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차재성 사진 홍성훈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나름 생긴 건 괜찮았다. 하지만 멀쩡한 겉과 다르게 사람들 앞에서 말이라도 할라 치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고, 심장은 쿵쿵 뛰고 말꼬리도 쏙 기어들어갔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가게 앞에 쭈뼛쭈뼛 서 있다가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가게 주인한테 “이거 주세요” 말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엉뚱한 걸 사오는 일도 많았다. 모심는 날, 엄마를 따라가면 맛있는 못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그 길을 차마 따라나서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난 언제나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뚝 떨어진 외딴섬 같았다.

 

그렇게 작아지다 못해 쪼그라지는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우연히 시인 이상의 작품을 본 순간, 마치 ‘부조리’한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려, 인간의 모습은 원래 이리 복잡하고 부족한 것.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여.”

그렇게 문학에 취한 나는 대학 같은 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공부를 못해서, 환경이 안 따라줘서라기보다는 필요 없기 때문에 안 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간혹 “몇 학번이세요?” 하고 물으면 슬그머니 문학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책의 한 구절로 튕겨냈다. 속으로 ‘대학 나와 봤자 별 볼 일 없으면서’ 하며 ‘썩소’를 날렸다. 집에 들어오면 방 안 벽면 가득한 책들이 나를 반긴다. 저 책들은 나의 교양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 저것이면 충분했다. 대학 졸업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대학생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기가 죽고, 꿈을 꿔도 대학에 떨어지는 꿈을 꾼다. 그런 내가 싫어 매일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 다시 쪼그라든 내 모습을 발견할 때의 참담함이란…. 그야말로 아침에 뜨는 해조차 절망스러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나를 직장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렇게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못났다’는 생각이 화석처럼 굳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만난 마음수련. 그때가 내 나이 마흔둘이었다.

가짜라고 했을 때 희망이 생겼다

수련을 하며 앨범을 들추듯 내 인생을 살펴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학예발표회 때였다. 1인극을 해야 했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 해 결국 무대에 섰다가 중간에 도망 나왔던 창피한 기억. ‘아, 그 기억의 사진 때문에 내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했구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나는 그 기억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 남들보다 잘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 택했던 문학과 술. 하지만 그럴수록 가난한 가정환경과 학력, 대인 기피로 인한 콤플렉스의 늪에서 더욱 허우적거렸고 헤어나질 못했다.

문학을 했던 속마음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이야!” 하며 정신세계를 추구한답시고 나는 다른 속물적인 인간들과 다르다며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결국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아주 못난 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면 너무 힘들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내가 그보다 한 수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해간 것도 그 이유였다. “당신도 어딘가 못난 구석이 있을 거야. 당신도 별 볼 일 없네….” 그렇게 단정하고 치부해야 내가 존재할 명분이 생기기에. 나도 세상도 속이고 있었구나, 나는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리고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환해지듯이, 내 마음에 빛을 비추니 지저분한 부유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만다행인 건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는 가짜이고 나의 본래는 무한대 우주라는 것! 결국, 콤플렉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나 역시 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이 꿈처럼 없는 세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 간밤의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김춘수의 ‘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였다. 세상과 전혀 교감을 못 한 나로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시구가 생경할 뿐이었다. 꽃을 봐도 예쁜지 몰랐고, 오히려 “너는 뭐하려고 이 세상에 나왔니?”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만큼 내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생기 있는 봄과는 겉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 좋고, 봄이 기다려진다. 꽃을 보면 “너는 왜 이리 예쁘게 생겼냐, 반갑다~!”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몇 층 가십니까?” 하고 먼저 묻는다.

명절 때면 가족들 만나기가 불편해 직장에서 숙직을 도맡아 하는 일도 이젠 없다. 아직도 가정을 갖지 못한 것이 부모님과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명절 때면 제일 먼저 찾아뵙고 집안일도 돕는다.

나도 모르게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새 나는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 망각의 강을 건넌 듯, 열등감에 주눅 들고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다.

지금 콤플렉스로 인해 힘드신 분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콤플렉스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실제 삶을 누릴 수 있다.

차재성(52) 님은 전북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국민연금공단에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