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이런저런 시상식들이 많이 열립니다.
화려하게 잘 차려입은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잔치를 열지요.
그들의 연기에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해왔던 시청자들 역시 과연 누가 무슨 상을 탈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봅니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기분좋고 보기 좋은,
공정하고 훈훈한 시상식이 되었으면 하면서 말입니다.
글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연예계의 시상식을 보며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작품과 연기력보다는 흥행작과 인기 스타 위주로 꾸려질 때입니다. 대중문화의 본질상 상업주의와 무관할 수는 없겠으나, 진정한 예술에 목마르고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열렸던 제47회 대종상 시상식은 무엇보다 감동적이었습니다. 흥행에 관계없이 정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좋은 작품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3개 영화제(대종상, 청룡영화상, 대한민국영화대상) 중에서 원로 배우들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 시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올해 85세의 전설적 여배우 최은희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여 공로상을 수상했고, 83세의 신영균이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은퇴하여 작품 활동은 쉬고 있으나, 대종상을 통해 그 건재함을 알림으로써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평생 여배우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해 왔다”는 최은희의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격동의 세월 속에 납북과 탈북이라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영화인으로서 자존심을 유지해 온 그녀의 삶이, 그 말 속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직 살아 있네요. 세월이 가도 어떡합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모든 분의 가슴속에 살아남겠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김희라는 병색이 완연한 외모와 몸짓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열정적인 수상 소감으로 그 울적함을 모두 날려주었습니다.
“어릴 때는 제가 잘해서 상 받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감독님이 나를 잘 만들어줘서 받는 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겸손한 수상 소감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몇 년 후에도 좋은 작품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있게끔 한국 영화에 많은 용기와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윤정희 역시 영화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1944년생으로 이제 겨우(?) 67세에 불과한 그녀이니 결코 헛된 소망은 아니겠지요. 다만 한국 영화가 대중에게서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 보일 뿐이었습니다.
짤막한 수상 소감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평소엔 쑥스러워서 잘 못했던 고맙다는 말도 하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도 하지요.
네 번이나 연예대상을 받은 강호동은 수상할 때마다 자신을 연예계로 데뷔시켜 준 이경규를 번쩍 안아들며 감사를 표하고, 이혼 후 재기에 성공한 고현정은 ‘선덕여왕’으로 MBC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아이들도 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열심히 일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은 연기자 고현정 이전에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엄마로서의 슬픔과 아픔이 느껴져 뭉클했다고 하지요.
2009년 SBS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탔던 반효정의 수상 소감도 아주 감동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시가 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남긴 그대의 발자국이 뒤를 따라오는 이에게는 이정표가 되리라.’ 너무 과한 상을 받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남은 배우 인생, 깨끗한 눈길 함부로 걷지 않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연기자로서의 진지함과 연륜, 삶의 깊이가 묻어나는 소감에 후배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연예인으로 평생을 바친 노장 선배와 불철주야 그 뒤를 따르는 후배들, 그리고 자신의 꿈을 먼저 이뤄낸 하늘 같은 선배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신인들이 함께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시청자로서도 참 좋습니다.
그들을 통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청년기와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황혼기를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압니다. 배우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노년에 불태우는 열정 또한 젊음의 풋풋함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계속 그렇게 그들과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만의 잔치를 넘어서는, 그런 시상식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