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온수리의 세 식구를 보며
본인의 미모와 춤 실력을 자랑하시는 외할머니에게 숙모는 언제나 잔잔한 미소로 답변을 대신한다. 삼촌은 외할머니의 춤 실력과 미모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고, 어떻게 하면 산장을 친환경적으로 아름답게 지으실까 골머리를 썩으며 본인의 아이디어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경제권을 지닌 숙모를 설득하신다. 숙모는 절대적으로 삼촌을 신뢰하고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지해 주신다.
대외적인 활동을 중시하시는 외할머니는 강화읍에서 주관하는 무용 연습에 매진하시며 당신 연배의 노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열심이시다. 때로는 할머니도 노인인데, 노인이 노인을 위로하는 위문 공연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시다는 것에서 노년의 즐거움을 찾고 계신 듯하다. 내가 찾아뵐 때마다 손녀, 손자들이 시집 장가 가서 증손자를 보고 이 세상을 마무리하실 수 있는지 물어보시는 할머니. 그때마다 나는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지금 할머니 모습으로 보아, 증손자가 아니라 그다음 손자까지 보실 수 있을 테니”라며 웃음을 드린다.
즐겨 먹는 식단과 식사 시간까지 다른 그들의 삶은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고 의미를 찾으며 인생의 작은 기쁨들을 함께한다. 개성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집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기에 누구보다도 각자의 개성을 인정해주고 같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관계 속에서 대부분은 갈등과 상처를 경험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족이기 때문에 받는 상처나 기쁨은 남들에게 느끼는 것 이상으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받는 상처들 또한 여운이 크지만, 그들에게 받는 위안 또한 어떤 좋은 경전 말씀보다 따뜻하다. 강화도 온수리에 있는 세 식구를 보면서 내 삶 속에서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 특히 가족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곤 한다. 그들이 있기에 나도 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11명의 선수들이 있기까지
처음 잡지사에서 축구 사진기자로 그라운드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의 카메라는 주로 선수들의 멋있는 모습을 찍기에 바빴다. 선수들이 골을 넣고 세리머니하는 장면 등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진에 매달렸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런 축구 사진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90분 동안 내가 그린 그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야 할까. 그런 고민들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렇게 보내기를 1년여.
오랜만에 푸른 그라운드를 다시 찾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축구공 하나에 울고 웃는 사람들. 경기를 뛰는 선수들,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 선수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과 선수들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팬들까지.
나에게는 일터이자 놀이터였던 푸른 그라운드엔 이렇듯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구나, 생각하니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나만의 축구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골을 넣은 선수들에게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낸다. 하지만어느 때부터인가 내 눈에 다른 선수들이 들어왔다. 바로 벤치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이다.
특히 작년에는 런던올림픽에서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내면서 온 국민의 환호성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일본과의 준결승 경기 후반전.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나기 직전까지 그동안 함께 고생했던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을 경기장에 내보내는 홍명보 감독의 용병술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고작 1~2분을 뛴 선수들도 동메달을 땄다며 운이 좋다 말했지만, 나는 감독의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
사실 축구 대표팀 23명의 선수들은 본선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수많은 예선 경기를 치른다. 여름엔 더위와 싸우고 겨울엔 추위를 견디며 힘든 훈련을 해내는 선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데도 애쓰는 선수들을 보면 되게 멋있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골키퍼 선수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 너머로 고마운 마음마저 들곤 한다.
대개 축구팀에서는 3명의 골키퍼를 선발한다. 주로 메인 선수 위주로 훈련하면서, 다른 2명의 골키퍼는 보조를 해주는 식으로 훈련을 진행한다. 하지만 메인 선수가 교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선수가 다치지 않는 이상 다른 두 명의 골키퍼에겐 언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기장에서 세 번째 골키퍼를 볼 때면 짠한 마음마저 들곤 한다.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할 때 두 명의 골키퍼는 각각의 골문을 지키고 있지만, 세 번째 선수는 연습 경기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혼자 몸을 풀고 훈련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이야말로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한 선수들이다. 만약 자신이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게 있으면 팀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그리고 만에 하나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이 ‘저 선수가 좀 못했으면 좋겠다’ ‘저 선수가 다쳐야 내가 경기에 뛸 수 있는데, 그래야 나한테 기회가 있는데…’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골 득점은 단순히 한 선수의 결과물이 아닌, 23명의 선수들 모두가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선수들, 코칭스태프들을 보면서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
축구를 매개로 사진을 찍고, 축구공 하나에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러한 경험들이 나 자신을 성숙시키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생의 시야를 폭넓게 해주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돋보이려 하기보다 희생하고 양보하며 팀 전체를 위해 뛰는 선수들이야말로 나에겐 베스트 멤버다.
18살 그해 여름,
척추장애가 가져다준 깨달음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계곡으로 놀러갔고, 재미 삼아 시도한 다이빙. 그것이 나에게 장애 1급의 척추장애, 전신 마비라는 평생의 짐을 안겨주게 될지는 몰랐다. 8시간의 큰 수술, 여러 번의 병원 이동, 몸을 움직이지 못해 욕창으로 고생하며, 몇 차례나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도 겪어야 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식물인간처럼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던 10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저런 생각뿐이었다.
왜 내가 태어났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필 왜 그곳에 갔을까, 왜 다이빙을 했을까. 몇 번이고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 후회도 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을 그냥 인정해보자며, 나를 조금씩 내려놓을수록 마음도 점점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 겨울이었다. 우연히 꽁꽁 언 땅을 뚫고 피어난 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저 언 땅에서도 꽃이 피어나지 않는가. 나도 살아가보자. 그즈음 무슨 계시처럼,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에 연필을 끼워주셨다. 손가락에 연필을 끼고, 마치 다시 초등학생이 된 기분으로 3년 동안 선 긋는 연습만 했다. 내 이름을 완전히 쓰는 데만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캔버스에 내가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전신 마비 장애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주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1992년 장애 화가들의 전시회인 ‘소울음 3인전’으로 화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장애 화가 최진섭이 아니라, 일반 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2년 7월 장애인들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인 ‘소울음아트센터’의 문을 열었다. 소울음은 ‘깨달음’의 우리말이다. 내가 언 땅에서 피어난 꽃을 보며 용기를 얻었듯,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며 사랑을 나누고 삶을 즐기는 방법을 깨닫자는 취지로 붙인 이름이다. 그림을 팔아서 운영비로 이용하며, 교습비는 받지 않았다.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장애인들도 우리 화실에 배우러 온다. 앞으로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이 누구나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와서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장애와 비장애인들 사이를 좁히면서, 이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장애 1급의 척추장애, 전신 마비. 그래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나는 숟가락도 들 수 없는 사람이다. 처음 사고 당시 엎드려 있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욕창이 생길까 봐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두 시간마다 나를 돌아눕혀 주었다.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시는 10년의 시간 동안에도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돌보아주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게 해주셨다.
매일 장애인들을 차로 데려다주는 이웃들, 화실에 들러 이발을 해주는 아주머니, 또한 식사와 청소 등 화실을 도와주는 자원 봉사자들을 볼 때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따듯해짐을 느낀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은,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봉사라는 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답하는 일인 거 같다. 나도 그렇게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