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에 위치한 작은 섬 아누타.
지난해 가을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 제작 촬영을 위해
돛단배를 타고 아누타 섬으로 향했다.
인간의 무한 경쟁과 탐욕으로 인해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 떠난 길이었다.
하지만 섬으로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나흘간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겨우 아누타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누타 섬에 도착하자 먼저 아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얀 모래사장, 비취색의 바다, 섬을 뒤덮은 야자수 등 천혜의 자연은 우리가 상상했던 낙원을 떠올리게 했다.하지만 이곳은 풍요의 땅은 아니었다. 지름 6백여 미터의 작은 섬 대부분이 언덕인데다 사방이 암초로 둘러싸여 있어서 배를 댈 곳도 마땅치 않을 정도로 척박했다. 이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때론 두려운 전쟁터였다. 수시로 닥치는 자연재해나 태풍에 가족을 잃기도 하고,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바다에 나가 고기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을에선 노래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벌거벗은 채 뛰어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흥겨움과 화음은 섬 안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아누타 섬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함께 해결한다. 한 집 건너 입양한 아이가 있을 정도로 부모 잃은 아이를 키워주는 건 당연하고,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기력을 찾을 때까지 순번을 정해 돌봐주고, 비록 고기잡이를 못 해도 잡은 물고기는 24가구가 골고루 나눠 갖는다. 아누타 사람들은 이를 ‘아로파’라 부른다. ‘사랑, 연민, 동정’의 뜻을 지닌 아로파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눔과 공존’의 가치다.‘아로파’를 통해 이들은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셈이다. 아로파가 아누타 섬에서 삶의 철학으로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3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옛날 좁은 영토 안에서 한정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결국 단 4명의 사람만 남으면서 이들은 공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는 법인 ‘아로파’로 전해졌다.
섬 주민 280명 대부분의 이름을 외우게 될 무렵, 한 달간의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섬을 떠나게 되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이 해변에 나와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별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오지 마을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이 수천수만 년 살아온 원래의 방식은 오늘날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일깨워준 곳, 아누타. 갈수록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아로파’가 희망의 언어가 되어 널리 전파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