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내 곁에 있어줘~’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면,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하는 참 행복한 당신입니다.

하루만큼 더 사랑하고

더 닮아가는 우리 부부

김은정 39세. 주부. 부산시 동래구 안락2동

우리는 2012년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신혼 때처럼 다정해졌다. 그래서 다행이다.

첫아이를 낳기 전 누구보다 사이좋았던 우리는, 주변의 ‘아기 낳고 나면 사이가 나빠진다더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우리가? 우린 아닐 거야. 우린 그러지 말자. 약속.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예민해진 우리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커지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말다툼을 했고 상처를 주고받았다.

남편이 코를 골아도 사랑스럽게 배를 두들겨주며 책을 읽었던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퇴근하자마자 뽀뽀~ 하며 입술을 내밀었던 남편도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엔 갑작스런 남편의 직장 발령도 있었다. 첫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사이는 더 멀어졌다.

남편은 새벽 4시 30분이면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야 들어왔다. 남편은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기도 했고 그럴 때면 무관심한 나에게 꽤나 섭섭해했다. 나 역시 아기를 혼자 돌보느라 지쳐 있었기에 도와주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우리가 이대로 그저 그런 부부가 될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데면데면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둘째 임신, 6주 차에 계류유산. 아주 초기 유산이었지만 마음도 몸도 힘들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 것일까. 어느 때부터인가 남편은 나를 위해 칼처럼 퇴근해 들어오려 노력했다. 그리고는 저녁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기도 씻겨주었다. 그렇게 내 곁에 있어준, 남편의 따스한 배려로 인해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고 따듯한 온기로 채워졌다.

그렇게 남편이 달라짐과 동시에 나도 빨리 회복이 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린 다시 또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남편은 더욱 열심히 첫애를 돌봐주고 분리수거며 요리를 해주었다. 가끔 내가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면 벌서는 기분으로 밥을 먹거나, “저쪽에 들어가서 먹을까?” 하며 나를 배려해 주었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La Nuit Bleue(푸른 밤)>

95.5×82cm, Serigraph on paper.

 

어느 날인가, 육아 파워블로거의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아기가 두 돌은 지나야 냉장고 속이 보이고, 남편이 입을 옷이 있나 없나가 보이고, 집이 보인다는 글이었다.

남편도 같이 읽어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몰라도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하면 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만 남편에게 기대 펑펑 울고 말았다. “입덧 끝나면 다 보답할게, 미안해” 했더니 웃으면서 “뭐가 미안하냐”고 한다.

점점 나는 남편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남편 역시 나의 고충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2년을 맞으며 약속이라도 한 듯 사이가 좋아진 우리. 참 신기하고, 참 행복했다.

하루 종일 귀찮을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는 남편. 퇴근할 무렵이면 ‘회식할까 봐 조마조마해’ 하며 빨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남편. 나도 내 남편을 다시 ‘귀염둥이’라 여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즐거웠다가, 좋아했다가, 심드렁해지기도 하면서 우리는 오늘 또 하루만큼 더 사랑을 하고, 하루만큼 더 닮아가는가 보다.

지난달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어서 이 시기가 지나 남편 와이셔츠도 잘 다려주고, 맛있는 술안주도 만들어주고 싶다. 우리에게 뜻깊었던 한 해도 벌써 저물어간다.

“남편, 너무 고맙고. 미안해. 새해부터는 내가 보답할게. 꼭!!”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이 삶이 마냥 좋다.

나만 바라보는 나바라기, 토토와 순돌이

양상훈 59세. 한지작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가을, 작업실 창밖엔 개미취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많은 벌과 나비들이 모여들어 꿀 잔치를 벌이는지 산속의 작업실은 왁자지껄하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홀로 머물고 있자니, 가끔은 외롭다. 하지만 나에게는 애완견 토토와 순돌이가 있어 행복하다. 강아지 얘기가 무어 대수냐 하겠지만, 내 곁에 항상 있어 기쁨을 주는 또 하나의 가족들이다. 늘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들. 토토는 못 말리는 비글, 순돌이는 똑똑한 진돗개 믹스견이다.

토토는 강아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막내가 조르고 졸라 키우게 됐는데, 어릴 때부터 동생처럼 침대에서 같이 자고 방에서 키웠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나를 보고 “아빠다, 토토야” 하는 막내를 보고 “내가 왜 강아지 아빠냐?”고 화를 낸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정이 들어 강아지 아빠임을 인정한다. 사냥견이라, 성견이 되니 목소리가 커져 아파트 대신 이곳 작업실에서 키우고 있다.

순돌이는 옆집의 잘생긴 진돗개가 바람을 피워 생긴 믹스견 새끼다. 아주 어릴 때 분양받아 키웠다.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지만, 마을 닭 한 마리를 해치운 후, 불쌍하지만 묶어 키운다.

열심히 작업에 열중일 때면, 토토는 내 옆에 붙어 나를 지켜주고, 순돌이는 창밖에서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나바라기’들이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72×59.5cm, Serigraph on canvas.

 

몇 해 전 사랑하는 부모님을 연달아 여의어 며칠간 우울해 있는 나를 보고, 가만히 옆에 와 한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토토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어요. 너무 슬퍼 말아요” 하는 눈빛으로 연신 나의 볼을 핥아주었다.

순돌이는 먹이를 주면, 허겁지겁 먹지 않고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려 고마움을 표시한 후, 내가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어야 밥 먹기를 시작한다.

나의 발자국, 차 소리를 듣고도 반기는 순돌이는 예의가 무척이나 바른 강아지다.

장난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토토도 내 작품이나 재료들은 절대로 건들지 않고 피해 다닌다. 두 마리 모두 착함의 본성을 인간 못지않게 갖고 있다.

작가란 각박한 현대인들이 정서적으로 정화되게 도와주어 풍요로운 삶을 갖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美)란 곧 선(善)이다’라고 생각한다.

동물에게도 무한한 착함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언제나 나만 바라보는 나바라기들…. 토토와 순돌이와 함께 좋은 작업에 정진하고 싶다.

83세 노부부가 가르쳐준 따듯함

임해숙 65세. 요양보호사. 전남 화순군 화순읍

그 어르신들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봄이었다. 83세의 노부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할아버지는 대장암 수술로 대소변 주머니를 차고 생활하셔야 했고, 할머니는 부축을 해야 겨우 화장실에 가실 만큼 거동이 불편했다.

요양보호사로서 처음 어르신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갔는데, 집안 구석구석 먼지가 가득하고, 냄새가 어찌나 지독하던지, 6개월을 닦고 쓸었다.

거동이 어려운 분들이니 아침에 출근해서 밥 챙겨드리고, 온 살림 다 하고, 씻겨드리고…. 나로서도 64년 평생에 이런 일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힘들고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어르신들이 마치 식모 대하듯 할 때였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자기 부담금 조금 낸다고 마치 유세를 부리는 것 같았다. 너무 서러워서 이달만 하고 그만해야지, 매달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효성노인복지센터 김숙이 원장님은 “처음엔 다 그렇다. 하다 보면 좋아질 거다. 어떻게 처음부터 좋은 말만 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냐. 시간이 가면 해결될 거다. 우리 하기에 달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부모님 모시듯이만 진실하게 모시면 된다. 어르신들께 바라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모시면 된다. 힘내라”고 하셨다.

그런데 진짜 원장님 말씀처럼,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6개월이 지나자, ‘늙고 병들고 거동이 불편한데, 얼마나 힘들까’ 나도 모르게 점점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몸이 건강해서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3년 전,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너무너무 많이 났다. 이분들한테 하는 것 반만 해드렸어도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리고 어르신들을 보니 미래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 최선을 다해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이후에는 항상 따듯한 말로, 따듯한 인상으로 대해드렸다. 음식도 입에 맞으시도록 더 신경을 썼다. 말씀은 잘 못하시지만, 밥을 먹여 드릴 때 조금 더 입에 맞는 반찬은 쉽게 꼴딱 넘기시는 걸 보면 뭘 더 맛있어 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에 그 음식을 해드렸는데, 잘 드시는 걸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우연히 시작하게 된 요양보호사지만 사람이 사람을 돌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뿌듯했다.

지난여름 볼라벤 태풍이 몰아친 날이었다. TV에서는 피해 없도록 단속을 잘하라고 야단이었다. 어르신들 댁에서 나오면서 단속한다고 하긴 했지만 새벽 2시경이 되니 폭우에 강풍, 번개까지 몰아치는데 정말 무서웠다. 어르신들이 걱정이 되어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창문이 깨져도 되지만, 그 집 유리창이 깨지면 노인들이 얼마나 놀랄까.

일단 집을 나섰는데 비바람 때문에 나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택시가 잡혔다. 겨우 택시를 타고 가서 대기시켜 놓고, 가지고 간 테이프로 유리창에 안전막을 쳐놓았다. 어르신들은 치매기가 있으셔서, 저녁에는 잠 잘 자는 약을 드시는데, 방 안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다. 휴~!! 다행이다, 생각하고 다시 집에 오니 머리고 옷이고 온몸은 흠뻑 젖었지만, 마음만은 훈훈하고 즐거웠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Noel de neige sur Paris

(파리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58×94.5cm, Serigraph on canvas.

 

지금은 어르신들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가 있다. 물을 드시고 싶구나, 덥구나, 간지러우시구나, 뭐가 잡숫고 싶구나…. 어르신들도 늘 “자네 아니면 못 산께, 같이 살면 안 되는가” 하시고, “자네가 다 알아서 하게” 하시며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신다.

내가 올 시간이 되면, 두 분 다 현관문 쪽만 보고 계신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필요로 하고 나만 기다리는 그 어르신들을 보면 나도 힘이 난다. 그분들을 보면 모든 욕심 다 내려놓고, 정말로 순수하게 흐르는 냇물처럼 살고 싶어진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 속에 사람이 산다는 말이 딱 맞다.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참 힘이 된다. 진짜 사람이 힘인 거 같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울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짠해서 눈물을 훔치게 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며 살고 싶다. 그분들이 더 건강해지시고 더 행복해지시길, 날마다 기도한다. 그렇게 내 곁에 계속 오래오래 계실 수 있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