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어느 운동회. 부모님이 없어 점심도 쫄쫄 굶어야 하는 형제에게 달리기란 어떤 의미였을까. 형은 배가 고픈 동생을 위해 달린다.
오로지 목표는 라면 한 박스. 1등이 아닌 2등을 해야 받을 수 있는 라면 한 박스를 위해 형은 1등을 할 수 있지만 2등으로 페이스를 맞춘다. 동생은 멀리서 우산으로 형의 페이스를 조절한다. 우산을 펴면 빨리 달리고 우산을 접으면 천천히 달리는 식이다. 이 장면은 ‘페이스메이커’라는 영화의 주제를 압축한다. 거기에는 꿈이나 일의 성과 혹은 주역이 되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달려야 했던 우리 시대의 모든 페이스메이커들의 삶이 담겨져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달리는 존재. ‘페이스메이커’는 그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울컥하게 만든다. 30킬로까지 주역(?)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달리고는 정작 남은 12.195킬로를 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늘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오로지 몸 하나에 의지해 결승점까지 가야 하는, 그것도 1등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로써 달려야 하는 페이스메이커의 마라톤은, 즐거움과는 상관없이 힘겨운 노동으로 집약되는, 일로서의 삶을 겪어온 가장들을 가장 잘 표현한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동생을 성공시키고는, 정작 자신은 노동에 피폐된 몸뚱어리 하나 덩그러니 안고 있으면서도, 그 잘된 동생만 보면 바보같이 웃는 가장들. 그런 형이 부담된다는 동생의 말에 질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도 모르고 동생을 힘들게 했다며 자책하는 그런 존재들. ‘페이스메이커’는 이들에게 던지는 헌사 같은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가장을 대변하는 듯한 페이스메이커 만호 옆에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듯 세워놓은 신세대 미녀새(장대높이뛰기 선수) 지원(고아라)이란 존재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만호의 질문은 그래서 이 한 시대를 겪은 가장 같은 인물이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상투적일 수 있는 이야기조차, 온몸으로 말하는 페이스메이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에 상투성을 넘어선다.
김명민은 이 영화가 결국 대사 몇 마디가 아니라 몸으로 말해줘야 그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배우였다. 완벽하게 페이스메이커로 빙의된 김명민은 어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과 비쩍 마른 체구, 그리고 달리고 달려서 너덜너덜해진 발바닥 같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몸 자체로 이 진심을 전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김명민의 얼굴과 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슴이 찡해질 수밖에 없다.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달려 나간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처지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그 레이스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로 달리기도 한다. 이 김명민이라는 놀라운 배우에 의해 완성된 ‘페이스메이커’를 보면서 울컥했다면 당신은 어쩌면 이 사회 속에서 때때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부지불식간에 해온 장본인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 주변의 누군가가 당신의 페이스메이커였는지도.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자꾸만 자신을 또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