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시아버님의 연세는 올해 90세이십니다. 저는 아버님을 뵐 때마다 큰 존경심과 함께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여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님이 교편생활 내내 새벽 6시에 출근하신 건 충남, 대전 교육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퇴직 후에도 중소기업을 창립하셔서 88세까지 운영을 하셨습니다. 출퇴근을 하실 때도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로 환승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지하철을 탈 때도 꼭 계단을 이용해서 다니셨지요. 2년 전 회사를 정리하신 후에도 매일 한 시간 반씩 집 앞의 하상 도로를 걸으십니다. 건강해야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아버님은 모든 사람의 전화번호를 다 암기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전화를 하면 바로 누구인지 알고, 전화를 거실 때도 암기하고 계신 번호로 전화를 하십니다.
올해 환갑인 저는 남편과 결혼을 한 지 35년이 됐습니다. 우리 가족은 타향에서 27년을 살다가 4년 전 남편의 고향인 대전으로 이사를 왔지요. 이사를 온 후 저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시댁에 갑니다. 그동안 객지에 사느라 자식 노릇 한번 변변히 못 한 게 죄송해서, 지금부터라도 저녁 식사도 함께하고 자주 뵈어야겠다 싶어서입니다.
아버님은 저와 대화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주로 집안 이야기나 자녀 교육, 정치와 역사 이야기 등을 말씀하시지요. 퇴직 후 하루 종일 집에 계시게 되면서는 컴퓨터 바둑도 두시고, 요즈음은 1000피스 퍼즐을 맞춘다 하십니다.
어머니마저 올 7월에 돌아가신 후로는 더욱 외로워 보이십니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는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반복하시거나 물으셨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의 똑같은 질문에 매번 처음처럼 대답을 해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니께서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게 다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를 선산에 묻은 후 아버님은 한 달을 편찮으셨습니다. 늘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어깨도 축 처지셨지요. 아버님의 허전한 그 뒷모습을 보며 저도 옛날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서른일곱 되던 해였습니다. 기관지 확장증이라는 병으로 오른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 후에도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님은 몸이 어떠냐고 늘 전화를 해주셨습니다. 또 제가 장사를 하느라 시어머니의 생신날을 기억 못 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도 새벽이면 아버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잠시 방을 비웠을 때 전화를 하셔서 “어미야! 오늘 네 어미 생일이다. 이따 전화라도 해라” 하고 바로 끊으십니다.
그럼 저는 아침 9시쯤에 전화를 합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동서들과 함께 있으므로 늘 아버님이 전화를 받게 되지요. 아버님은 “어미냐? 그래. 네 어미 바꿔줄게” 하고 마치 전화를 처음 받는 것처럼 하십니다. 어머니는 전화라도 해준 게 고맙다고 늘 말씀하셨고요.
매주 월요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시집에 가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맛있는 음식만 보면 아버님 생각이 납니다. 결혼 후 안정된 생활을 못 해서 늘 걱정을 드렸던 셋째 아들인 남편은 아버지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효자입니다. 이제 우리 가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아버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도록 잘 모시고 싶습니다.
아버님, 셋째 며느리는 아버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격려 덕분에 고단했던 인생을 잘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