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자막단

취재 문진정

일 년 동안 국내에서 개최되는 영화제가 무려 100여 개. 크고 작은 영화 축제마다 많게는 100명이 넘는 제작진들이 고군분투하며 전 세계 영화들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영화제들은 대개 열흘 남짓한 기간 안에 끝나기 때문에 영화제 제작진들은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서 흩어진다. 20대 초반부터 영화제 자막 팀에서 일해 온 김빈(38)씨 역시 이런 현실과 맞닥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가는 대신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영화제 자막을 제작하는 사회적기업 ‘21세기자막단’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라도 자막 없이는 무용지물. 기본적인 줄거리 전달 외에도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언어,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볼 때는 전혀 생뚱맞은 영화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막이다. 그렇기에 자막단 멤버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또 보고, 관객의 수준에 딱 맞는 단어를 찾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며 1년에 350편이 넘는 영화 자막을 만든다. 이들이 본업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숨겨진 명작들을 발굴해 이웃과 나누는 일이다. 그냥 묻어두기에는 아까운 훌륭한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과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매달 사무실 옥상에서, 혹은 전국 곳곳의 기관을 직접 찾아다니며 무료 상영회를 진행해왔다.

환경 다큐멘터리에 푹 빠진 갯벌의 아이들, 갑작스런 정전에도 꼼짝 없이 앉아 영화를 기다리는 네팔 사람들까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보며 오히려 활력을 얻게 되었다는 김빈 대표. 스크린 앞에 모여 앉아 울고 웃으며 따듯한 공감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꿈이자 자막단을 운영하는 이유이다.

지난해까지 ‘21세기자막단’ 사무실 옥상에서 매달 2번 이상 루프탑 활력상영회를, 매달 1번씩은 ‘찾아가는 활력상영회’를 열어 국내는 물론 인도, 네팔 등 해외의 관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올해는 사회적기업을 위한 사회적 경제 관련 영화들을 자료화하여 상영하는 방안, 그리고 다문화 이주민들에게 고국의 언어로 자막을 제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21stcentury.co.kr

김빈 대표 이야기

자막단을 만들기 전부터 팀원들과 공유해오던 생각이 사회적 활동을 하자는 거였어요. 정말 열심히 만든 영화, 의미 있고 재미있는 영화가 많은데 영화제에 가지 않으면 보기 어렵고 아예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과 영화를 함께 보고 싶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폐교될 위험에 처한 벌교 낙성초등학교 소식을 접했고 힘들어할 그 아이들을 위해 2012년 겨울, 제1회 ‘찾아가는 활력상영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화 소외 계층이라는 것이 경제적인 개념을 넘어서 어르신들, 서울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 서울에 살더라도 부모가 너무 바빠서 문화생활을 함께할 수 없는 아이들 모두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과 의미 있는 영화를 나누면서 문화 편차를 좁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감사하게도 저희의 취지에 공감해주시고 무료로 영화를 지원해주시는 영화감독님들도 많이 계세요. 어렵게 연락이 닿은 외국 감독님의 경우에는 오히려 관객과 만나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래서인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싶고, 좋은 문화 콘텐츠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자막단을 하는 동안 이런 저희의 진심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저의 목표이자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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