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태양의 계절이다. 이즈음이면 누구라도 배낭을 둘러메고 낯선 거리에 서고 싶다. 순백색 자유를 찾아서…. 세계적인 여행가 김찬삼(1926~2003), 그는 돈키호테였다. 그가 세계 여행을 떠난 1958년의 우리나라는 암흑의 시대였다. 이 암흑을 뚫고 그는 돈키호테의 기상으로 세계를 향해 돌진하였다. 3차례의 세계 일주를 포함하여 20여 회의 해외여행을 성취하였다. 모두 합치면 160여 개국, 여행 거리로는 지구 둘레 약 32바퀴를 여행한 셈이며 여행한 기간은 총 14년에 해당한다. 그 여행들을 바탕으로 그가 펴낸 여행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어두웠던 시절 우리 민족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한 우물을 파게, 물이 나올 때까지!” 슈바이처와의 만남
“코리아에서 온 미스터 킴이시지요?” 흑인 간호사는 김찬삼을 허름한 오두막으로 안내하였다. 호롱불 아래서 글을 쓰고 있던 슈바이처 박사는 찬삼을 보자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어서 오게! 왜 이리 늦었어? 무슨 사고가 났는지 걱정했다네!” “박사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1963년 11월 25일 밤, 서른여덟의 김찬삼은 소년 시절부터 동경해오던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 슈바이처 박사는 오랜 여행 끝에 땀에 찌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김찬삼을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 후 김찬삼은 가봉의 람바레네에 위치한 슈바이처병원에 머물면서 병원 일을 도왔다. 환자도 보살피고, 침대나 의자 등 집기도 고치고, 건물 보수도 돕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보름 후 김찬삼은 남은 여정 때문에 슈바이처 박사와 이별을 고해야 했다.
“박사님! 따뜻한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박사님! 제게 인생의 지혜를 하나 가르쳐주십시오.” “음, 인생의 지혜라… 그래! 한 우물을 파게, 물이 나올 때까지!” 김찬삼은 이 슈바이처의 충고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은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김찬삼에게 있어서 여행은 저항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소년 시절 그의 꿈은 기차의 차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차의 차장은 하얀 연기와 함께 기적을 울리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후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의 꿈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를 견학한 후 마도로스로 발전하였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원 학교를 지망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계 여행이라는 그의 꿈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슈바이처 박사와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였다. 김찬삼은 학창 시절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하였다. 집 안에 있으면 왠지 힘이 빠지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면 새장에 갇혔던 새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한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의 꿈은 더욱 절실한 신념이 되었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내가 세계 구석구석을 직접 가 봐야겠어! 컴컴한 우물 안에 있는 것 같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
김찬삼은 장손이자 독자로서 부모님의 권유로 열아홉에 결혼을 하였으며, 33세에 이미 1남 3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던 것이다. 늙으신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찬삼은 세계 여행이라는 뜨거운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부친께 세계 여행의 포부를 밝혔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법관이 된 훌륭한 분이었다. 김찬삼의 부친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그는 “네가 신중히 결정한 것이라면 감행하거라! 다만 이왕 뜻을 품었으면 반드시 성취하거라!” 하며 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부인 역시 남편의 세계 여행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찬삼의 부인은 평생토록 남모르는 헌신을 했으며, 그녀의 헌신으로 김찬삼의 꿈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의 여행기는 어려웠던 시절 많은 젊은이들의 꿈의 산실이었다”
김찬삼이 대망의 세계 여행길에 오른 것은 33세 때인 1958년 9월이었다. 당시는 전쟁 후의 혼란이 채 가시기 전으로, 세계 여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요,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이후 그는 3차례의 세계 일주를 포함하여 20여 회의 해외여행을 성취하였다.
여행은 고행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과 배고픔, 예측할 수 없는 위험 그리고 강행군을 통한 구도자의 길이었다. 김찬삼은 평생을 통한 세계 여행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었다. 수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완간된 그의 여행기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독자들은 그가 소개하는 여행담과 세계의 문물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의 여행기는 세계로 열린 창이었고, 경이로운 설렘이었다. 서재와 도서관마다 그의 책은 빼놓을 수 없는 장서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의 꿈의 산실이었다.
1992년 67세의 노장 김찬삼은 그가 14세 소년 시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자신은 동에서 서로 가며 서방견문을 하리라 다짐했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발 끈을 동여매었다. 그리고 그 314일간의 고행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되고 말았다. 여행의 신이 더 이상 그에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지 않은 것이었다.
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2003년 7월 78세의 나이로 여행 인생을 마감하였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의 유산은 남아 있다. 그 유산은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용기요, 꿈을 성취해내는 추진력이요, 우리나라 세계화의 초석이요, 인생의 후배들에게 남겨놓은 불굴의 정신적 이정표이다.
여행의 신을 믿는 그의 영혼은 어쩌면 지금도 남미 어느 골목이나 아프리카 오지 마을, 남태평양 작은 섬의 해변가에서 자유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