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을 달리는 행복한 인력거꾼
나는 인력거꾼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인 서울 북촌에서 자전거로 된 인력거에 손님을 모시고 아름다운 북촌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나는 그들이 눈과 귀 그리고 몸으로 북촌을 만났으면 한다. 아직도 내겐 알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은 북촌. 나는 오늘도 세발자전거에 몸을 싣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닌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난다.
우연히 알게 된 영화 ‘오래된 인력거’. 영화에 나오는 인력거꾼들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힘겨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인도에 있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신발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낄 정도로 딱딱해져버린 맨발. 언제 빨았을지 모를 누더기 옷들…. ‘난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가슴속으로 되새기게 했던 모습들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시작한 일이 인력거꾼이라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2009년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20대가 가기 전에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여행하는 거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 여행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나의 첫 여행지는 중국이었다. 그 후에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고 미국 횡단과 종단을 했다. 또다시 네팔, 스리랑카 등을 돌고 마지막으로 인도로 갔다. 인도라고 하면 왠지 현자들이 있을 것 같고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인도에서 현자를 만난 건 아니지만 내 인생의 방향성은 찾은 듯했다. 문득 투어 가이드가 되고 싶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우연히 친구 소개로 한국에도 인력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발자전거에 사람을 태우고 다닌단다. 자전거 여행에 이미 일가견 있던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특히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북촌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는 거였다.
내겐 더없는 연습 무대인 것이다.
14명의 라이더가 함께하는 아띠인력거. 지난해 처음 인력거에 올라타고 창덕궁을 지나 안국동으로 갈 땐 기분이 이상했다. 재미있을 줄만 알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에게 인력거를 이용하라고 길에서 말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떠오른 인도에서 보았던 인력거꾼들의 모습이 날 괴롭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무료로 사람들을 태워주기 시작했다. 음료수, 과자, 커피 등 여러 가지로 작은 팁을 주시며 고마워들 하셨다. 정식으로 요금을 받고 첫 손님을 맞이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북촌을 돌며 여기저기 여행을 했다. 투어가 끝났을 때 내게 행복했다며 고마워하셨다. 어떤 손님은 정말 오랜만에 엄마가 밝게 웃는 모습을 봤다며 감사하단다. 기분이 묘했다. 분명히 옷은 땀범벅이 되었는데 몸은 가볍고 날아갈 듯 행복감을 느꼈다.
하루는 한 커플을 태우고 예쁜 불빛들 사이로 바람과 함께 달렸다. 인력거에 오를 땐 말다툼을 했는지 말없이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각자 다른 곳을 향하던 커플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신이 나 골목길을 내달리자 약간의 흔들림으로 그들의 사이는 좁혀졌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초특급 유머 서비스! 하하! 커플은 손을 꼬옥 잡고 인력거에서 내렸다. 그리고 남자분이 조용히 다가와 건넨 말. “정말 고마워요. 인력거에 타기 직전에 여자 친구랑 헤어질 뻔했어요.” 내가 절로 뿌듯해졌다.
우리 회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20대부터 40대까지, 연애박사부터 나무박사까지 다양한 배경들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말머리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도 하고 CF를 자체 제작한다. 가끔은 음악인들이 인력거에서 노래를 하며 ‘움직이는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신나고 재미있다.
영화 속의 인력거꾼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 나와 함께 일하는 인력거꾼들은 다르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하고,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밝음, 기쁨, 희망을 보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분명 영화 속 인력거꾼들과 우리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같을 것이다. 정직하게 몸을 움직여 흘린 소중한 땀방울들이다. 왜 같은 직업 같은 땀을 흘리면서도 서로 다를까? 아마도 달려가는 심장의 방향이 달라서이지 않을까? 우리들은 말한다. 돈만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만의 문화와 재미를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거라고.
오드리 헵번을 사랑한 남자
1995년 1월 7일 오후 4시.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버스 정류장 뒤 무등 서점 앞. 한 소년이 서점 유리창에 붙어 있는 여배우의 브로마이드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소년은 그녀의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었고,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리신 어머니가 소년의 어깨를 흔들었을 때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엄마, 저 여자 누구야?” “응? 오드리 헵번이네!”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그때부터 20년이란 시간 동안 내 마음속의 빛으로 살고 있는 오드리 헵번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던 나는 내성적이고 친구 한 명 없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저녁 6시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춘기 소년이었다. 왜 이렇게 외로운 건지, 커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지….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나는 서점 앞에서 헵번을 본 후 헵번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하고 정처 없이 흘러만 가던 내 삶에 뭔가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그 깊고 아름다운 눈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싶었다.
오드리 헵번을 4년 정도 그리다 보니 이번에 그녀를 밖으로 꺼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3년 동안 조소를 전공하였다. 그러고 나니 그녀가 밟았던 길을 가보고 싶었다. 그녀가 영화를 찍었던 촬영 장소를 시작으로,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 그녀가 살았던 집 등 그렇게 헵번과 관련된 나라인 파리, 벨기에, 스위스, 런던, 뉴욕,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오니 이번엔 그녀의 직업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가 되었다.
23살 군 제대 후 배우 생활을 하기 시작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2011), 부활 더 골든 데이즈(2012) 등 연극 무대와 무용극, 뮤지컬 무대에도 올랐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무대에 수없이 오르내리며 이런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해준 헵번에게 감사했다.
짬이 날 때마다 배우 피규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소룡, 제임스 딘 등 다른 배우들도 만들었지만 항상 메인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돈벌이가 시원찮았던 연극배우 시절, 값비싼 조형 재료와 한 달 생활비 중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조형 재료를 선택했다. 조형 재료를 사면 그 달은 거의 굶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중 작년 3월엔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그램에 ‘오드리 헵번을 사랑한 남자’로 말이다. 방송이 나간 후 ‘오드리 헵번 카페’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 재단과 손잡고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카페를 오픈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20년 동안 내 삶의 빛이 되어준 헵번에게 나름 은혜를 갚고 싶었다. 모든 일을 정리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32살에 회사원이 되었다. (현재 홍보·마케팅 팀에서 일하고 있다.) 입사 후, 그녀의 둘째 아들인 루카 도티를 만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3박 4일 동안 그의 개인 비서가 되어 모든 행사에 함께 했다.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어떤 힘든 일도 긍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언제나 긍정적으로 세상을 대했던 오드리 헵번과 흡사했다. 그리고 눈과 코, 얼굴선, 몸의 비율,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물론 활짝 웃는 모습에서 헵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33년 동안 나의 삶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삶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지난해부터 성당에서 하는 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동생과 살고 있는, 보일러도 땔 수 없는 추운 방에 동생과 함께 앉아 있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의 눈을 보면서 중학교 때 힘들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왜 더 빨리 도와주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나?’ 그때부터 그 아이에게 재능 기부로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 매달 소액의 돈을 모아 전하고 있다. 날 보며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면, 말년에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헵번이 떠오른다. ‘헵번이 이런 느낌이었을까?’란 생각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너에게 오드리 헵번은 무엇이냐고. 나에게 헵번은 빛 같은 존재다. 꿈도 희망도 없던 12살 소년에게 다가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게 해준 어둠 속 등대 같은 존재. 이제껏 그 빛을 따라가서 실패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 빛을 따라갈 것이다. 그 빛이 나를 또 어떤 곳으로 이끌지 정말 궁금하다.
식당 아줌마라 행복해요
“엄마가 있지, 이 일 말고 다른 일 해보면 어떨까?”
“아니, 엄마가 계속했으면 좋겠어. 난 엄마가 항상 요리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하는 게 좋아.”
이따금 아이들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항상 이렇게 대답을 하곤 했다.
남편과 함께 대학가에서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한 지 올해로 12년째다. 내가 담당하는 것은 요리다. 내 가족이 먹는 음식과 똑같이 정성을 다하고, 음식으로 소통과 나눔을 실천하고자 애쓰며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만치 흘렀다.
평소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기를 즐긴 인연으로 2002년 8월에 지금의 이곳에 가게를 열게 되었다. 당시 6살, 3살이었던 남매를 데리고 일을 한다는 건 모험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힘들 때도 많았다. 그러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생각하고, 꽃길 펼쳐진 길은 없을 테니 스스로 꽃길을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냈던 시간들이었다.
찾아주시는 손님들에게는 온 마음 다한 정성스러움으로, 집 밥을 먹는 듯한 편안함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했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원만한 소통을 위하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도 늘 귀를 기울였으며 명랑한 인사와 웃음 띤 얼굴로 손님을 대하고자 애를 썼다.
덕분에 이 일을 통하여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많이 지었다. 네 살 때부터 아홉 살이 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꼬마 손님 성현이는 항상 나를 ‘최정숙 아주머니’라고 불러주며 학교 친구들 이야기, 여자 친구 이야기, 비밀 이야기도 곧잘 해주곤 한다.
정성스레 포장한 차 선물을 조심스레 건네주던 교수님 단골손님도 계시고, 개업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찾아주는 손님들도 많다. 매번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고 해주는 손님들이 있어 보람과 힘을 얻는다.
그리고 중학생, 고등학생인 우리 아이들 또래의 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 이해하고 대화를 원활히 할 수 있게 되는 장점이 될 때도 많다. 이런 여러 이유들로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밥을 먹는 일은 내 영혼을 공양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중요하고 숭고한 행위라는 말일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저 한 끼 때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주린 배를 채우고 나아가 포만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행복한 마음까지 들게 된다면 먹는다는 행위는 그냥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일에 종사한다고 생각하기까지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말이다.
2013년 초, 가족 첫 해외여행으로 네팔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이국의 문화와 음식을 접한다는 기대와 설렘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내 몸과 입에 맞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고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많고 많은 게 음식점이다. 단순히 음식을 팔아 돈을 버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매 순간 한 그릇의 음식에 나의 소중한 마음을 담는다.
그리고 나의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고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정성 담긴 맛있는 음식은 행복감을 불러오고 나아가 영혼의 허기도 메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만드는 나의 일을 아주 사랑한다.