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청명했던 지난 봄, 출근길에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따스한 봄 햇살과 시원한 공기가 필요할 것 같은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서다.
“어, 나야. 웬일이냐 형한테 전화를 다 하고….”
수신음이 한참 전달된 후 막 끊으려는 순간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눌함이 느껴지지만 목소리에 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반응이어서 반가웠다.
“아침은 먹었냐? 날 좋은데 바람이라도 쐬러 밖에 좀 나오지 그래?”
“너… 잔말 말고… 지금 어디냐? 지금 다 와 가니까 사무실로… 아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 거 뭐냐… 왜 새로 생겼다던 쌈밥, 후배 누구…? 에이, 집사람 바꿀게.”
적극적인 의사소통은 아직 무리인 듯 말이 매끄럽지 않다. 며칠 전 후배가 새로 개업한 쌈밥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얘긴데, 끝을 맺지 못하고 결국 부인을 바꾼다.
친구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심각한 것은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며 엉뚱한 말을 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점차 빠르게 회복되어 갔고, 하루 두어 차례씩 전화를 걸어와 완전치는 않지만 안부를 묻고 한참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부인은 그의 기억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매일 외출 허가를 받아 그가 일하던 일터를 보여주곤 한다고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침 일찍 병원을 나선 것이다.
점심시간에 만나 밥 한 공기를 간단히 비운 친구는 며칠 새 빠졌던 살이 다시 찐 것 같다며 ‘허허’ 웃었다. 두 달여 만에 함께한 친구와의 식사 자리는 유쾌하게 끝났다. 재삼 다행임을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유일하게 고향을 함께 지키며 서로 의지하던 친구인 데다, 얼마 전 지역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후배가 쓰러진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하직한 일도 있었던 터라 내심 조바심이 컸었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그 친구와 나의 고향이다. 덩치도 크고 운동 좋아하고 남성스럽고 호방한 성격의 친구.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각자 도회지로 나가 실컷 삶의 쓴맛을 맛보고 비슷한 시기에 귀향을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30대 후반에 나보다 일찍 고향에 내려와서 몇 년간 열심히 일한 친구는 결국 다시 삶의 터전을 회복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서울에서 작은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고향에 내려온 나를 따듯이 챙겨준 이가 바로 이 친구였다. 아무리 고향이라 해도 여러 가지로 변해 낯설어진 이곳에서 내가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건 이 친구의 도움이 컸다. 외모만큼이나 털털하고 정이 많았던 친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야~ 나와, 술 한잔 하자” 하며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며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무던히도 많이 헤쳐 온 친구를 보면, 재작년 때늦은 폭설 때 본 들풀이 생각난다. 내가 일하는 건물 지붕 처마 밑 금속 틈바구니에 쌓인 흙먼지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이름 모를 들풀. 눈보라를 견디지 못하고 휩쓸려 사라진 줄 알았던 들풀이 며칠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유난히도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통해 처마 끝을 바라보는 순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들풀 두 포기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몸을 흔들었지만 오히려 ‘우리, 여기 이렇게 살아 있소’ 몸짓하는 것 같았다. 거친 삭풍 속에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 배짱과 한결같음. 친구의 삶이 들풀을 닮았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지다 보니 친구가 간혹 “난 안 돼” 하며 자포자기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 이 친구는 모두 극복해낼 것이다. 머지않아 정상의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야! 커피 한 잔 타~뫄”라고 소리치며 사무실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들꽃이 다시 몸을 드러내었듯,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이내 봄을 가져다 놓듯이.
친구의 쾌유를 바라는
성락 님의 마음을 담아,
친구분께 꽃바구니를 보내드립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