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그 입장에서 생각해준다면,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서로를 알게 되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도로 위의 무법자 ‘김여사’가

내 아내일 줄이야

이대영 42세. 직장인. 충남 아산시 배방읍

몇 개월 전 퇴근 후 집에 오니, 아내가 조용히 나에게 말을 한다. “당신, 며칠 차 타지 마.” “왜? 사고 났어?” “아니, 주차장에서 차 빼다 기둥을 박아서 문짝이 찌그러졌어. 좀 심해. 펴올 테니까 다음에 타.” “끙~~”

그리고 고친다 고친다 하더니 바쁘다며 안 고친 지 3일째. 둘째를 학교에 태워다 줄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주차장에 내려갔다. 순간 허걱! 오마이 갓뜨! 어찌 이럴 수가!

운전석 문짝 부분이 푸~욱, 조금 찌그러졌겠지 했는데 이건 상상 초월이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갔는지 물어보니, 차를 빼는데 재채기가 나왔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보고 말로만 들었던 김여사가 내 아내일 줄, 진정 난 몰랐다. 결혼 후 운전면허를 딴 아내는 그렇게 잊을 만하면 한 건씩 터트리며 ‘김여사’를 떠올리게 했다.

결혼 전에는 장점이, 결혼 후에는 단점이 보이며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단다. 나 또한 그러했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아픔을 겪었던 나는 신용을 목숨처럼 중요시한다. 은행의 대출금은 물론이고 공과금 회비 등 금전적인 거래는 절대로 연체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납기가 지나 가스가 끊어진다고 연락이 와야 부랴부랴 가스 요금을 내고 한두 달 연체는 기본으로 아는 대범(?)한 여자다. 일과 가사 육아 등 다른 일에는 똑 부러지는 아내인데 왜 유독 그 부분에만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주리 작. <안경에 관한 명상> 안경 위에 아크릴릭. 2004.

하지만 아이를 기를 때 보면 엄마는 역시 다르구나, 느낄 때가 많다.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은 올 초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하고,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약할 정도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런 큰아이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2학년 초 바이올린이 하기 싫다며 엄마에게 짜증을 낸 것이다. 난 “하기 싫으면 때려쳐”라고 야단을 쳤지만 아내는 달랐다. 큰아이를 작은방으로 데려가 왜 하기 싫은지 들어보고는 문제점을 찾았다. 레슨 선생님이 내주는 너무나 많은 숙제에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그것이 폭발을 하고 만 것이었다. 숙제를 반으로 줄이자 아이는 더 이상 짜증을 내지 않았고 점점 실력이 향상되어갔다.

아내와 처음 만난 건 1996년 제주도에서였다. 5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금전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다. 아내는 내가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나를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해주었다. 힘들어할 때마다 “함께 헤쳐 나가자”며 용기를 준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내 가족이 누리는 행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남녀의 차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부부는 서로의 반쪽이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만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불완전한 관계인 것이다. 남녀가 가치관과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경할 때 하나의 부부로서 완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여보, 연체를 해도, 주차장 기둥을 박아도 괜찮다,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난 행복한 남편이니까.

 

진정 갈대 같았던 건

여자 아닌 내 마음이었어라

이진석 34세.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고3 때 나는 익산에 사는 한 여자아이와 펜팔을 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고, 친구들과 함께 3:3으로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여자아이들이 나왔다. 내 펜팔 친구는 작은 키의 귀여운 아이, 정말 맘에 쏙 들었다. 이후 펜팔은 계속되었고, 전화 통화도 했다.

그러던 중 대학 문제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며칠간은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펜팔 친구에게 전화해 대학 진학 문제로 당분간 연락을 못 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 다시 연락을 했는데, 반응이 쎄~ 하면서 “내가 보낸 편지 못 받았어? 편지로 이야기 다 했으니 그만 연락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띵~.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거지? 난 정말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대학 문제를 마무리하고 멋지게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그게 서운했던 걸까? 내가 자기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고 생각한 걸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하지?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대학 진학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던 중 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도 왠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대학교 축제 때 동아리를 대표하여 댄스 대회에 나갔다. 그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더욱 열심히 연습했다. 아~ 하늘이 그걸 알았나, 대상까지 타 버렸다.

축제가 끝난 후 뒤풀이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운명처럼 그 친구 옆에 앉게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친구 왈 “나 결혼 안 할 거야. 우리 동기잖아.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무튼 이 반응은 거절, 그러면 그동안 나에게 했던 행동들은 뭐지?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황주리 작. <식물학>

캔버스에 아크릴릭. 91x117cm. 2009.

2학년이 되었다. 신입생 중 정말 맘에 드는 여자 후배가 한 명 있었다. 그 후배는 군대 갈 때 입대 장소까지 따라와 주고 편지도 전해주었다. 훈련 중에 편지도 주고받고 정말 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첫 휴가를 받고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친구들 말이 그 후배가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하더란다. 더 망설일 게 없었다.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만났는데 후배가 먼저, “생각해 봤는데… 전 그냥 선후배 사이였으면 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띵~. 나는 한마디도 못 했는데. 그 뒤 더욱 황당했던 한마디. “선배와 전 같은 성이잖아요.”

이건 또 뭔 소리? 나한테 그동안 그렇게 예쁘게 편지를 보낸 건 뭐지?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면서? 내가 군대에 있었던 게 문제인가? 좋아한다면 나라면 기다릴 텐데.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제대 후에도 그렇게 또 많은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 다른 사람은 잘만 사귀는 것 같은데, 나는 번번이 연애 초입에서 이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여자 문제로 힘들면 혼자 이겨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자전거 여행도 가고, 노래방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남녀의 차이에 대해 다룬 책도 보고, 선배들에게 상담도 많이 했다. 외모를 멋있게 하기 위해 술도 안 마시고 다이어트에 돌입해 보기도 했다. 때론 이러면 여자들이 안 좋아했잖아, 이래야 여자들이 좋아하잖아, 하고 얽매이는 마음 때문에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아, 결국 나는 더 이상 여자에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이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그렇게 마음에서 여자를 놓는 한순간 불현듯 깨침이 왔다. 내가 정말 몰랐던 건 진정 여자였을까? 정작 갈대와 같았던 건 내 마음이 아니던가?

나부터 알아야겠다, 나부터 알아야 참사랑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남자는 하늘이 되고픈 어린아이,

사랑해주고 기다려주면 돼

김정숙 68세.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나는 7남매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한학자셨는데 남자와 여자의 도리에 대한 교육을 항상 시키셨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여자는 결혼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늘 들으며 자랐다. 그런 문화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새 남자들을 어려워하고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결혼해서도 그런 생활은 이어졌다. 연애 시절 포근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는데, 결혼해 보니 완전히 달랐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가정은 그냥 하숙집이었다. 매일 밥상 차려놓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일이 반복되니까 속상하고, 가정을 꾸렸으면 가정에 충실해야지 남자들은 왜 그러나 싶고 참 힘든 시절이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저 순종하며 사는 게 도리인 줄 알았다.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한테 기대했던 것이 어긋나니까 자식한테 내 모든 바람이 갔다. 사랑이라 생각하며 이런저런 간섭을 하니 아들들도 힘들어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내가 불쌍하고, 외롭고 고독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남편이 육십이 넘으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내가 몸이 아파서 수술도 하고 그러면서 부인의 소중함이나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한 많은 여자의 일생으로 남을 뻔했던 나의 기구한 인생, 그즈음 아들 소개로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마음을 버리며 남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미움이 한꺼번에 확 올라와 힘들기도 했지만 버리고 버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던 즈음 남편도 수련을 시작했다.

남편이 수련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정말 나 만나서 고생 많았다.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생애 이렇게 울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후회를 많이 했다”며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자존심이 강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나도 너무 놀랐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참 많이 변했다.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60x80cm. 2000.

매사에 내 의견을 물으며 인격적으로 대해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공사 때문에 더운물이 안 나왔는데, 내가 샤워를 한다니까 물을 데워서 갖다주었다. 너무 놀라 “내가 먼저 죽었으면 이런 호강을 다른 사람이 할 뻔했네” 하며 웃었다.

이제 와 보면 젊었을 때 왜 그렇게 잠 못 자고 신경 쓰며 들들 볶고 난리를 치며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때 되니까 가정으로 돌아오건만 조금만 남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기다려줬으면 어땠을까.

우리 시대야 남자, 여자가 달랐지만 지금은 여자든 남자든 똑같이 공부하고 사회생활도 똑같이 한다. 여자는 자기 없이 살아온 세월이 있어 시대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데 권위주의적인 습관이 밴 남자들은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맞벌이를 하는데도 아직도 가사는 여자 몫인 가정도 많은 것 같고, 어디 모임에서도 보면 아직까지도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남자들도 많이 본다. 그렇게 권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가 더디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설령 남자가 변화하지 않더라도 여자는 남자가 빨리 이 시대에 따라올 수 있게끔 좋은 얘기로 설득을 하며 기다려주는 게 필요하다.

남자는 어린애 같아서 잔소리하기보다 칭찬해주면서 “힘드니까 좀 거들어줘” 하고 부탁하면 잘 들어준다. 아무리 여자 남자가 다르더라도, 서로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아껴주면 누구나 재미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