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조건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통해 기적 같은 감동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시각장애인, 뉴스 앵커가 되다

이창훈 28세. KBS 프리랜서 앵커

“안녕하세요. <뉴스 12>의 생활뉴스 앵커 이창훈입니다.”

2011년 11월 7일, 뉴스 앵커로서 첫 방송을 했다. 523: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내 방송 최초로 시각장애인 앵커로 뽑혔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생후 7개월 만에 뇌수막염을 앓아 시력을 완전 잃었다. 딸만 셋이었던 집안에서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가 컸던 터라 백방으로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은 계속됐지만, 어느 순간 그것조차 당신의 욕심임을 깨달은 어머니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마음을 추스르셨다.

2006년 대학교 3학년 때, 헌법재판소의 ‘시각장애인 안마업 독점’ 위헌 판결이 내려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각장애인들의 비극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상황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우리들에 대해 알려나가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차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잘 알지 못해서란 거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2007년부터 시각장애인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면서 내가 만든 콘텐츠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PD, 작가, 엔지니어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내면서 방송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작년 6월 KBS에서 앵커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았을 때, 새로운 기회란 생각이 들었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먼저 뉴스를 많이 들었다. 뉴스 기사를 스크랩해서 점자 단말기에 넣어 점자로 읽어 내려갔다. 그다음 목소리 녹음한 걸 반복해서 듣는 등 하루 4~5시간 꾸준히 연습해 나갔다.

결국 서류 전형과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최종 면접에서 쟁쟁한 열 명을 제치고 합격했을 때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많은 분들이 방송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뉴스를 할까…’ 사실 여느 앵커와 다른 건 점자 정보 단말기로 뉴스 멘트를 읽어나간다는 것뿐이다.

올해부터는 직접 앵커 멘트까지 작성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일도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더 많은 장애인들이 다양한 분야에 도전할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역할을 하고 싶다. 더욱이 며칠 전 초등학교 아이가 사인해달라고 다가왔을 때 사람들이 허투루 보지 않는구나 싶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렇게 하면 공부가 잘되는구나’를 알고, 뉴스를 보면서 ‘아, 이런 시각이 있구나’를 배우고, 기존 앵커들의 뉴스를 들으면서 ‘아, 이렇게 하면 좀 더 전달력이 좋구나’를 익히는 등 매 순간 주변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려고 했던 마음가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김옥희 작 <스쳐 지나가는 향기도 기억하고> Oil on Canvas. 21×49cm.

 

자격증은 아이들의 꿈을 달고

윤정현 53세. 전남 장흥실업고등학교 교사

20여 년간 전남 농어촌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대부분의 농어촌 특성화 고등학교가 그러하듯이 가정환경이 열악한 아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고, 성적이 좋다 해도 의욕을 상실한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을까. 나는 자격증을 생각해냈다.

몇 년 전 보성실업고에 근무할 때였다. 고1 때부터 맡았던 한 학생이 틈만 나면 학교에서 잠만 잤다. 가정환경이 너무 곤란해서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교 3년 동안 식당, 편의점, PC방, 주유소 등에서 일을 했는데, 그중에서 온종일 허리 한번 펼 시간도 없이 설거지를 하는 식당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이 학생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소질에 맞는 자격증을 따게 해서, 사회인의 길을 잘 걷게 해주는 것이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독서반을 만들어 먼저 ‘가나다’부터 가르쳤다. 1년 해서 안 되면 2년, 2년 해서 안 되면 3년에 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전에 자격증을 따서 사회에 나가 성공한 제자들에게 강연도 부탁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학생에 맞는 자격증 일정을 체크해서 기능사 시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아이들의 취업 상담을 위해 경제 신문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구독했다. 진로 상담도 개개인의 적성은 물론 그 분야의 성장 가능성을 고려하여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짬짬이 내어 정말로 3년 동안 눈물겹게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자동차정비와 건설기계 자격증 등을 13개나 취득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생도 들어가기 어려운 부사관 시험에 합격해서 직업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부사관 시험에 응시한 학생들 중 자격증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 학생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몇 년 전 맡았던 한 여학생도 생각난다. 그 학생의 장래 희망은 할인점 판매원이었다. 단칸방에서 삼대가 살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것이, 그 학생이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꿈의 크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총명하고 열의가 넘치는 학생이었기에, 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하나하나 안내를 했다. 방과 후와 주말에, 상담과 전화 독려로 이론 공부를 시켰다. 방학에는 모자란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시켰다. 매일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관련 자료를 나눠주며 공부를 시켰다.

원서비와 시험을 보러 갈 때는 교통비를 대주고 부산, 광주, 목포 등 시험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그 결과 그 여학생은 자동차정비 기능사, 건설기계정비 기능사, 불도저, 굴삭기, 지게차 기능사 등 건설기계 분야의 거의 모든 자격증을 취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보처리기능사, 인터넷 정보 관리사 등 무려 34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결국 특별 전형으로 조선이공대 자동차과를 전액 장학생으로 다녔던 그 여학생은 현재 보험 회사 자동차 대물분야를 담당하고 있고, 자동차 분야 최고 전문가를 꿈꾸고 있다.

그 외에도 한글도 못 읽던 아이들이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8번 만에 자격증을 딴 아이도 있다. 학원비가 없어 식당 일을 하며 주경야독한 제자들, 그렇게 자격증을 따서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해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누구나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김옥희 작 <지금 스며드는 진한 향기> Oil on Canvas. 38×38cm.

 

글라디올러스와 수선화, 두 꽃이 이뤄낸 기적

강명식 83세. 경남 거제시 예구마을 공곶이 농원

‘거제 8경’ 중 하나로 불리고 ‘종려나무숲’이라는 영화의 촬영지가 되면서 더욱 유명해진 우리 농원은 해마다 봄이면 꽃의 바다가 된다. 샛노란 수선화와 글라디올러스, 붉은 동백, 새하얀 조팝나무가 쪽빛 바다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가히 절경인 이곳은 아내와 내가 40여 년간 피땀으로 일군 곳이다.

내가 공곶이에 처음 온 것은, 1957년 중매로 아내를 만나면서 처가가 있는 예구마을로 선을 보러 와서이다. 아내와 마을 뒷산을 산책하다가 ‘눈에서 불이 번쩍 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했는데, 바로 공곶이었다. 결혼 뒤 공곶이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10여 년간 마산 등 대도시에서 돈을 번 후, 1969년 마침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토록 이곳에서 살기를 바랐지만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방도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중, 우연히 옆집 화단에서 가꾸던 글라디올러스란 꽃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개의 어미 뿌리에 새끼 뿌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꽃 뿌리 하나에 콩알보다 작은 종자 15개가 붙어 있네. 뿌리 하나에 10원만 하더라도 10만 개면 100만 원… 1년, 2년 지나면 몇 만 평에 뿌리를 내리겠구나.’

이 단순하고도 간단한 계산 방식으로 몇 년이 지나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감이 생겨났다. 나는 글라디올러스를 손에 들고 외쳤다.

“이것이다. 비록 두 뿌리로 시작하지만 언젠가 이 땅 전체를 얻을 것이다!”

그 드넓은 땅에 또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길을 걷다가 한 가게에서 수선화 뿌리를 보게 되었다. 주머니를 몽땅 털어도 수선화 두 뿌리밖에 살 수 없었다. 많이 사면 그만큼 소득이 클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형편상 접을 수밖에 없었다.

꽃을 심기 위해,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때론 어두컴컴한 밤까지 일은 계속 됐다. 아내도 내가 하는 일에 묵묵히 따라와 주었다. 당시엔 농기계가 없었던 터라 일일이 호미와 삽으로 때론 손으로 척박한 산을 개간해나갔다. ‘손’을 농기구라 말할 정도로, 손끝은 닳고 닳았다. 어느덧 산은 다랑이 밭으로 층을 이루었고, 그 길이가 4km를 넘었다. 산을 개간하다 보니 걸어 다닐 때마다 미끄러워, 개간하다 나온 돌로 333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길을 중심으로 동백나무가 심어졌고, 땅에는 수선화와 글라디올러스를 비롯해 밀감나무, 유자나무, 종려나무 등이 심어졌다.

처음엔 자연 재해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69년, 1~2년간 2천 그루의 밀감나무를 심었지만, 60년 만에 한파가 오면서 밀감나무가 모두 얼어 죽어버렸다. 열대 나무인 밀감나무가 얼까 봐 가을이면 나무마다 가마니를 덮어씌우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건만, 이제 막 열매를 맺을 찰나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버렸을 땐 좌절감도 컸고, 그때 충격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렸다.

그다음 시도했던 동백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동백나무는 꺾꽂이를 해서 심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기까지 1년 내내 공을 들여야 한다. 잎을 따주고, 줄기 끝은 깎아 흙에 꽂아주고, 때에 맞게 물을 주고, 여름엔 볕을 보면 말라 죽기에 발을 쳐주는 등 애지중지 키워나갔다. 하지만 다음 해 태풍 때문에 동백나무 10만 그루가 죽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때마다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 이상으로, 이 땅을 알뜰히 가꿔서 아름답게 지켜나가자…’라고 힘든 마음을 추스르며 계속 밭을 일구고 꽃과 나무를 심어 나갔다.

그렇게 10~2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비로소 꽃과 나무를 팔며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고, 땅은 정직하게 손길이 닿은 대로 화답해주었다. 이제 해마다 봄이 되면 노란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난다. 두 뿌리로 시작했건만 땅을 가득 메운 수선화를 볼 때면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자연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 노력의 흔적으로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4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농원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선화, 동백나무, 종려나무, 조팝나무 등 많은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큰 자연 정원을 이루고 있다. 내 자신도 이 일을 해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글라디올러스와 수선화, 이 두 꽃을 일컬어 기적의 꽃이라 부른다. 이 두 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자연경관에 감동할 때마다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싶어 감사하다. 또한 이렇게 되기까지 묵묵히 따라와 준 아내와 건강하게 잘 커준 아이들에게도 고맙다. 사람들은 꽃과 나무를 보며 천혜의 자연 농원이라 칭송하지만, 그것은 부족한 내게 하느님이 허락하신 삶이었다.

 

김옥희 작 <사랑-정> Oil on Canvas. 38×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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