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나의 재능을 발견하는 기쁨
국지혜 27세. 병원 코디네이터.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학창 시절 나는 예체능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평소 손재주가 있다는 소리도 들었기에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은 커져갔다. 하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택한 것은 실기 시험이 없는 대학이었고, 수능 시험만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디자인을 마음껏 할 수 있기에 들뜬 마음으로 대학 생활을 했다.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실기 과제 때문에 학교에서 노숙자처럼 지내며 3일 밤샘 작업은 기본이고 매일 밀려오는 과제에 체력이 바닥날 만도 한데 공부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집중력이 쏟아져 나왔다.
매번 밤샘을 하고도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성적도 늘 상위권이어서 장학금도 받았다. 그동안 공부로 인정받지 못해 부모님 속을 썩였던 것을 대학에 와서 효도하는 기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 자신과 약속을 한 것이 있다.
“나도 이제 성인이니까 내 용돈과 과제 재료비는 내 손으로 벌어야겠다!!”
그래서 주말이면 커피숍 서빙 아르바이트를 오픈부터 마감까지 했다. 평일에는 과제를 하고 주말엔 새벽 첫차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이 이어졌다. 만성 피로에 시달렸고 주변에서도 걱정하셨지만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많았던 내 성격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도 디자인 회사 취업을 위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원에 다녀야 했다. 내가 했던 일은 안내데스크와 비서직으로, 모두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는 서비스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디자이너를 꿈꿔왔던 나인데 어느 순간 생활비 마련을 위해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은 과 친구들은 디자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승진하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서비스직 일이 나에게 더 잘 맞는 것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 다시 나의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밤샘 작업을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기분 좋아지게 하고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그 일이 더 뿌듯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던 중 병원 코디네이터 제안을 받았다. 환자를 가족처럼 챙겨주고 병원 경영도 신경 써야 하는 직업이었다. 아픈 환자들을 대할 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한다면 환자들도 좋아할 것이다. 서툰 디자인 실력도 병원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시작하는 초보 수준이지만 꿈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면서 나만의 특별하고 소중한 능력을 발견한 것에 대해 출근할 때마다 감사함을 느낀다.
디자인 회사 취업을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원 수업과 과제를 해낼 때, 정말 최강 체력으로 주경야독에 매진했다. 지금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의 시간을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힘든 일들을 하나씩 헤쳐 나가면서 자신이 진짜 잘할 수 있는 일, 혹은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기분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기분이다. 그래서 신나고 감사하고 행복한 인생이다.
명불허전 막강 경비원으로 거듭나리!
홍경석 54세. 대전시 동구 성남동
인생이 박복하여 저는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생모를 잃었습니다. 초가집의 누옥(陋屋)에서 편부와 빈곤하게 살았을지언정 그래도 초등학교 때 공부는 줄곧 우등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단한 삶의 무게는 더욱 그 중압감이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래들이 까만 교복을 입고 등교할 적에 고향역 앞에서 구두를 닦는 것으로 생업 전선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저처럼 많이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가 벌어먹고 살 거라곤 고작 몸으로 부대끼는 험한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노동과 행상도 모자라 안 해 본 직업이 드물 정도입니다. 하지만 힘이 든 건 차치하고라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당최 보이지 않았기에, 학벌보다는 능력으로써 승부할 수 있다는 세일즈 업계에 입문하기에 이릅니다. 영어 교재와 테이프를 판매하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당시까지 영어라곤 고작 알파벳 정도밖에는 모르는 ‘무식쟁이’였던 관계로 저는 한동안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대들었습니다.
바로 매일 영어테이프를 들으며 교재를 깡그리 암기해 버리는 거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저는 실적이 우수한 사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엔 주임으로의 승진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소장으로 승진하여 매니저가 되자 대학을 나온 많은 사원들을 관리하는 직책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 회사가 부도가 난 것입니다. 다른 회사로 취업하여 역시도 열심히 뛴 바람에 다시금 매니저를 맡기도 했지만 그 직장에서부터는 이제 기본급은 언감생심이었고 철저한 능력급만이 제 수입의 전부였습니다. 그건 바로 ‘비정규직’이라는 원초적인 함정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나(!) 학력이었습니다.
‘정식 대학’엔 가지 못할지언정 지식만은 쌓자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주말마다 공공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수년간 엄청난 양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내공을 쌓았습니다. 그러자 깡마른 사시랑이와도 같던 내게도 지식과 지혜의 샘물이 졸졸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에 대한 ‘진정한 투자’도 시작했습니다. 물론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들과 딸이 고교를 다닐 당시 도합 6년간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웅 (등교)과 마중(하교)을 나갔습니다. 또한 가급적이면 칭찬과 격려로서 동기부여를 함에도 소홀함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학원에는 못 보냈지만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같이 다녔습니다. 그러한 ‘자양분’이 동기가 된 덕분이었을까요. 아들은 국립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닌 후 취업하였고, 딸 역시도 현재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입니다.
그러던 중 작년 가을 제가 불의의 실직을 당했습니다. 명색이 가장인지라 두문불출의 백수건달이 되고 보니 가족들 보기 면구스러워 견딜 재간이 없었습니다.
취업코자 이력서를 낸 곳에서 이윽고 연락이 온 건 작년 말이었습니다. 다행히 1월 1일부터 근무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난생처음으로 맡아서 하게 된 일은 바로 경비원입니다. 하루는 주간 근무로써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튿날은 반대로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근무하는 시스템입니다.
소식을 듣고 아들과 딸도 모처럼 집에 왔습니다. 경기도가 직장인 아들과 서울서 대학원에 다니는 딸이 이 아빠를 응원하고자 ‘작당’하여 오자 어찌나 반갑던지요! 새로운 직장 생활에 충실하느라 평소 물처럼 즐겼던 술조차 일부러 한모금도 안 마시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들이 따라주는 술은 차마 거절할 수 없더군요.
“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조금만 고생하세요. 제가 승진하고, 동생이 취업까지 하게 되면 아빠의 지금 고생도 종착역에 닿으실 겁니다. 그러고 나면 평소 아빠의 소원이라는, 글만 쓰실 수 있는 환경을 꼭 만들어 드릴게요.”
아들의 그 한마디는 물질적으론 여전히 가난뱅이일망정 자식 농사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진정한 만석꾼이란 자긍심이 들게 해주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자타공인 효자가 된 아들딸은 기실 어려서부터 효심을 강조하고 더불어 많은 책을 읽도록 배려한 때문이라 믿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을 미래의 동량으로 키우겠노라는 저의 의지는 그야말로 한 땀 한 땀의 정성에서 기인했던 것이죠. 저 또한 한 땀 한 땀의 노력과 정성으로 명불허전(名不虛傳) 막강 경비원으로 거듭날 작정입니다.
‘나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이 나를 바꾼다
김정환 36세. IT 디자이너. 서울시 동대문구 장안동
새벽 4시. 몇 년 전부터 내가 일반적으로 기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뜰 때마다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이 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항상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정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거 같다. 디자인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정말 끊임없는 노력을 많이 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게 노력이고,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꿈을 이루게 된다고 항상 믿어왔다. 특히 ‘나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이라는 말은 언젠가 책에서 읽었는데, 참 멋진 말로 다가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형적인 ‘올빼미족’이었다. IT쪽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상 야근, 철야는 피해갈 수 없는 당연한 생활의 일부였다. 예전에는 이런 생활 패턴 때문에, 즐기면서 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었고, 슬럼프에도 자주 빠지면서, 건강까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탓하기보다 나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겼다. 나는 이전의 부족하고, 비효율적인 내 자신을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시기에, 여러 가지 책을 읽던 중 ‘새벽형 인간’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고, 나한테 꼭 필요한 거라 여겼기에 바로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수십 년간 가져온 나의 생활 문화, 패턴을 근본부터 바꿔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취침 시간을 많이 앞당겨야 하기에, 늦은 시간까지의 지인들과의 만남을 할 수도 없었고, 술도 마실 수 없었으며, 이밖에도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금욕을 해야 했다. 또 겨우겨우 새벽에 일어난다 해도, 졸 때도 많았고, 멍한 상태가 지속되기 일쑤였다. 힘들었지만 나를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고 노력했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평등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이라도 남들보다 더 많이 확보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을 버티니, 점차 몸이 적응했고, 점차 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순수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새벽 시간에는 나를 방해할 외적인 요소가 아무것도 없었고, 굉장히 집중이 잘되었다. 당연히 일의 효율과 성과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또한 올빼미족 때 가졌던, 나쁜 습관들이 상당수 고쳐지면서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남들보다 더 양질의 시간을 확보하고 시작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기 전엔 늘 기분이 좋고, 다음 날이 기다려지는 미래 지향적인 긍정적 마인드 정착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했다. 경제적으로는 대기업을 다니는 지인들보다 수입이 많으며, 일적으로도 인정받고 있고,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을 즐기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바꾸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결과들이 얼마큼 자신을 바꿀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나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을 하려면, 본인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보려는 노력, 자신의 나쁜 습관을 A부터 Z까지 고쳐보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