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그녀는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 패션이라는 말조차 생경하던 시절 국내 최초 패션쇼 개최, 최초 기성복 제작, 최초 ‘하이 패션’ 수출 등 급변하는 한국 패션 산업의 중심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디자이너이다. 그리고 지금,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패션계에서는 그녀의 삶을 재조명한 전시, 영화 제작 등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패션의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패션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뿌리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 뿌리의 뿌리를 찾아갔을 때 노라노 선생님이 계셨다. 그런데 코코 샤넬,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이제는 대한민국 패션사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 서은영 / 스타일리스트. 2012년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기획자
지난 10월 3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는 그렇게 서은영씨가 선생을 찾아와 전시회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44년 일본군 위안부 징집을 피해 17살의 나이에 결혼, 그러나 19살에 이혼을 선택한 노라노. 그 후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 결심한 그녀는 주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나는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처럼 살겠다 다짐하며 ‘노명자’에서 ‘노라노’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패션디자이너로 살아온 60여 년의 삶은, 그 시대 억압된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처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어떠셨나요?
사실 자기 영화를 찍는다는 거는 옷을 벗고 나간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처음엔 내가 한 거라고는 옷 만들어 판 거밖에 없는데 영화가 되겠느냐며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찾아온 젊은이들이 굉장히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또 우리 집안 젊은이들도 내가 세상을 떠나면 누군가는 찍을 텐데 살아생전에 하는 게 좋겠다 해서 하게 됐죠. 3년 동안 찍는데 내가 뭐 잘났다고 이렇게 찍히나 싶었지만, 그래도 이걸 계기로 젊은이들을 만나고 우리 시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니 좋네요.(웃음)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사는 날까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노라노
한국전쟁 전후 ‘패션’이라는 말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패션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존재했다. 1956년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하며 우리나라에 패션의 시작을 알린 노라노 선생은, 1960년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멋진 옷을 더 많은 여성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성복을 제작한다. 그동안 맞춤복을 하며 축적했던 고객들의 신체 사이즈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성복은 맞지 않는 옷으로 통칭되던 시절, 기성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기사들도 심심찮게 등장했지만 일하는 여성들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고 결국 성공이었다. 그 후 노라노는 1967년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나팔바지) 등등 수많은 사회 이슈를 낳는 패션을 스타일링한다. “노라노 선생님은 옷을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버렸다”는 가수 윤복희의 말처럼, 당시 노라노 선생의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을 깨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려는 여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하기 힘든 도전들을 많이 하셨는데요. 옷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일찍이 미국에 가보니 여성들이 당당하고, 우리와는 다른 사고의 차이를 많이 느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렇게 바꿔주면 좋겠다 생각했지요. 사실 해방 직후 여성의 지위가 없었거든요. 그런 시대에 우리가 활약한다는 것은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을 만들자, 그렇게 생각했죠.
언론의 지탄을 받는다거나 힘든 일도 많았을 거 같습니다.
일거일동이 다 비판거리였죠. 1950년대 초반, 미국 방송국에서 취재를 요청해 미니 패션쇼를 비공개로 연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한 신문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일선에서는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후방에서는 여성들이 웃통을 벗고 날뛴다’는 식의 가십 기사가 나서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정도 일에 흔들린다면 네 앞길이 염려스럽다. 호평보다는 혹평이 너를 더 빨리 알리는 길이다. 그렇게 마음이 약하다면 차라리 지금 그만두는 게 좋겠다.” 그 말씀이 제 인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 이후 나 자신에게만 엄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남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내 양심과 믿음에 따라 원리 원칙을 지키며 살았죠.
‘내가 삭스백화점에서 멋진 실크 드레스를 발견하고 상표를 보니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씌어 있었다. 너무 놀라 어떻게 백화점 최고급 디자이너 코너에 한국 제품이 걸려 있느냐고 물었다. 담당 바이어는 파리 기성복 전시회에서 발견하고 제품이 좋아 주문했다고 했다. 패션이 파리나 밀라노에서만 오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패션은 어디에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 – 미국 뉴욕타임스, 1973년 8월 6일 자
노라노는 최초의 패션 한류를 이끈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패션으로 어떻게 우리나라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던 선생은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옷을 만들 때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옷감을 쓴다는 것. 패션 덕분에 이탈리아의 섬유 산업이 발전했듯, 패션 산업이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될 날이 꼭 올 거라 믿었다. 그 원칙을 고수해온 노라노 선생은 1973년 국산 견직물로 만든 제품들로 파리 기성복 패션쇼에 참가한다. 그 패션은 뉴욕의 최고급 패션 거리인 5번가 바이어의 눈에 띄었고, 3백 50벌의 옷을 계약한다. 우리나라 무역 사상 처음으로 국산 소재로 만든 ‘하이패션’이 수출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돼 미국 뉴욕에서 국산 실크를 알리는 패션쇼를 열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패션의 중심지 뉴욕 ‘7번가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실크와 프린트 산업 수준에 놀라는 기사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 위에서 세계 패션 시장을 철저히 조사하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세계적인 패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였다.
우리나라 섬유 산업에도 큰 기여를 하셨는데요. 선생님께 조국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시대만 하더라도 미국은 너무 부자고 우리는 너무 가난했잖아요. 처음 패션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한국이 어려우니 여기서 더 활동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남의 나라의 좋은 환경에서 내가 즐긴다는 것이 뭐라 해야 하나, 배신이랄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비록 가난하지만 내 조국은 한국이고 그곳에 나의 부모님과 형제가 있으니까, 돌아가자. 내가 미국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걸 가지고 한국에 도움이 되자 그렇게 생각했죠. 그때는 누구나 다 그랬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보자는 열정이 넘쳤고, 그런 마음들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거죠.
‘패션’ 외길 인생을 걸어오셨는데, 한결같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늘 도전 정신으로 버텨왔던 거 같아요. 도전과 야망은 또 다른 말인데, 야망은 목적의식이 확실한 거라, 그 목적이 달성되면 힘이 빠져. 그런데 계속 도전하며 사는 사람은 그게 없어요. 계속 가는 겁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정과 긴장감을 즐기는 거죠. 그러니까 젊은이들에게도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또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행복한 사람은 성공을 못 한다, 분노가 있어야 한다고 해요. 저는 19살에 이혼하고, 집에서 쫓겨나고 갈 데도 없고 억울한 소리도 많이 듣고, 그때의 분노가 지금의 나를 만든 기본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곧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돼, 힘들어’ 그러잖아요. 근데 원래 산다는 게 다 힘든 거지요. 쉬운 일이 있나요? 지금 힘들어도, 그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서 계속 도전하며 밀고 나가야지요.
꿈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강연에 가면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가 두 가지 있습니다. 내 일이고 남의 일이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반드시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시기에 구원의 손길을 뻗어 나를 한 단계 올려준다. 그 한 단계 한 단계가 나를 오늘날까지 오게 했다. 또 한 가지는 욕심이 없어야 된다. 욕심을 내면 스트레스가 오니까 건강을 해치잖아요. 순리대로 살면 됩니다. 남들이 보면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는데 별거 아니야. 열심히 살고 있으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거거든요.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신 거 같습니다.
그렇죠. 50대 때 저를 괴롭힌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줄까 고민하는데, 어느 날인가 그동안 나한테 고맙게 해준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도 끝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 용서했어요. 지금 보면 나를 도와준 분들께 다 인사드리지 못해 마음이 아파요. 나중에 연락드려 보면 이미 돌아가신 분도 많았고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스미스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네가 성장한 것을 지켜본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으니, 넌 나에게 빚이 없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들거든 다음 세대에게 갚거라.’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지금은 젊은 사람들한테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이 넘도록 2대 3대에 걸쳐 그녀의 의상을 찾는 고객들이 많다. 실용적이면서도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옷, 편안함과 우아함이 조화를 이룬 옷, 뛰어난 재능으로 정성을 다해 만든 옷, 여성들을 멋있고 당당해지게 만드는 옷. 10년, 2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멋이 나는 옷, 그리고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 명예가 된 옷.
86세의 현역, 대한민국의 최초이자 이제는 최고(最古)가 된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은 지금도 변함없이 옷을 만들고 있다. “옷을 만드는 일을 위해, 늘 스스로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훈련시켜야 했다”는 노라노 선생은 지금껏 단 하루도 아프다는 핑계로 결근한 일이 없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만들어온 하루하루가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를 만들었다.
요즘은 모두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과연 어떻게 입는 게 잘 입는 걸까요?
옷을 입는다는 게 뭐냐. 그게 중요하죠. 왜 옷을 입어요? 목욕탕에 가면 다 똑같은데.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의 개성이 나오고 뭘 하는지도 느낄 수 있잖아요. 제가 백날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옷이 사람보다 먼저 걸어 나오면 실패다. 저는 사람을 봐도 옷은 별로 기억을 못 해요. 옷이 아니라 사람을 보니까. 튀지 않으면 잘 입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옷을 기억하는 사람은 옷을 잘 못 입은 거지.(웃음) 옷이 잘 어울렸으면 그 사람이 멋있다라는 생각이 남죠. 글로 치면 산문이 아니라 시처럼 심플하게 디자인하는 것. 진짜 멋은 절제돼야 하는 것이지, 옷이 사람에 앞서 걸어 나오면 그것은 실패작이다. 그게 저의 패션 철학입니다.
나는 86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갈림길에 서 있었다. 때로는 어리석었고 때로는 지혜로웠다. 사는 동안 나는 그 갈림길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길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 영화 <노라노>에서 선생의 내레이션
“성공이라는 건 남의 거예요. 남이 인정하는 게 성공이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거야. 깊게 생각하면 요는 행복한 게 중요해요. 행복은 내 거니까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풀어내다가도 “젊은이들, 파이팅이야” 하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노라노 선생. 그녀는 이제 28년간 함께 일해 온 후계자와 더불어 ‘노라노’ 브랜드를 다시 국제화하려는 행복한 도전을 꿈꾸고 있다. 야망이 아닌 도전.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는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