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여러 형태의 가정이 있고 다양한 부류의 부모가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과 유대 관계를 쌓는 데 단 하나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함께한 시간’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시간은 피보다 깊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피를 나눈 자식과 세월을 함께한 자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두 가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료타와 미도리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남편은 일류 대기업의 인정받는 건축가이며, 엄마는 상냥하고 배려 깊은 살림꾼이다. 부부에겐 아들 케이타가 있다. 애교 넘치면서도 조숙하고 착한 케이타는 부부에게 큰 기쁨이다. 이런 부부의 행복은 어느 날 케이타가 태어난 산부인과 병원에서 전화가 오며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친아들 이름은 류세이. 유다이와 유카리 부부가 기르고 있었다. 두 가정은 병원에 맞서 함께 소송을 진행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꿀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영화는 두 가정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이에게 필요한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설파한다.
유다이는 철물점을 운영하며, 세 아이를 둔 아버지다. 그는 아들과 목욕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연날리기를 함께해주고, 놀이방에서 같이 노는 게 책임이라 여기며 아이를 늘 웃게 만든다. 반면, 료타는 다정하지만 동시에 냉정한 아버지다.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답게 그는 어떤 것이든 자신이 앞서야 하고, 정복해야만 한다. 그 역시 케이타를 사랑하지만 때로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케이타가 료타는 아쉽다. 친자 검사 결과가 나온 날, 료타는 “역시 그랬군”이라고 말한다. 료타의 그 말은 그동안 자신만큼 뛰어나지 못한 케이타를 이상하게 여긴 그의 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료타의 모습을 우리는 아니꼽게만 볼 수도 없다. 료타 그 자신도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않았다. 재혼해서 어린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줬고 그래서 그는 새어머니를 향해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료타에게 부자 관계란 그저 일직선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은 나를 닮은 존재이자 나의 분신이다. 그래서 그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존재라고 생각한다.
두 가족은 결국 아이를 바꾼다. 하지만 류세이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지 못한다. 심통을 부리고, 키워준 부모 얘기를 하며 결국 몰래 집을 나가 옛집을 찾아간다.
류세이와 케이타, 상이한 가정에서 자란 두 아이의 대비되는 모습은 짧지만 강렬하게 어떤 서글픔을 준다. 류세이는 직접 보고 싶은 부모를 찾아간다. 반면 케이타는 아버지 료타가 류세이를 찾으러 왔을 때, 벽장에 몸을 숨긴다.
류세이의 가출로 무언가를 깨달은 료타는 결국 조금씩 변화한다. 아이의 총싸움에 응해주고 함께 게임을 하며 시종일관 장난을 걸어준다. 하지만 이런 료타의 변화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그렇게’에 해당하는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들끓는 장면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해바라기 같은 숨겨진 애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료타는 케이타가 남긴 카메라 속 사진에서 자신을 향한 아이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무장해제되고 만다. 자신만을 향한, 자신만을 바라본 아이의 사랑을 깨달은 후 료타는 자신 ‘역시’ 케이타의 아버지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칫 신파로 흐를 수도 있는 소재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강한 울림을 지닌 가족 드라마로 만들었다. 피보다 서로 함께 나눈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의 순수한 연기로 보여준다. 케이타의 사랑은 료타를 해제시키고 아버지로 만들었듯이, 관객의 마음까지 해제시켜 버린다. 보는 이의 마음을 풀어헤치는, 아이의 눈망울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