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이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꼽히는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 <로마의 휴일> 등 수십 편의 영화를 통해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던 그녀는 화려한 여배우의 삶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굶주린 아이들의 구호 활동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던 것. 그녀의 진심 어린 말과 행동은 영화보다 큰 감동을 전해주었고, 전 세계에 기부 문화를 불러일으켰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으로 언제나 빛나던 배우 오드리 헵번. 어느덧 그녀가 세상 떠난 지 21년, 그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사랑할 차례이다.”
오드리 헵번이 구호 활동을 위해 찾아간 곳은 수단,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는다. 그녀는 아프리카를 방문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매주 25만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더 빨리 이 일을 시작했다면 훨씬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음식을 찾아 10일 심지어 3주를 걸어 다닌 아이들과 엄마들을 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막에 임시 캠프를 치며 음식을 찾아다녔다. 난 ‘제3세계’란 단어를 굉장히 싫어한다. 우리는 모두가 한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당신들 반대편에 살고 있는 인류는 고통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린 그녀가 굶주림에 시달렸을 때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당시의 기억은 그녀가 구호 활동에 열정을 쏟는 계기가 되었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쟁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당시 파시즘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부모의 이혼은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녀는 독일 나치 점령하에서 지내면서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 배고픔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먹을 게 없어 튤립의 구근을 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특히 큰오빠인 알렉산더가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면서 가족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난 후 알렉산더는 돌아왔지만, 전쟁은 그녀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사람이 죽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매일같이 잔인함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거였다. 그 어느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직업, 재산, 자식과 명성은 더더욱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인간답게 그리고 품위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원래 오드리 헵번의 꿈은 발레리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런던의 유명한 발레 학교인 램버트 발레 학교에 입학했지만, 170cm의 큰 키는 발레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레의 꿈을 접게 된다. 이후 단역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오랫동안 연극 ‘지지’의 여주인공을 찾던 프랑스의 여류 작가 콜레트의 눈에 띈 것. 그녀의 연기는 평론가들의 큰 호평을 받았고, 당시 ‘지지’의 공연을 본 윌리엄 와일러 감독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 앤 공주 역할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특한 매력은 영화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발레로 다져진 완벽한 자세, 날 듯이 가벼운 걸음걸이, 타고난 우아함, 풍부한 표현력 등 할리우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럽풍의 귀엽고 발랄한 외모였던 것.
하지만 영화배우로서의 삶과는 달리, 그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영화배우 멜 퍼러,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배우이기보다 엄마로서 행복한 가정을 꿈꿔온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녀는 그저 두 아이와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를 끝으로 더 이상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1987년 오드리 헵번은 마카오에서 열린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성공적인 자선 기금 모집을 통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그저 덧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후 그녀는 자발적으로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전염병이든, 내전으로 위험한 지역이든 어디든 달려가 아이들을 보살폈다. 한편 대중 앞에 서는 것만이 범세계적인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여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인터뷰를 자청했고, 전 세계를 돌며 각국 정상들에게 선처를 구했다.
6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무리한 일정의 강행, 현장에서 받는 슬픔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건강은 악화됐지만, 그녀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행여 자신 때문에 일정이 취소될까 아픈 것도 숨긴 채 진통제로 고통을 참으며 일정을 소화해냈고, 여정은 계속됐다.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썹, 커다란 눈망울로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오드리 헵번. 1993년 1월, 63세를 일기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