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째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라는 단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온 이왈종 화백. 1991년 안정된 교수직을 내려놓고 제주에 내려간 후 계속해서 천착해온 주제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 화가로 평가받는 이화백은 지난 5월 말, 왈종미술관을 개관했다. 20여 년간 그에게 행복을 주었던 제주 서귀포에 감사하며,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인생의 이치와 행복을 발견해 갔다는 이왈종 화백이 이 시대에 전하는 행복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 폭포로 유명한 제주 정방폭포, 그 바로 옆에 왈종미술관이 있다. 그곳엔 이왈종(69) 작가의 40여 년 작품 생활을 총망라하는 수장고, 작품 전시 공간, 작가의 작업실, 그리고 10여 년 넘게 제주 어린이들을 위해 무료로 진행해온 어린이 미술 교육을 위한 공간도 포함되었다. 살던 집을 헐어 미술관을 짓기로 한 그는 우선 도자기를 빚어 건물 모형을 만들었다. 모나고 각진 것 없이 부드럽고 둥근 선을 지닌 조선백자 다완(茶碗)을 닮은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미술관 완공에 앞서 문화재단을 만들어, 전시된 작품과 수익이 사회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미술관을 재단에 귀속하기로 했다. 이것이 20년 넘게 제주의 자연과 함께하며 갖게 된 ‘왈종 스타일’이었다.
미술관 개관을 축하드립니다. 미술관을 문화재단에 기증하셨다고 했는데, 그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이화백은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무척 몸이 약했기에 부모님은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는 것을 포기하셨고, 덕분에 그는 그가 원하는 미술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 등을 수상하며 일찍이 화단에서 주목받던 젊은 작가였던 그는, 1979년 추계예술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크고 작은 업무들. 그러다 보면 겨우 밤에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어느 순간 그는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이게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1990년 결국 그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자연은 그의 생각과 화풍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제주도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우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웃음) 그래도 저는 그랬죠. 밥 세끼 먹으며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성공한 거다. 우리 시대 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환쟁이 취급받고 그랬어요. 그런 상황을 어려서부터 겪었기 때문에 늘 마음 편히 사는 방법,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 마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들여다봐야 하잖아요. 그런데 교수 생활을 하면서는 마음이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처음에 제주에서 작업을 하는데, 바다에 엄청 파도가 센 날이었어요. 창밖으로 고깃배 하나가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데 보였다 안 보였다 아슬아슬해요. 그때 인간의 어떤 목표를 위해서 나아가는 억센 의지를 본다고 할까. 그 배를 보면서 그럼 나의 목표는 뭐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론은 나에겐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겠더라고요.
작품 속 색이 밝고 화사해서 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밝은 색을 쓰는 편이 아니었는데 여기 와서 많이 달라졌어요. 색과 선이 그림을 만드는 건데 색을 컴컴하게 써서 남을 스트레스받게 할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여기 와서 자연의 색에 감탄할 때가 많았어요. 겨울에 동백꽃을 보면 왁스 칠해놓은 거 같아요. 반짝반짝. 그리고 새벽에 흙을 뚫고 올라오는 싹들을 보면 그 색깔이 정말 아름답지요. 그런 데서 오는 쾌감, 자연의 신비로움, 그런 색을 구현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합니다.
‘중도中道’라는 주제로 꾸준히 작업을 하셨는데 작가님께서 말하는 중도란 무엇인가요?
중도는 양극을 피하는 것.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이에요.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거고.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람은 끊임없이 양면의 감정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 양면성을 융합시켜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평등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물이나 파리나 사람이나 생명의 선상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하나고 다 평등하고 소중하잖아요.
그러한 생각도 제주의 자연을 통해서 갖게 되신 건가요?
한번은 길가에 잡초를 들여다보는데 질서정연해요. 우거진 나무들도 부딪칠 거 같은데 서로 다치게 하지를 않잖아요. 식물도 이렇게 자기 관리를 잘하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오직 인간만 만나면 싸우고 미워하고 그렇잖아요. 그리고 여기에는 1년 사계절 꽃이 계속 펴요. 목단, 장미 같은 화려한 꽃들뿐만 아니라 잘 안 보이는 아주 작은 꽃들도 많아요. 그런 작은 꽃들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자기 질서를 가지고 있어요. 크나 작으나 모두 자기 역할을 다 하는 거예요. 생명의 선상에서는 땅바닥에 붙어 있는 이 작은 꽃이나 인간이나 다 평등한 거구나, 이곳에서 그런 걸 더 많이 느끼게 되었죠.
낮에는 온갖 꽃들과 새들의 울음소리가, 밤이면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귀뚜라미, 여치, 곤충들의 오케스트라가 끊이지 않는 천상 낙원 같은 제주도. 그러한 자연에 감동하며 즐겁게 작업을 하면서 이화백은 더욱 마음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과 증오, 탐욕과 미움, 번뇌와 자유, 슬픔과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천상 낙원 같은 이곳도 마음에 따라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동백나무에서 뚝뚝 떨어진 동백꽃처럼, 뚝뚝 떨어져간 친구들을 보며, 시간의 힘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생의 무상함도 많이 경험했다. 꽃이 피고 지고 다시 생성되듯, 그러한 자연의 섭리 속에 인간 또한 속해 있음을 느꼈던 시간들. 그것은 스스로를 겸허하게 만들어준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된 성찰 속에서 ‘제주 생활의 중도와 연기’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
“도대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만 깊게 생각해왔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보았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란 생각도 해봤다. 살다 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緣起)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일생을 걸었다.” – 작업노트 중에서
결과적으로 그림을 통해서 말하고 싶으신 게 무엇인가요?
결과적으로 그림을 통해서 말하고 싶으신 게 무엇인가요? 행복이 뭐냐? 그런 걸 주제로 삼고 싶은 거죠. 그런데 행복이 뭔가 이런 것을 그림에 표현하려면, 내 자신의 마음이 밝아야 하잖아요. 그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기가 추구하는 세계가 긍정적일 때 작품에도 밝게 표현됩니다. 그래서 집착하고 치우치지 않고 마음을 어떻게든지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데서부터 작업이 시작됩니다.
작가님만의 마음 다스리는 비법이 궁금해집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쉬워요. 저 우주에서 바라볼 때는 나는 세균이나 똑같은 거잖아요?(웃음) 나는 세균덩어리다, 그렇게 내가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내려놓아져요. 내 고집, 내 생각, 나라는 존재가 별거 아니다 하면 간단하죠. 그리고 마음을 낮춰서 개한테도 고맙다, 새한테도 고맙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요. 그런 마음을 이곳 자연에서 많이 배웠죠. 그리고 제가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팔자예요.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내 팔자다 그렇게 생각하고 빨리 잊어먹으면 마음이 편하지요. 한번 해봐요. 좋아요.(웃음)
“집착은 버리되 자신의 작업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기 생각을 자꾸 변형하고 탈바꿈시키고 껍질을 벗겨내는 훈련이 행복”이라 말하는 이왈종 화백은 제주에 와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평면에서 부조, 목조, 판각, 도자기와 향로, 테라코타 설치…. 그리고 최근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미디어아트도 시도하고 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정체되면 썩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화백의 그림 속에는 어떤 일정한 틀을 찾아보기 어렵다. 상하좌우, 크기의 틀도 없다. 그의 그림 속에는 집보다 갈대가, 수선화나 분꽃이 훨씬 크기도 하고, 사람과 강아지의 크기가 같기도 하다. 사슴, 새, 연꽃, 잉어 등 행운과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색이, 전화기, 자동차, 골프채 등 현대를 상징하는 이미지와 색들과 조화를 이룬다. 전통과 현대, 일상과 환상, 고요와 역동… ‘제주 생활의 중도와 연기’라는 주제처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담아낸 작품. 소박하지만 격조 높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현대적인 이화백의 그림은 한국화다, 서양화다 하는 개념마저 무색하게 만들었고,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두고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도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나의 그림은 보다 자유롭다. 인간이 새도 되고 새가 인간도 되고 꽃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 그림은 물질과 만나면 인연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가상을 그린 것이다.” – 작업노트 중에서
이화백은 인터뷰 내내 때로는 무척 진지하고, 때로는 크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 모습이 마치 극과 극의 화합, 중도를 추구하는 그의 그림 같았다.
이화백은 밤 9시면 잠자리에 들어 새벽 3시면 일어난다고 한다. 그 시간에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한잔 벗 삼아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화백.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작가님께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저는 스타가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유명한 화가다 예술가다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생긴 것도 뒷골목 할아버지잖아요.(웃음) 전 세계에 저 밤하늘의 별처럼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지만, 저는 그런 예술가 대열에 끼는 것보다는 어떻게든지 내가 편안하고 나의 작은 편안한 마음을 또 행복한 마음을 내 그림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이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 목표고 행복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한국화의 매력을 민화에서 찾는데, 이름도 없이 사인도 없이 그렇게 그림만 남기고 간 민화 작가들처럼, 그런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이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이왈종 화백. ‘이미 늙은 몸은 허약하고 말랐으나 온갖 꽃들과 새를 벗 삼아 살아가는 마음만은 풍요롭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언제나 자연과 함께하고자 했고, 그만큼 자연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