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은인’ ‘농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그의 노력 덕분에 한국전쟁으로 척박했던 땅에는 한국형 배추와 무가 자랐고, 강원도에선 씨감자가 제주도에선 감귤이 여물어갔다. 그가 만들어낸 씨앗들은 굶주린 백성들의 따듯한 식량이자, 한국 농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우량 채소 종자를 개발하여 자급자족의 길을 열고 한국의 육종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한 우장춘 박사. 그의 삶은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매년 8월이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945년 조선은 독립했지만 농촌 현실은 처참했다. 농사를 지어도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넘쳐났다. 현실을 직시한 각계 인사들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 우장춘에 주목했다.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뜻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쌈짓돈을 보탤 정도였다.
당시 우장춘은 육종학 연구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게 당시 학계의 정설이었지만, 우장춘은 배추 속 식물의 유전체를 분류하고 분석한 결과 서로 다른 종끼리 인공적으로 교배했을 때 유채 같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이 연구가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진화론을 주장했지만 새로운 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설명하지 못한 다윈. 이에 반해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유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 공존이라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두 개 종을 인위적으로 교배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음을, 생태계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 땅에 씨를 뿌리고 연구해, 실용 가치가 높은 새로운 품종을 육성, 보급해주기만 한다면 식량 문제 해결뿐 아니라, 미래 농업 발전에 큰 계기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1947년부터 불기 시작한 환국추진운동은 우장춘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1950년 3월,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에 돌아온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그는 추진위원회에서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비로 쓰라고 준 100만 엔 전액을 실험 기구, 종자, 육종 서적 등을 사는 데 사용하는 등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한국의 농업 위기를 극복하려 애썼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 전보를 받고도 “지금 일본에서 가져온 종자를 이 시기를 놓치면 못 심게 됩니다. 한 해 늦춰집니다. 인사는 한두 달 늦어도 되지 않습니까”라며 인사를 가지 않을 정도였다.
“피를 피로 씻어내는 역사, 나는 평화로운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1857~1903). 어린 시절부터 그에겐 ‘우범선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붙었고, 6살 때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란 이유로 놀림당하며 자라야 했다.
“길가에 핀 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 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어머니의 말씀 때문일까, 우장춘은 세상의 어떠한 시선에 대해서도 변명도 항변도 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해내었다. 그리고 1936년 유채 연구를 하면서 쓴 논문 <종의 합성>이 세계 육종학계를 깜짝 놀라게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50년 한국으로 환국한 후에도 그는 철저하게 실용적인 연구와 후배 양성에 매달렸다. 연구소 사람들에게도 연구와 논문을 위한 시험은 당분간 미룰 것을 당부했다. 농림부장관직 제의도 거절하는 등 오로지 종자 개발에만 헌신했던 그는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있어 ‘고무신 박사’라고도 불렸다.
“이제 이 종자를 심으면 속이 꽉 차고 사각사각하면서도 고소한 배추가 나올 것입니다.”
우장춘은 먼저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의 품질 개량에 힘썼다. 사람들은 대개 예전부터 지금과 같은 배추를 먹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 한국 배추와 무의 품질은 최악이었다. 대부분의 재래종 배추는 배춧잎이 모아지지 않고 상추처럼 힘이 없었다. 반면 일본 배추는 잎의 두께가 두꺼웠다. 우장춘은 이 둘을 교배해 오늘날 속이 꽉 차고, 무르지 않고, 사각사각하면서도 고소한 배추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무와 일본 무를 교배해 크고 아삭하며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최상의 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가 새로 개량한 무, 배추 종자를 보급했지만 정작 농민들은 일본에서 밀수입한 종자를 이용했던 것. 일본 종자에 대한 믿음과 우리 종자에 대한 불신이 그 이유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한 가지 묘안을 냈는데 그것이 바로 ‘씨 없는 수박 시식회’였다. 씨 없는 수박은 사람들의 많은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 최초 개발자라는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기도 했다. 원래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사람은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가졌던 기하라 히토시 교수다.
그는 이후에도 식량난 해결을 위한 강원도 무병 씨감자 생산과 제주도 감귤 재배 성공에 이르기까지 절망뿐이었던 우리 농촌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노력 덕분에 1957년부터는 종자의 국내 자급이 가능하게 되었고, 훗날 우리 배추가 국제 게놈 해석 연구의 주축이 되는 등 오늘날 김치가 대표적인 음식이 된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숱한 밤샘 작업 끝에 몸이 쇠약해져 결국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 와중에도 한창 연구 중이던 벼를 관찰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우장춘 박사. 사망 하루 전 그에겐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됐고, 1959년 8월 10일,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