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이곳 낯설고 물설은 섬, 무의도로 남편이 좋아 32살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무의도는 연안부두에서 2시간 배를 타야 올 수 있는 곳이었지요. 농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저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쯤 농사꾼 남편을 따라 들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 매일 함께한 시간이 벌써 26년이네요.
“땅은 정직하다. 심은 대로 거둔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늘 남편이 하던 말입니다. 농사꾼이었던 남편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 하지 않고, 더 얻으려 욕심부리지도 않으며 그저 주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가꾸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함께 농사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 순환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유기농을 시작하면서 바보라고, 돈도 안 되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저도 여름에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 풀을 매고 있을 때면, 가끔 제초제를 뿌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벌레와 곤충들이 먹고 우리 먹을 것도 남겨주겠지.” 태평스럽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늘 이야기했지요. 일을 재미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요즘 일어나는 천재지변은 모두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 거라고. 내가 먹지 못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도 줄 수 없다는 것. 땅이 건강해지면 농약도, 비료도, 거름도 주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게 남편의 신념이었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풀이 많으면 많을수록 땅이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풀을 낫으로 잘라서 땅에 쓰러뜨리면 썩어서 퇴비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힘은 들었지만 땅이 점점 비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생물과 지렁이 등 온갖 곤충들이 득실거리고, 땅이 건강하니 작물 또한 건강하게 자라주었습니다. 또한 밭에 닭과 오리를 풀어놓아서 벌레를 잡아먹게 하고 풀도 뜯어 먹게 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어주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풀이 많으면 작물이 잘 안된다고들 하는데 해충들이 연하고 부드러운 풀을 먹느라고 농작물에 붙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까 수확은 감소되고, 그것이 돈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지요. 때론 무모한 모험으로 한 해 농사를 두 손 털어보기도 몇 번. 남편과 의견 충돌도 많았습니다. 2005년 9월에는 화재로 인하여 농장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얻는 것도 정말 많았습니다. 진실은 통한다고, 위기의 순간마다 많은 이들의 격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요.
먼 미래를 내다보는 마음으로 택한 길을 묵묵히 일체의 타협도 없이 앞으로 내닫는 사람.
그런 남편과 함께하며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아가 강한 나를 겸손해지게 했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게 했습니다.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변화되었고, 남편 말대로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갔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쁘고 보람되었던 일은 우리 아이들이 농부인 아빠의 삶에서 희망을 보았기에, 스스럼없이 둘 다 농대를 지원하였다는 겁니다. 살면서 자식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이상 바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행히 많은 분들의 사랑과 격려로 새롭게 ‘연’을 재배하기 시작한 지 7년. 좋은 먹을거리가 나오려면 자연환경부터 살아야 함을 잘 알기에, 우리 후손에게 빌려온 땅을 풍요롭게 물려주어야 하기에, 남편은 오늘도 열심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뭇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온 나의 남편을 존경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오늘 하루도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며 기쁨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내 남편이지만 이 땅의 진정한 농사꾼임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