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의 스케치북> 호청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불만은 바로 이 프로그램의 방영 시간이다. 불금 아니 불금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늦은 시간, 12시 하고도 20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시작된다. 아니 그것도 운이 ‘좋으면’이다. 요즘처럼 월드컵이라도 하면, 그야말로 함흥차사이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5주년 방송이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5주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브라질 월드컵이 16강전에 앞서 하루를 쉬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MC인 유희열은, 그것이 바로 ‘가늘고 길게’ 5주년까지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저력(?) 중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밤 11시대에 공중파, 케이블을 막론하고, 야심차게 편성되었던 모든 음악 프로그램들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정말 그 애매한 시간대는, 제약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일 수도 있겠단 ‘웃픈’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무려 5년이나 지속해온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야무지게도, 내친김에, 유희열이 송해 할아버지 나이가 될 때까지 해보겠단 포부를 펼친다. 그리고 그 포부의 ‘현현’으로, 5주년 특집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장수 프로그램 특집이다. 이른바 KBS의 장수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 <뮤직 뱅크> 그리고 <열린 음악회>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방문한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의 시그널이 울리고, 송해 할아버지의 우렁찬 ‘전국 노래 자랑~!’이라는 멘트가 울려 퍼지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전국노래자랑>의 단골 초청 가수 박구윤의 트로트 ‘뿐이고’가 화려한 무대를 펼친다. 오래도록 <열린 음악회>를 지켜왔던 황수경 아나운서가 그 내공의 한 자락을 펼치고, <열린 음악회> 하면 떠오르는 가수 인순이가, 그 무대에서 즐겨 불렀던 <거위의 꿈>을 수화와 함께 열창한다.
5주년 특집으로, <전국노래자랑>과 <열린 음악회>의 무대를 고스란히 퍼 나른,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보고 있노라면,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는, 자부심과 정의를 확인하게 된다.
‘고품격 음악 방송’으로써, 음악이 자리한 그곳의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 그것의 가치와 존재를 제대로 확인시켜 주는, 우리 시대의 어쩌면 유일한 방송,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존재론을, 5주년 특집으로 다시 한 번 스스로 증명해낸다.
덕분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가수들의 절창은 물론, 가수들의 절창을 가능케 해준 음악인으로서의 연주자들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5주년을 맞이하여, 그 가수와 음악인들에게 오래도록 무대를 제공해 왔던 ‘장수 무대’들의 존재를 새삼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 <뮤직 뱅크>를 즐기다, 철들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맛들이고, 나이가 지긋해져 가면서 <열린 음악회>가 편해지고, <전국노래자랑>이 흥겨워지는, KBS의 음악 프로그램만으로, 마치 누군가의 일생을 조망하게 되는 듯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이유’라는 가수를 발견해 주고, ‘십센치’의 붐을 선도했으며, ‘장미여관’을 발굴했던, 음악 프로그램 본연의 몫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5주년에 즈음하여, 스스로에게 개근상을 수여하듯, 되돌아본다.
이것이 또 하나의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이다. ‘인기 가수’가 된 많은 가수들이, 일찍이 유희열의 극찬을 받으며 떨리는 모습으로 이 무대에 섰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가기 전에, 그들과 조우했던 ‘선견지명’의 맛은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호청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몫이었다.
그렇게,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이 할 수 있는 각종 특집들과,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의 매의 눈으로, 오늘의 5주년을 만들었다. 늦은 밤의 기다림도, 변심한 애인처럼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만남도 마다치 않을 터이니, 부디 오래오래 해먹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