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생, 올해 나이 86세가 된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의 모습을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구봉서는 후배들의 부축을 받긴 했어도 운신에 큰 어려움이 없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가 등장하자 코미디언 후배도 아닌데 저 역시 왠지 모를 고마움이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글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BC
지난 2월 3일 ‘추억이 빛나는 밤에’의 게스트는 이홍렬과 이성미였습니다. 구봉서는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방문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홍렬은 구봉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설마… 설마 어떻게 오셨겠어?”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선배의 몸을 부축해서 걸어 나오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홍렬은 일본 체류 중에 구봉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주실 거라고는 기대도 못 했었답니다.그런데 구봉서는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정성 들인 글씨로 편지지 5장을 꽉 채워서 보내주었습니다.그 편지는 이홍렬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고, 지금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다 합니다.그 편지의 내용 일부를 소개해 봅니다.
‘그러잖아도 어떻게 연락해야 되나 걱정하던 차에,
자네 편지를 받아보고 자네 얼굴을 보듯이 반가웠네.
자네의 처지와 심경을 나는 훤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네.
어쨌든 그 역경을 헤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니,
반갑고 기쁘고 고맙기도 하네.(모두 눈물이 글썽)
우리 희노회(아마도 희극인들의 모임인 듯)는 약속한 대로
매주 화요일에 꼭 모이고 있네.
박미선이는 한 번 나오더니 영 안 나오고(모두 울다가 웃음),
한무는 영 그 후로 한 번도 안 나오고(또 웃음)
나머지 식구들은 열심히 하고 있네…(중략)…
한국에 있는 코미디언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킨다는데,
자네가 귀국한다면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
이제 할 말의 오분의 일도 안 됐는데,
벌써 어깨가 결리고 여기저기 쑤시니 그만 쓸까 보네.
자네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하라고 하게.
주소가 바뀌면 바로 연락해줘.- 1991년 6월 15일 아침, 구봉서’
시원하게 터뜨리는 웃음 한 방이 얼마나 건강에 유익한지 많은 연구 결과로도 증명되었지요. 정말 좋은 코미디언은 타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네가 귀국한다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이와 같은 편지를 대선배가 보내주셨으니, 이홍렬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그날 게스트와 MC 후배들은 대선배 앞에 세배를 드렸고 구봉서의 덕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네들도 오래오래 코미디 하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하는 일에 긍지를 가져야 해요. 별 볼일 없는 선배라도, 자주 연락하고 끈끈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구봉서가 현역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풍채 좋고 표정도 유들유들하니 천생 희극인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의 유쾌한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욱 좋군요. 왠지 그 앞에 있으면 추운 날 아랫목에 발을 담근 듯 마음이 따스해지고, 인생의 모든 고통이 별것 아닌 듯 느껴지는…. 지금의 구봉서는 그렇게 신선 같은 풍채를 지녔습니다. 이러한 대선배가 생존해 계신다는 것은, 코미디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