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이 남기고 간 선물, 나의 조카 행운이
반려동물, 내게는 참으로 생소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옆에는 행운이라는 갈색 푸들 한 마리가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어디를 가든 함께한다. 행운이는 막내 여동생이 함께 살아온 강아지였다. 쉰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여동생이 자식마냥 십 년을 넘게 동고동락해온 가장 가까운 식구였다.
2011년도에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다가 대장암 말기라는 청천병력 같은 선고를 받은 동생은, 수술에 요양에 한방에 열심히 치료를 받았지만, 2012년 설날 부모 형제를, 사랑하는 행운이를 이 세상에 둔 채 쓸쓸히 저세상으로 갔다.
동생은 투병 생활을 하는 1년 동안 행운이 걱정을 참 많이 했다. 자기가 죽으면 유기견이 될까 봐, 거리에서 유기견을 보고 온 날이면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리고 나에게 언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며, 자신이 어떻게 된다면 행운이를 맡아달라고 어렵사리 부탁을 했다. 짐승이라면, 아니 벌레 한 마리에도 기겁을 하는 나는 개를 집에서 기른다는 사실이 정말 무섭고 싫었지만 막내 여동생에게는 웃으며 그러마 했다. 아무 걱정 말라고.
여동생의 49재를 지내고 행운이는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내게로 왔다. 그날부터 나와 행운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물이라고는 한 번도 키워보지 않았던 나는 실수투성이였다. 간혹 행운이를 만질 때면 가슴이 펄떡펄떡하며 무서움에 떨었다.
12년을 돌봐주던 엄마가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을까. 행운이는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고, 멍하니 풀이 죽어 있을 때가 많았다. 동생이 마지막 침상에서 투병 생활을 할 때 행운이는 언제나 동생 발밑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동생을 만지려고만 해도 으르렁거리곤 했던 행운이였다. 낮에는 꼼짝 안 하고 가만히 있고, 밤이 돼도 잠도 안 자던 행운이는 나를 포함해 낯선 사람들이 다가가면 사납게 대했다. 거기다 자동차도 못 타고, 아무 데서나 다리 들고 오줌 싸고, 성질나면 왕왕 짖어대고….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이 병원 저 병원 돌며 행운이에게 맞는 병원을 정하고 동물병원 원장 선생님의 조언도 듣고 거실 개집 옆에서 잠도 함께 자고, 동물농장 TV도 열심히 보며 참고했다.
풍선으로 놀래주기, ‘짖지마’ 구입하기 등등 노력을 하는 동안 점차 행운이와 가까워져 갔다. 그렇게 동생을 잃은 슬픔에 바깥 외출은 일절 하지 않은 채 나는 행운이랑 1년을 보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그렇게 춥던 지난겨울도 행운이와 산책하고, 행운이 목욕시켜주고 간식 주고 하며 열심히 같이 살았다. 이제 행운이는 신발도 신고, 오줌도 가려 누고, 아침이면 산책 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자동차도 잘 타는 등 정말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동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한 가슴에 눈물이 고이지만, 이젠 행운이도 주인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고 나도 동생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조금씩 세상과 어울리려 한다.
평생 이런 글을 써서 보내보는 건 처음이다. 이 글을 통해 막내 동생에게 전해주고 싶다. 행운이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곳에서 편안히 지내라고.
행운이를 조카처럼 생각하며 이모가 되어 평생을 돌볼 것이다. 지금도 내 옆에서 네 다리 쭉 뻗고 쌔근쌔근 잠자고 있다. 사랑스런 내 조카 행운이가.
토끼가 아닌 가족 ‘노랑이와 예랑이’
10여 년 전이다. 지하도에서 우연히 아랑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토끼를 발견했을 때, 반가움만큼이나 두려움이 들었다. ‘아랑이’란 토끼를 길렀다가 얼마 안 되어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냈던 일 때문이었다. 어미젖도 못 뗀 채 길에서 팔리는 토끼들은 면역력이 매우 약하여 생야채를 먹이면 안 된다는 걸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 됐던 나는 다시 그 토끼를 집으로 데려왔고, 이전과 달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노랑이’라 이름을 붙이고 건강한 토끼로 길러냈다. 처음에는 슬픈 일이 되풀이될까 봐 걱정했던 가족들도, 노랑이에게 애정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았다. 노랑이는 아기 때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우람하게 자라났다.
사람들은 웬 토끼가 이렇게 무시무시하냐며 덩치를 보고 놀라고 또 놀렸지만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토끼였기에 나는 매일매일 노랑이에게 “노랑아, 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는 말을 해주곤 했다. 그랬더니 노랑이는 정말로 자기가 제일 예쁜 토끼인 것처럼 굴었고, 예랑이가 올 때까지 집안의 막내둥이로서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예랑이’ 역시 우연한 기회에 우리 집으로 왔다. 노랑이를 데려온 지 약 반년 후, 휴학을 하고 학원에서 일할 때 어떤 학생이 뽑기 상품으로 팔리던 아기 토끼를 데려온 걸 대신 기르게 된 것이다. 예랑이는 노랑이와 달리 몸집이 크지 않은 애완용 품종이었다. 우려와 달리 노랑이는 예랑이를 금방 받아들였고, 예랑이는 그런 노랑이를 엄마처럼 따랐다. 마치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여 우리 가족은 노랑이와 예랑이를 볼 때마다 웃음 짓곤 했다.
노랑이는 어릴 적부터 사람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이마를 쓰다듬어주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를 긁어댔다. 이것은 토끼가 기분이 좋다는 걸 뜻한다. 반면에 예랑이는 사람보다 노랑이를 따라서, 언젠가 노랑이가 몸이 아파 새벽 중 병원에 갔을 때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노랑이를 찾을 정도였다.
토끼는 기질적으로 매우 깔끔한 동물이다. 조금이라도 더러운 게 묻으면 탈탈 털어내고, 수시로 자기 몸을 닦는다. 게다가 초식 동물이라서 특유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아, 깔끔하신 부모님이 유일하게 뽀뽀하고, 사람 쓰는 접시를 공유했을 정도였다. 반면에 개나 고양이에 비해 기르기 어려운 동물이다. 약하고, 예민하고, 아파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고로 주인까지 덩달아 예민해지곤 한다. 또한 인간에 대한 친밀감이 부족하여 기르는 사람을 섭섭하게 만들 수 있다. 개나 고양이처럼 누군가를 따르거나 동반자로 여기는 개념이 없어서 훈련이 어려운 데다 독립적이고 시크(도도)하기까지 한 토끼에게 모든 걸 맞춰줘야 한다. 동물을 기른 경험이 풍부한 나였지만, 토끼 양육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름 즐거웠다. 제멋대로에 먹을 것만 밝히는 줄 알았던 토끼들이 가끔씩 가족들의 손과 얼굴을 핥으면서 애정 표현을 하면 우리는 감동받았고 기뻐했다. 노랑이는 토끼치곤 애정 표현을 자주 했는데, 사람을 정성껏 핥아주는 걸로 보답하곤 했다(토끼의 혀에는 침이 없고, 초식 동물이라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아무리 핥아내도 찜찜하지 않고 씻어낼 필요도 없다.^^).
때론 둘 다 기분이 좋아 침대 위를 뛰어다니거나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때면 우리도 덩달아 행복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인 존재를 순전히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사는 건 생각만큼 낭만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를 아끼고 보살피다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만큼 그들을 책임지려는 자세뿐만 아니라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기쁨과 가치를 알게 해준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인 셈이다.
그러나 동물을 기르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나의 부주의가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왔고, 죽음 또한 우발적이든 자연적이든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무게를 감당하는 것도 버거웠다. 특히 토끼는 중성화수술을 받더라도 수명이 10년을 채 넘기지 못한다. 그래서 아랑이에 이어 노랑이, 예랑이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내야 했고,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존재든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마다 펑펑 울면서 다른 동물을 기르는 데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괴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동물을 만날 때면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배우기도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정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신 부모님의 배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햄스터, 병아리, 강아지, 토끼 등등 많은 동물을 기르면서 무언가를 보살피는 데 따른 행복감과 책임감, 그리고 세상을 이루는 자연의 법칙을 가슴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
16살 아롱아 떠나는 그날까지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줄게
중학교 2학년 때, 내 생일날의 일이다. 친구와 엄마 가게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신발 끈이 끊어져 버렸다. 지하철 근처에서 구두 수선집을 발견했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운명이었을까? 그곳에서 털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좁은 바구니 속에서 앉지도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들어 있는 걸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귀엽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수선을 하며 기다리는 동안 조금씩 그 아이가 내 심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었나 보다. 수선집을 떠난 후에도,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자꾸 그 아이가 눈에 아른거렸다.
내 나이 14살. 나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는 나이에 친구와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다시 그 수선집에 갔다. 우리는 가격을 깎았고 1만5천 원에 친구가 생일 선물로 그 아이를 내게 사주었다. 수선집 아저씨에게 들으니, 강아지 주인이 “이 아이는 혼혈견이니 싸게 팔아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우리는 가게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2개월이 된 아이를 안고 있는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엄마에게 혼날 생각에 겁이 났다. 미리 아빠에게 전화로 이야기했지만 역시 엄마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하라며 화를 내셨다. 그렇게 수선집의 하얀 강아지, ‘아롱이’와의 생활이 시작되고 어언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아롱이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롱이가 도로로 뛰어들어 간발의 차로 트럭 밑으로 들어갔던 아찔한 일, 두 번이나 잃어버려 애타게 찾았던 일, 큰 사고로 수술을 받았던 일…. 아롱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가슴이 덜컹, 가슴이 메어 울었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가족의 일원으로 아롱이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나도 조금씩 성장해갔다.
그런데 요즘엔 아롱이를 보면 자주 마음이 아프다. 15살이 넘어가면서 점점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자리에서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운 채 왼쪽으로 뱅글뱅글 돌고, 어두운 구석으로 찾아 들어가고, 뒷걸음질도 못 치고, 안 먹던 사료도 먹고, 밤새도록 낑낑대고,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처음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잘 몰랐는데, 아롱이가 16살이 된 지금에서야 왜 그런 행동들을 반복하는지 알게 되었다.
뱅글뱅글 돌기만 하니 대소변은 만날 밟아 바닥에 다 발라놓고, 다리에 힘이 없어 대소변 위에 미끄러져 몇 번씩 발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려, 눈앞의 간식도 못 찾고 밥과 물은 밟아 엎지르고 코만 가려져도 갇힌 줄 알고 낑낑거리다 짖어대서 하루에 10번 이상을 꺼내줘야 한다. 사람이 옆에서 하루 종일 봐줘야 할 정도로 이제는 점점 정신이 멀어지고 있다. 정신이 희미해진 후부터는 많이 온순해져 내가 안아도 물지 않아 옆에서 돌보는 게 그나마 좀 수월해졌다. 대신 간식과 손가락을 구분 못 해 물리기 일쑤이지만 100번을 씹히고 피를 보더라도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아릴 뿐이다. 이런 아롱이를 돌보느라 엄마도 정말 많이 고생하고 계셔서 너무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상행동을 고쳐보려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며 여러 방법을 시도하면서, 그래도 가끔 앞으로 가기도 하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감사한다. 고통받지 않고 떠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내 옆에서 함께해 준다면 나는 바랄 게 없다.
아롱이의 이상행동을 보면서 예전에 잘해주지 못했던 순간이 후회가 된다. 어린 나이에 데리고 와 잘해주지도 못했고 그때에는 반려견이라는 의미와 동물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야 오랫동안 함께 있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하나의 생명을 키우기 위해선, 단순히 좋을 때만이 아니고 아프고 힘들 때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지금 마음의 준비 중이다. 막상 일이 생기면 심장이 멈춘 듯 아프겠지만 눈감는 그날까지 가족으로서 보살피며 몇 만 배의 사랑을 듬뿍 안겨주어 떠날 때 행복한 모습으로 보내주고 싶다. 아롱아, 사랑한다. 우리 다음에도 가족으로 꼬옥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