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참 가난했다. 학비는 엄마가 마련해 주셨지만 용돈이나 참고서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아르바이트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대중목욕탕 청소, 남의 집 빨래 등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해 용돈을 모았다. 하지만 참고서를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시절 내게 큰 힘이 되어준 분이 바로 심현택 선생님이다.
고2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심선생님은 어느 날, 나를 불러 선생님의 과목인 영어뿐 아니라 다른 과목의 ‘교사용 지도서’까지 조용히 건네주셨다. 무척 감사했고, 나는 다른 친구들이 볼까 봐 참고서를 달력으로 싸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고3 때도 담임이 되신 선생님은 또 교사용 지도서를 구해다주시며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셨다. 하지만 나는 희망하던 전기 대학에 떨어졌고, 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떨어졌다는 상실감, 더 이상 해도 할 수 없을 거 같은 좌절감, 도와준 선생님을 실망시켜드렸다는 자책감과 죄송함, 그리고 다시 대학에 가겠다고 차마 말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
여러 가지 마음에 학교도 결석하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꼭 학교에 오라는 말씀이셨다. 며칠 만에 학교에 가 쭈뼛쭈뼛 죄송하다고 하는 나를 선생님은 환하게 맞아주셨다. “괜찮다. 이것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는 대학은 얼마든지 많으니 대학 진학을 해야 한다.”
그렇게 설득하시던 선생님은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아이다. 나는 믿는다. 대학에 진학해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너무나 큰 격려가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아이다”를 여러 번 되뇌며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선생님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가 있는 지방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지금, 나는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에 근무하고 있다. 출소자들의 자립을 도와 건전한 사회 복귀와 재범을 방지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지금은 올해 2월에 발족한 취업전담센터에서 출소자들의 취업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좀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여 새롭게 직업학 공부도 시작해서, 올해 석사를 졸업하고 이제 박사 과정에 입학한다. 아이 둘 키우면서 직장에 다니며, 학교 공부까지 병행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에너자이저라고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지혜가 넓어지면 그들에게 나눠줄 게 있겠다 하는 마음이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뿐이다.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부터 경험했기에, 더욱 믿음을 갖고 일하고 있다.
포기하려고 했을 때 잡아주신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잊으셨는지 몰라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아이다.” 선생님의 이 한마디가 나를 이만큼 키웠다.
이제 모교의 교감 선생님이 되신 심현택 선생님께는 매년 꾸준히 안부를 전한다. “선생님 저 합격했어요.” “선생님 저 결혼해요.” “선생님 저 엄마가 됐어요.” “선생님 저 승진했어요.” 그렇게 소식을 전할 때마다 선생님은 참 기뻐하셨다.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이 나를 ‘자네’라고 부르셨다. 아마 둘째 아이를 낳고 전화를 드렸을 때였던 것 같다. “자네도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고, 한 가정의 주부인데 아무리 선생이라도 제자 이름 함부로 부르면 안 되지” 하시면서. 그 이후 선생님에게 듣는 ‘자네’라는 호칭이 더 정겹게 들렸다. 옛날에 그 어려웠던 사제지간이 아니라 요즘은 같이 늙어가는 인생 선후배 같은 느낌이다.
“사람은 평생 배우며 살아야 하는데, 제자한테도 배울 것이 있으면 스승이지, 자네에게 많이 배운다” 하시던 심현택 선생님. 선생님 말씀 늘 마음에 새기며 삶이 힘겨운 출소자들에게도 희망과 자신감을 나누어주는 일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