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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운 선수의 마인드 컨트롤 방법

탕 탕 탕~! 20평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코트에 파워풀하게 공을 치는 소리가 가득 울린다. 지난 10월, 인천에서 열린 제94회 전국체전 스쿼시 남자 일반부 4강전. 접전 끝에 대전시체육회 소속 스쿼시 최정운(31) 선수는 동메달을 따낸다. 2011, 2012년 동메달에 이은 세 번째 성과였다. 시합 때의 반복적인 실수 등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지배하는 몸의 기억마저도 버리며 훈련하기에, 경기 당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는 최정운 선수. 그는 마음 빼기야말로 최고의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라고 말한다.

정리 & 사진 김혜진

이번 전국체전에는 총 46개 종목 3만여 명의 선수가 출전한 가운데, 저는 스쿼시 선수로 남자 단체전에 참가했어요. 모든 스포츠는 심리전이라고 할 정도로 시합에서 얼마나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마음수련 덕을 많이 봤어요. 수련한 이후로 시·도 대표팀 선수로도 선발되고, 4년 연속 전국체전에도 참가하게 되었으니까요.

스쿼시는 대학 1학년 때 강사분의 권유로 시작했어요. 막상 해보니까 재미도 있고 해서, 방학을 이용해 자격증을 땄고, 이후 스포츠 센터 강사를 하면서 학교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스쿼시는 원래 ‘볼을 구석에 밀어 넣는다’는 의미로 영국의 죄수들이 교도소 벽에 공을 친 데서 유래됐습니다. 당구 치는 원리와 비슷해서, 가령 상대 선수가 한쪽 구석에 있으면 받아치지 못하도록 반대쪽 구석으로 공을 보내야 할 때, 옆벽을 쳐서 앞 벽을 맞춘 후 반대편 구석으로 보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순간 판단력과 순발력,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지구력도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많아요. 보통 사람은 5~10분 정도 공을 치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죠.

그럼에도 스쿼시가 좋았던 건 공이 제대로 파워풀하게 맞았을 땐 마음이 뻥 뚫리면서 마치 응어리진 마음들이 한결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그러다 공을 내 맘대로 컨트롤하게 되면서 상대 선수를 제압했을 땐 뭐랄까, 그 희열감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대회에 출전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는 내가 싫은 거예요. 승부욕도 생기고, 자존심도 올라오고. 제대로 한번 배우고 싶었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스쿼시란 운동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고 체계화가 안 돼서 배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선수에 대한 국가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라 자기 직업을 갖고 운동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선수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어요.

다행히 그 무렵 아는 형을 통해 국가대표 선수들과 9개월간 함께 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어요. 직접 가르침을 받은 건 아니지만, 같이 운동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실력을 키우는 동안 운 좋게도 2006년부터 스쿼시가 전국체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각 시·도에서도 선발전을 통해 대표팀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에 저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됐죠.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결과가 좋지 않은 거예요. 제가 시합 때 안 좋은 버릇이 있거든요. 가령 공을 쳤는데 제대로 안 들어가거나 실수하면 경기 중에 계속 그 생각만 하는 겁니다. 이미 지나간 것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할 때 여자 친구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됐어요. 처음 수련 상담을 하는데, “사람은 여태 더하기만 하고 살았는데 이건 마음을 빼는 공부다, 그럼 다 없는 거다”라는 말이 제겐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사실 선수로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은 안 겪어보면 모를 거예요. 정말 어마어마하거든요. 특히 큰 시합이 앞에 닥치면 오만 생각이 다 떠올라요. ‘지면 어떡하지? 부상당하면 어떡하지? 연봉은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뭐라 할까….’

선수라면 공을 갖고 놀아야 하는데, 거꾸로 공에 휘둘리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래서 평소 실력은 좋은데 실전에서는 제대로 기량을 발휘 못 하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수련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니까 삶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떠오르더군요. 어렸을 때 외로웠던 것, 시합 때 안 좋은 기억들까지…. 놀라운 건 마음뿐 아니라,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그 기억이 다 담겨 있다는 거였어요. 덕분에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도 깨닫게 됐지요.

운동선수라면 다 알 거예요. 예전에 했던 그 실수를 결정적인 순간에 반복하고 있는 자신. 정말 나도 모르게 나와요. 열심히 반복 훈련해서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 경기는 엉망이 되죠. 무의식적인 행동들, 그 원인이 몸의 기억 때문이라니! 마치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를 푼 기분이었어요. 그다음부터는 무조건 빼기를 했죠.

수련하고 가장 큰 변화는 오직 경기에만 집중한다는 거예요. 마냥 좋아서 운동했던 그 마음을 되찾은 기분이랄까. 어느 순간 웃으면서 경기를 즐기고 있더라고요. 여유가 생기니까 시야도 넓어지면서 내가 혹은 상대가 어떻게 경기를 하는지도 보이고요. 몸, 마음이 담고 있는 기억에 얽매이지 않으니까 원하는 플레이를 하게 되더라고요.

전국체전의 경우 2010년부터 개인전에서 단체전으로 바뀌면서 세 명의 선수가 한 팀이 돼서 시합을 해요. 그러다 보니 선수 간의 팀워크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번에 전국체전을 앞두고 두 달간 합숙훈련을 했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서로가 발전이 되는 윈윈 플레이를 했다는 거예요. 제가 ‘이 정도 하면 끝나겠지’ 하고 쳐낸 공을 선수들이 다 받아치니까 긴장을 늦출 수가 없더라고요. 서로 다른 플레이를 통해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채울 수 있어서 동료 선수가 참 고마웠어요. 예전 같으면 공 하나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며 자책했을 텐데, 그걸 교훈 삼아 부족한 점들을 미리 파악해서 대비를 하니까 경기력도 점점 향상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선수 입장에선 자신이 노력한 만큼 시합에서 기량을 발휘하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모든 선수들이 마음 빼기를 통해 최고의 기량으로 멋진 플레이를 펼쳤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모든 선수들을 응원합니다. 파이팅!!!

이름 없는 들꽃처럼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코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조각상
<피에타>를 제외하고는 사인이 없다고 합니다.
그 유래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바티칸의 시스티나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성당 출입을 막고
성당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습니다.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그는 이 일에 모든 열정을 바쳤습니다.
무려 4년 후, 그는 마지막으로 사인을 한 뒤 드디어 붓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눈앞의 광경에 감탄하고 맙니다
눈부신 햇살과 푸른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새들,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나무….
그때 미켈란젤로의 마음에 한 자락 깨침이 일었습니다.
‘신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고도
어디에도 이것이 자신의 솜씨임을 알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나는 기껏 벽화 하나 그려 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하다니….’
그는 즉시 성당으로 돌아가 자신의 사인을 지워 버렸습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그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남기지 않았다 합니다.
그거 내가 한 거야, 그게 내 생각이었다니까….
뭐 굳이 생색을 낸다고까지 할 건 없습니다만,
뭔가를 이뤄낸 후 ‘내가 했다 하는 그 마음’이 없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무렴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어, 은근 ‘나, 나’ 하게 되지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정말로
저 이름 없는 들꽃처럼, 저 이름 없는 새처럼 살아간다면
진심으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무런 흔적 없이 살아도,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 행복이 진짜라고, 늘 변치 않는,
저 자연의 아름다움이 말해줍니다.

마음 이전의마음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떠나가는 수많은 것들은
대자연서 왔다가 대자연으로 가고 말구나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인간이 살아가듯이
그 마음 이전의 마음이 대자연의 마음이라
오고 가도 대자연은 말없이 있고
가고 오고 해도 대자연은 말없이 있으나
형상의 일체가 가고 오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은 미완성이라
일체가 나온 그 근본 자리에 간 자만이
오고 감의 섭리를 알 것이다
이 세상에 일체의 것이 다 변해도
자연을 낸 본래의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고 이것만이 진짜인 참인 것이다
 
사람이 이 마음 가지고 있지 않고
이 마음의 나라에 나 있지 않아
사람은 죽어 있는 것이다
있는 참세상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의 세상에 인간이 살고 있기에
인간은 가진 그 마음 안에서 갇혀 영원히 죽고 말 것이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비굴하고 몹쓸 존재임 알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참 될 자격이 있고
자기가 무엇을 자꾸 먹고 챙기려는 자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자기가 이루려고 하고 자기가 되려고 하는 자는
진리인 도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참은 만상의 이전의 자리요
참은 인간 형상과 마음 이전의 자리이기에
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마음 몸이 없어졌을 때
참의 나라에 갈 수가 있고
이 참의 나라에 거듭 다시 나는 것은
참 나라의 주인이 할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는 자만이
참 나라에 다시 나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서 천극락에 나 있지 않으면 영원히 죽고 말 것이다
내 마음이 우주의 본래로 되돌아가서
그 본래에서 다시 나지 않고는
영원이란 단어를 붙여서도 안 되고 붙일 수도 없다
영원은 단지 이곳밖에 없고 이곳만이 영생불사신이고
또 내가 이 불사신으로 다시 난다
진리는 이곳이고 진리로 거듭 다시 난 자만 살 것이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북덕 바람

어머니가 살고 계신 동네 근처로 근무지를 옮겨 일 년을 살았다. 떨어져 있을 때는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늘 미안할 뿐이었는데, 막상 함께 살게 되니 괜한 일로 속상할 때가 많았다.

작년 김장철이었다. 퇴근하고 대문을 들어서니, 여기저기 배추 이파리와 김장용 비닐 같은 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어머니가 또 혼자 기어코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수돗가 커다란 물통에 소금 간을 절인 배추가 가득 차 있는 걸 보니 왈칵 화가 났다.

“지금 혼자 뭐 하는 겁니까?”
“내일 모레 비도 오고 더 추워진다고 해서….”
“김장은 다음 주에 다 같이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어머니는 작년에도 혼자 김장해서 우리들 애간장을 태웠다. 올해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또다시 혼자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모기 소리만 하게 말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배추 간물 씻어낼 때 자네가 좀 도와주게.”

나는 들은 척 만 척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슬그머니 거실로 나가보았더니, 거실에 빨간 고무장갑과 털모자와 마스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도 완전 무장을 하고 조용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두워져가는 마당에서 찬물에 배추 포기를 마구 흔들어 헹구었다. 하지만 갑갑한 내 속의 간물은 빠지지가 않았다. 배추 전쟁은 밤 아홉 시가 넘어 끝났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이구, 됐다. 이제 시나브로 양념만 치대면 된다.”

나는 아침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 대신 “나, 갑니다”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 대문을 나섰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오니 저녁상에 몽어회 한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새벽 시장에 가면 갯가에 사는 할머니들이 싱싱한 어물을 팔았다. 그중 갯벌에 쳐놓은 발에 걸린 잡어들은 진짜로 싸고 싱싱한 횟감이었다. 어머니는 몽어새끼 삼천 원어치를 사와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를 기다렸다. 저녁 반주 삼아 꼬들꼬들한 몽어회를 곁들여 소주 한잔을 털어 넣었더니, 뭉쳤던 화가 스르르 풀려 내려갔다. 참 신기했다. 나는 가끔 그렇게 내 풀에 토라졌다가 풀어지곤 하였다.

어느덧 파견 기간이 끝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복귀할 때가 가까워졌다. 새벽녘,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어머니가 비설거지를 하나 싶어 불을 켜보니, 당신은 아랫목에 콜콜 잘 주무시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바람 소리였다. 밤바람은 괜히 유리창을 툭툭 치고, 낡은 창고 문을 흔들고, 마당에 있던 고양이 밥그릇을 끌고 다녔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고양이 밥그릇을 제자리에 두고, 거름통 앞에서 허리춤을 풀고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금이 간 듯 여기저기 샛별이 반짝였다. 도깨비 같이 바람이 뒤로 돌아와 내 등을 밀었다. 하지만 소리만 컸지 하나도 맵지 않은 특이한 겨울바람이었다. 방에 들어오니 어머니도 잠을 깼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바람이 왜 저렇게 유별하게 분답니까?”
“북덕 바람이여.”
어머니는 그 바람을 내게 말해주었다.

옛날 손으로 농사짓던 시절, 늦가을 벼를 타작할 때 부는 바람이라고 했다. 해가 떨어지는 벌판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은, 지푸라기와 검불은 멀리 날려 보내고 알곡만 떨어지게 할 만큼만 불었단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도 북덕 바람이 불었다. 내 부끄러운 잡념을 검불처럼 날려 보내고, 알곡 같은 모정(母情)만 고스란히 남겨주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

정리 김혜진

& 자료 제공 환기미술관

수화(樹話) 김환기.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탐구하고 도전했다. 국내에서의 명성과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미술의 중심지 파리, 뉴욕으로 향했다. 항아리, 달, 산 등 한국적인 소재에서 더 나아가 점, 선, 면의 순수 조형을 통해 인간의 근원인 자연과 영원한 우주로의 회귀를 노래한 화백 김환기.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나는 남방의 따사로운 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랐다. 고향 우리 집 문간을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김환기는 1913년 신안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안좌도에서 대지주였던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육지와 통하는 연락선조차 드문 시대였지만 김환기는 화실까지 두고 그림 공부에 매진할 정도로 미술에 빠져 있었다. 아름다운 고향 풍경은 그의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 1933년 김환기는 니혼대학 미술학부에 입학, 일본 추상미술의 선구자들과 교류하며 추상화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새로운 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환기는 이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체화해서 표현할 것인가 고뇌했다. 그의 초기작 <론도>(1938)는 당시 풍경화, 인물화 위주였던 한국 화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곡선과 직선, 기하학적 형태로 구상한 작품으로, 그는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론도> 61×71.5cm. 캔버스에 유채. 1938.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
해방 전후 김환기는 서울 성북동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미에 심취하게 된다. 1944년부터 6~7년간 매일 조선 백자 항아리와 목공예를 살 정도로 그 애정이 각별했다. 김환기에게 달항아리는 예술의 원천이었고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평범한 둥근 모양, 평범한 백색…. 그는 특히 그 평범함에 주목했다. 거기엔 어떤 기교도, 위대한 미술품을 만들려는 도공의 욕심도 느낄 수 없었다. 도공의 무심(無心)은 자연과 일치했고, 그 결과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그릇을 탄생시켰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내가 그리는 그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달이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 어찌하면 사람이 이런 백자 항아리를 만들었을꼬. 싸늘한 사기로되 다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정원에 달항아리를 놓고‘달 뜬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는 1950년대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려 ‘달항아리 화가’로도 불렸다.

아내 김향안과 함께. 김향안의 내조는 평생 김환기 작품에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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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항아리> 53×37cm.
캔버스에 유채. 1957.

“저 단순한 구도,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일 거야.”
1956년 김환기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아내 김향안을 따라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간다. 그는 아침 9시에서 자정이 넘도록, 앞이 캄캄해서 지척이 안 보이는 절벽에 서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붓을 들었다. 그곳에서 피카소, 루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그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강력한 노래가 있다는 것.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부르던 노래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거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그가 알게 된 한국의 정서는 고향의 푸른 하늘, 푸른 바다였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푸른색이 주조색으로 등장한다. 산월, 항아리, 매화 등을 현대적으로 조화롭게 담아내 아름다운 걸작들을 완성시켰고, 한국인 최초로 파리에서 6번의 개인전을 여는 성과를 이뤄낸다. 이어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명예상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또 한 번 도전에 나선다. 현대 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으로 떠난 것이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당시 뉴욕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기존 순수 예술의 권위는 무너지고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가 대중문화로 자리하고 있었다. 김환기에겐 충격이었다. 국내에서는 최고의 작가로서 명예를 누렸지만 뉴욕에서는 무명의 작가일 뿐이었다. 작품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부수는 용기가 필요했다’는 그의 말처럼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는 사라지고 가장 순수한 조형 형태인 점, 선, 면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생계를 잇기 위해 육체노동을 하는 등 좌절과 고통의 시간은 계속됐다. 그러던 중 친구 김광섭 시인이 보내준 시 ‘저녁에’를 읽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라는 전면점화(全面點畵)를 통해 선보이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다.
캔버스 가득 채운 수많은 점들은 그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고향의 산천이었고, 가족, 친구, 제자들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울림을 전해주었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이어 그의 작품은 우주와 같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추상의 세계로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린 점 하나하나는 김환기가 온 생애 다해 도달한, 인간의 근원인 자연의 세계, 영원의 노래였던 것이다.

<15-VI-65> 209×158cm. 캔버스에 유채.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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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IV-70 #166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232×172cm. 캔버스에 유채. 1970.
이 작품은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김환기(1913-1974)는 현대 미술의 중심, 파리와 뉴욕에까지 이름을 알린 한국 대표 화가로, 3천여 점의 유작은 그의 열정을 말해줍니다. 이 글은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환기 저)<김환기 탄생 100주년 도록1>(환기미술관 저)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가 12월 31일까지 환기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열린 고민 상담소


제 고민은요?

저는 30대 초반의 직장남입니다. 몇 달 전 저희 팀에 신입 직원이 왔는데, 싹싹하고 잘생기고 능력도 뛰어납니다. 회의 시간 때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내니, 팀원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럴 때마다 질투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왔지만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라 괜히 부아가 치밀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후배를 혼내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속 좁은 내가 싫고, 곧 후배에게 따라잡힐 것 같아서 불안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입니다. 부끄럽지만 마음을 제어하기 어려워 고민을 보냅니다.

제 생각은요!

우선 이렇게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먼저 큰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제 주변에도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쿨하게 한마디 해줍니다. “그런 애들 오래 못 가~.”(^^) 물론 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후배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럴 때는 선배로서 먼저 그 후배에게 다가가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그 후배도 선배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회의 때 질투가 올라오더라도 꾹 누르고 우와~ 정말 좋은 아이디어다, 대단하다, 한마디만 해봐주세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인정해주고 종종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살아온 이야기, 서로를 향한 마음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다 보면, 후배를 향한 마음도 정리가 되고, 후배도 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서 관계도 돈독해지게 될 겁니다.
사실 처음에는 능력 있는 후배가 더 빛나 보이는 것 같지만, 뒤에서 그 후배를 인정하고 지원해주는 든든한 산 같은 선배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 눈에는 더 빛나 보이는 법이랍니다.– 박건

계속 자기만족의 기준을 밖에서만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배를 남들이 인정해주는 모습에 질투를 느끼는 건, 그만큼 남의 평가에 의해 스스로도 평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외부의 조건이나 평가에만 집중하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어느 수준까지 성장하고 싶은지, 자기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은 잃어버린 채 계속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숙제인 듯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떠나서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어떤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원하는 수준의 선은 어디까지이고,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어느 선인가. 그리고 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다 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주변에서 나를 인정해줄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이미 최선의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원진

님의 고민은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저도 이삼십 대 직장생활을 할 땐 불안증의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하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를 돌아보며 마음을 버려볼 기회를 가지면서,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지만요. 아무도 불안해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혼자서 부정적인 데 에너지를 다 쏟으며 삶을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님만의 강점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약점을 보완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그 강점을 강화해 나가길 바랍니다. 자신의 강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다 보면, 후배를 향한 질투 등으로 쓸데없이 삶을 소모하는 일들도 줄어들 겁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정도가 다를 뿐 대부분 자기 한계를 느낍니다. 저 또한 한 부서의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느낍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며 서로서로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지요.
사실 임원이 되고 보니 아랫사람을 볼 때 단지 능력만을 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심성, 태도, 꾸준함, 긍정적 성향, 뭔가 매달려서 끝까지 해보려고 하는 자세,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보게 되지요. 자꾸만 한계를 느낀다면 남보다 세 배는 더 노력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보세요. 그 노력의 결실은 클 것입니다. – 목경수

지금 고민 중이신가요. 혼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함께 나눠보아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엄마가 20년 넘게 저와 아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오셔서 온몸에 근육 통증이 있으시고 불면증에 소화장애 불안증 우울증까지 있습니다. 병원에선 아무 병명이 없다고 하여 신경과 약을 복용 중입니다. 몇 년 동안 해오던 일도 접으시고, 계속 누워만 계십니다. 운동을 하라고 해도 기운이 생겨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과거에 있었던 기억들만 나는지 자꾸 죽고 싶다며 눈물만 흘리십니다. 아빠는 따로 살고, 저도 취업 준비 중이라 예전처럼 옆에 있어드릴 수만도 없습니다. 엄마를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정말 답답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바른 생활 시아버지와 불량 며느리

며칠 전 아내와 그리고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과 넷이서 고향으로 벌초를 갔다 왔습니다.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지만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고향 가는 길이 기쁘신지 주무시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연신 이야기꽃을 피우십니다. 이때 항상 말동무가 되어드리는 게 아내입니다.
벌초하러 올라가는 길목, 아내가 밤나무 밑에 멈췄습니다.
“어머나, 밤이 벌써 익었네요. 아버님 잠깐만요, 여기서 밤 좀 따고 가요~~.”
진격의 아버지는 가는 길을 멈추지도 않고 한마디 하십니다.
“사 먹어~~~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아버지의 시크한 한마디에 아내가 발끈합니다.
“아버님은… 이런 게 다 재미죠~~ 얼마나 좋아요, 산에서 밤도 줍고.”
아버지가 잠시 멈춰서 다시 한마디 합니다.

“사 먹는 게 맛있어.”

한참 벌초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아버지를 급히 찾습니다.
“아버님, 이 버섯 먹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아내의 손에 놓인 버섯을 보는 둥 마는 둥 한마디 합니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라. 버섯 먹고 싶으면 사서 먹어~~.”
아내 역시 아버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연신 버섯을 들춰 봅니다. 그 모습에 아버지가 다시 한마디 합니다.
“먹는 버섯인지 독버섯인지 구분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애쓰지 말고 슈퍼에서 사먹어~~ 슈퍼에선 독버섯 안 팔아~~ 무슨 구분법이고 지랄이고 그냥 사 먹어~~.”

백일성(43)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최근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벌초를 다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아내가 밤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그리고 이내 발걸음을 옮기다 차를 세워둔 마을 입구에 다다라서 대추나무를 발견합니다.
“어머나, 대추 큰 거 봐요 아버님, 한 움큼만 따서 차례 상에 올리면 좋겠다.”
이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실룩이자 아내가 자진 납세를 합니다.
“알았어요~~ 사 먹을게요~~ 사 먹는 대추가 맛있어요~~ 네네.”
아버지가 실룩이던 입을 멈추는가 했더니 기어이 한마디 더 하십니다.
“남의 울타리 안에 있는 건 떨어진 거라도 행여나 줍지 마라. 이 세상에 안 파는 거 없다. 다 사 먹어~~ 그게 세상에서 젤 맛있고 몸도 맘도 다 편해.”
차를 타고 나오는 길에 아내가 깨밭을 지나치며 한마디 합니다.
“아… 저 깻잎….”
그리고 아버지 눈치를 보더니 아내의 말끝이 흐려지며,
“사 먹는 게 더 맛나겠다….”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아내와 어머니는 화장실에 가고 아버지와 저는 휴게소 장터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홍삼캔디 하나를 시식하시고 계셨습니다.
“한 봉지 사 드릴까요?”
저의 물음에 아버지는 저에게만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이런 데서 사면 비싸.”
그리고 슬그머니 시식용 캔디 한 개를 더 챙기더니 차로 가셨습니다. 언제 나왔는지 아내가 차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만 원짜리 홍삼캔디 한 봉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다닥 계산을 마치더니 차로 뛰어갑니다. 얼떨결에 같이 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데 아내가 아버지에게 사탕 봉지를 내밀며 한마디 합니다.
“아버님~~~ 사탕 드세요. 그리고 그렇게 얻어 드시지 말고요. 사 드세요~~ 꼭~~ 사~~~ 드세요~~~ 아셨죠? 아버님~ 사 먹는 게 젤 맛있어요~~~.”
표정이 영 떨떠름한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아내에게 전합니다.
“너도 이거나 먹어라.”
언제 주우셨는지 아내의 손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밤이 몇 개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차 안에서는 아버지는 사탕을 먹고 아내는 밤을 까먹었습니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둘이 입에 뭘 물고 있으니 세상이 다 조용하다.
진작 뭘 물려 놓을 걸. 에이구, 시끄러워.”

강화는 대학, 시골 어르신들의 푸근한 인생 강좌

취재 문진정

2011년 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후 평균 연령이 높아진 강화도 온수리에 20대의 용감한 자매가 발을 디뎠다. ‘OO은 대학’ 프로젝트의 하나로 강화 ‘온수리대학’을 만든 우민정, 우민희 자매다. ‘답 없는 고민들만 가득한 도시의 청년들이여, 농촌 마을을 돌아보면서 한 템포 쉬어가자’는 취지로 시작한 강화 온수리대학에는 현재 우민희, 신일진, 조성현, 세 명의 술래(‘OO은 대학’에 참여하는 청년들을 부르는 호칭)가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 무작정 들어가 지역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공통 관심사를 찾기 힘든 어르신들을 일일이 만나 대화를 이어가야 했고, 혹여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닌지 곱지 않은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할머니들 옆에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면서 마음의 벽을 낮추어갔다.

우리나라 변천사가 인생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순무 김치 할머니, 100년 전통 막걸리 만드는 법을 전수해주신 양조장 아저씨, ‘유행은 돌고 돈다’는 철학으로 강화도에 3명의 미용사를 키워내신 은하미장원 할머니 등 훌륭한 교수님들도 발굴했다. 그리고 이제 말투는 조금 투박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듯한 어르신들의 진짜 속마음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청년들은 ‘마을출장대학’을 통해 이곳에서 배움을 얻어가고, 어르신들은 자신의 인생 노하우를 가르쳐주며 기쁨을 나누는 대학. 한 걸음 느리게 서로에게 귀 기울여줄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강화는 대학’의 베이스캠프인 ‘모두의 별장’. 소셜펀딩을 통해 마련한 보증금으로 지난 6월 문을 열었다. 11월의 마을 축제, 청소년 방학 캠프 등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술래 유자(신일진) 이야기
처음에는 이렇게 조용한 시골에서 무슨 재미로 지낼까 했는데 어르신들의 오랜 지혜를 배우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순무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저희는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드리기도 하고요. ‘이 나이에 무슨 교수냐’ 쑥스러워하시다가도 저희가 만든 교수 위촉장을 받으실 때는 경건함, 기대와 설렘, 뿌듯함이 다 느껴져요. 그래서 더 보람이 느껴지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술래 하루(우민희) 이야기

도시의 삶은 늘 바쁘고 복잡했던 것 같아요. 지하철 환승은 너무 어렵고 마트 계산대에서는 다음 손님 때문에 쫓겨나고요. 그러다가 여기 강화도에 왔는데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도 모두가 여유롭게 볼 수 있는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이런 소통 방식, 서로 들어주고 지켜봐줄 수 있는 시간들을 많은 청년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제 죽을 텐데 내가 뭘 해’ 하시는 할머니들이 계세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참 속상하죠. 그런 어르신들과 작은 것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서 더 다가가려고 해요. 3년째 되니까 이제 어르신들도 청년들 온다고 ‘사탕 하나 사놔야겠네’ 하세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서로 다가가고 믿음을 쌓아나가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강화도 온수리 양조장에 학생들이 만든
간판이 걸렸다.
‘강화는 대학’ 교수님들이 청춘에게 고함
모이세 붕어빵집의 김형섭 교수님
인내심을 갖고 하는 것이 붕어빵 맛의 비결이다. 나는 항상 손님들에게 얘기를 듣고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여러분들도 무슨 일을 선택하든 꾸준히 끝까지 끌고나가다 보면 걱정할 게 없다.
귀금속점 광명당의 유환규 교수님
청춘이여! 노력에는 나이가 없다. 내가 중학교도 중퇴한 사람이지만 세상 속에서 살면서 공부했기에 알파벳도 한자도 알고 외국 간판도 신문도 볼 줄 안다. 모든 건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 돈이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우리들의 노바이처

“왜 그렇게 울었어요? 그깟 놈 보내기가 그렇게 서러웠어요?”
두 번째 수술(전절제) 후 첫 회진 때 오셔서 하신 노동영 박사님의 첫 말씀이었다.
수술 결과가 어땠는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이 난다.

긴장되고 아마득한 상황에서도 박사님의 ‘툭’ 던지는 한마디는 긍정의 힘이 되어 잔뜩 웅크렸던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대한민국 최고 명의답지 않은 소탈함과 친근함에 두려움은 어느덧 절반이 된다. 대부분의 환자가 여성이라는 특성도 있겠지만 몇 백 명의 여성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게 우리와 한마음이 되어 잘 어울리신다.

어느 해인가 워터파크가 있는 리조트로 수련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곳 풀장에서 유일한 청일점이었던 박사님이 하얀 가운 대신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환자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느꼈었다. 환우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시간을 쪼개어 함께하시는 박사님, 우리 또한 박사님이 떴다 하면 구름처럼 모여든다.

등산, 야유회, 수련회, 트레킹…. 오죽하면 노교주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환자에 대한 배려는 수술실 안에서도 나타난다. 서울대 의대 오케스트라 지도 교수이기도 한 박사님은 공포에 떠는 환자를 위해 수술실에서도 은은한 음악을 틀어놓고 특유의 부드럽고 개구진 미소로 맞이하신다.

암 병원장이기도 하신 박사님은 한국유방건강재단 상임이사장이기도 하고 한국유방건강재단 설립 초기인 2000년부터 이사로서 아모레퍼시픽과 함께 국내 핑크리본캠페인을 해왔으며, 유방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유방암 조기 검진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고 계신다.
학술적으로는 유방암 수술 방법인 감시림프절 생검술의 장기적 안전성을 세계 최초로 입증하는 등 국내 유방암 연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끌어왔으며 2011년에는 분쉬의학상, 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학회에 따르면 유방암의 맞춤 진단 및 치료를 위한 7건의 바이오마커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와 관련한 논문 170여 편을 국제학술잡지에 게재했다고 한다.

외과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분쉬상 수상 소감에서 박사님은 “환자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더 많은 환자의 완치를 위해 계속 연구하고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언제 어디서나 환자가 우선이고 환자만이 박사님 가슴 안에 있는 것 같은 대목이다.
당신의 인생도 리셋을 할 때가 되었다며 함께하셨던 장장 13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5천 미터 정상을 300미터 남기고 고산병으로 하산해야 했던 박사님.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면서도 죽네, 사네, 울고, 불고하던 그녀들이 당신 걸음을 앞질러 정신력과 체력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씩씩하게 설산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셨다.

그 많은 환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 알아보시는 세심함, 어마어마한 진단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설명해주시는 자상함, 환우회 모임 때는 항상 드레스 코드를 핑크로 하시는 패션 센스, 체력을 길러야 많은 환자를 돌보신다며 스스로의 관리에도 철저하신 강인함을 지니신 분. 유방암이 아니었으면 못 만났을 큰 분을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져가신 만큼 주는가 보다. 이런 분을 내게 보내주셨으니 말이다.

지난 5월에 홍콩유방암협회와 한인여성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드레곤스백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박사님의 수술로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된 서혜경씨도 함께했는데 어찌나 박사님에 대한 사랑이 큰지 1,500석 홀에서 박사님만을 위한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고, 트레킹하는 환우들을 산 중턱에 모아놓고 스승의 노래를 즉석 개사하여 연습을 시켜서 박사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었다. 마지막 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 영원하리~ 노~바이처~~’
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노동영 박사이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분께 내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나누어 드리고 싶다.

김지윤 54세. 여행치유가. 인천시 서구 가정동

‘고고씽 킬리만자로~!!!’
내년에는 꼭 킬리만자로에 함께 가자는, 김지윤 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노동영 박사님께 난 화분을 보내드렸습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 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파는 화분만 화분이 아니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시장에 나가 보면 화초보다 화분 값이 훨씬 비싸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안에 화분으로 쓸 만한 물건이 아주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요즘 대세인 다육식물의 경우 해물탕을 먹은 후에 남은 소라 껍데기나 굴 껍데기에 흙을 채우고 작은 다육식물을 심으면 흔히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답니다. 달걀 껍데기도 좋아요. 외국 인테리어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이템은 보기에도 재밌지만 달걀 안의 얇은 막이 영양제 구실을 해서 식물이 좋아하지요.

또한 아이가 어릴 때 신다가 작아진 고무장화나 장난감을 화분으로 만들어주면, 매일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아이 마음에는 정서의 안정과 함께 자연의 신비도 자란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화분 재료는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가서 쓰지 못하게 된 사기그릇일 거예요.

그런 사기그릇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만들어 보세요. 평범한 그릇의 깜짝 변신,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신기함과 즐거움은 내 몸속의 엔도르핀을 퐁퐁 샘솟게 해줍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얼룩덜룩해지고 찌그러진 주전자도 개성 넘치는 화분이 될 수 있고, 녹슨 깡통은 그야말로 빈티지한 멋이 철철 흘러넘치는 멋진 화분으로 부활하지요.

이런 물건들을 어떻게 화분으로 만드느냐고요? 물구멍만 만들어주면 되기 때문에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요. 못과 망치, 또는 송곳을 이용해 물건의 밑바닥에 작은 구멍만 뚫어주면 된답니다. 우리 주변 흔한 물건들의 화분으로의 재탄생! 돈 주고 산 것보다 훨씬 멋지고 매력적인 화분 만들기 이후 저의 가드닝이 백배는 더 재밌어졌답니다. 자,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화분을 만들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