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와인 기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20년. 좋은 테루아Terroir에서 자란 포도나무가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고, 이 포도가 훌륭한 양조가를 만나면 최상급 와인으로 탄생하듯, 와인의 뿌리가 되는 포도밭의 향긋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온몸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게 와인 기행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와인은 자연을 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견디며 각 계절마다 자연의 혜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포도의 몸속에 저장한다. 그러나 항상 포도나무에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추위와 바람과 우박과 갈증을 동반한 자연은 포도나무에게 끊임없는 시련을 주지만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 포도나무의 최대 목표는 열매를 맺는 것이고, 이는 인간으로 보면 부모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피를 받은 자손들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태어난 인간이 모두 다르듯 포도 또한 다양하며, 와인은 자연스럽게 포도가 태어난 해의 자연 환경을 간직하게 된다. 그래서 와인 농부들은 포도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와인이 성장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 그것은 바로 고독과 기다림이다. 마치 한 인간이 깊이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 커다란 고독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와인이 숙성되고 있는 지하 저장고에는 고요함이 있다. 오크통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마치 심연에서 작은 방울들이 표면으로 올라오며 내는 듯한 신비한 소리만이 들린다. 살아 있는 와인이 숨 쉬는 소리다.
스치며 지나치는 길에 나무 사이로 농부를 보았습니다. 장마 중에 잠시 햇빛이 나니 서둘러 논에 나왔나 봅니다. 비는 벼도, 잡초도 무럭무럭 자라게 합니다. 비는 무엇에나 동등합니다. 자연이 그러하니 농사짓는 이는 제 노동만큼 결실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잡초를 뽑아내는 농부의 모습에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긴 잠에서 깬 와인은 식탁으로 옮겨져 자신이 태어났던 그 해의 자연의 맛과 향을 그대로 전해주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만약 당신이 한 잔의 와인을 마시며 그 와인이 태어난 연도로 회귀할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전 잊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해 그 시절로 돌아가 아련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일이리라. 그래서 좋은 와인 한 잔은 때론 자신의 기억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추억을 일깨운다.
건강하게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세월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얼굴에 아름다움이 가득하듯 잘 숙성된 와인의 향기와 맛에서는 깊고 잔잔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엔 토양의 보이지 않는 힘이 숨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빗대면 근본이 있어 언젠가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유형과 같다.
그래서 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한 와인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사랑한다. 하지만 단지 알코올이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고,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와인 속엔 문화와 역사, 철학이 있고, 그리고 삶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