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애 41세.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여덟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를 둔 결혼 8년 차 엄마다.
하루하루가 아이들의 소소한 다툼으로 시끄럽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싸우기라도 하면 남편은 항상
울고 있는 작은아이 편을 들고, 큰아이는 서럽게 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에게서 예전의 내 모습이 비춰질 때마다,
혹시 나처럼 상처가 남을까 봐 늘 불안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부이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는 편이라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곤 하셨다. 8남매를 키우느라 돈 때문에도 자주 싸우셨다. 내가 괜히 태어나서 더 힘들게 해드리는가 싶어, 눈치 보며 꾹꾹 참으며 살았다.
부모님께 학용품 사달라는 얘기를 제대로 못 하고 등록금이 나와도 말을 못 해 맨 나중에 내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 상사들의 눈치를 많이 보다 보니 오래 일하기가 힘들었다.
결혼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참고 눈치 봤던 마음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육아에서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돈 쓸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어린 시절 불우하고 어두웠던 가정 환경이 떠올랐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아이들이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면,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감정이 격해지면 아이를 때렸다. 그리고 나서 잠든 아이를 보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아이가 놀다가 실수해서 값비싼 물건이라도 깨면 놀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기보다 소리부터 질렀다. 머리론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부분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되물림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막막했고 희망이라곤 없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마음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기에 더 끔찍했다.
그래서, 마음수련을 결심했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물질적으로 장난감 하나를 더 사주는 것보다 상처 주지 않고, 그늘 없는 밝은 마음을 물려주고 싶었다. 과거가 지금 현재의 모습이고, 현재가 미래라고 생각하니, 나부터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마음속의 짐들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다. 설움과 한숨이 눈물과 함께 빠져나갔다.
열등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상처들이 하나하나 걷어져 나갔다. 열등감과 불안함, 자책이 사라진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엄마가 다시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고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다. 얼마나 아이들다운가. 나는 더 이상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웃으며 투정을 받아주고 보듬어준다. 어깨를 짓누르던,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도 사라졌다. 아이들을 세상에 내려놓을 줄도 알고 마음 놓고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친구들과 만나며 배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짐이 아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함께 성장해가는 고마운 존재, 세상의 일부분이었다.
내가 밝아지니, 아이들의 표정도 더 밝아졌다. 아이들이 봄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인다. 딸아이는 특히 나를 닮아 예민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는데, 지금은 엄마처럼 많이 밝아지고 두리뭉실 놀기도 잘한다.
“예쁜 우리 아이들 대현이 민서야,
미안한 게 많은 부족한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맙다.
엄마가 더 많이 노력할게.”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여니 봄 햇살이 맘껏 쏟아져 들어온다. 내 마음에도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은 가고 꽃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새봄이 찾아왔다. 나에게도 희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