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나비들의 날갯짓이 화려하다. 우리나라엔 어떤 나비들이 살고 있을까. 봄처녀나비, 팔랑나비, 모시나비…. 그 예쁜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을까.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1908~1950). 그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비들의 가짓수를 정하고, 이름을 지어준 나비 분류 학자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외국인들이 그보다 50년 앞서 한국 나비를 연구하면서 범한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점이다. 42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75만여 마리의 나비를 연구하면서 남긴 논문만도 128편.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치열한 노력과 열정의 결과였다.
“잘못 붙여진 나비 이름들을 바로잡아야겠소”
1938년 어느 날이다. 석주명 앞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 단체 영국왕립 아시아학회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조선산 나비 전체를 다룬 논문을 써주십시오. 아시아학회지에 싣겠습니다.’ 하지만 제출한 논문은 발표되지 못했다. 학회 측에서 한 번 학회지에 발표하고 말기엔 내용이 너무 아깝다는 이유로 책 출판을 제안했던 것.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그 유명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이다. 당시 석주명의 위상은 일본의 한 신문에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 도쿄에 오다’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한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 신문에 당당히 기사화되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석주명이라는 중학교 선생이 영어로 된 책을 펴냈는데, 그 내용이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학자들이 새로운 종이랍시고 새 이름을 붙여 발표한 나비들이 수없이 많다. 석주명은 그 잘못을 바로잡아 무려 500종이 넘는 나비 이름을 목록에서 제외했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이 워낙 과학적으로 근거가 확실해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다. 그가 채집하고 연구하는 박물학교실의 표본은 무려 60만 개가 넘는다. 대영박물관보다 더 많아 세계 제일이다.’
“내가 다닌 길이 거미집 모양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
석주명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농림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척박했던 농촌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스승의 결정적인 한마디로 인해 나비 연구에 발을 디디게 된다. “자네가 조선의 나비를 죽어라 10년간 연구하면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걸세.” 1931년 송도고보 박물 교사로 취임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나비 연구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 박물관은 그가 채집한 나비들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세계 최초로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찾은 지질학자 모리스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수많은 표본들을 보고 감탄한 모리스는 미국의 유명 박물관들과의 나비 표본 교류를 제안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박물관들로부터 연구비까지 지원받게 된 그는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해졌다.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역에 채집 여행을 다니면서, 나비들이 서식하는 곳을 일일이 지도에 표시해 나갔다. 이 자료는 훗날 생물지리학 사상 걸작으로 꼽히는 <한국산 접류 분포도>의 모태가 되었다.
“내가 돌아다는 곳을 지도에 표시한다면 꽤 복잡할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다닌 길을 100만 분의1 지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거의 거미집 모양이 돼가고 있다. 몇 해 지나 나비 종류 수대로 붉은 선 거미집이 완성되면 이 나비 분포 지도를 보고 채집지를 골라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나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
석주명은 채집한 나비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 일본 유명 학자가 쓴 곤충도감을 보다가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크기와 무늬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분명히 같은 종임에도, 전혀 다른 종으로 분류되었던 것. 당시 학자들이 개체 변이에 대한 지식이 없이 마구잡이로 이름을 붙인 결과였다. 개체 변이란 같은 종이라도 형질이 조금씩 다른 현상을 말한다.
석주명은 먼저 한국 나비들 중에서 844개의 동종이명을 없애나갔다. 그리고 개체 변이 현상을 연구 목표로 삼았다. 어디까지가 같은 나비이고 아닌지 그 범위를 밝혀야만 조선의 나비가 몇 종인지 알고, 그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총 167,847마리의 배추흰나비와 씨름을 해야 했다. 나비들을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 날개 길이를 일일이 자로 재고, 무늬가 몇 개인지 세고, 크기와 모양을 비교했다. 이를 통해 배추흰나비의 앞날개의 옅고 짙은 색깔은 봄부터 여름까지 계절에 따라 차츰 변해가는 연속된 변이 현상임을 밝혀냈다. 미련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가능한 한 많이 채집해 정확한 통계를 내겠다는 원칙을 지켜낸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그는 1940년 <한국산 접류 총목록>을 통해 한국 나비는 총 255종임을 밝혀냈다. 이 책은 한국 나비 목록을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인 저서 최초로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른 순간이었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송도고보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주도에서 근무할 때는 나비 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은 훗날 나비 이름을 짓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산 나비 248종에 대해 아름다운 우리말로 직접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정말로 산 공부를 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며 자신의 모든 삶을 나비 연구에 쏟았던 석주명.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 전쟁 중 불의의 총격 사건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남긴 엄청난 유고 중에서 미완성인 원고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치열했던 연구 인생을 말해준다. 이제 그의 흔적은 그가 하나하나 정성껏 지어주었던 나비들의 이름과 함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국학이란 자연과학에도 관련되는 것으로, 생물학에서는 깊은 관련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 조선 사람이 상식(常食)하는 쌀은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 이처럼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처럼 향토색이 농후한 것이 없으니 조선 생물학이라는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 … 무릇 우리나라 안에 있는 것이면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는 비단 나비학자만이 아니었다. 민족의 자긍심으로 세계 속으로 나아간 자랑스런 한국인 과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