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45세. 서울 관악구 서원동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과 무표정한 얼굴….
어느 때부터인가 거울을 마주하는 게 싫었습니다.
무뚝뚝해지고 강퍅해지는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억센 아줌마일 뿐이었습니다.
20년 전, 결혼했습니다. 독신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접게 한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시작한 결혼 생활. 자유를 포기한 만큼 가정을 일구며 더 큰 걸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내 삶은 온데간데없어진 것 같았고, 직장 일로 바쁜 남편을 볼 때면 ‘나를 잊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을 아빠한테 맡긴 채 떠난 하루 동안의 기차 여행.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발 디딘 곳만 달라졌을 뿐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니까요. 돌아가면서도 마음은 집안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욱 우울해졌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근심은 더해졌습니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생활비 없이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주는 게 미안했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까 불안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칠 때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러냐”며 아이들을 닦달했습니다. 큰아이가 “엄마, 왜 그래~” 하며 울부짖었고, 나는 멈칫했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것도 순간뿐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마치 내 마음은 촘촘한 체가 되어버린 듯 남편이나 아이들의 모습, 말 한마디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행복해” 하던 아이의 상처 어린 말들,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해서 또다시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집안은 총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교육원으로 떠났습니다. 평소에는 생각해볼 수도 없는 한 달간의 긴 여행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뭔가 해결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절박한 만큼 집중해서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한 공간에 있어도, 한순간도 같이 산 적이 없었더군요. 나는 과거에 살고, 남편은 미래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각자의 기나긴 평행선을 향해 달려갈 뿐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연애 시절 남편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달라진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반면, 남편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지나고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교차점은 없었습니다. 남편만 보면 원망스럽고 불안하고, 남편 역시 믿어주지 않는 아내를 답답해했습니다.
내게 가족은 나의 바람과 기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참으로 가족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고, 그 순간 소외된 엄마, 소외된 주부, 소외된 아내라는 우울한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내 한과 내 욕심과 내 집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꽁꽁 묶어놨던 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자, 비로소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커준 아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거센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내 마음도 점차 잔잔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도 함께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는 이제야 같이 사는 기분입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당신 덕분에 마음공부도 하고 이렇게 한마음으로 살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참 고마웠습니다. 아이가 무릎 위에 누워 살갑게 얼굴을 비비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비운 만큼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거울을 봅니다. 40대 중반의 한 아줌마가 활짝 웃습니다.
세월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는 주름도 예쁘게만 보입니다.
부족하다고 슬프지도, 넘친다고 자랑할 것도 없이
주어진 조건과 세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나는 행복한 엄마, 아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