년 김환기는 니혼대학 미술학부에 입학, 일본 추상미술의 선구자들과 교류하며 추상화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새로운 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환기는 이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체화해서 표현할 것인가 고뇌했다. 그의 초기작 <론도>(1938)는 당시 풍경화, 인물화 위주였던 한국 화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곡선과 직선, 기하학적 형태로 구상한 작품으로, 그는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론도> 61×71.5cm. 캔버스에 유채. 1938.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
해방 전후 김환기는 서울 성북동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미에 심취하게 된다. 1944년부터 6~7년간 매일 조선 백자 항아리와 목공예를 살 정도로 그 애정이 각별했다. 김환기에게 달항아리는 예술의 원천이었고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평범한 둥근 모양, 평범한 백색…. 그는 특히 그 평범함에 주목했다. 거기엔 어떤 기교도, 위대한 미술품을 만들려는 도공의 욕심도 느낄 수 없었다. 도공의 무심(無心)은 자연과 일치했고, 그 결과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그릇을 탄생시켰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내가 그리는 그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달이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 어찌하면 사람이 이런 백자 항아리를 만들었을꼬. 싸늘한 사기로되 다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정원에 달항아리를 놓고‘달 뜬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는 1950년대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려 ‘달항아리 화가’로도 불렸다.

아내 김향안과 함께. 김향안의 내조는 평생 김환기 작품에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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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항아리> 53×37cm.
캔버스에 유채. 1957.

“저 단순한 구도,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일 거야.”
1956년 김환기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아내 김향안을 따라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간다. 그는 아침 9시에서 자정이 넘도록, 앞이 캄캄해서 지척이 안 보이는 절벽에 서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붓을 들었다. 그곳에서 피카소, 루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그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강력한 노래가 있다는 것.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부르던 노래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거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그가 알게 된 한국의 정서는 고향의 푸른 하늘, 푸른 바다였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푸른색이 주조색으로 등장한다. 산월, 항아리, 매화 등을 현대적으로 조화롭게 담아내 아름다운 걸작들을 완성시켰고, 한국인 최초로 파리에서 6번의 개인전을 여는 성과를 이뤄낸다. 이어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명예상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또 한 번 도전에 나선다. 현대 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으로 떠난 것이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당시 뉴욕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기존 순수 예술의 권위는 무너지고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가 대중문화로 자리하고 있었다. 김환기에겐 충격이었다. 국내에서는 최고의 작가로서 명예를 누렸지만 뉴욕에서는 무명의 작가일 뿐이었다. 작품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부수는 용기가 필요했다’는 그의 말처럼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는 사라지고 가장 순수한 조형 형태인 점, 선, 면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생계를 잇기 위해 육체노동을 하는 등 좌절과 고통의 시간은 계속됐다. 그러던 중 친구 김광섭 시인이 보내준 시 ‘저녁에’를 읽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라는 전면점화(全面點畵)를 통해 선보이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다.
캔버스 가득 채운 수많은 점들은 그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고향의 산천이었고, 가족, 친구, 제자들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울림을 전해주었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이어 그의 작품은 우주와 같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추상의 세계로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린 점 하나하나는 김환기가 온 생애 다해 도달한, 인간의 근원인 자연의 세계, 영원의 노래였던 것이다.

<15-VI-65> 209×158cm. 캔버스에 유채.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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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IV-70 #166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232×172cm. 캔버스에 유채. 1970.
이 작품은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김환기(1913-1974)는 현대 미술의 중심, 파리와 뉴욕에까지 이름을 알린 한국 대표 화가로, 3천여 점의 유작은 그의 열정을 말해줍니다. 이 글은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환기 저)<김환기 탄생 100주년 도록1>(환기미술관 저)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가 12월 31일까지 환기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열린 고민 상담소


제 고민은요?

저는 30대 초반의 직장남입니다. 몇 달 전 저희 팀에 신입 직원이 왔는데, 싹싹하고 잘생기고 능력도 뛰어납니다. 회의 시간 때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내니, 팀원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럴 때마다 질투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왔지만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라 괜히 부아가 치밀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후배를 혼내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속 좁은 내가 싫고, 곧 후배에게 따라잡힐 것 같아서 불안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입니다. 부끄럽지만 마음을 제어하기 어려워 고민을 보냅니다.

제 생각은요!

우선 이렇게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먼저 큰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제 주변에도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쿨하게 한마디 해줍니다. “그런 애들 오래 못 가~.”(^^) 물론 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후배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럴 때는 선배로서 먼저 그 후배에게 다가가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그 후배도 선배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회의 때 질투가 올라오더라도 꾹 누르고 우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다, 대단하다, 한마디만 해봐주세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인정해주고 종종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살아온 이야기, 서로를 향한 마음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다 보면, 후배를 향한 마음도 정리가 되고, 후배도 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서 관계도 돈독해지게 될 겁니다.
사실 처음에는 능력 있는 후배가 더 빛나 보이는 것 같지만, 뒤에서 그 후배를 인정하고 지원해주는 든든한 산 같은 선배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 눈에는 더 빛나 보이는 법이랍니다.– 박건

계속 자기만족의 기준을 밖에서만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배를 남들이 인정해주는 모습에 질투를 느끼는 건, 그만큼 남의 평가에 의해 스스로도 평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외부의 조건이나 평가에만 집중하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어느 수준까지 성장하고 싶은지, 자기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은 잃어버린 채 계속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숙제인 듯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떠나서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어떤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원하는 수준의 선은 어디까지이고,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어느 선인가. 그리고 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다 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주변에서 나를 인정해줄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이미 최선의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원진

님의 고민은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저도 이삼십 대 직장생활을 할 땐 불안증의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하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를 돌아보며 마음을 버려볼 기회를 가지면서,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지만요. 아무도 불안해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혼자서 부정적인 데 에너지를 다 쏟으며 삶을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님만의 강점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약점을 보완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그 강점을 강화해 나가길 바랍니다. 자신의 강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다 보면, 후배를 향한 질투 등으로 쓸데없이 삶을 소모하는 일들도 줄어들 겁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정도가 다를 뿐 대부분 자기 한계를 느낍니다. 저 또한 한 부서의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느낍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며 서로서로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지요.
사실 임원이 되고 보니 아랫사람을 볼 때 단지 능력만을 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심성, 태도, 꾸준함, 긍정적 성향, 뭔가 매달려서 끝까지 해보려고 하는 자세,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보게 되지요. 자꾸만 한계를 느낀다면 남보다 세 배는 더 노력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보세요. 그 노력의 결실은 클 것입니다. – 목경수

지금 고민 중이신가요. 혼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함께 나눠보아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엄마가 20년 넘게 저와 아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오셔서 온몸에 근육 통증이 있으시고 불면증에 소화장애 불안증 우울증까지 있습니다. 병원에선 아무 병명이 없다고 하여 신경과 약을 복용 중입니다. 몇 년 동안 해오던 일도 접으시고, 계속 누워만 계십니다. 운동을 하라고 해도 기운이 생겨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과거에 있었던 기억들만 나는지 자꾸 죽고 싶다며 눈물만 흘리십니다. 아빠는 따로 살고, 저도 취업 준비 중이라 예전처럼 옆에 있어드릴 수만도 없습니다. 엄마를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정말 답답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바른 생활 시아버지와 불량 며느리

며칠 전 아내와 그리고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과 넷이서 고향으로 벌초를 갔다 왔습니다.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지만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고향 가는 길이 기쁘신지 주무시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연신 이야기꽃을 피우십니다. 이때 항상 말동무가 되어드리는 게 아내입니다.
벌초하러 올라가는 길목, 아내가 밤나무 밑에 멈췄습니다.
“어머나, 밤이 벌써 익었네요. 아버님 잠깐만요, 여기서 밤 좀 따고 가요~~.”
진격의 아버지는 가는 길을 멈추지도 않고 한마디 하십니다.
“사 먹어~~~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아버지의 시크한 한마디에 아내가 발끈합니다.
“아버님은… 이런 게 다 재미죠~~ 얼마나 좋아요, 산에서 밤도 줍고.”
아버지가 잠시 멈춰서 다시 한마디 합니다.

“사 먹는 게 맛있어.”

한참 벌초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아버지를 급히 찾습니다.
“아버님, 이 버섯 먹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아내의 손에 놓인 버섯을 보는 둥 마는 둥 한마디 합니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라. 버섯 먹고 싶으면 사서 먹어~~.”
아내 역시 아버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연신 버섯을 들춰 봅니다. 그 모습에 아버지가 다시 한마디 합니다.
“먹는 버섯인지 독버섯인지 구분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애쓰지 말고 슈퍼에서 사먹어~~ 슈퍼에선 독버섯 안 팔아~~ 무슨 구분법이고 지랄이고 그냥 사 먹어~~.”

백일성(43)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최근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벌초를 다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아내가 밤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그리고 이내 발걸음을 옮기다 차를 세워둔 마을 입구에 다다라서 대추나무를 발견합니다.
“어머나, 대추 큰 거 봐요 아버님, 한 움큼만 따서 차례 상에 올리면 좋겠다.”
이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실룩이자 아내가 자진 납세를 합니다.
“알았어요~~ 사 먹을게요~~ 사 먹는 대추가 맛있어요~~ 네네.”
아버지가 실룩이던 입을 멈추는가 했더니 기어이 한마디 더 하십니다.
“남의 울타리 안에 있는 건 떨어진 거라도 행여나 줍지 마라. 이 세상에 안 파는 거 없다. 다 사 먹어~~ 그게 세상에서 젤 맛있고 몸도 맘도 다 편해.”
차를 타고 나오는 길에 아내가 깨밭을 지나치며 한마디 합니다.
“아… 저 깻잎….”
그리고 아버지 눈치를 보더니 아내의 말끝이 흐려지며,
“사 먹는 게 더 맛나겠다….”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아내와 어머니는 화장실에 가고 아버지와 저는 휴게소 장터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홍삼캔디 하나를 시식하시고 계셨습니다.
“한 봉지 사 드릴까요?”
저의 물음에 아버지는 저에게만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이런 데서 사면 비싸.”
그리고 슬그머니 시식용 캔디 한 개를 더 챙기더니 차로 가셨습니다. 언제 나왔는지 아내가 차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만 원짜리 홍삼캔디 한 봉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다닥 계산을 마치더니 차로 뛰어갑니다. 얼떨결에 같이 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데 아내가 아버지에게 사탕 봉지를 내밀며 한마디 합니다.
“아버님~~~ 사탕 드세요. 그리고 그렇게 얻어 드시지 말고요. 사 드세요~~ 꼭~~ 사~~~ 드세요~~~ 아셨죠? 아버님~ 사 먹는 게 젤 맛있어요~~~.”
표정이 영 떨떠름한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아내에게 전합니다.
“너도 이거나 먹어라.”
언제 주우셨는지 아내의 손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밤이 몇 개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차 안에서는 아버지는 사탕을 먹고 아내는 밤을 까먹었습니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둘이 입에 뭘 물고 있으니 세상이 다 조용하다.
진작 뭘 물려 놓을 걸. 에이구, 시끄러워.”

강화는 대학, 시골 어르신들의 푸근한 인생 강좌

취재 문진정

2011년 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후 평균 연령이 높아진 강화도 온수리에 20대의 용감한 자매가 발을 디뎠다. ‘OO은 대학’ 프로젝트의 하나로 강화 ‘온수리대학’을 만든 우민정, 우민희 자매다. ‘답 없는 고민들만 가득한 도시의 청년들이여, 농촌 마을을 돌아보면서 한 템포 쉬어가자’는 취지로 시작한 강화 온수리대학에는 현재 우민희, 신일진, 조성현, 세 명의 술래(‘OO은 대학’에 참여하는 청년들을 부르는 호칭)가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 무작정 들어가 지역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공통 관심사를 찾기 힘든 어르신들을 일일이 만나 대화를 이어가야 했고, 혹여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닌지 곱지 않은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할머니들 옆에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면서 마음의 벽을 낮추어갔다.

우리나라 변천사가 인생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순무 김치 할머니, 100년 전통 막걸리 만드는 법을 전수해주신 양조장 아저씨, ‘유행은 돌고 돈다’는 철학으로 강화도에 3명의 미용사를 키워내신 은하미장원 할머니 등 훌륭한 교수님들도 발굴했다. 그리고 이제 말투는 조금 투박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듯한 어르신들의 진짜 속마음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청년들은 ‘마을출장대학’을 통해 이곳에서 배움을 얻어가고, 어르신들은 자신의 인생 노하우를 가르쳐주며 기쁨을 나누는 대학. 한 걸음 느리게 서로에게 귀 기울여줄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강화는 대학’의 베이스캠프인 ‘모두의 별장’. 소셜펀딩을 통해 마련한 보증금으로 지난 6월 문을 열었다. 11월의 마을 축제, 청소년 방학 캠프 등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술래 유자(신일진) 이야기
처음에는 이렇게 조용한 시골에서 무슨 재미로 지낼까 했는데 어르신들의 오랜 지혜를 배우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순무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저희는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드리기도 하고요. ‘이 나이에 무슨 교수냐’ 쑥스러워하시다가도 저희가 만든 교수 위촉장을 받으실 때는 경건함, 기대와 설렘, 뿌듯함이 다 느껴져요. 그래서 더 보람이 느껴지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술래 하루(우민희) 이야기

도시의 삶은 늘 바쁘고 복잡했던 것 같아요. 지하철 환승은 너무 어렵고 마트 계산대에서는 다음 손님 때문에 쫓겨나고요. 그러다가 여기 강화도에 왔는데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도 모두가 여유롭게 볼 수 있는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이런 소통 방식, 서로 들어주고 지켜봐줄 수 있는 시간들을 많은 청년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제 죽을 텐데 내가 뭘 해’ 하시는 할머니들이 계세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참 속상하죠. 그런 어르신들과 작은 것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서 더 다가가려고 해요. 3년째 되니까 이제 어르신들도 청년들 온다고 ‘사탕 하나 사놔야겠네’ 하세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서로 다가가고 믿음을 쌓아나가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강화도 온수리 양조장에 학생들이 만든
간판이 걸렸다.
‘강화는 대학’ 교수님들이 청춘에게 고함
모이세 붕어빵집의 김형섭 교수님
인내심을 갖고 하는 것이 붕어빵 맛의 비결이다. 나는 항상 손님들에게 얘기를 듣고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여러분들도 무슨 일을 선택하든 꾸준히 끝까지 끌고나가다 보면 걱정할 게 없다.
귀금속점 광명당의 유환규 교수님
청춘이여! 노력에는 나이가 없다. 내가 중학교도 중퇴한 사람이지만 세상 속에서 살면서 공부했기에 알파벳도 한자도 알고 외국 간판도 신문도 볼 줄 안다. 모든 건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 돈이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우리들의 노바이처

“왜 그렇게 울었어요? 그깟 놈 보내기가 그렇게 서러웠어요?”
두 번째 수술(전절제) 후 첫 회진 때 오셔서 하신 노동영 박사님의 첫 말씀이었다.
수술 결과가 어땠는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이 난다.

긴장되고 아마득한 상황에서도 박사님의 ‘툭’ 던지는 한마디는 긍정의 힘이 되어 잔뜩 웅크렸던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대한민국 최고 명의답지 않은 소탈함과 친근함에 두려움은 어느덧 절반이 된다. 대부분의 환자가 여성이라는 특성도 있겠지만 몇 백 명의 여성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게 우리와 한마음이 되어 잘 어울리신다.

어느 해인가 워터파크가 있는 리조트로 수련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곳 풀장에서 유일한 청일점이었던 박사님이 하얀 가운 대신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환자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느꼈었다. 환우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시간을 쪼개어 함께하시는 박사님, 우리 또한 박사님이 떴다 하면 구름처럼 모여든다.

등산, 야유회, 수련회, 트레킹…. 오죽하면 노교주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환자에 대한 배려는 수술실 안에서도 나타난다. 서울대 의대 오케스트라 지도 교수이기도 한 박사님은 공포에 떠는 환자를 위해 수술실에서도 은은한 음악을 틀어놓고 특유의 부드럽고 개구진 미소로 맞이하신다.

암 병원장이기도 하신 박사님은 한국유방건강재단 상임이사장이기도 하고 한국유방건강재단 설립 초기인 2000년부터 이사로서 아모레퍼시픽과 함께 국내 핑크리본캠페인을 해왔으며, 유방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유방암 조기 검진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고 계신다.
학술적으로는 유방암 수술 방법인 감시림프절 생검술의 장기적 안전성을 세계 최초로 입증하는 등 국내 유방암 연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끌어왔으며 2011년에는 분쉬의학상, 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학회에 따르면 유방암의 맞춤 진단 및 치료를 위한 7건의 바이오마커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와 관련한 논문 170여 편을 국제학술잡지에 게재했다고 한다.

외과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분쉬상 수상 소감에서 박사님은 “환자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더 많은 환자의 완치를 위해 계속 연구하고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언제 어디서나 환자가 우선이고 환자만이 박사님 가슴 안에 있는 것 같은 대목이다.
당신의 인생도 리셋을 할 때가 되었다며 함께하셨던 장장 13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5천 미터 정상을 300미터 남기고 고산병으로 하산해야 했던 박사님.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면서도 죽네, 사네, 울고, 불고하던 그녀들이 당신 걸음을 앞질러 정신력과 체력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씩씩하게 설산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셨다.

그 많은 환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 알아보시는 세심함, 어마어마한 진단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설명해주시는 자상함, 환우회 모임 때는 항상 드레스 코드를 핑크로 하시는 패션 센스, 체력을 길러야 많은 환자를 돌보신다며 스스로의 관리에도 철저하신 강인함을 지니신 분. 유방암이 아니었으면 못 만났을 큰 분을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져가신 만큼 주는가 보다. 이런 분을 내게 보내주셨으니 말이다.

지난 5월에 홍콩유방암협회와 한인여성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드레곤스백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박사님의 수술로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된 서혜경씨도 함께했는데 어찌나 박사님에 대한 사랑이 큰지 1,500석 홀에서 박사님만을 위한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고, 트레킹하는 환우들을 산 중턱에 모아놓고 스승의 노래를 즉석 개사하여 연습을 시켜서 박사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었다. 마지막 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 영원하리~ 노~바이처~~’
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노동영 박사이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분께 내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나누어 드리고 싶다.

김지윤 54세. 여행치유가. 인천시 서구 가정동

‘고고씽 킬리만자로~!!!’
내년에는 꼭 킬리만자로에 함께 가자는, 김지윤 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노동영 박사님께 난 화분을 보내드렸습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 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파는 화분만 화분이 아니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시장에 나가 보면 화초보다 화분 값이 훨씬 비싸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안에 화분으로 쓸 만한 물건이 아주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요즘 대세인 다육식물의 경우 해물탕을 먹은 후에 남은 소라 껍데기나 굴 껍데기에 흙을 채우고 작은 다육식물을 심으면 흔히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답니다. 달걀 껍데기도 좋아요. 외국 인테리어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이템은 보기에도 재밌지만 달걀 안의 얇은 막이 영양제 구실을 해서 식물이 좋아하지요.

또한 아이가 어릴 때 신다가 작아진 고무장화나 장난감을 화분으로 만들어주면, 매일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아이 마음에는 정서의 안정과 함께 자연의 신비도 자란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화분 재료는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가서 쓰지 못하게 된 사기그릇일 거예요.

그런 사기그릇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만들어 보세요. 평범한 그릇의 깜짝 변신,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신기함과 즐거움은 내 몸속의 엔도르핀을 퐁퐁 샘솟게 해줍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얼룩덜룩해지고 찌그러진 주전자도 개성 넘치는 화분이 될 수 있고, 녹슨 깡통은 그야말로 빈티지한 멋이 철철 흘러넘치는 멋진 화분으로 부활하지요.

이런 물건들을 어떻게 화분으로 만드느냐고요? 물구멍만 만들어주면 되기 때문에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요. 못과 망치, 또는 송곳을 이용해 물건의 밑바닥에 작은 구멍만 뚫어주면 된답니다. 우리 주변 흔한 물건들의 화분으로의 재탄생! 돈 주고 산 것보다 훨씬 멋지고 매력적인 화분 만들기 이후 저의 가드닝이 백배는 더 재밌어졌답니다. 자,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화분을 만들어볼까요?

스위스 감자전

요즘 예능 프로그램 중 연예인들이 나와 자신만의 야식을 직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영향인지 야식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지는 듯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라면처럼 만들어진 제품에 다른 것을 섞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야식이라고 꼭 간단해야 하나! 저녁 겸 야식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면 조금은 복잡해도 만들고 먹는 보람이 있다. 스위스 감자전은 여행길에서 만난 스위스의 전통 음식인 로스티를 따라 만들어 본 메뉴이다. 어느 집에나 있는 감자로 푸짐하게 만들어 보면 좋을 듯하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재료

감자 2개,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베이컨(햄으로 대체 가능) 2줄, 달걀 1개

1 감자 2개는 껍질을 벗겨 가늘게 채 썰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한다.

2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감자 채를 넣어 익힌다.

3 다른 팬에 베이컨 2줄을 굽고 달걀 1개는 프라이한다.

4 감자전 위에 달걀과 베이컨을 얹는다.

레이저 캡 Laser Cap

이름은?  레이저 캡(Laser Cap). 레이저(Laser)와 뚜껑(Cap)의 합성어로 줄이 없는 백지에서도 정확하고 반듯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뚜껑에서 레이저 가이드선이 나오는 볼펜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여자 친구와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바로 이거다! 하고 우연히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산업디자인과를 전공 중인 나와 여자 친구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 엉뚱한 생각을 잘해 서로 아이디어 공유를 많이 하는 편이다.

제품의 원리는?  줄이 없는 백지에 글을 쓸 때 종이에 레이저 캡을 끼워서 사용하면 된다.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레이저 부분이 상하로 움직이며,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글의 레이아웃에 맞게 높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레이저가 나오는 부분의 버튼으로 글자 크기에 맞게 레이저 가이드선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어느 부분에서 레이저 가이드선이 나와야 할지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자 어려웠던 점이다. 처음에는 레이저가 나오는 구조를 연필 그립에 적용시켜 보았는데 쓰기에 불편해 포기하고, 결국 볼펜 뚜껑에 적용시켰다. 이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는 많은 노력들이 숨어 있다. 직접 제품을 사서 써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물어보고 수용하고,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변의 반응은?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하고 재밌어했다. 다들 한 번씩은 겪어본 문제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현재 레이저 키보드(레이저로 나오는 키보드)가 개발된 것을 보았을 때, 충분히 현재 기술로 상용화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은?  산업디자인과 전공이라 해서 그 분야만 전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 환경,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발휘하는 유능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리고 항상 응원해주는 부모님과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나의 목표인 ‘디자인의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을 디자인해 나갈 것이다.

만든 사람

허진원, 김다솜, 손창만

동서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재학 중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를 일컫는 말이다. ‘주변의 의견은 모으되, 결정은 내가 한다.’ 가지런하게 써내려간 일본어 위로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다.<엔딩 노트9>.

스나다 도모아키는 정년 퇴임과 동시에 건강 검진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스나다씨는 담담한 마음으로 꼼꼼하게 엔딩 노트를 준비한다. 그리고 영화는 스나다씨의 일상과 생각을 근접한 위치에서 담아낸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기꺼이 손주들의 머슴 노릇하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등. 스나다씨의 버킷리스트는 가벼운 듯 가볍지 않다. 삶을 살아오며 행하지 않았던, 혹은 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완성해가며 스나다씨는 새로운 인생의 맛을 경험한다.

장례식장 사전 답사를 가고 초대장을 준비하며 꼼꼼하게 점검한다. “내가 호스트인 행사인데, 초청 명단 관리도 잘해야지”라고 말하는 행사는 사실 본인의 장례식이다. 아이러니함에 웃음이 날 만도 하지만 엔딩 노트가 완성되어 갈수록 관객 또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스나다씨는 ‘잘, 죽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사람은 왜 죽을까?’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그때, 스나다씨의 어린 손주가 답을 말해준다. 설핏 웃음이 나는 순진한 대답이지만 꽤나 명쾌한 대답이다.

이제 마지막을 맞이하며 스나다씨의 상태는 급격하게 악화된다. 부인과의 대화를 담은 장면이 스크린에 비춰질 땐 극장이 엄숙해지기까지 한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버킷 한편에 담아두었던 작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이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엔딩 노트가 판매되고 있다. 법적 효력을 지니는 문서는 아니지만 사후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병이 들었을 때 조치를 바라는지 여부, 장의 절차와 상속,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통장의 자동이체 목록 등.

‘죽어감’을 생각하며 작성하는 엔딩 노트는 삶을 돌아보는 계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내가 없음으로 인해 생길 일들에 대한 민폐를 줄이는 일, 이 얼마나 배려 있는 삶인가! 아니, 죽음인가! <엔딩 노트>에는 두 가지 매력이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스나다씨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레이션이 흐르는데, 이는 사실 영화의 감독이자 스나다씨의 막내딸인 마미 스나다의 목소리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아빠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레이션. 어색할 법도 하지만 죽음을 공포의 시각이 아닌 받아들임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기에 영화의 맛이 달라진다. 어느새 관객도 스나다씨의 가족과 함께 스나다씨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매력은 스나다씨 본인의 유쾌함이다. 분명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자락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나다씨는 유머러스한 모습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소탈하게 웃는 스나다씨의 모습에서 관객이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살아감’과 ‘죽어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아빠의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담아갔던 감독조차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던 하나레 구미의 ‘천국님’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할아버진 보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셨지
마음의 보물은 돌아보면 항상 그곳에 있다고
있어요, 있어요. 거기에 있어요. 항상 거기에 있어요

항상 거기에 있었던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과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엔딩 노트를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조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