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그 사람을 떠올린다. 잊을 수 없어 기억의 갈피에 새겨두고 있는 것이다.
절친한 친구도 아니고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 안다면 겨릅대처럼 약한 체질에 바보스러운 데다가 간질병까지 앓는 40대의 지체장애자라는 정도이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내가 40여 년 살아온 자그마한 진거리에서 밥 동냥 하는 걸인이었다. 막말로 거지 비렁뱅이라는 말이다.
거지란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 사람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삼검불처럼 헝클어진 뿌연 머리, 구질구질하고 너덜너덜한 옷에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데 때가 가득 낀 손에는 언제나 작은 가방 하나와 사기물이 떨어진 법랑 고뿌 하나 그리고 뚜껑이 오그라든 군용 밥통이 들려 있었다.
그 사람의 하루 일과는 아침부터 골목길을 오르내리면서 가가호호의 대문을 두드리는 것인데 그렇게 먹을 것을 조금 얻으면 휘파람을 불며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냉대를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그를 보면 온역신을 만난 듯이 피하였고 아예 대문 밖에서 쫓아버리곤 했다.
그런다고 인심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내남이 다 식량난으로 배를 곯던 세월에 아무리 동정심이 많다 해도 매일같이 쌀과 밥을 퍼줄 만한 집이 어디 그리 많았을까? 조무래기들의 기시는 더구나 심했는 바 무리를 지어 따라다니며 놀려주기, 욕하기, 침 뱉기에 돌 총질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동냥길은 그만큼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마음이 약해서 아무런 항변도 없이 고작 화내는 흉내를 내다가 히쭉 웃으면 끝이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히쭉이’라는 별호를 달아주었다.
훗날 내가 교편을 잡고 출근할 때 히쭉이를 만난 것은 간이 음식점 앞에서였다.
바로 그 무렵부터 히쭉이의 동냥 반경은 집집의 대문을 두드리던 데로부터 보다 안전하고 구걸 확률이 높은 음식점으로 옮겨진 것이다. 히쭉이는 진거리에 있는 역전식당, 대중반점과 회족식당을 전전하면서 구걸하였는데 그 방법을 살펴보니 먼저 유리 창문으로 지켜보다가 어느 상의 손님이 일어나면 즉시로 뛰어 들어가 먹다 남긴 음식을 마구 집어 먹는다. 그러다가 혹시 만두나 빵 조각을 만나면 가방에 집어 넣고 밥이 있으면 밥통에 담고 반반한 반찬이 있으면 법랑 고뿌에 담으면서 운이 좋다는 듯이 히쭉 웃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서였다. 큰길가에 숱한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기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보다 하고 다가서 보니 히쭉이가 쓰러진 채로 입에 거품을 가득 물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간질병이 발작한 것이다. 예사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하나 둘 제 갈 길을 가고 시간이 꽤나 지나서야 의식을 회복한 히쭉이가 언제 그랬냐 싶게 부스스 털고 일어났다. 히쭉이는 아무 말 없이 히쭉 웃더니 땅에 쏟아진 콩나물 반찬과 밥을 끌어 담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팔부 취급도 못 받는 히쭉이가 매일같이 부지런히 밥 동냥을 다니는 것은 자기 하나의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집에 홀로 계시는, 바깥출입도 못 하는 칠십 고령의 앉은뱅이 노모(老母)를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남들이야 웃건 말건 나는 그날 히쭉이가 한 말에 진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장애자로, 걸인으로 이 세상 밑바닥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히쭉이에게 그처럼 지극한 효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더는 히쭉이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히쭉이네 집은 철길 동쪽 마을에 있었다. 히쭉이는 운신 못 하는 엄마의 하루 세 끼 식사를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 반반한 음식을 여남 있게 얻는 날이면 나머지는 움 속에 넣었다가 다시 끓이고 덥혀 엄마에게 드리는 그런 효자였다.
그것도 음식이 변했을까 봐 먼저 맛을 보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엄마에게 드리는 그런 효자였다.
그 뒤로 나는 히쭉이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사업 전근으로 현성을 거쳐 다른 고장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이 흘러간 후에도 내가 히쭉이를 잊지 못하는 것은 거지 효자 히쭉이가 한 말이 항시 내 기억의 깊은 곳에 빛나는 거울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거울을 보면서 옛날 어느 조대의 임금님이 알았다면 효자비라도 세웠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히쭉이는 신통히도 까마귀를 닮은 인간이다. 낳아준 정, 키워준 정, 그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은혜를 갚기 위해 늙고 병든 엄마 까마귀에게 날마다 먹이를 구해다 준다는 그런 새끼 까마귀 같은 존재였다.
찍어 말해서 히쭉이는 걸인이지만 신분과는 관계없이 동양인의 가장 아름다운 사상이며 미덕인 부모에 대한 효심을 안고 효행 길을 산 사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효란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효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척도인 바, 어찌 효를 떠나 가족 사랑과 민족 사랑을 담론할 수 있으며 또 어찌 효를 떠나 참되고 바른 인생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본연의 의지와 자세로 구축된 미풍양속 중에 효라고 하는 영원히 사윌 줄 모르는 어여쁜 꽃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결 아름다운 것이리라!
이 글을 쓰는 이 시각. 나의 귓전에는 “집에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날 기다리는데…”라고 하던 히쭉이의 말이 떠날 줄 모른다. 동시에 나의 눈앞에는 쏟아진 음식을 담아 가지고 집으로 달려가던 히쭉이의 가냘픈 뒷모습이 안겨온다. 나는 지체장애자와 걸인이기 전에 인간인 히쭉이의 말과 행동에서 평생 두고 못 잊을 효의 꽃을 보고 있다.
지금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남들이 모르고 있는 히쭉이라는 효의 꽃과 그 꽃이 풍기는 효의 향기를 이 세상을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글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