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고려청자, 겸재 정선의 산수화, 신윤복의 풍속화, 훈민정음 원본….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 땅의 문화유산이 훼손되고 약탈당하던 당시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한 간송 전형필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은 전 재산을 팔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찾아 모았다. 가치 있다고 판단되면 일본으로 찾아가 다시 이 땅에 돌아오게 했다.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그가 일생을 다 바쳐 모은 문화유산 5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기필코 이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내리라. 이것이 금생에 내게 맡겨진 임무이다.” –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종로에서 대대로 미곡상을 운영하는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해 장서 수집이 취미였던 그를 눈여겨본 휘문고보 시절 은사 춘곡 고희동(1886~1965)은 “글을 읽으며 학문을 닦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라” 했고 전형필은 그의 조언에 따라 문화재 수호에 뜻을 모으게 된다.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서화와 골동품 중 일급품들은 거의 일본 권세가나 재력가에게 넘어가 있었던 것.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인 골동 상인들은 고려청자가 있는 고분을 닥치는 대로 파헤쳤고, 석탑을 분해해서 가져가는 등 문화유산 약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던 중 전형필의 나이 24세,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그는 10만석(약 6천억 원)이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이어 춘곡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문화재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을 만나 본격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워간다. 위창은 간송에게 어떤 작품을 모아야 하는지에서부터 정신 자세까지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서화를 모으는 일은 재물도 있어야 하고 안목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하네. 또한 수장가에겐 모으는 일보다 지키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려운 게야. 상황이 힘들면 처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 잘못하면 자네가 오랫동안 애써서 모은 수장품이 자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으니 명심하게.”
1932년 간송은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고서화를 수집하고, 1934년 문화재 보관 및 연구를 할 수 있는 북단장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몰두한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삼국 시대부터 조선 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수집했고, 특히 서화는 화가의 대표작 또는 기준작이 되는 작품을 모아나갔다.
간송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구입할 때는 금액을 깎지 않았다. 설사 물건을 파는 사람이 그 가치를 잘 몰라서 싼값을 부른 경우에도 제값을 치르고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앞다퉈 그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해서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은 물론 고려, 조선 시대의 뛰어난 자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큰 기와집 한 채가 천 원이던 시절, 조선 후기의 대표작인 심사정의 <촉잔도권>을 거금 5천 원에 구매, 정밀한 복원 수리를 위해 6천 원의 비용을 지불했고, 풍속화란 이유로 낮게 평가되던 신윤복의 그림 총 30점이 수록된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일본에 직접 건너가 되찾아왔다. 특히,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제294호)은 서울의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에서 열린 세계적인 고미술 상인 야마나카와의 숨막히는 경합 끝에 1만 4,580원에 입수,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
또한 영국 출신 존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 22점을 일괄 구매할 땐 40만 원(1,200억 원 상당)을 마련하기 위해 조부 때부터 내려온 논 1만 마지기를 내놓는 결단을 내린다.
현재 간송미술관 뒤뜰에 자리 잡은 ‘괴산 팔각당형 부도(보물 제579호)’를 되찾은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일본인 골동품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폐사지(조선 시대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인해 폐허가 된 신라와 고려의 사찰들)를 찾아다니며 탑과 부도를 찾아내게 했다. 탑과 부도를 분해해서 밀반출하면 큰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식을 접한 전형필은 급히 달려가 1만 2천 원의 돈을 건넨 후 찾아온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구입한 선의의 취득에 대해서도 무효 판결을 내리고 부도를 압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시한다고 결정한다. 이에 간송은 일본인들의 불법 반출과 거래는 묵인하면서, 폐사지에서 최초로 불법 반출한 사람들이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총독부 박물관에 귀속시키는 건 부당하다며 반환 청구소송 제기, 3년간의 재판 끝에 승소한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일제가 극단적인 문화 말살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애타게 찾던 <훈민정음>을 손에 넣었을 땐 그 가치를 인정해 요구하는 가격의 10배인 만 원을 주고 구매, 자신의 최고 보물로 여기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잠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그리고 훗날 <훈민정음> 원본(국보 제70호)을 통해 한글의 제자 원리가 밝혀지면서 그 우수성을 증명할 수 있었다. 현재 훈민정음 원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자 원리가 밝혀진 글자로 인정받고 있다.
수집한 문화재들은 그의 나이 33세인 1938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곳. 현 간송미술관)에 보관했다. 100년 이상 갈 수 있는 튼튼한 박물관을 지어 후손에게 우리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고자 했던 간송의 뜻이었다.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4점이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광복 이후 그는 자신이 모은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밝히기 위해 문화사 복원 계획도 세운다. 특히 간송이 영, 정조 시대 때 겸재와 현재, 단원, 혜원 등 진경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 수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 시대 문화를 탐색하여 조선왕조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훗날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설립과 더불어 간송문화 발간으로 이어지며 우리 역사를 세상에 바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그가 지켜낸 것은 그저 예술품이 아닌 우리의 민족문화, 우리의 민족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