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라 불리는 성산(聖山) 장기려 선생(1911~1995). 그는 가난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이 안타까워 무료 진료를 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섬겼던 장기려 박사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동화처럼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참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준 장기려 박사. 그를 기린다.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사가 되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중에는 평양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피난 온 외과 의사 장기려도 있었다. 당시 부산육군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그는 피난민들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서, 미군에서 빌린 천막 3개로 1951년 복음진료소를 세운다.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응급수술을 하고 나무판을 수술대로 써야 할 만큼 상황은 열악했지만, 무료 진료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천막병원엔 환자들이 넘쳐났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한 달에 한 번 의료 기관이 없는 시골을 찾아다녔다. 1928년 경성의전에 지원하며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합격시켜 주시면 평생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국내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 및 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하다
장기려 선생은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의학 공부를 철저히 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간 전문 외과 의사로 주목을 받아왔다. 당시 간은 핏덩어리라고 생각해 칼을 대면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그는 간에서 출혈되지 않는 선을 발견하여 출혈 없이도 수술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1959년 간암 환자의 간을 75% 잘라내는 데 성공, 간암 치료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명의가 될 수 있었던 건 비단 의학적 성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1968년 복음병원으로 한 응급 환자가 실려 왔다. 환자는 자동차 폭발 사고로 3도 전신 화상을 입어, 온몸이 숯덩이처럼 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의 두밀리자연학교 교장으로 ‘ET할아버지’라 불리던 채규철씨다. 당시 화상을 치료하는 전문 시설이 없었던 터라 장기려 선생은 미국인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온몸을 칭칭 감은 붕대를 조심스레 풀고, 하루 두세 시간씩 드레싱을 하는 등 극진히 간호했다. 고통스런 치료 과정은 1년이 넘게 계속됐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던 환자는 기적처럼 생명을 얻었다. 이렇게 그는 진료나 수술 등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늘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 환자가 나라면, 혹은 내 가족이라면 무엇이 최선일까?”
선생은 가난한 환자들이 찾아와 입원비나 수술비가 없다고 사정하면 자신의 월급을 털었고, 돈이 없어서 퇴원을 못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곤 했다. 환자의 속옷이 남루한 것을 보고는 내복을 사다주고,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를 위해 처방전에 ‘닭 두 마리 살 돈을 주라’고 써주는 등 딱한 사정에 마음 아파하며 환자들을 대했다. 때론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행려병자들을 직접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하였다.
“눈앞에 나타난 불쌍히 여길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인술이야.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 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아프다면 돈이 없어도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의료보험제도가 없던 1960년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 문턱은 너무나 높았다. 전쟁이 끝난 후 복음병원의 재정 지원도 끊기면서 무료 진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자 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은 바로 채규철씨였다. 덴마크 유학 시절,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료보험의 혜택으로 무료로 치료받은 경험을 전했던 것. 선생은 의료보험이야말로 가난한 환자도 돕고 병원도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장기려 선생은 복음병원에서 퇴임한 뒤 1968년 5월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결성, 청십자 의원을 개업하고 청십자 의료보험을 적용해나갔다. 담배 한 갑이 100원 하던 때 조합원의 월 회비는 60원. 초반엔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1987년엔 회원 가입자만 20만 명을 넘어섰다. 첫 번째 수혜자는 부산 지역의 가난한 영세민들이었다. 이렇듯 ‘건강할 때 서로 돕고 아플 때 도움받자’라는 모토로 부산에서 시작된 청십자 의료보험은 1989년 시행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진실과 동정으로 환자를 대하면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는 변변한 집조차 없었다. 복음병원 옥상에 마련된 옥탑방에서 홀로 지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환자를 향한 헌신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하고 겨울에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주었던 장기려 선생.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한쪽 팔이 마비된 불편한 몸으로도 매일 환자들을 진료하며 의사로서의 소명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가진 의술로 병든 자들을 구하고,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배불렸던 그는, ‘가난한 환자들과 평생을 함께하리라’는 서원을 60여 년간 온몸으로 지켜냈던 것이다.
1995년 12월 25일,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사람들은 그를 ‘바보 의사’라 부르며 추모했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