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9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였다. 당시 중환자실 8명의 환자를 2명의 보호사가 돌보았다.
첫날, 저녁쯤 한 환자분의 딸이 엄마를 보러왔다. 4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었는데,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첫인상은 좀 차갑다 할까, 말도 별로 없고 되게 까다로운 분이겠거니 했다. 다음 날도 비슷한 시간쯤 딸이 찾아왔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딸은 어김없이 병원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뭐 며칠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계속 반복되니까 뭔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입원한 지 1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를 보러 왔다고 했다!
딸은 오면 우선 물을 떠다가 엄마 얼굴도 씻기고, 손발도 닦아주고 로션도 발라주었다. 우리들이 다 했다고 해도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하며 엄마를 챙겼다.
그리고 욕창 환자들이 쓰는 베개도 네 벌씩 사다놓고 모든 면에서 엄마가 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엄마, 내가 어렸을 때 오빠가 50원 준 거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썼다고 엄마가 혼냈었잖아, 기억 나?” “엄마, 오늘 오빠가 승진했대. 오빠 잘했지?” 그리고 엄마의 손을 꼬옥 잡고 지나간 추억 이야기며 손자들 자라는 이야기, 집안 이야기 등을 해드리곤 했다.
비록 못 움직이고, 말도 못하고, 밥도 코로 연결된 줄을 통해 겨우 드셔야 하는 중환자이시지만, 그렇게 딸이 있을 때면 눈빛도 얼굴색도 활짝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날씨도 춥고 비도 내리고 무척 궂은 날이었다. 오늘도 올까? 했는데 어김없이 딸은 나타났다. “이런 날은 좀 쉬지. 내가 있잖아요. 나도 엄마한테 최선을 다해드리는데.” 그렇게 말하자 딸이 한마디 했다. “저도 알지요. 그런데 엄마가 기다릴 거 같아서요. 왔다 가야지 마음이 편해요.”
그렇게 정성을 다하니 우리도 감동을 받아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게 되었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 생각도 많이 났다. 사실 나도 효녀 소리 들었지만, 그 딸처럼 하지는 못했다. 애들 낳고 살림한다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고, 엄마 돌아가실 때도 옆에서 하루밖에 못 있어드렸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한스럽다.
“어떻게 그래요? 엄마가 참 잘 키웠나 보네.” 첫인상은 차가웠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많은 그 딸에게 한번은 이렇게 물었다.
자식들 키우느라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그렇게 고생을 하신 엄마라고 했다. 자기 아들들도 엄마가 다 키워줬는데, 이제 좀 쉬실 만할 때 쓰러지셨다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할머니가 키워줬다던, 이제 대학생이 된 손자들도 자주 와서 꼭 엄마처럼 할머니에게 하고 갔다. 얼마나 사랑을 많이 줬으면 손자들까지 그렇게 할까 싶어서 부럽기도 했다.
“바쁠 텐데 싫다고 안 하고,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 물으면 손자들은 “당연히 와야죠. 우리 할머니인데요” 하고 대답을 했다. 역시 자식들은 보고 배우는 것일까.
5개월 후 내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그 환자하고도 헤어졌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짝궁 보호사를 통해 소식을 듣는데 그 따님은 여전히 매일같이 엄마를 찾아온다고 한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그 엄마는 참 행복하실 것이다. 중환자실의 의식 없어 보이는 환자들도 다 느낀다. 우리는 안다. 좋으면 웃는 게 느껴지고 어떨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보호자를 본다는 것은 참 드문 일이라,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딸 이야기를 하곤 한다. 최고의 효도는 뭘 해드려서가 아니라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다. 부모에겐 맨날 봐도 보고 싶은 게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