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두 뒷모습,
아버지 그리고 준하 형
tvN <롤러코스터2> ‘푸른거탑’ 말년병장 역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의 옷에는 항상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 일을 하셔도 좀 깔끔하게 입고 하세요”라고 말이라도 하면, “야, 사람이 깨끗하면 됐지, 옷이 깨끗해서 뭐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도 못 나오셨지만 아버지는 정말 지혜로운 분이셨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13살 때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품삯으로 돈을 받을래, 소를 받을래 했더니 소를 받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는 그 어린 나이에 직접 나무를 해와 축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한평생을 정직하게 지혜롭게 사신, 그런 아버지를 나는 존경했다.
20대 초반, 나는 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떠난다는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그래, 조심해서 가라. 항상 어디 가서, 삽질을 하든, 시멘트를 바르든, 남들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그러시면서 그 흙 묻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쥐어주셨다. 그러고는 얼른 돌아서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 그 뒷모습이 너무 따듯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저런 뒷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5년 전,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 묘소에 가면 얼굴이 아니라, 그때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너무나도 따듯했던….
또 하나는 정준하 선배님의 뒷모습이다. 연기자의 꿈을 갖고 서울에 왔지만 녹록지 않을 때 우연히 같은 기획사였던 정준하 선배님의 매니저 일을 하게 되었다. 힘들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형은 6년이나 나를 곁에 두었다. 그 덕에 <무한도전>을 통해 ‘최코디’로 알려지고, 형이 출연했던 뮤지컬 <라디오 스타>에 강원도 출신 엔지니어로 출연도 할 수 있었다.
준하 형은 간혹 일에서 실수를 하거나 하면, 꾸중을 하셨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모든 촬영 스케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차에서 내려 꾸중을 하셨다. “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중에 네가 꿈꾸는 거 어떻게 해낼 거야.” “죄송합니다”라는 말에 “가봐. 다음부터 그러지 마” 하고는 돌아서서 가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는 참 서러웠는데, 돌아서는 준하 형의 뒷모습이 참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나를 잘되게 하려고 일부러 쓴소리를 했다는 것, 촬영하고 힘들 텐데도 그렇게 마음을 내어 충고해주었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고, 고맙고 감사했다.
재작년 나는 나의 꿈을 찾아 매니저 생활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너무 싫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던 중 올해 초 <롤러코스터>의 말년병장 역으로 출연 제의가 왔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준하 형의 충고가 더 다가올 때가 많다.
항상 형은 재능의 크기가 아니라 연기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항상 겸손하고 너를 낮춰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라. 모든 것에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한다. 예의 발라야 한다. 그래야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좋은 인상을 보여줘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너나 나나 좋은 인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웃어야 된다.”
나는 이제 아버지처럼, 준하 형처럼, 그런 뒷모습을 갖고 싶다. 따듯한 진심이 느껴지는 뒤태를 가진 배우이자, 가장이자, 남편이자, 자식이자, 아빠이기를 꿈꿔본다.
꼬부랑 할머니의 사랑, 뜨개질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옆에 찰떡같이 붙어 앉아 할머니의 뜨개질하는 모습을 즐겨 보곤 했다. 특히 할머니의 손놀림이 빨라지면 질수록 그 즐거움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북슬북슬한 털실이 할머니의 손을 만나면 갖가지 모양의 보물로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해 보이는 벙어리장갑, 목을 몇 번이나 두르고도 남는 긴 목도리, 손등까지 푹 덮어주는 털스웨터, 두툼한 고무줄로 허리춤을 마무리한 털바지, 양말 위에 덧신을 수 있는 털양말까지. 그것들을 모두 갖춰 입는 날에는, 마치 할머니의 품에라도 안긴 듯 따뜻하고 포근하여, 한겨울의 추운 날씨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뜨개질이 끝나면 할머니는 으레 그것들을 비닐봉투에 담아 들고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 손주들 집을 방문하셨다. 그걸 입고 좋아라 할 손주들을 보는 게 할머니에게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 어려워 걷는 내내 할머니의 뒤만 쫓아 걸어야 했지만, 씩씩하고 행복해 보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나 역시 씩씩하고 행복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내가 한 여덟 살 때부터인가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면서 잠깐씩 멈추는 일이 잦아지셨다. 뜨개질하던 손에서 대바늘을 내려놓고 눈을 비빈 후 다시 뜨개질을 하고, 그러다가 조금 후 다시 눈을 비비시고. 날이 갈수록 뜨개질하는 시간보다 눈을 비비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이상 뜨개바늘을 잡지 못하게 되셨다.
‘할머니는 내가 입고 있는 이 털옷들과 시력을 맞바꾸신 거다’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그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할머니가 오래도록 내 얼굴을 볼 수 있고, 맛난 음식을 눈으로 보면서 드실 수 있으며, 언제든 불편 없이 화장실을 가실 수 있는 거였다. 할머니의 행복을 빼앗아갔다는 죄책감에 우울해 있는 나를 어느 날 할머니께서 부르셨다.
“아가, 털실과 뜨개바늘을 가져다주렴. 아마 장롱 서랍 어딘가 전에 쓰다 남은 실뭉치가 있을 게다.” 나는 혹시 말씀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가, 너 거기 있는 거니? 있으면 실타래와 뜨개바늘을 가져다주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실타래는 왜 찾으시는 거지?’ 나는 재빨리 장롱으로 달려가 서랍을 열었다. 진홍빛 실타래가 그 안에서 오래도록 주인님이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나를 맞이했다.
“할머니, 여기요!” 나는 벅찬 가슴으로 뜨개질 꾸러미를 할머니께 건네 드렸다. “그래, 고맙구나.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사십 년이 흐른 지금, 할머니의 몸은 심하게 구부러져 예전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지팡이 없이는 걸음조차 힘들지만, 완전히 잃은 시력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여전히 뜨개질을 하신다. 할머니가 평생 사랑해왔던 뜨개질을 눈이 아닌 손으로 보면서…. 할머니는 이제 실을 직접 고를 수도, 화려한 문양을 마음껏 넣을 수도, 빠른 손놀림으로 갖가지 것들을 완벽하게 짤 수도 없지만 할머니의 뜨개옷은 여전히 포근하고 곱다.
“실 색깔이 아무래도 좀 어두워 보이는데 괜찮겠냐?”
환하디 밝기만 한 털실을 만지면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어, 그래요? 그럼 다른 색으로 할까요?”
실을 전혀 볼 수 없으면서 능청스럽게 말씀하시는 할머니께 이제는 나도 넉살스럽게 응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할머니를 통해 ‘앞을 볼 수 없음’이 ‘삶의 기쁨마저 볼 수 없게 만들진 않는다’는 걸 배웠으니까.
“그럼 지팡이를 좀 가져다주렴. 이 할미랑 실타래 사러 가자.”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 발씩 조심스레 내딛는 할머니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힘에 겹다. 더 이상 힘차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심지어 심하게 꼬부라져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꼬부라진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찌 흉해 보일 수 있으랴. 거기에는 지나온 약 백 년의 삶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이번엔 내가 할머니의 구부러진 등이 시리지 않게 따뜻한 등덮개를 하나 짜드릴 차례이다.
자꾸만 커져가는 그 걸인의 뒷모습
하루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거리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걸인이 나타났습니다. 삼검불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어깨에는 볼모양 없이 더러운 가방을 메고 한손에는 깡통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 걸인이었습니다.
땟국이 줄줄 흘러내리는 걸인이 나타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보기 싫은 비렁뱅이라고 한쪽으로 피하는데 그 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룩거리며 모금함으로 다가오더니 깡통에 담긴 얼마 안되는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모조리 모금함에 쏟아 넣는 것이었습니다.
돈이라고 해야 구겨진 1원짜리 서너 장 그리고 50전짜리, 10전짜리 각전이 여남은 개, 모두 합해야 10원도 안 되는 부스럭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결코 적거나 가벼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억만 부자가 내놓은 거액의 돈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구걸로 연명하는 걸인, 더구나 장애인 걸인에게는 그 보잘것없는 푼전이 주린 배를 달래여 목숨을 이어주는 소중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구걸한 푼돈을 모금함에 쏟아 넣는 걸인의 모습, 그것은 걸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인간 사랑이 강력한 빛을 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은, 평시에 걸인을 깔보았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걸인은 비록 빌어먹고 사는 가련한 몸이지만 나라에서 당한 재난을 알고 그것을 관심하는 국민의 한 조각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걸인의 뒷모습은 마치 노신 선생이 <사소한 사건>에서 먼지투성이의 인력거꾼을 찬미한 것처럼 ‘찰나에 우뚝 솟아 보이더니 그가 걸어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뒷모습은 나의 양복 속에 숨어 있는 남을 경시하는 글쟁이의 못된 버릇을 꼬집으면서 나의 마음을 비춰보는 커다란 거울로 안겨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불행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이런 사랑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그 걸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동네를 훈훈하게 만드는 열과 빛이 어떤 것인가를 무언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이 꽤나 지나간 오늘도 자꾸만 커지는 그 걸인의 뒷모습을 이렇게 그려보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