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가 가장 행복했던 때
“엄마, 엄마는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예요?”
정확한 날짜는 생각나지 않지만 행복이 무엇일까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엄마에게는 그 순간이 도대체 언제였을지 궁금해 물었다. “너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그때가 26살이네. 어떻게 생각하면 바보 같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삶에 대해 아무 걱정도 없고 행복하기만 했어. 우리 집이라는 것도 있고 직장도 다니고 남편도 잘해주고 거기다 주위에서 모두 내 불룩한 배를 보고 아들 배라고 말해대는 통에 철석같이 아들인 줄 알고 그냥 믿었거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했었으니까. 아들 하나 떡 낳아서 잘 키워봐야지 했었어. 어떻게 생겼을까, 잘생겼을까, 발가락 다섯 개 손가락 다섯 개 모두 다 있을까 하는, 다른 엄마들이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당연히 건강할 거라 여겼으니까. 바보 같지?”
그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사진으로 담아 둔 엄마. 7개월쯤 자란 나를 배에 담고서 며칠 친정에 놀러간 엄마가 외할머니 집 마당에 핀 예쁜 꽃나무 옆에서 양손으로 허리춤을 살짝 짚고서 당당하게 배를 내밀고서. 약간은 수줍지만 사진 찍으려고 웃는 것이 아닌 정말 행복해서 웃고 있는 엄마. 엄마의 무릎까지 찍은 사진과 얼굴만 한 장 가득 찍은 사진 두 장을 나는 앨범에서 꺼내어 그중에 배를 내밀고 찍은 사진을 내 지갑을 열면 바로 볼 수 있게 넣어 두었다.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 사진은 액자에 넣어 책상에 두었다.
그리고 세상 태어난 이상 살다 보면 진실되지도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들을 만나 용기를 끄집어내야 할 때, 대수롭지 않은 일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려 할 때, 그 사진을 본다. 나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한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 그래 나는 그런 존재. 그렇게 태어난 존재.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기억하며 다시 입꼬리 올리고 웃기 위해.
“너를 가졌을 때는 다들 한다던 입덧은 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좋아하지도 않던 자장면이랑 순대만 먹고 싶더라구. 정말 많이도 먹었네. 그래서 네가 까무잡잡하게 나왔나 봐. 그때는 아기를 병원에서 낳아 봐야 딸인지 아들인지 알 때이니까. 병원에서 기를 쓰고 새벽까지 진통하고 있었는데 까무러쳐 버렸어.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 통증을 정신이 이겨내지 못해 그랬는지, 기운이 달려서 그랬는지 하여튼 기절을 해버려서 네가 어떻게 나왔는지도 몰라. 겨우 내 몸에서 비집고 나온 네 머리 윗부분을 의사가 집게 비수무리(의료 도구겠지만)한 걸로 끄집어냈다지 아마. 미안해. 미안해.”
엄마는 그렇게 가장 행복했던 때를 말하면서도 나에게 미안해했고,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도,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방실방실 웃느라 화장이 들뜬 나의 결혼식 날에도 미안해했다. 또 당신이 죽음과 삶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짧은 의식만 잠깐 돌아와도 병 수발하게 해서, 걱정시켜서 힘들게 만들었다며 미안해란 말만 했다.
엄마는 얼마나 나를 사랑했을까.
“네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야”라는 그 말을 수천 수만 번 들으며 자란 사람은 알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의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가더라도 무의식 안에서 바람처럼 스스로 불어대고 햇살처럼 따스하게 비추는 그 목소리의 울림의 힘을.
아줌마, 새엄마 그리고 어머니
엄마의 생신이 다가옵니다. 무얼 해드리면 기뻐하실까, 선물 고민이 한창입니다. 엄마. 나의 어머니….
아줌마. 내 나이 19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예전부터 늘 먹어오던 냉동식품이 아닌, 맛있는 카레와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무침이 한 상 가득 차려져 나를 기다립니다. 전래 동화에 나오는 우렁각시님인가요? 아빠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그분을 ‘엄마가 될 사람’으로 소개하시네요.
“안녕, 네가 진이구나? 너희들 얘기 아빠 통해서 많이 들었어” 하고 아줌마가 처음 인사를 건네십니다. 첫인상이 참 따뜻해 보이시네요. 미인이세요.
대학에 가게 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남동생, 운수업을 하시는 아빠를 두고 어떻게 떠나올까 걱정했을 때 아줌마가 이야기하시네요. 이제 우리와 같이 살면서 어린 남동생을 키워주시겠다고.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겠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대학생이 될 준비를 잘하라고요. 15살 때부터 어린 남동생을 지켜내느라,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못했었는데 아줌마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너무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네요. 내게도 이런 날이 오네요.
새엄마. 아빠와 아줌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셨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아줌마의 재혼식이 있는 날이에요. 내 나이 15살,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5년이란 시간 동안 자식 셋을 홀로 키워 오신 아빠. 찰칵! 아빠와 아줌마, 언니와 남동생, 그리고 저는 처음으로 ‘가족’이란 이름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갈 때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줌마?’ ‘새엄마?’ 한참을 고민하다가 호칭을 그냥 생략한 채 말을 시작합니다.
아직 차마 엄마라는 말은 나오질 않습니다.
아빠와 크게 다투신 어느 날, 안방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래전, 이혼을 하시기 전에 배 아파 낳은 소중한 두 아들의 사진을 보고 계시네요. 지금은 딱 저와 언니의 나이가 되어 있을 자식들 생각에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요. 왜 그렇게 제 마음이 아픈 걸까요. 새엄마가 자식들을 가슴에 묻으려는 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자주 만날 수도 없는 삶이란 걸 체념이라도 하듯이 말이에요.
제 남동생은 초등학교 시절, 밤늦게까지 혼자 집을 지켜야만 했어요. 그래서 두려움과 상처가 많아요. 친구들에게 엄마 없는 애라며 놀림을 받아 학교에 가기 싫어했던 적도 있었죠. 그럴 땐 내가 엄마이지 못한 것이 너무 화가 났고, 17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가 너무 서러웠어요. 그런 동생이 이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밝게 웃고 있네요.
새엄마, 덕분이에요.
대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 감당할 수조차 없는 빚더미에 새엄마는 가계에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며 하루 종일 식품 공장에 나가십니다. 냉난방 시설조차 없는 공장에서 두 손이 얼도록, 탈진할 것처럼 땀에 흠뻑 젖도록, 무거운 짐을 종일 날라서 두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도록 일하십니다. 새엄마의 또 다른 시작이 너무도 버거워 보여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리 집 때문에 제가 더 죄송해져옵니다.
그럼에도 새엄마는 친엄마의 제삿날이면 새벽 일찍부터 제사상을 정성스럽게 차리시느라 분주합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으려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며 언니와 제게도 제사상을 차리는 법을 열심히 가르쳐주시네요. 그리고 외할머니 댁에 전화를 드리는 일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엄마. 대학을 졸업하고, 정신없이 직장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갑작스레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신경이 마비되어 신체의 오른쪽에 전혀 감각을 느낄 수가 없고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실명될 수 있었던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하네요. 그 와중에도 병실로 올라가면 입원비가 많이 비싸진다는 이유로 응급실에서 일주일씩이나 누워 계신 어머니. 또다시 엄마란 이름을 아프게 기억하게 될까 봐 겁이 납니다.
퇴원 후, 유난히 아빠와 엄마의 싸움은 잦아지네요. 엄마와 아빠는 서로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결국 남동생이 울면서 부모님께 이야기하네요. “서로 한 발짝씩만 뒤로 물러나면 되는데 왜 서로 상처만 주느냐”고. 덩달아 내 마음도 찢어집니다. 혼자서 그동안 많이 아팠나 봅니다. 어느덧 동생은 엄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애교스런 아들이 되어 있습니다. 20대 후반, 한창 직장 생활 하느라 집에 자주 못 가는 두 명의 누나를 대신해서 엄마 옆을 지켜주었던 남동생은 이제 제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엄마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참 많았어요. 엄마 팔짱 끼고 함께 미용실 가기, 영화 보러 가기, 단둘이 1박 2일 여행 떠나기, 남자 친구 소개시켜드리기…. 어느덧 30대가 되어 이제는 친구처럼 어머니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재미있게 수다를 떨 수 있어서, 힘을 주는 둘째 딸에게 늘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엄마.
집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엄마표 떡볶이를 해달라며 어리광을 부려도, 싫은 소리 없이 늘 한가득 해 오셔서 딸과 함께 먹어야 재미가 있다며 두런두런 지나온 세월들을 추억하는 오늘. 이젠 제가 한 여자로서 당신의 인생에 힘을 주고 싶습니다. 이제 그 사랑, 제가 갚아드릴 차례니까요. 저도 곧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겠지요? 이제는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나의 어머니.
엄마, 가족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나의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의 소원
어머니, 입에 담기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차오르게 만드는 그 이름. 전 유난히 엄마 얘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못난 딸입니다.
2014년이면 33살인데 아직 결혼은커녕 남자 친구조차 없는 쓸쓸한 모태 솔로라고 할 수 있죠. 저희는 여동생과 엄마, 저 이렇게 세 여자가 한집에 살고 있어요. 엄만 올해 58살인데 건강이 좋지가 못하세요. 고혈압과 혈소판 감소증이라고 하는 생소한 병까지 앓고 계세요. 젊었을 적엔 누구보다 커 보이고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 분이셨는데 이젠 뒷모습이 왜 그렇게나 작아 보이시는지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제가 이렇게 사연을 보내는 이유는 엄마의 작은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희 엄마는 책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누구보다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분이신데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공부는커녕 학교조차 다녀본 적이 없으시대요. 옛날 분들 특히 남자들은 여자가 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저희 외할아버지도 그렇게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는 저희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죠. 그래도 저희 엄마는 외삼촌들 책이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오면 포장지를 대신하는 신문 조각 그리고 어릴 때 시골에 자원봉사하러 온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배우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글을 깨치셨어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분이었기에 엄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드셔야 했고 저희 3남매는 엄마의 노력으로 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한결같은 아빠의 행동에 엄마는 저희를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아빠와 헤어져 저희들 자매와 같이 살고 계십니다. 엄마의 소원을 얘기하지 않고 구구절절한 사연만 들려드리고 있네요.
저희 엄마의 소원은 다름이 아닌 책을 정말 죽을 때까지 실컷 보는 게 소원이시래요. 저희가 책을 사드린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책값도 참 비싸더라고요. 마음만은 많이 사드리고 싶지만 경제 형편이 좋지 못해서 그 소원을 못 들어드리고 있네요. 오죽하시면 농담으로 서점 하는 사람과 결혼해라, 이런 말씀까지 하시거든요. 헤헤. 저희 엄마 참 유머러스하시죠.
아마 제가 이 글을 써서 감격스럽게 책에 실리기까지 한다면 아마 정말 기뻐하실 텐데…. 정말 나중에 엄마를 위해서 서점을 차리는 게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엄마, 책을 많이 읽으셔서 저보다 더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 우리 엄마.
책 보는 것도 좋지만 건강 좀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어. 책 보느라 약도 잊어버리고 안 드시잖아. 약도 잘 챙겨 먹고 책 보는 거 조금만 줄여. 알았지? 엄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