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정리 김혜진 & 자료 제공

<나 자신과의 대화>
(넬슨 만델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2013년 12월 5일,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서거했다. 한평생 아프리카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해온 넬슨 만델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했던 그는 훗날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이 된다. 취임식 날 자신을 투옥했던 백인 교도관들을 특별 귀빈으로 초청하며 자신의 평소 가치관을 몸소 보여줬던 그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인종을 떠나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화해와 용서’의 상징 넬슨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을 되새겨 본다. – 편집자 주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서로를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이 투표장에 들어오는 모습은 내 기억에 깊숙이 남아 있다. 길에 늘어선 사람들의 거대한 행렬, 생애 첫 번째 투표를 반세기 동안 기다려온 할머니들, 마침내 자유국가에 살게 되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백인 남녀들….
선거 기간 동안 전국엔 활기가 넘쳤다. 마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 것 같았다. 이것은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희생과 나보다 앞서 사라져간 모든 아프리카의 애국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감사할 수 없다는 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나의 사명은 나라의 상처를 한데 묶고 화해와 신뢰,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특히 소수 인종인 백인들과 혼혈인, 인도인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걸 알기에 그들을 안도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와 싸운 것이지 백인과 싸운 것이 아님을, 그리고 이제 모든 남아공인들은 하나 되어 서로 손잡고, 우리가 ‘한 나라 한 국민’임을 깨닫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했다.


영국 런던에 간 넬슨 만델라

아래 자신의 통행증을 태우는 넬슨 만델라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

1918년 나는 트란스케이 음베조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공동체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아버지 말씀과 우리 부족의 풍습을 따르며 생활했기에 적어도 인간이 만든 법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가끔 마을 회의가 열리면 템부족 모두가 참석하여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곤 했다. 그것은 내가 본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1948년 남아공의 백인들은 이 땅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를 수립했다. 백인이 흑인들을 격리하며 지배하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가 그것이다. 국민의 92%가 흑인이고 백인은 단지 8%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의 권리는 백인들이 독점한 상태였다. 흑인에게는 투표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고 토지 소유권마저도 없었다.

더 나아가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 시설, 거주지 등 일상의 세세한 구역까지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통행할 땐 반드시 통행증을 휴대해야 했고, 이를 어기면 즉각 체포되었다. 우리는 이 부당한 법에 대해 비폭력 운동으로 저항했다.

1960년 샤프빌에서 대규모 총격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면서 나는 비폭력 저항의 한계를 느꼈다. 이 사건은 비폭력 저항에서 무장 투쟁으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1962년 무장 투쟁 혐의가 발각되면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억압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

감옥 생활은 여러모로 큰 고통을 주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볼 수 없고, 고통받는 그들을 지켜낼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한편으론 감옥은 날마다 자신의 행동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난 내가 정말 오만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론 내가 힘들 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들에게 과연 충분히 고마움을 표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 너머엔 백인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내 의식을 억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나는 억압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 또한 증오의 포로이며, 편견과 편협함의 감옥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비와 관용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태어나면서 피부색이나 출신 배경, 종교 등을 이유로 타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듯이, 미움이 배워서 알게 된 것이라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감옥은 비록 내 육신을 가두었지만, 정신에는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었다.

세월이 흘러 전 세계에서 나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 1990년 2월 11일, 27년 만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1993년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의 끈질긴 대화와 협상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공식 선언하게 된다.

로벤 섬의 철조망

아래 로벤섬 감방 책상

“나는 선각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종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다.”

대통령 취임 후 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과거 인권 침해 사실에 대해 잘못한 점을 진실로 고백하되,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는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즉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실과 화해, 용서를 통해 과거를 알린다는 것이니까.

우리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함께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듯이, 나는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증오와 복수 대신 평화적 해결을 선택했다. 나는 나를 감옥에 집어넣고 아내를 핍박하고 내 아이들을 괴롭혔던 바로 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나갔다.

내 소망은 모든 남아공 국민들이 이 땅을 우리가 꿈꾸는 땅으로 바꾸는 데 다시 전념했으면 하는 것이다. 증오와 차별이 없는 곳, 집 없는 설움과 굶주림이 사라진 곳, 우리 아이들이 미래 지도자로 자랄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가 인간의 유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기본적인 인생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넬슨 만델라(1918~2013)는 1918년 남아공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났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며 흑인 인권 보호에 힘썼다. 1943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들어가 1962년 8월 체포될 때까지 집권당인 국민당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했다. 1993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첫 흑인 대통령이 된다. UN 총회는 그의 생일인 7월 18일을 ‘세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선포함으로써, 세계 자유를 위해 헌신한 그의 공을 치하했다. 이 글은 <나 자신과의 대화> <넬슨 만델라 어록>(넬슨 만델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등을 토대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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